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원 (조선)
1. 개요
박명원은 조선 시대의 인물로, 영조의 셋째 딸인 화평옹주와 결혼하여 금성위에 봉해졌다. 1780년에는 연행사로 청나라를 방문했으며, 정조 시대에는 사도세자의 능을 융건릉으로 이장하는 데 기여했다. 1790년에 사망했으며, 정조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제문과 신도비명을 직접 지었다.
-
박지원 (1737년) -
유득공
조선 후기 북학파 학자이자 문신인 유득공은 박지원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고, 《경도잡지》, 《발해고》 등의 저술을 통해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했으며, 규장각 검서관을 지내며 한국사 연구에 기여했다. -
박지원 (1737년) -
홍대용
홍대용은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천문학자로 북학파의 중심 인물이었으며,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며 서양 천문학 지식을 접하고 지구 자전설과 우주 무한론을 주장하여 학계에 영향을 미쳤고, 사헌부 감찰과 영주군수를 역임하며 실학적 이상을 실현하려 노력했다. -
조선의 부마 -
윤사로
윤사로는 세조의 계유정난 공신으로 의정부 좌찬성 등 요직을 역임하며 세조 정권에 기여하고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는 등 권력층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젊은 나이에 사망하여 조선왕조실록에 영민함과 청렴함이 기록됨과 동시에 재산 축적에 대한 비판도 함께 제시된 조선 전기의 인물이다. -
조선의 부마 -
심종
심종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인물로, 태조 이성계의 사위가 되어 청원군에 봉해지고, 제1차 왕자의 난 때 공신에 책록되었으나, 회안군 이방간과 내통한 죄로 폐서인되어 사망했다. -
조선 영조 -
정조
정조는 조선의 제22대 왕으로, 탕평책 계승, 규장각 설치, 장용영 설치, 신해통공 실시, 수원 화성 건설 등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으며, 47세에 사망하여 건릉에 안장되었다. -
조선 영조 -
황윤석
황윤석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이기론 관련 저서 『理藪新編』과 『頤齋遺稿』, 『頤齋亂藁』 등 다수의 저술을 남겼으며, 관직에서 물러난 후 학문 연구에 전념했고, 그의 저서들은 국어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며, 특히 『頤齋亂藁』는 시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 생애
1725년(영조 1년) 박사정과 함평 이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반남이며, 선조의 다섯째 딸 정안옹주와 금양위(錦陽尉) 박미 부부의 5대손이다. 박지원은 8촌 동생이며, 박준원은 순조의 외조부이자 수빈 박씨의 아버지로 동항렬의 친척이다.
1738년(영조 14년) 영조의 셋째 딸 화평옹주와 혼인하여 금성위(錦城尉)에 봉해졌다. 1748년(영조 24년) 화평옹주와 사별하였다. 1780년(정조 4년) 연행사로 청나라를 방문하여, 8촌 동생인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편찬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1786년(정조 8년) 문효세자의 초상과 장례를 주관하였고, 1789년(정조 9년) 사도세자의 능을 융건릉으로 이장할 것을 정조에게 건의하였다. 1790년(정조 14년) 3월 25일 사망하였으며, 정조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장례를 1등급의 예로 치르도록 하였다.
2.1. 출생과 가계
1725년(영조 1년) 10월 21일, 박사정과 함평 이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반남이며, 선조의 다섯째 딸인 정안옹주와 금양위(錦陽尉) 박미 부부의 5대손이다.
실학자 연암 박지원은 박명원의 8촌 동생이며, 순조의 외조부이자 수빈 박씨의 아버지인 박준원 또한 동항렬의 친척이다.
2.2. 부마 시절
1738년(영조 14년) 2월, 영조의 셋째 딸인 화평옹주와 혼인하여 금성위(錦城尉)에 봉해졌다.
화평옹주와 박명원의 혼례를 주관하였던 효종의 부마이자 숙녕옹주의 남편인 금평위(錦平尉) 박필성은 '영조의 장녀 화순옹주의 혼례 때의 의물이 숙녕옹주 때보다 열 배나 더 풍성하였는데, 화평옹주의 혼례는 화순옹주보다 더욱 풍성하다'고 말하였다. 영조가 화평옹주를 매우 총애하였기 때문에, 화평옹주의 남편인 박명원 또한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화평옹주와 박명원 부부는 혼례를 치른 후에도 궐 안에서 생활하다가, 1742년(영조 18년) 출합하여 사저에 나가 거주하였다. 화평옹주가 출궁할 때 영조는 이현(梨峴)의 별궁을 하사하였는데 옹주가 사양하였다.
1748년(영조 24년), 화평옹주와 사별하였다. 영조가 화평옹주의 상에 친림하려 하자 대신들이 만류하였고, 이때 박명원이 대죄를 청하자, 영조는 박명원에게 화를 내며 꾸짖었다.
임금이 태묘(太廟)에 전배(展拜)하고 환궁할 때 지나다가 [[화평옹주]](和平翁主)의 상(喪)에 들른다 하니, 대신과 약원(藥院)에서 간쟁하였는데, 임금이 수레를 탈 때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면서 말하기를, "경 등이 기필코 간쟁하려 한다면 모름지기 원직(院直)하게 하겠다." 하자, 대신이 감히 간쟁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땅에 엎드려 죄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노하여 꾸짖기를, "네가 나를 부옹(婦翁, 장인어른)으로 여긴다면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는가?" 하였다. 대가(大駕)가 옹주의 집으로 들어갔는데, 초경(初更)에 이르러 정원 ·옥당 ·내국과 시임 대신 · 원임 대신이 품계하자 환궁하였다.zh-hant
이후 영조는 화평옹주의 장례를 국상에 버금갈 정도로 성대하게 치렀다. 영조는 이후에도 화평옹주의 저택을 수차례 들러 박명원을 만나보고 돌아갔다.
2.3. 정조 시절
1780년(정조 4년), 박명원은 연행사로 선발되어 진하 겸 사은사로서 청나라 북경을 방문하여 청나라의 풍경과 실황을 보고하였다. 이때 수행관의 일원으로 함께 따라간 8촌 동생인 박지원이 청나라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적어 《열하일기》를 편찬하였다.
1786년(정조 8년), 문효세자가 죽자 초상에서부터 장례 때까지 주관하였으며 장지를 정하는 일까지도 행하였다.
1789년(정조 9년), 박명원은 정조에게 사도세자의 능을 이장할 것을 건의하여 현재의 융건릉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1790년(정조 14년) 3월 25일 사망하였다. 정조는 박명원의 죽음을 애도하며 친히 제문과 신도비명을 작성하였다. 박명원이 생전에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길 바랐던 뜻과 달리, 정조는 호조에 명을 내려 장례에 1등급의 예를 적용하였다.
정조는 박명원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3. 가족 관계
화평옹주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두지 못해, 형의 아들인 박상철을 양자로 들였으나 박상철 또한 요절하였다. 측실에게서 4남 3녀를 두었다.
| 관계 | 이름 |
|---|---|
| 양자 | 박상철 |
| 며느리 | 안동 김씨 |
| 측실 | 미상 |
| 아들 | 박종선(朴宗善), 박종현(宗顯), 박종건(宗謇), 박종련(宗璉) |
| 딸 | 장선(張僎)의 처, 서근수(徐瑾修)의 처, 이건영(李建永)의 처 |
4. 평가
박명원은 영조와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왕실의 외척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사도세자의 능을 이장한 것은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1789년(정조 9년), 박명원은 정조에게 사도세자의 능을 이장할 것을 건의하여 현재의 융건릉 자리로 옮기게 하였다.
정조는 박명원을 "어진 도위(都尉)"라고 칭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1790년(정조 14년) 3월 25일 박명원이 사망하자, 정조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직접 제문과 신도비명을 작성하였다. 박명원이 생전에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길 바랐던 것과 달리, 정조는 호조에 명을 내려 장례에 1등급의 예를 적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