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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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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방은 1563년에 태어나 1640년에 사망한 조선의 문신이다.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588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하고, 정유재란, 이몽학의 난 진압에 기여했으며 광해군 시대에 형조판서를 지냈다. 인조반정 이후 좌의정, 영의정을 역임했으며,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 인조를 호종했으나 병자호란 때 인순왕후의 신주를 분실한 책임을 지고 유배되었다. 최종 관직은 영중추부사였다.

2. 생애

1563년 윤두수의 장자로 태어난 윤방은 1640년 사망할 때까지 조선 전기의 주요 사건들을 겪으며 다양한 관직을 역임한 문신이다.

어려서 율곡 이이에게서 공부하였다.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88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임진왜란정유재란을 겪으며 선조를 호종하고 군량 운반을 담당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아버지 윤두수가 정치적 사건으로 유배되거나, 본인이 탄핵을 받는 등 부침도 있었다.

광해군 시대에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는 등 외교와 역사 기록 분야에서 활동했다.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여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인조반정 이후 다시 등용되어 좌의정, 영의정 등 최고위 관직을 역임했다. 이괄의 난 진압과 정묘호란 극복에 기여했으나, 병자호란인순왕후의 신주를 분실하여 유배되기도 했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다 1640년 사망했으며, 문익(文翼)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2. 1. 초기 생애와 수학

1563년 윤두수의 장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관찰사 황기(黃琦)의 손녀이자 참봉 황대용(黃大用)의 딸이다.

일찍이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2. 2. 관직 생활과 임진왜란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88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등을 지냈다.[1] 1591년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과 예문관 봉교, 예조좌랑, 사헌부 지평 등을 거쳤다.[1] 1591년 아버지 윤두수가 동인과의 정쟁으로 유배되자 사직했다가 복귀하여 정언(正言) 등을 지냈다.[1]

임진왜란윤두수가 재상으로 기용되자 예조 정랑(禮曹正郞)이 되어 아버지와 함께 선조의 어가를 모시고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따라갔다.[1] 병조판서 이양원(李陽元)의 인사 부정을 탄핵하다가 성균관 전적으로 전임되었다.[1] 예조정랑, 호조정랑, 호조좌랑을 거쳐 병조정랑으로 있을 때 모친상을 당하였으나 특명으로 곧 기복(起復)해 홍문관 수찬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지냈다.[1] 이조좌랑을 거쳐 홍문관 응교에 올랐으며, 왜적의 만행이 극심한 중에도 몰래 숨어서 어머니 빈소에 다녀오는 효성을 보였다.[1]

홍문관 수찬, 이조정랑, 이조좌랑, 응교(應敎), 직강(直講), 사예(司藝) 등을 거쳐 아버지 윤두수가 탄핵을 받고 퇴직당하자 따라 관직을 사퇴했다.[1] 그러나 곧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으로 소환되고 1597년 경상도 순어사(慶尙道巡禦使)로 나갔다가 군기시 첨정이 되었다.[1] 경상도 순어사로서 성적을 올린 공로로 군기감정으로 승진했다가 평산부사 등을 지냈다.[1]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진압되자 추관(推官)으로 활약하였다.[1]

2. 3. 임진왜란 이후의 활동

1597년 경상도순어사(慶尙道巡禦使)로 나갔다가 군기시첨정이 되었다. 경상도 순어사로서 성적을 올린 공로로 군기감정으로 승진했다가 평산부사 등을 지냈다.[1]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진압되자 추관(推官)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1]

이후 평산부사, 동부승지 등을 거쳐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순안독찰(巡按督察)이 되어 군량 운반을 담당했고, 곧 철원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철원 백성들이 그의 덕을 칭송하여 송덕비를 세웠다.[1] 그해 선조는 둘째 아들을 공주(公主)의 부마(駙馬)로 삼고 해숭위(海嵩尉)를 주었다.[1]

2. 4. 광해군 시대

1601년 우부승지로 승진되었을 때에 윤방은 부친상을 치르던 중 왕명으로 기복하여 명나라에 동지사(冬至使)로 다녀온 뒤 해창군(海昌君)에 피봉되고 부총관(副摠管)으로 병조 참판을 겸하였다. 그 뒤 작호는 아버지의 작봉을 이어받아 해평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가 다시 해창부원군으로 개봉되었다.[1]

1601년 병조참판으로 춘추관동지사를 겸직, 임진왜란 때 불탄 실록(實錄) 재간에 참여하였고 도승지로 전직되었으며, 한성부판윤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지의금부사 등을 거쳐 행대호군으로 1605년 청난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1]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형조판서를 지냈다. 이후 한성부 판윤, 판의금부사, 형조판서, 1609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겸지춘추관사로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병조판서, 경기도관찰사, 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했다.[1] 1613년(광해군 5) 익사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1]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3등(衛聖原從功臣三等)에 책록되었다.[1] 1615년(광해군 7) 다시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1] 이후 판의금부사,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1] 1618년(광해군 10) 인목대비 폐모론이 거론되었을 때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자는 정청(正廳)에 불참, 사직했다.[1]

2. 5. 인조반정 이후

1623년 인조반정으로 예조판서에 등용되었고, 이어 우참찬을 거쳐 판의금부사를 겸했다. 이후 우의정으로 승진했으며, 곧이어 좌의정이 되었다.[1]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고 민심 수습에 노력했다.[1] 1627년(인조 5) 영의정에 올랐으나 사직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1]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인조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했다.[1] 서울로 돌아온 후 1628년 판중추부사가 되었다.[1] 같은 해 유효립의 난 진압을 도운 공로로 영사원종공신 1등(寧社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1]

2. 6. 말년과 사망

1634년 병석에 누웠다가 1636년 병자호란 때 묘사제조(廟社提調)로서 묘사를 받들고 빈궁(嬪宮)·봉림대군과 함께 40여 신주(神主)를 강화에 모셨다가 사위(社位) 40여 주를 땅에 파묻어 적화(賊火)를 면케 했으나 인순왕후의 신주를 분실하여 탄핵을 당했다. 봉림대군 등이 사태의 불가피함을 변호하였으나 위패 분실의 책임에 대한 양사의 탄핵 공론에 인조도 파직, 유배하였다가 1639년 6월 연안(延安)에 이배시켰다. 그해 8월 곧 풀려나 고향에 방환된 뒤 중추부영사가 되고, 1640년 다시 중추부영사가 되었다. 문집에 《치천집》이 있으며, 윤덕영, 윤택영 형제는 그의 후손이다.

인품이 중후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후에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으며 1640년 초 병석에 누웠다가 그해 8월에 사망했다. 1640년 11월 7일 장단군 오음리 선영하에 안장되었으며, 문익(文翼)의 시호가 내려졌다.

3. 가계

항목내용
조부윤변(1493~1549)
조모성주 현씨(?~1584) - 현윤명의 딸
아버지윤두수(1533~1601)
외조부황대용
외조모온양 정씨 - 정백붕의 딸
어머니창원 황씨(?~1592)
형제윤흔(1564~1638), 윤휘(1571~1644), 윤훤(1573~1627)
누이이수, 신함에게 하가[1]
부인한봉헌(1562~1603)[1] - 청원위 한경록과 중종의 딸 의혜공주의 손녀
장남윤이지(1579~1668)
며느리안동 김씨(1578~1638) - 김상준의 딸
손자녀8남 1녀
차남해숭위(海嵩尉) 윤신지(1582~1657)
며느리정혜옹주(1584~1638) - 선조인빈 김씨의 딸
손자윤지(1600~1644, 숙종인경왕후의 아버지인 김만기의 외조부), 윤구(1606~1637)


4. 평가

윤방은 인품이 중후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효성이 지극했다. 이이의 제자였으며, 1588년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쳤다. 임진왜란정유재란 때에는 군량 운반을 담당하는 등 나라에 헌신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인조를 강화도까지 호종하였고, 병자호란 때에는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관직 생활 동안 청렴하고 원칙을 지키는 관리로 평가받았다. 이양원의 인사 부정을 탄핵하고,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는 등 소신 있는 모습을 보였다. 이괄의 난을 진압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데에도 노력하였다.

선조, 광해군, 인조 대에 걸쳐 중책을 맡으며 국가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여러 차례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사후에는 문익(文翼)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5. 관련 작품

6. 저서

치천집

7. 기타

광해군 초 형조판서를 지냈으나, 왕실 인척이라는 이유로 특혜를 받지 않기 위해 항상 삼가고 근신하였다. 덕분에 광해군 집권 초반 왕실의 인척과 중신들이 여러 화를 입었음에도 홀로 구설수와 화를 면할 수 있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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