토곤 (진남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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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곤은 원나라 쿠빌라이 칸의 서자로, 1284년 진남왕에 봉해져 참파 정벌을 명받았다. 같은 해 대월(베트남) 침공을 시도했으나 쩐흥다오의 저항에 부딪혀 탕롱을 점령하는 데 그쳤고, 1288년 박당강 전투에서 패배하며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쿠빌라이 칸의 신뢰를 잃고 양주에 주둔하다가 130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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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곤 (진남왕)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토곤 (Toghon) |
작위 | 진남왕 (鎮南王) |
재위 기간 | 1284년 – 1301년 |
출생 | ? |
사망 | 1301년 |
사망 장소 | 양저우 |
가계 | |
아버지 | 쿠빌라이 칸 |
어머니 | 황후 바야우진 |
배우자 | 안쯔 공주 (첩) |
자녀 | 라오장 (Laozhang) |
기타 | |
종교 | ? |
몽골어 | ᠲᠣᠭᠣᠨ (Togoon) |
페르시아어 | توقان (Tuqan) |
중국어 | 脫歡 (Tuō Huān) |
2. 생애
1284년 토곤은 '''진남왕'''(鎭南王)에 봉해졌고, 그의 가문은 어저우로 옮겨졌다.[2] 같은 해, 참파 정벌 임무를 받았다.[6]
1285년, 참파로 가기 위해 대월(현재의 베트남)에 들어가 길을 요구했으나, 쩐 탄 통에게 거부당했다.[1] 쿠빌라이 칸의 명에 따라 대월 침공을 이끌었으나, 초기 탕롱 점령에도 불구하고 쩐 흥 다오의 활약으로 1288년 백당강 전투에서 대패 후 퇴각했다.[8] 쩐 탄 통은 몽골군 진격을 늦추기 위해 안 쯔 공주를 토곤에게 바쳤다.[1] 토곤은 대월의 기후와 질병을 이유로 철수했고, 퇴각 중 쩐 흥 다오에게 패했다.[1]
1287년 재차 베트남을 침공했으나, 바크 당 강에서 해군이 쩐 왕조에 압도당해 후퇴했다.[1] 이로 인해 쿠빌라이는 그를 보려 하지 않았다.[2]
1291년, 양저우에 주둔했고,[2] 1301년 사망했다.[13]
2. 1. 생애 초반
쿠빌라이 칸의 서자로, 생년월일은 알려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바야드 부족 출신 부라쿠진의 딸 바야우진(伯要兀眞)으로, 쿠빌라이의 11번째 아들이었다. 일설에는 후슈친 황후 허루친씨(烏式眞 皇后 許兀愼氏) 소생으로 아이아치, 코코추 등이 동복 친형제라는 설도 있다. 이름 토곤은 몽골어로 솥, 가마, 냄비를 뜻한다.1283년 11월 2일 어떤 전투에서 공을 세워 태부카와 함께 은폐(銀幣)를 하사받았다.[15]
1284년 6월 6일 아버지 쿠빌라이는 토곤을 진남왕(鎭南王)에 봉하고 낙뉴금인(螭紐金印)을 하사했다.[16] 진남왕위는 대원 왕실서열 제도에서 6계급 중 2위에 위치하는 고위직 왕호였다.[18] 이는 쿠빌라이가 토곤의 남방 정복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18] 토곤은 가족을 어저우(鄂州, 현 후베이성 어저우 시)로 옮겼다.[16] 7월 참파(占城, 베트남 동남부 해변에 있던 국가)를 정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17] 7월 12일 토곤의 군대가 참파에 도착, 베트남의 사절 여영(黎英) 등이 토곤 군대를 영접하고, 쩐 성종이 파견한 중대부 완도학(阮道學)을 통해 조공물을 받고 되돌아왔다.
2. 2. 안남 원정
1284년 12월, 쿠빌라이 카안의 명을 받은 토곤은 참파로 가기 전 안남(대월 쩐 왕조) 정벌을 계획하고 안남에 도착했다. 쩐 성종에게 참파로 가는 길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군을 나누어 대월을 침공했다.[19]1285년 토곤은 탕롱을 점령하는 등 초기에 승리했으나, 쩐 성종과 쩐흥다오가 이끄는 안남군의 저항에 부딪혔다. 쩐 성종은 몽골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안투공주를 토곤에게 보냈다.[1] 같은 해 쩐흥다오 군에게 대패하고, 청동 파이프 안에 숨는 굴욕을 겪었다.[19]
1287년 다시 베트남을 침공했으나, 1288년 박당강 전투에서 대패하고 후퇴했다. 이 패전으로 쿠빌라이는 죽을 때까지 토곤을 알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10]
2. 2. 1. 1차 안남 원정
1285년 쿠빌라이 카안은 토곤에게 참파 정벌을 명하고 50만 명의 병력을 주었다. 토곤은 안남의 쩐 성종에게 참파로 가는 길과 식량 지원을 요청했으나, 쩐 성종은 몽골군이 자신의 영토를 통과하고 식량을 공급하는 것을 거부했다.[19]토곤은 군을 나누어 대월(쩐 왕조)을 침공, 안남의 수도인 탕롱을 점령하는 등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19] 1285년 1월 토곤의 군대는 푸루강(Phu Lu River, 富良江, 현재의 추강)에서 베트남수군을 격파하였다. 같은 해 5월에는 탕롱을 점령했고, 쩐 성종 등은 피신했다.
그러나 진국준(陳国峻)은 '항복을 하려거든 신(臣)의 목부터 먼저 베소서'라며 결사항전을 주장했고, 쩐 성종과 쩐흥다오는 전술을 방어에서 공격으로 바꾸고 몽골을 공격했다. 1284년 12월 26일 쩐흥다오는 몽골군에게 서신을 보내 베트남에서 나가줄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19] 쩐 성종은 몽골군의 공격을 늦추기 위해 1285년 3월 9일 누이 안투공주를 토곤에게 보내기도 했다.
1285년 4월 쩐쾅가이(陳光啓)가 소게투를 전사시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몽골군을 크게 대패했다. 쩐흥다오 군도 함투(Hàm Tử, 현재의 흥옌)에서 전투에서 토곤 군대를 격파하였다. 베트남군의 기습공격에 토곤은 청동 파이프 안에 숨었는데, 이는 몽골 제국과 토곤 자신에게 굴욕감을 가져다 주었다.[19]
덥고 비가 자주 오는 환경에서 몽골군은 기습공격을 당해 패주했고, 1285년 7월 장군 수게투(Sügetü)는 베트남 복병에 의해 참수되었다. 쩐 성종은 안남군을 이끌고 계속 몽골군의 뒤를 추격하여 이항을 독화살로 쏘아 죽였다. 결국 토곤은 퇴각하여 사명주(思明州)로 가서 다시 전력을 재정비했다.[19]
2. 2. 2. 2차 안남 원정
1286년 봄, 토곤은 정동선위도원수 아바치(阿八赤)와 아리카야(阿里海牙, Ariq Qaya)를 대동하고 베트남을 침공, 정교지행상서성(征交趾行尚书省)을 설치했다.[1] 아리카야를 좌승상, 아바치를 우승상, 오그룩치(奥都赤)를 평장정사 등으로 임명하고 몽골인, 한인 7만 명, 운남 병력 6천 명, 기타 이민족 1만 5천 명으로 병력을 편성하여 공격했다. 그러나 대월의 장군 진국준(陳国峻)의 활약으로 원나라 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고, 토곤은 군대를 베트남 북부에서 호광 지역으로 퇴각하였다.[1]2. 2. 3. 3차 안남 원정
1287년 윤 2월 24일, 토곤은 난징으로 출진하였다. 1287년 12월 토곤은 다시 안남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1288년 1월 초, 토곤의 군대는 안남의 수도 탕롱을 점령했지만, 안남의 왕실과 관료들은 삼림으로 도피하여 몽골군은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1]1288년 1월 쩐성종은 바다로 피신, 토곤은 군대를 이끌고 쩐성종을 추격하려다가 중도 포기했다. 원나라 군은 식량난으로 고전을 겪었고, 사람을 보내 군량을 조달, 우마르를 안방해구(安邦海口)로 보내 장문호(張文虎) 등이 싣고 온 군량미를 지원받았다. 1288년 2월 토곤과 원나라 군은 안계(安劫)로 후퇴했다가, 3월 안쪽으로 후퇴했다. 안남군은 원나라 군대의 이동을 막았고, 토곤의 부장 만호 장균(张均)이 3천 병력을 이끌고 돌아서 퇴각했다. 3월 6일에 내방관에서 베트남 군을 물리친 토곤은 퇴각을 결정, 아이로, 우루치 등에게 군사를 나누어 퇴각했다. 쩐 성종은 퇴각하는 토곤에게 사의를 표했다.
그러나 안남군은 퇴각하는 몽골군을 기습 공격했다. 1288년 4월의 1288년 박당강 전투에서 토곤이 이끄는 원군은 대패를 당했다. 탕롱을 점령한 몽골군은 식량난에 시달렸고 토곤은 반끼옙으로 퇴각했다. 안남의 군대는 곳곳에서 기습공격을 하여 토곤을 괴롭혔다. 그해 4월 원나라의 장군 오마르가 이끄는 원나라군 보급부대가 베트남에 도착하자, 안남의 군대는 퇴각하는 척 하며 오마르 군대를 도발했다. 오마르 군대는 베트남 군대를 추격했고, 안남의 군대는 박당강의 양 둑에 매복해 있다가 기습공격, 원나라 보급부대를 몰살시키고, 장군 사도(唆都)는 전사하고, 장군 오마르는 베트남군에 사로잡혔다. 이후로도 쩐성종은 30만 군대를 이끌고 항전했다. 그해 4월 19일 참패한 토곤은 생존 장병을 이끌고 투민으로 탈출했다.[2]
2. 3. 생애 후반
1288년 백당강 전투에서 토곤이 이끄는 원나라 군대는 대패했다.[9]1291년 2월 16일, 토곤은 몽골군 500명과 한인 병력 1000명을 이끌고 양주에 주둔하라는 명을 받았다.[20] 두 번의 안남 원정 실패로 토곤은 쿠빌라이 칸의 신뢰를 잃었다. 안남에서의 패전에 분노한 쿠빌라이 칸은 죽을 때까지 토곤의 알현을 허락하지 않았다.[10][21] 이후 토곤은 수도로의 입경이 금지되었다.
이후 토곤의 활동은 거의 기록되지 않았으나, 1294년 쿠릴타이에 참석하여 테무르를 황제로 추대했다.[11][22] 같은 해 6월 13일 원 성종은 왕족들을 포상할 때, 토곤과 그의 아들 이센테무르에게 금 5백 냥, 은 5천 냥, 초(鈔, 지폐) 2천 정(錠), 폐백(幣帛) 각 2백 필을 하사했다.
1298년 6만 정(錠)을 하사받은 것[23]을 마지막으로 토곤에 대한 기록은 사라졌다. 1301년 토곤은 양저우에서 사망했다.[24] 사망 일자, 장소,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3. 가계
아버지 | 쿠빌라이 칸 |
---|---|
어머니 | 바야우진 |
아들[3] |
4. 기타
동명이인으로 동시대에 활동하던 오로나르 족 출신 토곤(1292년 ~ 1328년)과, 15세기에 활동한 오이라트 족장 마하무의 아들로, 몽골의 태사(太師)였던 토곤이 있다.
5. 평가
토곤의 베트남 원정은 실패로 끝났지만, 동남아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베트남에서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영웅적인 항쟁으로 기록되며, 특히 쩐흥다오는 민족 영웅으로 칭송받는다.[8] 원나라 입장에서는 과도한 군사적 확장이 초래한 실패 사례로 평가된다. 쿠빌라이 칸은 토곤의 패전에 분노하여 그가 알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10]
현대 한국의 관점에서는 베트남과의 역사적 관계와 관련하여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된다. 특히 베트남 전쟁 이후, 양국 관계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더불어민주당 등 진보 진영에서는 베트남의 항쟁을 민족 해방 투쟁의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참조
[1]
서적
Descending Dragon, Rising Tiger: A History of Vietnam
Reaktion Book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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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史 권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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