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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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열하일기》는 박지원이 청나라를 방문한 여정을 기록한 기행문으로, 총 26권 10책의 필사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압록강에서부터 열하행궁까지의 여정을 다루며, 수레와 유통의 중요성, 상공업 진흥, 양반 계층 비판 등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다. 박지원은 이 글에서 조선의 빈곤 원인을 수레를 사용하지 않는 데서 찾고, 유통 수단의 미흡함과 도로망 건설의 소홀을 지적하며, 당시 조선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열하일기》는 문체의 파격성과 내용의 혁신성으로 인해 당대에는 비판을 받았으나, 19세기 후반에 재조명되어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실학 사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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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 [서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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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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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 |
저자 | 박지원 (1737년) |
언어 | 한문 |
국가 | 조선 |
발표 | 18세기 |
세부 정보 | |
장르 | 기행문학 |
2. 구성
《열하일기》는 26권 10책 필사본으로, 여러 판본이 전해진다. 1901년 김택영이 처음 간행했고, 이후 단국대학교에서 박지원의 친필본이 발견되었다.[5] 《열하일기》는 총 10권 26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책의 첫머리에 서(序)가 있다.
《열하일기》는 박지원이 청나라를 방문한 여정을 따라 다양한 주제를 다룬 글로, 총 26권 10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본 없이 필사본으로만 전해져 오다가 1901년 김택영이 처음 간행하였다. 단국대학교 〈연민문고〉에서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친필본이 발견되기도 했다.[5]
3. 내용
연암은 이 글에서 조선이 빈곤한 주요 원인을 수레를 사용하지 않은 데에서 찾고 있다. 수레나 배와 같은 유통 수단이 부족하고, 도로망 건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점을 지적하며, 조선의 수레가 둥글지 못하고 궤도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비판한다. 그러면서 "수레를 만들지 않으니 길을 닦지 않는 것"이라며 수레 제작을 시도조차 하지 않고 비판하는 태도를 강하게 비판한다.[4] 또한, 당시 조선에서 청나라 털모자를 수입하는 것을 두고 조선의 은을 낭비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6]
박지원은 고전소설 <호질>을 통해 지배 계층인 양반들의 위선을 풍자하여 비판하기도 했다.
3. 1. 도강록 (渡江錄)
이것은 압록강에서부터 시작하여 15일 동안의 기록으로, 묶는 끈과 벽돌의 사용에 대한 관심사를 보여준다.[3]
3. 2. 성경잡지 (盛京雜識)
10년 된 일부터 작은 검은 모래산에 이르기까지 5일간의 사건들을 기록한 것이다.[3]
3. 3. 일신수필 (馹汛隨筆)
신광령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다리를 포함한 지역에 대한 묘사이다.[3]
3. 4. 관내정사 (關內程史)
산해관에서 연경까지의 여행 기록이다. 특히 백이와 숙제에 대한 이야기와 호질이라는 제목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3]
3. 5. 막북행정록 (漠北行程錄)
연경에서 열하까지 5일간의 여정을 기록한다.[3]
3. 6. 태학유관록 (太學留館錄)
태학에서 중국 학자들과 성리학에 대한 이론을 논한 내용이다.[3]
3. 7. 구외이문 (口外異聞)
옛 북문 밖에서 들은 60가지의 다양한 이야기이다.[3]
3. 8. 환연도중록 (還燕道中錄)
還燕道中錄|환연도중록중국어은 열하에서 연경으로 돌아오는 6일간의 여정을 기록한 청나라 교통 시스템에 대한 설명이다.[3]
4. 박지원의 실학 사상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실학적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고전소설 <호질>을 통해 지배 계층인 양반들의 위선을 풍자하며 비판하기도 했다.[4][6]
4. 1. 수레와 유통의 중요성
연암 박지원은 조선이 빈곤한 주요 원인으로 수레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지적한다. 그는 수레나 배로 대표되는 유통 수단의 미흡함, 도로망 건설의 소홀이 조선이 가난한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4][6]그러면서 연암은 조선의 수레 바퀴가 거의 둥글지도 못하고 자국은 궤도에 들지도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수레를 만들지 않으니 길을 닦지 않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즉, 직접 수레를 만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반대와 비판부터 하는 정신 자세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또한 연암은 당시 조선에서 청나라의 털모자를 수입하는 것에 대해 조선의 은을 낭비하는 행위라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4][6]
4. 2. 상공업 진흥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조선이 빈곤한 주요 원인을 수레를 사용하지 않은 데에서 찾고 있다. 정확히는 수레나 배로 대표되는 유통 수단의 미흡함, 도로망 건설의 소홀이 조선이 가난한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연암은 조선의 수레가 바퀴가 거의 둥글지도 못하고 자국은 궤도에 들지도 못한다는 지적과 함께, "수레를 만들지 않으니 길을 닦지 않는 것"이라며 직접 수레는 만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반대, 비판부터 하고 보는 정신 자세를 신랄하게 비판한다.[4] 또한 연암은 당시 조선에서 수입하는 청나라의 털모자 수입에 대해서 조선의 은을 낭비하는 행위라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6]4. 3. 양반 계층 비판
연암 박지원은 고전소설 <호질>에서 호랑이의 입을 빌려 지배 계층인 양반들의 위선을 풍자하고 비판하였다.[4][6]5. 평가 및 영향
《열하일기》는 독창적인 문체와 내용으로 당대에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19세기 후반 박지원이 세상을 떠난 지 약 80년이 지나서야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후대에 재조명되어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특히 조선 시대 수많은 ‘연행문학’(북경 사신 및 그 일행이 사신행을 하면서 지은 문학) 중에서 백미(白眉的)로 평가받는다. 실학의 대표 학자인 박지원은 중국의 문물을 유심히 관찰하며 앞선 기술을 배우고 선진 제도를 본받으려 하였다.[4]
5. 1. 문체반정
정조는 패관잡기를 불온하게 여겨 순정문(純情文)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는 문체반정을 일으켰는데, 그 중심에는 《열하일기》가 있었다. 정조는 박지원의 문장이 저속하다고 지적하며, 문체가 나빠진 까닭이 《열하일기》 탓이라고 박지원에게 반성문을 쓰게 하였다.[4]정조의 이러한 명에 따라 박지원은 격식을 갖춘 속죄문을 써서 바쳤는데, 이 글이 명문이라 정조가 웃고 말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5. 2. 연행문학의 백미
《열하일기》는 조선 시대 수많은 연행문학(북경 사신 및 그 일행이 사신행을 하면서 지은 문학)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으며,[4] 실학 사상을 담은 중요한 문헌으로도 인정받고 있다.[4]현재 남아있는 《열하일기》 필사본은 아홉 종으로, 당시 이 책의 인기를 보여준다. 연암은 조선의 토속적인 속담을 섞어 쓰거나, 청나라 여행에 나선 사절들을 돕는 하인들이 한 농담까지도 기록했다.
당시 '점잖은 글'에서 상투적으로 쓰던 판에 박힌 글과는 전혀 다른 문체를 사용했다. 한문 문장에 중국어나 소설의 문체를 쓰기도 하고, 특유의 해학과 풍자를 가미해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했다는 분석이 있다. 무엇보다도 당대 현실에 대한 철저한 고민이 《열하일기》에 녹아 있었던 점이 지식인들에게 어필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문체나 내용의 파격성으로 인해 당대에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정조는 패관잡기(길거리 이야기를 소재로 한 글로, 조선시대 지배계급 지식인들은 허황된 이야기인 소설을 비판했다)를 불온하게 여겨 순정문(부드럽고 올바르게 고친 글)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는 문체반정을 일으켰는데, 그 중심에 《열하일기》가 있었다. 정조는 직접 하교를 내려 박지원의 문장을 저속하다고 지적하고, 《열하일기》 탓에 문체가 나빠졌다며 반성문을 쓰게 했다.
정조의 호령에 박지원은 격식을 갖춘 속죄문을 써서 바쳤는데, 이 글이 명문이라서 정조가 웃고 말았다는 일화가 있다. 《열하일기》는 연암이 세상을 떠난 지 약 80년이 지난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오늘날 《열하일기》는 학술 서적뿐만 아니라 한국 문학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실학의 대표 학자인 박지원은 중국의 문물을 유심히 관찰하며 앞선 기술을 배우고 선진 제도를 본받으려 하였다.[4]
참조
[1]
서적
A Bibliographic Guide to Traditional Korean Sources
Asiatic Research Center
[2]
서적
Jehol Diary
https://www.amazon.c[...]
Global Oriental
[3]
웹사이트
열하일기(熱河日記)
http://encykorea.aks[...]
2018-06-03
[4]
간행물
연암집(燕巖集)
한국학중앙연구원
[5]
뉴스
조선시대 성리학자와 실학자의 정신을 엿보다
http://news.unn.net/[...]
한국대학신문
2013-09-12
[6]
문서
일신수필 '수레 만드는 법'
1780-07-22
[7]
문서
박영철본을 중심으로 기타 다른 판본을 참고해 번역했다.
[8]
문서
이가원 소장본을 중심으로 다른 초고본 계열을 참고해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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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물음을 통한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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