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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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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함평 이씨는 고려 태조 때 신무위대장군을 지낸 이언을 시조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함평을 본관으로 하며, 갤럽 인터내셔널 회원인 여론조사 기관 한국갤럽과는 관련이 없다. 고려 시대에는 이광봉이 삼사사 삼중대광보국숭록대부 좌명공신에 녹훈되고 함풍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조선 시대에는 이정, 이원, 이만운 등 문무를 겸비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조선 왕실과도 인척 관계를 맺었으며, 2015년 대한민국 인구주택총조사에서 157,102명이 함평 이씨(함풍 이씨 포함)로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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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 이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함평 이씨
기본 정보
나라한국
관향전라남도 함평군
시조이언(李彦)
집성촌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 초포리
경기도 평택시, 화성시
나주시 다시면
주요 인물이각
이덕일
이만운
이돈명
이건영
이균범
이영일
이원범
이계철
이신범
이용섭
이강수
이계훈
이계안
이길범
이치범
이재훈
이상훈
이재갑
이재원
이광범
이종범
이정후
이웅범
이연경
이승철
이재현
년도2015
인구157,102명

2. 역사

『정묘보(丁卯譜)』 세록(世錄)편에 의하면 시조(始祖) 이언(李彦)이 고려 태조때 신무위대장군(神 武衛大將軍)을 지냈다. 2세손 이화(李和)는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을 지냈고, 3세손 이상문(李尙文)도 부친과 같은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를 지냈다. 4세손 이순지(李順之)는 검교(檢校) 흥위위대장군(興威衛大將軍)을 지냈으며 그의 큰 아들 이림(李琳)은 신종 6년인 1202년에 태어나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상의국(尙衣局) 직장정(直長正)을 지냈으며 둘째 아들 이광봉(李光逢)은 문과를 거쳐 삼사사(三司使) 삼중대광보국숭록대부(三重大匡輔國崇祿大夫)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녹훈되고 함풍부원군(咸豊府院君)에 봉해졌다. 6세손 이요(李堯)는 고종 35년인 1247년에 태어나 사순위 부호군(司巡衛 副護軍)을 지냈다. 7세손 이인원(李仁元)은 고려조(高麗朝)때 높은 벼슬인 첨서사사(詹書司事)를 지냈고, 둘째인 이인관(李仁琯)은 충렬왕 3년 1276년에 태어나 일찍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종3품 검교예빈경(檢校禮賓卿)을 지냈다. 8세손 이현우(李玄雨)는 고려조(高麗朝)의 문과(文科) 출신으로 직장동정(直長同正)을,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는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 중직대부(中直大夫) 종삼품(從三品)으로 증직(贈職)되었다. 9세손 이자보(李自寶)는 고려조(高麗朝) 충목왕 4년 1347년에 태어나 조선조(朝鮮朝)에서 선무랑(宣務郎) 모평감무(牟平監務) 비순위정용랑장(備巡衛精勇郞將)을 지냈고 뒤에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참의(戶曹參議)로 증직(贈職)되었다. 슬하에 이이(李貽), 이극해(李克諧), 이극명(李克明) 3남을 두었다. 그 후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여 함평이씨의 대종(大宗)을 형성하였다.

2. 1. 시조 및 기원

이언(李彦)은 고려 태조 때 신무위대장군(神武衛大將軍)을 지낸 것을 시작으로 함평 이씨가 시작되었다. 2세손 이화(李和)는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을, 3세손 이상문(李尙文)도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을 역임하였다. 4세손 이순지(李順之)는 검교(檢校) 흥위위대장군(興威衛大將軍)을 지냈으며, 그의 큰 아들 이림(李琳)은 신종 6년인 1202년에 태어나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상의국(尙衣局) 직장정(直長正)을 지냈고, 둘째 아들 이광봉(李光逢)은 문과를 거쳐 삼사사(三司使) 삼중대광보국숭록대부(三重大匡輔國崇祿大夫)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녹훈되고 함풍부원군(咸豊府院君)에 봉해졌다.

6세손 이요(李堯)는 고종 35년인 1247년에 태어나 사순위 부호군(司巡衛 副護軍)을 지냈고, 7세손 이인원(李仁元)은 고려조(高麗朝)때 첨서사사(詹書司事)를, 둘째인 이인관(李仁琯)은 충렬왕 3년 1276년에 태어나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종3품 검교예빈경(檢校禮賓卿)을 지냈다. 8세손 이현우(李玄雨)는 고려조(高麗朝)의 문과(文科) 출신으로 직장동정(直長同正)을,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는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 중직대부(中直大夫) 종삼품(從三品)으로 증직(贈職)되었다. 9세손 이자보(李自寶)는 고려조(高麗朝) 충목왕 4년 1347년에 태어나 조선조(朝鮮朝)에서 선무랑(宣務郎) 모평감무(牟平監務) 비순위정용랑장(備巡衛精勇郞將)을 지냈고 뒤에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참의(戶曹參議)로 증직(贈職)되었다. 슬하에 이이(李貽), 이극해(李克諧), 이극명(李克明) 3남을 두었으며, 그 후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여 함평이씨의 대종(大宗)을 형성하였다.

2. 2. 고려 시대

함평 이씨의 시조 이언(李彦)은 고려 태조 때 신무위대장군(神武衛大將軍)을 지냈다. 2세손 이화(李和)와 3세손 이상문(李尙文)은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을 역임했다. 4세손 이순지(李順之)는 검교(檢校) 흥위위대장군(興威衛大將軍)을 지냈다.

이순지의 둘째 아들 이광봉(李光逢)은 문과를 거쳐 삼사사(三司使) 삼중대광보국숭록대부(三重大匡輔國崇祿大夫)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녹훈되고 함풍부원군(咸豊府院君)에 봉해졌다.

6세손 이요(李堯)는 고종 35년(1247년)에 태어나 사순위 부호군(司巡衛 副護軍)을 지냈다. 7세손 이인관(李仁琯)은 충렬왕 3년(1276년)에 태어나 문과에 급제하여 종3품 검교예빈경(檢校禮賓卿)을 지냈다. 9세손 이자보(李自寶)는 고려 충목왕 4년(1347년)에 태어나 조선에서 선무랑(宣務郎) 모평감무(牟平監務) 비순위정용랑장(備巡衛精勇郞將)을 지냈고, 후에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참의(戶曹參議)로 증직(贈職)되었다.

2. 3. 조선 시대

이언(李彦)이 고려 태조(太祖)때 신무위대장군(神 武衛大將軍)을 지냈고, 2세손 이화(李和)는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을 지냈으며, 3세손 이상문(李尙文)도 부친과 같은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를 지냈다. 4세손 이순지(李順之)는 검교(檢校) 흥위위대장군(興威衛大將軍)을 지냈으며 그의 큰 아들 이림(李琳)은 신종(神宗)6년 1202년에 태어나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상의국(尙衣局) 직장정(直長正)을 지냈으며 둘째 아들 이광봉(李光逢)은 문과를 거쳐 삼사사(三司使) 삼중대광보국숭록대부(三重大匡輔國崇祿大夫)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녹훈되고 함풍부원군(咸豊府院君)에 봉해졌다. 6세손 이요(李堯)는 고종(高宗)35년인 1247년에 태어나 사순위 부호군(司巡衛 副護軍)을 지냈다. 7세손 이인원(李仁元)은 고려조(高麗朝)때 높은 벼슬인 첨서사사(詹書司事)를 지냈고, 둘째인 이인관(李仁琯)은 충렬왕(忠烈王)3년 1276년에 태어나 일찍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종3품 검교예빈경(檢校禮賓卿)을 지냈다.

8세손 이현우(李玄雨)는 고려조(高麗朝)의 문과(文科) 출신으로 직장동정(直長同正)을,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는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 중직대부(中直大夫) 종삼품(從三品)으로 증직(贈職)되었다. 9세손 이자보(李自寶)는 고려조(高麗朝) 충목왕(忠穆王) 4년 1347년에 태어나 조선조(朝鮮朝)에서 선무랑(宣務郎) 모평감무(牟平監務) 비순위정용랑장(備巡衛精勇郞將)을 지냈고 뒤에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참의(戶曹參議)로 증직(贈職)되었다. 슬하에 이이(李貽), 이극해(李克諧), 이극명(李克明) 3남을 두었다.

3. 본관

함평 이씨(咸平李氏)는 함평(咸平)이 발상지(發祥地)이고 시조(始祖) 이언(彦)이 함평(咸平)에서 득관(得貫)했기에 함평 이씨(咸平李氏)가 되었다.

원래 함평(咸平)은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하였고 백제(660년) 굴내현(屈內縣)과 다지현(多只縣)으로 되었다. 통일신라(757년)에는 굴내현(屈內縣)이 함풍현(咸豊縣)으로 되고 다지현(多只縣)이 다기현(多岐縣)으로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함풍현(咸豊縣)은 존속되고 다기현(多岐縣)은 모평현(牟平縣)으로 개칭되었다. 그 후 조선 태종 9년(1409년)에 함풍현(咸豊縣)과 모평현(牟平縣)을 합하여 함평현(咸平縣)으로 개칭하였고, 1895년에 함평현(咸平縣)을 함평군(咸平郡)으로 개칭하였다. 그러기에 고려 초기 함풍현(咸豊縣)일때는 함풍 이씨(咸豊 李氏)라고 불러왔었고, 조선 태종 9년(1409년)에 함풍현(咸豊縣)이 함평현(咸平縣)으로 개칭되면서부터는 함평 이씨(咸平 李氏)로 불러오고 있다. 함풍이씨(咸豊李氏)라고도 한다.

4. 인물

4. 1. 고려

4. 2. 조선

이극명(李克明, 1388년 ~ 1454년)은 선략장군 호분위호군이었으며, 사후 순충적덕보조공신 정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함평군에 봉해졌다. 이긍(李兢, 1389년 ~ 1433년)은 1433년 증 이조판서, 공조판서를 지냈다. 이종생(李從生, 1423년 ~ 1495년)은 이시애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정충출기 적개공신에 봉해지고, 각도의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 가정대부 한성부좌윤, 오위도총부부총관을 지내고 함성군에 봉해졌으며, 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장양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최부가 묘지를 지었으며, 『해동명신록』에 무인 중 두 번째로, 『해동명장전』에 최영, 이지란, 어유소 등과 함께 기록되었다.

이종수(李從遂, 1424년 ~ 1483년)는 무과 급제 후 충좌위부사정을 지냈고, 사후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이량(李良, 1446년 ~ 1511년)은 1497년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시절 수중성인 방왜축제를 축조하여 왜구를 물리쳤다. 함경북도병마절도사와 동지중추부사 겸 사복장을 지냈으며 함천군에 봉해졌다. 여수 장군도는 이량이 쌓은 수중석성을 기념하는 곳이며, 충청수영의 영보정은 1504년 충청수군절도사 시절 건립했다. 이종인(李宗仁, 1462년 ~ 1533년)은 함경북병사, 전라좌수사, 병조참판을 역임했다.

이세번(李世蕃)은 무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 김해도호부사를 지냈고, 증 승정원승지 겸 경영참찬관, 기묘명현록재공지학문조행등어에 봉해졌다. 이종의(李宗義, 1462년 ~ 1520년)는 시호가 양익이며, 무과 급제 후 중종반정 유공으로 함흥군에 봉해졌다. 이윤보(李允寶, 1513년 ~ ?)는 무과에 급제하여 만호를 지냈다. 이윤탕(李允宕, 1518년 ~ 1570년)은 무과 급제 후 갑산부사를 지냈고, 사후 참판에 추증되었다. 이장영(李長榮, 1521년 ~ 1589년)은 1558년 문과에 급제하여 좌부승지를 지냈다.

이관(李瓘, 1523년 ~ 1597년)은 1548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예조참판을 지냈다. 이각(李珏)은 무과 급제 후 경상좌병사를 지냈다. 이종례(李宗禮)는 무과 급제 후 황주목사를 지냈다. 이지춘(李枝春)은 세종조에 무과 급제 후 청산현감을 지냈다. 이진충(李盡忠)은 호가 석관이며, 중종조에 무과 급제 후 신령현감을 지냈다. 이몽상(李夢詳)은 명종조에 무과 급제 후 군자감에서 근무했다.

이유근(李惟謹, 1523년 ~ 1606년)은 1561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구부사를 지냈으며, 명나라 서장관으로 갔을 때 시로 황제를 감복시켜 연주옥패를 하사받았다. 이총(李摠, 1529년 ~ 1663년)은 1567년 문과에 급제하여 양주목사를 지냈다. 이경(李儆, 1537년 ~ 1592년)은 1564년 문과에 급제하여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이영익(李英翼, 1541년 ~ ?)은 1568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승지를 지냈다.

이응성(李應星, 1543년 ~ 1549년)은 가선대부 문천군수, 습봉 함풍군, 증 숭정대부 의정부 우찬성을 지냈다. 이지효(李止孝, 1551년 ~ 1614년)는 충청도수군절도사, 선전도총을 지냈고, 인목대비 폐비 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했으며, 사후 형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효원(李效元, 1550년 ~ 1629년)은 예조좌랑, 한성부좌윤, 대사간을 역임했다. 임진왜란 때 부친 이관과 함께 임금을 호종했으며, 대사간 재임 시절 광해군 옹립을 꾀한 이이첨 무리의 횡포를 간하다가 거제에 16년간 유배되었다. 아들 이해의 공으로 가의대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함풍부원군에 봉해졌다.

이지경(李止敬, 1554년 ~ 1576년)은 무과 급제 후 통덕랑을 지냈다. 이홍원(李弘元, 1554년 ~ ?)은 1577년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을 지냈다. 이백복(李伯福, 1555년 ~ 1632년)은 무과 급제 후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포도대장을 지냈고, 1623년 계해위정사원종공공신 2등훈에 봉해졌다. 이지득(李之득, 1555년 ~ 1594년)은 임진왜란 때 군량미 모곡에 공을 세웠고, 흥양에 침입한 왜병에 맞서 장경홍과 함께 싸우다 순절했다. 1893년 참의에 봉해졌다.

이광선(李光先, 1563년 ~ 1616년)은 소강, 첨사, 절제사를 지냈고,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선무원종이등공신에 봉해졌다. 이지완(李之완, 1569년 ~ 1632년)은 1624년 이괄의 난 때 군수 보급에 공을 세워 금부도사에 추증되었다. 이춘원(李春元, 1571년 ~ 1634년)은 1596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세자강원, 가선대부, 강원도관찰사, 충청도관찰사,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를 지냈으며, 『명신록』에 기재되었고 문집이 있다.

이배원(李培元, 1575년 ~ 1653년)은 1612년 문과에 급제하여 황해도관찰사 겸 순변사, 세자전을 지냈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호는 귀휴당으로, 백주이명한저, 『귀휴당집』, 대제학연안이학수서, 귀휴당팔경시, 금북저류작구 등 문집이 있다. 이원(李沅, 1586년 ~ 1637년)은 충청도병마절도사, 경상좌도병마절도사, 경상우도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제사, 함경남도방어사 겸 영흥대도호부사, 함경북도병마절도사 겸 삼도순변사,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 분충찬모입기명윤정사삼등공신으로 함녕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경무공이다. 비문은 최명길이 지었다.

이선철(李先哲, 1584년 ~ 1626년)은 무과 급제 후 덕천군수를 지냈다. 이효원(李效元)은 1570년 진사, 1594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을 지냈다. 이정(李靜, 1571년 ~ ?)은 1606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봉교를 지냈다. 이원(李沅, 1586년 ~ 1637년)은 1618년 무과에 급제하여 당상관으로 장단방어사, 도총부 부총관, 훈련도감 중군, 포도대장 외에 충청도병마절도사, 경상좌도병마절도사, 경상우도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제사, 함경남도방어사 겸 영흥대도호부사, 함경북도병마절도사 겸 삼도순변사, 평안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했다. 1623년 인조반정 공신으로 함녕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경무공이다. 비문은 최명길이 지었다.

이해(李澥, 1591년 ~ 1670년)는 형조판서, 공조판서, 의금부판사, 한성부판윤을 지냈고, 현종 10년 보국숭록대부로 품계가 올랐다. 분충찬모입기명윤정사이등공신으로 정1품 함능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충정공이었으나 후에 충민공으로 고쳐졌다. 이정(李정, 1603년 ~ 1630년)은 문과 급제 후 통덕랑을 지냈다. 이온(李溫, 1604년 ~ ?)은 16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을 지냈으며, 문집이 있다.

이선즙(李善즙, 1611년 ~ 1661년)은 1636년 병자호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북상하다 청주에서 강화 소식을 듣고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이지익(李之翼, 1625년 ~ 1694년)은 예조판서, 공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냈다. 손자 이윤신, 증손 이영록·이영휘, 고손 3형제 이명운·이경운·이정운 등 대를 이어 7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이행연(李行然, 1634년 ~ 1694년)은 무과 급제 후 선전관, 효우출천 재여지승람 율원 민여양 윤명재 상탄을 지냈다.

이숙(李塾, 1637년 ~ ?)은 1698년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을 지냈다. 이이신(李以愼, 1643년 ~ 1699년)은 무과 급제 후 부호군을 지냈다. 이정규(李庭葵, 1644년 ~ 1672년)는 무과 급제 후 선전관을 지냈다. 이빈(李斌, 1648년 ~ ?)은 무과 급제 후 적순부위, 통훈대부, 행관상감판관, 어모장군, 행충무위부호군을 지냈다.

이정면(李庭葂, 1652년 ~ 1702년)은 무과 급제 후 선전관을 지냈다. 이정신(李庭藎, 1669년 ~ 1745년)은 무과 급제 후 만호를 지냈다. 이임(李林, 1673년 ~ 1732년)은 무과 급제 후 첨사를 지냈다. 이경악(李景岳, 1676년 ~ 1769년)은 무과 급제 후 부안현감을 지냈다.

이삼(李森, 1677년 ~ 1735년)은 무과에 장원 급제하여 병조판서, 공조판서 겸 도총관을 역임했고, 수충갈성결기효력분무공신, 자헌대부로 함은군에 봉해졌다. 한성판윤, 훈련대장 등의 관직을 유지하다 사망했다. 이윤신(李潤身, 1689년 ~ 1748년)은 1746년 중시에 장원하여 통정대부로 승정원 우승지 겸 경연참찬관을 역임했고, 1742년 함평이씨 임술보를 간행했으며 문집도 남겼다. 이하연(李夏連, 1690년 ~ 1762년)은 1717년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 용인현감을 지냈다.

이시창(李時昌, 1691년 ~ 1780년)은 예조참판을 지냈다. 이심(李沈, 1693년 ~ 1761년)은 인조 을해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승지, 해주목사를 지냈다. 이수덕(李壽德, 1696년 ~ 1764년)은 1733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다. 이수구(李壽龜, 1696년 ~ 1734년)는 무과 급제 후 증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훈련원사를 지냈다.

이희석(李喜石, 1697년 ~ 1775년)은 문과 급제 후 좌랑을 지냈으며, 『월촌록』 13권, 『양촌가첩』 2권, 『대학심수론어어답록』, 시문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유신(李裕身, 1698년 ~ 1766년)은 1723년 문과에 급제하여 가선대부, 참판, 도승지, 강원도관찰사를 지냈으며, 함평이씨 무인보를 편찬했고 시집이 있다. 이영록(李永祿, 1707년 ~ ?)은 1737년 별시에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설서, 통훈대부, 사간원 정언을 지냈다.

이희겸(李喜謙, 1707년 ~ ?)은 1739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현령을 지냈다. 이수봉(李壽鳳, 1710년 ~ 1785년)은 영조 경신년에 문과에 급제, 대사간을 지냈으며, 1758년 검전도사가 되었다. 이영휘(李永暉, 1710년 ~ ?)는 1809년 진사를 거쳐 1737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다. 이창운(李昌運, 1713년 ~ 1791년)은 상원군수, 안동영장을 거쳐 1754년 가선대부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고 함춘군에 봉해졌다. 1776년 삼도수군통제사, 우포도대장을 거쳐 어영대장과 총융사를 지냈다.

이만운(李萬運, 1723년 ~ 1797년)은 이덕무 등 실학자와 교류했으며, 돈녕부 참봉으로 조선의 전고에 유능한 인물로 선정되었다. 정조의 명을 받고 『문헌비고』를 개정·보완한 『증보문헌비고』 초고를 완성했으나 재보완 작업 중 사망, 아들이 대를 이어 완성했다. 저서 및 편서로는 『기년아람』, 『조두록』, 『풍천음』, 『장릉지』 등이 있다. 이성운(李成運, 1727년 ~ ?)은 1773년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에서 강의를 하였다. 이명운(李溟運, 1728년 ~ ?)은 1753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을 지냈으며, 문집이 있다.

이숭운(李崇運, 1729년 ~ ?)은 1786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사간원(정6품)을 지냈다. 이유홍(李儒弘, 1733년 ~ 1761년)은 무과 급제 후 통정대부, 붕화부사, 증 좌승지를 지냈다. 이일운(李日運, 1736년 ~ ?)은 1796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다. 이익운(李翼運, 1738년 ~ ?)은 1765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의 정언을 지내다 이인좌의 역모 때 참두상소를 올리고 북청으로 유배되었으나, 영조의 특명으로 돌아왔으나 젊은 나이에 병사했다. 필법이 능하여 국왕이 극찬했다.

이경운(李庚運, 1745년 ~ 1821년)은 1782년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의 가의대부, 참판을 지냈으며 봉조하에 봉해졌다. 이유수(李儒修, 1746년 ~ ?)는 1783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의 사간을 지냈으며, 궁술에 능하여 연중칠장하여 정조가 칠발이라는 호를 내렸다. 이유경(李儒敬, 1747년 ~ 1804년)은 무과 급제 후 선전관, 승지, 금위중군, 우포도대장, 삼도수군통제사를 거쳐 1799년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국경 지역인 평안북도 창성군에 당아산성을 700여 보 증축했다.

이정운(李貞運, 1747년 ~ 1812년)은 1809년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 통정대부 당상관,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으며, 10권의 문집이 있다. 이유경(李儒慶, 1748년 ~ 1818년)은 1772년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옥서의 도승지, 참판을 지냈고, 유고집이 있다. 이종운(李鍾運, 1760년 ~ 1840년)은 1801년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 가의대부, 참판, 개성유수를 지냈다. 이방운(李昉運, 1761년 ~ ?)은 조선 후기 화가로 호는 기야이며, 산수화와 인물화에 능했다. 현존 작품은 50여 점이며, 남종화법을 따랐다. 대표작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빈풍도와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의 청계도인도, 홍익대 박물관의 망천십경도 등이다.

이유빈(李儒斌, 1762년 ~ 1837년)은 무과 급제 후 통정대부, 통진부사를 지냈다. 이유갑(李儒甲, 1762년 ~ 1830년)은 정시 무과에 급제하여 우후, 증 승지를 지냈다. 이유상(李濡象, 1772년 ~ ?)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이명서(李明緖, 1773년 ~ ?)는 1807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을 거쳐 통훈대부 사헌부집의를 지냈다.

이유원(李儒遠, 1774년 ~ 1828년)은 무과 급제 후 전영장, 통정대부, 철산부사를 지냈다. 이익서(李益緖, 1779년 ~ 1821년)는 무과 급제 후 통정대부, 함평현감을 지냈다. 이원서(李元緖, 1781년 ~ 1862년)는 무과 급제 후 가선대부, 풍천부사를 지냈다. 이장서(李莊緖, 1794년 ~ ?)는 1823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집의를 지냈다.

이민교(李敏敎, 1797년 ~ 1879년)는 무과 급제 후 가선대부 북병사, 좌포도대장, 지중추부사, 습봉 함능군 충훈부 당상관을 지냈다. 이민상(李敏常, 1816년 ~ 1891년)은 무과 급제 후 가선대부, 동지돈영부사를 지냈다. 이민수(李敏樹, 1819년 ~ 1879년)는 무과 급제 후 가선대부, 승지를 지냈다. 이증서(李增緖, 1827년 ~ 1898년)는 무과 급제 후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 충익위장,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을 지냈다.

이민영(李敏英, 1843년 ~ ?)은 1882년 문과에 급제하여 옥서비서원의 승지를 지냈고, 학행이 높아 사우의 추앙을 받았으며, 유고집이 있다. 이민창(李敏昌, 1845년 ~ 1898년)은 무과 급제 후 통정대부, 전주중군을 지냈다. 이돈봉(李敦鳳, 1845년 ~ 1905년)은 무과 급제 후 선전관, 첨정을 지냈다. 이계필(李啓弼, 1860년 ~ ?)은 1887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 승지를 지냈다. 이민승(李敏昇, 1861년 ~ 1941년)은 무과 급제 후 통정대부, 초계군수를 지냈다.

4. 3. 근현대

5. 왕실과의 인척 관계

태종의 후궁은 혜순궁주이다. 영조의 후궁은 정빈 이씨이다.

6. 항렬자

23세24세25세26세27세28세29세30세31세32세33세34세35세36세37세38세39세40세41세42세
유(儒)口서(緖)민(敏)口헌(憲)계(啓)口범(範)재(載)口행(行)건(建)口성(聖)규(奎)口선(善)원(源)口식(植)희(熙)口기(基)진(鎭)口수(洙)병(秉)口열(烈)


7. 인구

2015년 대한민국 인구주택총조사에서 함평 이씨는 138,550명, 함풍 이씨는 18,552명으로 총 157,102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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