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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원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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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명원은 조선 시대의 인물로, 영조의 셋째 딸인 화평옹주와 결혼하여 금성위에 봉해졌다. 1780년에는 연행사로 청나라를 방문했으며, 정조 시대에는 사도세자의 능을 융건릉으로 이장하는 데 기여했다. 1790년에 사망했으며, 정조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제문과 신도비명을 직접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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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원 (조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인물 정보
배우자화평옹주
자녀4남 3녀 (첩실 소생) · 박상철 (양자)
가문반남 박씨
출생일1725년 10월 21일 (음력)
사망일1790년 3월 25일 (음력)
아버지박사정
어머니함평 이씨
시호충희(忠僖)
능묘화평옹주 · 박명원 묘
위치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파주리 산57-1
별호자: 회보(晦甫) · 호: 만보정(晩葆亭)

2. 생애

1725년(영조 1년) 박사정과 함평 이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반남이며, 선조의 다섯째 딸 정안옹주와 금양위(錦陽尉) 박미 부부의 5대손이다.[1] 박지원은 8촌 동생이며, 박준원은 순조의 외조부이자 수빈 박씨의 아버지로 동항렬의 친척이다.

1738년(영조 14년) 영조의 셋째 딸 화평옹주와 혼인하여 '''금성위'''(錦城尉)에 봉해졌다.[2] 1748년(영조 24년) 화평옹주와 사별하였다.[4] 1780년(정조 4년) 연행사청나라를 방문하여, 8촌 동생인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편찬하는 계기를 제공했다.[9]

1786년(정조 8년) 문효세자의 초상과 장례를 주관하였고, 1789년(정조 9년) 사도세자의 능을 융건릉으로 이장할 것을 정조에게 건의하였다. 1790년(정조 14년) 3월 25일 사망하였으며, 정조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장례를 1등급의 예로 치르도록 하였다.[11]

2. 1. 출생과 가계

1725년(영조 1년) 10월 21일, 박사정과 함평 이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반남이며, 선조의 다섯째 딸인 정안옹주와 금양위(錦陽尉) 박미 부부의 5대손이다.[1]

실학자 연암 박지원은 박명원의 8촌 동생이며, 순조의 외조부이자 수빈 박씨의 아버지인 박준원 또한 동항렬의 친척이다.

2. 2. 부마 시절

1738년(영조 14년) 2월, 영조의 셋째 딸인 화평옹주와 혼인하여 '''금성위'''(錦城尉)에 봉해졌다.[2]

화평옹주와 박명원의 혼례를 주관하였던 효종의 부마이자 숙녕옹주의 남편인 금평위(錦平尉) 박필성은 '영조의 장녀 화순옹주의 혼례 때의 의물이 숙녕옹주 때보다 열 배나 더 풍성하였는데, 화평옹주의 혼례는 화순옹주보다 더욱 풍성하다'고 말하였다.[3] 영조가 화평옹주를 매우 총애하였기 때문에, 화평옹주의 남편인 박명원 또한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화평옹주와 박명원 부부는 혼례를 치른 후에도 궐 안에서 생활하다가, 1742년(영조 18년) 출합하여 사저에 나가 거주하였다. 화평옹주가 출궁할 때 영조는 이현(梨峴)의 별궁을 하사하였는데 옹주가 사양하였다.

1748년(영조 24년), 화평옹주와 사별하였다.[4] 영조가 화평옹주의 상에 친림하려 하자 대신들이 만류하였고, 이때 박명원이 대죄를 청하자, 영조는 박명원에게 화를 내며 꾸짖었다.[5][6]

이후 영조는 화평옹주의 장례를 국상에 버금갈 정도로 성대하게 치렀다. 영조는 이후에도 화평옹주의 저택을 수차례 들러 박명원을 만나보고 돌아갔다.[7][8]

2. 3. 정조 시절

1780년(정조 4년), 박명원은 연행사로 선발되어 진하 겸 사은사로서 청나라 북경을 방문하여 청나라의 풍경과 실황을 보고하였다. 이때 수행관의 일원으로 함께 따라간 8촌 동생인 박지원이 청나라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적어 《열하일기》를 편찬하였다.[9]

1786년(정조 8년), 문효세자가 죽자 초상에서부터 장례 때까지 주관하였으며 장지를 정하는 일까지도 행하였다.[10]

1789년(정조 9년), 박명원은 정조에게 사도세자의 능을 이장할 것을 건의하여 현재의 융건릉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1790년(정조 14년) 3월 25일 사망하였다. 정조는 박명원의 죽음을 애도하며 친히 제문과 신도비명을 작성하였다. 박명원이 생전에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길 바랐던 뜻과 달리, 정조는 호조에 명을 내려 장례에 1등급의 예를 적용하였다.[11]

정조는 박명원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3. 가족 관계

화평옹주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두지 못해, 형의 아들인 박상철을 양자로 들였으나 박상철 또한 요절하였다.[12] 측실에게서 4남 3녀를 두었다.

관계이름
양자박상철[12]
며느리안동 김씨
측실미상
아들박종선(朴宗善), 박종현(宗顯), 박종건(宗謇), 박종련(宗璉)
장선(張僎)의 처, 서근수(徐瑾修)의 처, 이건영(李建永)의 처


4. 평가

박명원은 영조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왕실의 외척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사도세자의 능을 이장한 것은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1789년(정조 9년), 박명원은 정조에게 사도세자의 능을 이장할 것을 건의하여 현재의 융건릉 자리로 옮기게 하였다.[9]

정조는 박명원을 "어진 도위(都尉)"라고 칭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1790년(정조 14년) 3월 25일 박명원이 사망하자, 정조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직접 제문과 신도비명을 작성하였다. 박명원이 생전에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길 바랐던 것과 달리, 정조는 호조에 명을 내려 장례에 1등급의 예를 적용하였다.[11]

5. 기타

영조가 직접 어필로 찬(贊)을 적어준 박명원의 초상화 두 점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1] 연행사청나라를 방문할 때 요하에서 비가 내려 길이 막히자, 급히 강을 건너 뒤따르던 사람들이 허둥댔다.[2] 강을 건넌 후 사람들에게 "오늘 일은 진실로 위태로웠다. 그러나 왕조의 위덕(威德)에 힘입은 자는 물에 빠져 죽을 리가 없고, 설사 빠져 죽는다 해도 이것은 자기의 직분이다."라고 말하였다.[2]

참조

[1] 문서 박미 → 박세교 → 박태두 → 박필하 → 박사정 → 박명원
[2] 실록 박사정의 아들 박명원이 화평옹주에게 장가들어 금성위로 봉작되다
[3] 실록 처음 화평옹주가 하가(下嫁)할 때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귀주(貴主, 옹주)들의 혼인을 매번 주관해왔다. 그런데 [[화순옹주 (영조)|화순옹주]](和順翁主)가 하가할 때의 의물이 내가 관주(館主)가 되었을 때에 견주어 보면 열 배나 더 풍성하였으며, 이제 귀주([[화평옹주]])의 혼수(資裝)는 또 화순옹주에 견주어보면 더할 수 없이 풍성하였다." 하였다.
[4] 실록 화평옹주가 위독하여 옹주 집에 행행하다
[5] 실록 화평옹주의 상에 들른다하여 대신이 간쟁했으나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며 꾸짖다
[6] 실록 화평옹주를 장사지냈는데 의물의 성대함이 국장에 버금갈 정도였다
[7] 실록 임금이 금성위 박명원의 집에 거둥하였는데 이 날이 화평옹주의 소상이다
[8] 실록 명선공주 · 명혜공주의 사당에 나갔다가 금성위의 집에 들르다
[9] 실록 진하 겸 사은 정사 박명원 등이 청나라의 사정을 아뢰다
[10] 문서 금성위 박명원 신도비명
[11] 실록 금성위 박명원이 졸하니 하교하다
[12] 실록 광주 부윤 박상철의 죽음을 애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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