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량
1. 개요
박동량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시기에 관직에 올라 선조를 호종한 공로로 승진을 거듭했다. 26세에 도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병조참지를 지냈으며, 이후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고 금계군에 봉해졌다. 계축옥사 당시 영창대군 추대 혐의를 받아 유배되었으나, 인조반정 이후 억울함이 밝혀져 관직이 회복되었다. 실록에는 그의 인품을 칭찬하는 기록이 있으며, 연암 박지원이 그의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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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 | 밀양(密陽) |
|---|---|
| 자 | 중경(仲卿) |
| 호 | 가저(茄渚) |
| 출생 | 1437년 (세종 19년) |
|---|---|
| 사망 | 1504년 (연산군 10년) |
| 묘소 |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 |
| 1466년 | 문과 급제 |
|---|---|
| 사헌부 감찰 | 역임 |
| 예조 정랑 | 역임 |
| 형조 정랑 | 역임 |
| 성균관 직강 | 역임 |
| 사간원 헌납 | 역임 |
| 지평 | 역임 |
| 응교 | 역임 |
| 전한 | 역임 |
| 도승지 | 역임 |
| 대사간 | 역임 |
| 병조참판 | 역임 |
| 대사성 | 역임 |
| 한성부 우윤 | 역임 |
| 공조참판 | 역임 |
| 이조참판 | 역임 |
| 호조참판 | 역임 |
| 형조판서 | 역임 |
| 공조판서 | 역임 |
| 지중추부사 | 역임 |
| 아버지 | 박강(朴薑) |
|---|---|
| 어머니 | 정부인 안동 권씨(貞夫人 安東 權氏) |
| 배우자 | 정부인 남양 홍씨(貞夫人 南陽 洪氏) |
| 아들 | 4남 |
| 딸 | 2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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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5년 사망 -
사뮈엘 드 샹플랭
프랑스의 탐험가 사뮈엘 드 샹플랭은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에 북아메리카를 탐험하며 퀘벡 시티를 건설하여 프랑스 식민지 확장에 기여했고, 원주민과의 관계를 맺으며 누벨프랑스 초기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1635년 사망 -
로페 데 베가
로페 데 베가는 스페인 황금기의 대표 작가로, 1500편이 넘는 희곡을 포함한 방대한 작품을 남기며 국민 연극 확립에 기여하고 연극 형식에 혁신을 가져왔으며, 다양한 주제를 다룬 작품과 파란만장한 개인사가 그의 작품 세계에 반영되었다. -
1569년 출생 -
허균
허균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정치가로서, 홍길동전, 교산시화, 도문대작 등 다양한 저서를 남겼으나, 진보적인 사상과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다. -
1569년 출생 -
다치바나 긴치요
다치바나 긴치요는 전국 시대 규슈의 다치바나 씨족 당주로서 뛰어난 지략과 용맹함으로 가문을 이끌었으며, 시마즈 씨족과의 전투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후에도 활약한 여성 영주이다. -
조선의 문신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조선의 문신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박동량은 1590년(선조 23년)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 의주에서 이조좌랑, 정5품 정랑을 거쳐 승정원 승지로 발탁되었고, 26세에 도승지에 임명되는 등 빠른 승진을 거듭했다. 1600년 대사헌, 이듬해 이조참판을 역임하고 경기도,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1603년 형조, 호조, 병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고 금계군에 봉해졌다.
1611년 부모상을 마치고 판의금부사로 복귀하였으나, 1613년 박응서 사건과 관련하여 김제남과 영창대군 추대 모의 혐의를 받았다. 박동량은 김제남과의 불화를 증명하려다 의인왕후 능 저주 사건을 언급했고, 이것이 인목왕후와 김제남의 소행으로 몰리면서 신흠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계축옥사의 원인 제공자로 지목되어 탄핵을 받고 강진에 위리안치되었다. 부안, 충원을 거쳐 1633년(인조 11년) 석방되어 고향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후 아들 박미 등의 노력으로 인조 때 윤방, 김유, 김상용, 오윤겸 등과의 논의를 통해 관직이 회복되었다.
2.1. 관직 생활과 임진왜란
1590년(선조 23년)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박동량은 의주에서 이조좌랑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에 정5품 정랑으로 승차하였다. 이듬해 선조를 호종한 공로로 젊은 나이에 승정원 승지로 발탁되었는데 낭관에서 당상관으로 뛰어오른 파격적인 인사였기에 사간원에서 외람된 관직 제수라고 간하였으나 선조가 듣지 않았다. 이듬해에는 도승지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박동량의 나이가 26세였다. 이에 박동량이 여러 번 상소하여 사직하였고 병조참지 관직을 제수받았다. 1597년 다시 승정원 도승지에 올랐고 이듬해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되었는데 이를 두고 사간원 등에서 여러 차례에 거쳐 과분한 보상이라고 간하였고 박동량 본인도 가자를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선조가 윤허하지 않았다. 1600년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이듬해 이조참판에 올랐으며 경기도관찰사, 강원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603년에는 형조참판, 호조참판, 병조참판 등을 지냈고 이듬해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금계군(錦溪君)에 봉해졌다. 평안 감사로 재직중에 아들 금양위 박미의 병세가 위중하여 선조가 박동량을 상경하게 하였는데, 사간원 등에서 상경을 철회하거나 체차시킬 것을 간하였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2.2. 계축옥사와 유배
1611년 부모의 상을 마치고 판의금부사로 관직에 복귀하였는데, 1613년 박응서의 사건과 관련해 김제남과 결탁하여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게 되었다. 박동량은 김제남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그것을 증명하려다 영창대군의 하인들이 의인왕후의 능에서 저주하는 일을 대대적으로 벌였다고 말했고 이것이 화근이 되어 저주 사건은 인목왕후와 김제남의 소행으로 몰렸으며 박동량도 신흠 등과 유배되었다. 인조반정 후 계축옥사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으며, 강진에 위리안치되었다. 이후 유배지가 부안을 거쳐 충원(忠原)으로 옮겨졌고, 1633년(인조 11년)에 석방되어 고향에서 죽었다. 사후 아들 금양위 박미 등이 박동량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을 올렸고, 인조는 윤방, 김유, 김상용, 오윤겸 등과 의논하여 박동량의 관직을 회복시켰다.
2.3. 사후 복권
인조반정 후 계축옥사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강진에 위리안치되었다. 이후 유배지가 부안을 거쳐 충원으로 옮겨졌고, 1633년(인조 11년)에 석방되어 고향에서 죽었다. 사후 아들 금양위 박미 등이 박동량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을 올렸고, 인조는 윤방, 김유, 김상용, 오윤겸 등과 의논하여 박동량의 관직을 회복시켰다.
4. 가족 관계
조선 초 좌의정을 지낸 박은의 후손으로 박조년의 증손이자 박응복의 아들이며, 박응순의 조카이다. 어머니는 임억령의 조카딸인 증 정경부인 선산 임씨이다. 박지원은 박동량의 6대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