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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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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승직은 경기도 광주 출신의 기업인으로, 1890년경 '박승직 상점'을 개업하여 사업을 시작했다. 1916년부터 화장품을 판매하고, 1920년에는 '박가분' 상표를 등록했다. 1925년에는 주식회사 박승직 상점으로 법인 전환했다. 광복 후에는 아들 박두병이 동양맥주를 설립하고, 박승직 상점을 '두산상회'로 재개업하여 두산그룹의 시초가 되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 사망 당시 추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친일 단체인 조선경제회, 조선실업구락부, 동민회 등에서 활동했으며, 중일전쟁 지지 발언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활동 등으로 친일 행적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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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직
기본 정보
이름박승직
원래 이름朴承稷
직책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임기1940년 10월 10일 ~ 1941년 1월 23일
출생일1864년 6월 22일
출생지조선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 이매리
사망지대한민국 경기도 인천
사망일1950년 12월 20일
본관밀양
배우자정정숙
정당무소속

2. 생애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 이매리에서 태어난 박승직은 1890년경 ‘박승직 상점’이라는 상호로 배오개에 진출하였다. 1916년부터 부인 정정숙의 건의를 받아들여 화장품을 만들어 팔았으며, 1920년 박가분이라는 상표로 등록했다.[1] 1925년에는 회계처리를 근대화하는 체제로 바꾸면서 상호를 주식회사 박승직 상점으로 변경했다.

1945년 광복 이후 아들 박두병이 이를 인수하여 동양맥주를 설립했고, 1946년 박승직 상점을 ‘두산상회’로 재개업함으로써 두산그룹의 시초가 되었다.[2]

2. 1. 초기 생애와 사업 확장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 이매리에서 태어난 박승직은 1890년경 ‘박승직 상점’이라는 상호로 배오개(종로)에 진출하였다. 1916년부터 부인 정정숙의 건의를 받아들여 화장품을 만들어 팔았으며, 1920년 박가분이라는 상표로 등록했다.[1] 1925년에는 회계처리를 근대화하는 체제로 바꾸면서 상호를 주식회사 박승직 상점으로 변경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아들 박두병이 이를 인수하여 동양맥주를 설립했다. 이듬해인 1946년 박승직 상점을 ‘두산상회’로 다시 열면서 두산그룹의 시초가 되었다.[2]

2. 2. 해방 이후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아들 박두병이 박승직 상점을 인수하여 동양맥주를 설립했다. 이듬해인 1946년에는 박승직 상점을 '두산상회'로 재개업함으로써 두산그룹의 시초가 되었다.[2]

2. 3. 친일 행적 논란

박승직은 일제강점기에 여러 친일 행적을 보였다는 논란이 있으며, 이는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되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3]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 연도별, 주제별로 서술되어 있다.

2. 3. 1. 주요 친일 행적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저격으로 이등박문이 사망했을 때, 창업주 박승직은 이등박문을 추도하는 ‘국민대추도회’의 발기인(총 41명) 및 위원(총 100명)으로 참여했다.[3]

이 국민대추도회는 한성부민회가 주최하고 각 단체가 연합하여 추진한 것으로, 한성부민회는 1907년 10월 일본 황태자의 ‘한국시찰’을 환영하는 반관반민(半官半民)의 비상설단체인 ‘대일본(제국)황태자봉영한성부민회’를 모체로 조직되었고 이듬해 유길준이 주도해 한성부민회로 재조직되었다.[3]

박승직의 친일행적은 일제 치하 내내 계속되었는데, 1919년박영효, 최진 등이 만든 친일단체인 조선경제회 이사로 참여하였고, 1922년엔 조선실업구락부 발기인으로 참여해 평의회 임원 등을 지냈다. 조선실업구락부는 1920년 유력 경제인들이 친목도모와 일선융화(日鮮融和)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였다. 박승직은 1924년 4월 반일운동 배척과 일선융화를 표방하던 친일단체 동민회(同民會)의 평의원에 선임되었다.[3]

1938년 1월 1일 신년을 맞이해 매일신보가 마련한 ‘조선인의 진로와 각오’라는 주제의 좌담회에서 박승직은 “중일전쟁의 책임은 전적으로 중국에 있음을 강조하는 한편 조선인들이 보여준 거국일치의 ‘애국정신’에 찬사를 보냈다. 이어 조선통치에 있어 조선총독부의 시정(施政)이 적절하므로 개선이 전혀 필요없음을 강조했다”고 되어 있다. 같은 해 2월 조선지원병 제도 제정축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박승직은 매일신보에 지원병 제도 실시를 축하하는 담화를 통해 ‘내선일체의 구현이며, 조선인도 제국 신민으로서 의무와 권리를 갖추게 되었다’며 환영했다.[3]

같은 해 8월 박승직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평의원에 선임되었고, 국민정신 총동원 경성부연맹 상담역을 맡았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은 1938년 총독부의 종용 하에 동아일보 김성수, 조선일보 방응모, 이화여대김활란 등이 결성한 전시동원 선전조직으로 이듬해에 공표된 국민징용령에 맞춰 조선인 강제징용과 위안부 모집 등에 앞장섰다. 박승직은 이 조직이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확대개편된 뒤인 1940년 10월에도 평의원을 맡았다. 1941년 12월엔 경성부 총력과를 직접 방문해 해군 국방헌금으로 10000JPY을 헌납했고, 1943년에도 두 차례에 걸쳐 방공감시대 위문금과 국방헌금을 헌납했다.[3]

2. 3. 2. 친일 행적에 대한 비판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저격으로 이등박문이 사망했을 때, 창업주 박승직은 이등박문을 추도하는 ‘국민대추도회’의 발기인(총 41명) 및 위원(총 100명)으로 참여했다.[3] 국민대추도회는 한성부민회가 주최하고 각 단체가 연합하여 추진한 것으로, 한성부민회는 1907년 10월 일본 황태자의 ‘한국시찰’을 환영하는 반관반민(半官半民)의 비상설단체인 ‘대일본(제국)황태자봉영한성부민회’를 모체로 조직되었고 이듬해 유길준이 주도해 한성부민회로 재조직되었다.[3]

박승직의 친일행적은 일제강점기 내내 계속되었는데, 1919년박영효, 최진 등이 만든 친일단체인 조선경제회 이사로 참여하였고, 1922년엔 조선실업구락부 발기인으로 참여해 평의회 임원 등을 지냈다. 조선실업구락부는 1920년 유력 경제인들이 친목도모와 일선융화(日鮮融和)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였다. 박승직은 또한 1924년 4월 반일운동 배척과 일선융화를 표방하던 친일단체 동민회(同民會)의 평의원에 선임되었다.[3]

1938년 1월 1일 신년을 맞이해 매일신보가 마련한 ‘조선인의 진로와 각오’라는 주제의 좌담회에서 박승직은 “중일전쟁의 책임은 전적으로 중국에 있음을 강조하는 한편 조선인들이 보여준 거국일치의 ‘애국정신’에 찬사를 보냈다. 이어 조선통치에 있어 조선총독부의 시정(施政)이 적절하므로 개선이 전혀 필요없음을 강조했다”고 되어 있다. 같은 해 2월 조선지원병 제도 제정축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박승직은 매일신보에 지원병 제도 실시를 축하하는 담화를 통해 ‘지원병 제도 실시는 내선일체의 구현이며, 조선인도 제국 신민으로서 의무와 권리를 갖추게 되었다’며 환영했다.[3]

같은 해 8월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평의원에 선임되었고, 국민정신 총동원 경성부연맹 상담역을 맡았다”고 친일인명사전은 기록하고 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은 1938년 총독부의 종용 하에 김성수, 방응모, 김활란 등이 결성한 전시동원 선전조직으로 이듬해에 공표된 국민징용령에 맞춰 조선인 강제징용과 위안부 모집 등에 앞장섰다. 박승직은 이 조직이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확대개편된 뒤인 1940년 10월에도 평의원을 맡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1941년 12월엔 경성부 총력과를 직접 방문해 해군 국방헌금으로 10000JPY을 헌납했고 1943년에도 두차례에 걸쳐 방공감시대 위문금과 국방헌금을 헌납했다.[3]

3.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사망비고
아버지박문회별세 
어머니허씨별세 
부인정정숙별세 
아들박두병1910년1973년별세
며느리명계춘1913년2008년별세
손자박용곤1932년2019년별세
손자박용오1937년2009년별세
손자박용성1940년 
손자박용현1943년 
손자박용만1955년 
손자박용욱1960년 
손녀박용언 
아들박우병 
아들박기병 
아들박규병 


참조

[1] 서적 이것이 한국 최초 삼문 1995-11-01
[2] 서적 매헌 박승직 연강 박두병 연구 : 2. 해방과 두산의 창업기 2002
[3] 웹인용 원조 친일기업 두산, 창업주 박승직은 위안부 모집 단체 참여 https://news.v.daum.[...] 2019-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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