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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지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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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터 지커트는 1860년 뮌헨에서 태어난 영국 화가이다. 그는 1880년대 후반 런던 음악 홀 장면을 묘사한 그림으로 주목받았으며, 에드가 드가의 영향을 받아 인상주의의 개인적인 버전을 발전시켰다. 1900년대 초 베네치아를 방문하여 풍경화를 제작했고, 1907년 캠던 타운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는 잭 더 리퍼 사건의 용의자로 거론되기도 했으며, 1920년대 후반에는 사진을 활용한 독자적인 화풍을 확립했다. 지커트는 캠던 타운 그룹의 중심 인물로서 영국 근현대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42년 배스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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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지커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11년 당시의 시커트
1911년 당시 시커트
본명Walter Richard Sickert
국적영국
출생일1860년 5월 31일
출생지바이에른 왕국 뮌헨
사망일1942년 1월 22일
사망지잉글랜드 바스
안장 장소배섐프턴 세인트 니콜라스 교회
로마자 표기Walter Richard Sickert
직업
분야화가
활동 기간알 수 없음
사조인상파, 모더니즘
영향제임스 맥닐 휘슬러, 에드가 드가
주목할 만한 작품캠던 타운 살인
"Ennui" (권태)
학력유니버시티 칼리지 스쿨
킹스 칼리지 스쿨
수상알 수 없음
선출로열 아카데미
영국 왕립 미술가 협회
개인 정보
배우자엘렌 코브던 (1885년 결혼, 1899년 이혼)
크리스틴 앵거스 (1911년 결혼, 1920년 사망)
테레즈 레소르 (1926년 결혼)

2. 생애

지커트는 세 번 결혼했다. 1885년부터 1899년 이혼할 때까지 리처드 코브덴의 딸인 엘렌 멜리센트 코브덴과 결혼했고, 1911년부터 1920년 사망할 때까지 크리스틴 앵거스와 결혼했으며, 1926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화가 테레즈 레소어와 결혼했다.[32]

지커트의 누이는 여성 참정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페미니스트이자 평화주의자인 헬레나 스완윅이었다.

그는 주제를 연작으로 그리는 경향이 있었으며,[39] 특히 실내 장면, 베니스 풍경, 음악 홀 및 극장 장면, 초상화와 관련이 깊다. 반면 정물화는 거의 그리지 않았다. 지커트는 예술에서 주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모든 위대한 소묘가들은 이야기를 한다"고 말했지만, 자신의 주제를 객관적인 방식으로 다루었다.[30]

2. 1. 초기 생애와 교육

발터 지커트는 1860년 5월 31일 바이에른 왕국 뮌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덴마크 출신의 예술가 오스왈드 지커트였고, 어머니는 영국인 엘레노어 루이자 헨리(Eleanor Louisa Henry)였다. 어머니 엘레노어는 천문학자 리처드 쉽생크스의 사생아였다.[1] 지커트의 할아버지 역시 덴마크에서 이름난 화가로, 집안은 3대에 걸쳐 화가를 배출했다. 1868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병합의 여파로 지커트 가족은 영국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3] 아버지 오스왈드의 작품은 레베카 폰 크로이서 남작 부인의 추천으로 당시 내셔널 갤러리 관장이었던 랄프 니콜슨 워넘에게 소개되기도 했다.[2] 지커트 가족은 런던에 최종 정착하여 영국 국적을 취득했다.[3]

지커트는 1870년부터 1871년까지 유니버시티 칼리지 스쿨에 다녔고, 이후 18세가 될 때까지 킹스 칼리지 스쿨에서 공부했다. 화가 집안에서 자랐지만, 처음에는 배우를 지망하여 헨리 어빙 경의 극단에서 약 4년간 단역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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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연기자의 길을 포기하고 1881년 슬레이드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슬레이드 미술학교에는 1년도 채 다니지 않고,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의 제자이자 에칭 조수가 되기 위해 학교를 떠났다.[4] 지커트는 휘슬러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초기 그림들은 휘슬러의 방식처럼 자연을 대상으로 알라 프리마 기법으로 그린 작은 크기의 색조 연구였다.[6]

1883년에는 파리로 가서 에드가 드가를 만났다. 드가의 독특한 공간 구성 방식과 소묘(드로잉)를 중시하는 태도는 지커트의 작품 세계에 강력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6] 드가는 휘슬러와는 다른 균형점을 제공했으며, 결과적으로 지커트의 예술적 발전에 더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5] 드가의 조언에 따라, 지커트는 어두운 색조를 선호하는 자신만의 인상주의 화풍을 발전시켰으며, '자연의 폭정'에서 벗어나 소묘와 기억에 의존하여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채택했다.[6] 드가와의 우정은 1917년 드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졌다.

2. 2. 화가로서의 활동과 캠던 타운 그룹

지커트는 1899년에 이혼하고 소호로 돌아왔다. 그 후 1905년에 자신의 아틀리에를 캠던 타운 (현 캠던 런던 자치구 내)에 두고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잭 더 리퍼의 침실'', 1907년경


지커트는 잭 더 리퍼의 범죄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악명 높은 연쇄 살인범이 사용했던 방에 머물렀다고 믿었다. 그는 1881년에 그곳에 머물렀던 이전 세입자를 의심했던 집주인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었다. 지커트는 이 믿음을 바탕으로 1905년부터 1907년까지 그 방을 그림으로 그렸으며, 제목은 ''잭 더 리퍼의 침실'' (맨체스터 미술관)이었다. 그 그림은 어둡고 우울한 방을 보여주며 대부분의 세부 사항이 흐릿하게 처리되어 있다.[45]



1907년 9월 11일, 캠던 타운에서 에밀리 디목(Emily Dimmock)이라는 매춘부가 자신의 아파트에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성교 후 잠든 그녀의 을 베는 잔혹한 수법으로 그녀를 살해했다. 이 사건은 '캠던 타운 살인 사건'으로 알려지며 큰 파장을 일으켰다.

지커트는 이전부터 나체 여성이 쇠 침대에 누워있는 소재를 그림으로 다루었는데[59], 1908년에 발표한 ''캠든 타운 살인'' (원제: ''집세를 위해 무엇을 할까?'')[43][44]은 나체의 여성이 누워있는 침대 옆에 남성이 앉아 절망한 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실제 사건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논란이 되었다.

한편, 지커트가 잭 더 리퍼 사건에 보인 관심과 관련 그림 때문에 1970년대 이후 그가 잭 더 리퍼이거나 공범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커트는 이 사건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심각한 용의자로 간주되지 않으며, 강력한 증거는 그가 리퍼 살인 사건 대부분이 발생했던 1888년 당시 프랑스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53][46][47][48]

2. 3. 후기 활동과 사망

1920년 두 번째 아내가 사망한 후, 지커트는 프랑스 디에프로 이주하여 카지노와 카페 생활을 그렸고, 1922년에 런던으로 돌아왔다. 1924년에는 왕립 아카데미(ARA)의 준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에는 화가 테레즈 레소어와 세 번째 결혼을 했으며, 같은 해 가벼운 뇌졸중으로 추정되는 병을 앓았다.[22] 이듬해인 1927년, 그는 자신의 이름 '발터'를 버리고 중간 이름인 '리처드'를 사용하여 '리처드 지커트'로 알려지기를 원했다.[23] 이 시기 그의 그림 스타일과 주제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그는 직접 보고 그리는 것을 멈추고, 아내 테레즈 레소어가 찍은 스냅 사진이나 뉴스 사진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진을 격자무늬로 나누어 캔버스에 확대 전사하는 방식을 사용했으며, 연필로 그린 격자선은 완성된 그림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났다.

지커트의 옛 스튜디오와 학교(런던 이즐링턴 하이버리 플레이스 1번지)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를 예술가로서의 쇠퇴로 여겼지만, 지커트의 후기 작품들은 오히려 그의 가장 진보적인 시도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는 후대의 척 클로스나 게르하르트 리히터 같은 화가들의 기법을 예견한 것으로 여겨진다.[24] 또한 그는 조지 보워스나 존 길버트와 같은 빅토리아 시대 예술가들의 삽화를 활용하여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원본 삽화의 맥락에서 벗어나 포스터처럼 강렬한 색상으로 칠해 서사적, 공간적 이해를 모호하게 만들었는데, 그는 이러한 작품들을 "영국 에코(English Echoes)"라고 불렀다.[25]

1927년경, 지커트는 윈스턴 처칠의 비공식 초상화를 그렸다.[26] 처칠의 아내 클레멘타인 처칠은 지커트의 가족과 친구였고, 그녀의 소개로 두 사람은 만났다. 지커트와 처칠은 서로 잘 통했으며, 그림 그리기가 취미였던 처칠은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정말 나에게 화가로서의 새로운 삶을 주고 있다"고 쓸 정도로 지커트에게 영향을 받았다.[27]

헨리 톤크스. ''Sodales: Mr Steer and Mr Sickert'', 1930


지커트는 이스트 런던 그룹의 젊은 예술가들을 지도하고 멘토링했으며, 1929년 11월에는 르페브르 갤러리에서 그들과 함께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는 1929년에 마지막 에칭 작품을 제작했다.[28]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영국 예술가 왕립 협회 회장을 역임했다.[29] 1934년 3월에는 왕립 아카데미 정회원(RA)이 되었으나, 이듬해인 1935년 5월 9일 아카데미에서 사임했다. 이는 스트랜드에 있는 영국 의학 협회 건물에 설치된 제이콥 엡스타인의 조각 부조 작품 보존 문제에 대해 아카데미 회장이 지지하지 않는 것에 대한 항의 표시였다.[30]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지커트는 아내 테레즈 레소어의 도움을 받으며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31]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후원자 중 한 명은 신문 재벌 비버브룩 경이었다. 비버브룩 경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지커트 그림 컬렉션을 소장했으며, 이 컬렉션은 지커트와 비버브룩이 주고받은 개인 서신과 함께 캐나다 뉴브런즈윅주 프레더릭턴의 비버브룩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지커트는 비버브룩 경 외에도 배우 그웬 프랭콘-데이비스, 작가 휴 월폴, 밸런타인 브라운, 제6대 켄메어 백작 등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오브리 비어즐리, 조지 5세, 배우 페기 애시크로프트 등의 모습을 좀 더 자유로운 방식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Ludovico Magno'' (1930), 필립스 컬렉션


1942년, 지커트는 잉글랜드 서머싯주 바스에서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잭 더 리퍼 용의자설



지커트는 잭 더 리퍼의 범죄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악명 높은 연쇄 살인범이 사용했던 방에 머물렀다고 믿었다. 그는 1881년에 그곳에 머물렀던 이전 세입자를 의심했던 집주인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었다. 지커트는 1905년부터 1907년까지 그 방을 그림으로 그렸으며, 제목은 ''잭 더 리퍼의 침실'' (맨체스터 미술관)이었다.[45] 이 그림은 어둡고 우울한 방을 보여주며 대부분의 세부 사항이 흐릿하게 처리되어 있다. 이는 그가 이 주제에 대해 병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80년 넘게 지커트가 리퍼 범죄의 용의자라는 언급이 없었지만, 1970년대에 작가들은 지커트가 잭 더 리퍼이거나 그의 공범이라는 생각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지커트는 이 사건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심각한 용의자로 간주되지 않으며, 강력한 증거는 그가 1888년 대부분의 시간을 영국 밖에서 보냈으며,[53] 리퍼 살인 사건 대부분이 발생했을 당시 프랑스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46][47][48]

추리 소설 베스트셀러 작가인 패트리샤 콘웰은 저서 『진상 - "살인마 잭"은 누구인가?-(원제: Portrait Of A Killer: Jack The Ripper Case Closed)』를 2002년에 발표하여, 발터 지커트가 바로 살인마 잭의 진범이라고 지목했다.[60] 콘웰은 2001년 스코틀랜드 야드 견학 중 살인마 잭 사건에 과학 수사 기법(DNA 감정, 필적 감정, 프로파일링 등)이 적용되지 않았음을 알고 직접 조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조사 과정에서 용의자 중 한 명으로 지커트를 알게 되었고, 그의 그림, 성격, 살인마 잭의 편지 등을 분석하며 그를 진범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콘웰은 이 조사를 위해 지커트의 작품 100점 이상을 자비로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61][62]

콘웰이 제시한 주요 근거는 다음과 같다.[60]


  • '''미토콘드리아 DNA 일치''': 콘웰은 살인마 잭의 편지 우표 타액과 지커트의 편지 타액, 소지품 등에서 DNA를 비교하여 미토콘드리아 DNA 일치를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단, 미토콘드리아 DNA 일치만으로는 동일 인물로 단정할 수 없다.)
  • '''편지지 및 필적 유사성''': 지커트가 사용한 편지지와 살인마 잭 명의 편지지의 가로줄무늬가 동일 제조사(A·피리&선즈 사)의 같은 로트 제품임을 밝혀냈다. 또한 필적이 매우 유사하여 전문가로부터 동일 인물 가능성이 높다는 감정을 받았다.
  • '''잭 더 리퍼에 대한 집착''': 지커트가 생전에 잭 더 리퍼 사건에 병적으로 집착했다는 증언이 다수 존재한다. 그는 자신이 사용하던 캠던 타운의 아틀리에가 과거 잭 더 리퍼가 살았던 곳이라고 믿기도 했다.
  • '''성적 콤플렉스 추정''': 프로파일링 관점에서 범인의 잔혹한 살해 수법은 여성에 대한 극심한 증오심과 콤플렉스를 시사하는데, 콘웰은 지커트가 어린 시절 남성기 누공[63]으로 세 차례 수술받은 경험 때문에 성적 콤플렉스를 가졌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
  • '''작품과 사건 현장의 유사성''': 콘웰은 지커트의 그림, 특히 데생과 에칭에서 잭 더 리퍼 사건 현장 사진이나 피해자 모습과 유사한 점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작품에 나타난 병적인 폭력성과 여성 혐오를 근거로 들었다.[60] 지커트는 ''잭 더 리퍼의 침실''[64]이라는 제목의 유화를 남기기도 했다.


패트리샤 콘웰의 주장에 대해서는 물증 부족[65] 등을 이유로 많은 반론이 제기되었다.[66]

  • 살인마 잭이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들의 신빙성 문제: 콘웰이 분석한 편지 대다수는 진범이 보낸 것이 아니라 장난 편지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66]
  • 성적 콤플렉스 주장의 근거 부족: 지커트가 성적 문제로 콤플렉스를 가졌다는 주장은 추측에 불과하며, 오히려 그에게 숨겨진 아이가 있었다는 소문도 있다.[66]
  • 알리바이의 존재: 사건이 집중적으로 발생한 1888년 8월과 10월에 지커트는 프랑스에 체류했을 가능성이 높아 알리바이가 성립한다는 주장이 있다.[66]


또한 미술계에서는 영국 미술사에 남긴 지커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며, 추측에 근거해 그를 살인마 잭과 연결 짓는 것에 불쾌감을 표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4. 작품 세계

지커트는 가장 초기 그림에서 휘슬러의 방식을 따라 매우 유동적인 물감을 사용하여 빠른 습식 기법(알라 프리마)으로 그린 작은 톤 연구였다.[6][33] 이후 에드가 드가를 만나 그의 그림 공간 사용과 드로잉 강조에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6] 드가의 조언에 따라 '자연의 폭정'에서 벗어나 드로잉과 기억을 바탕으로 스튜디오에서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점차 변화했다.[6] 그는 어두운 색상을 선호하는 인상주의의 개인적인 버전을 개발했으며,[5] 여러 단계로 그림을 그리는 신중한 절차를 채택하여 스스로 '요리' 측면이라고 부르는 기법적 과정을 중시했다.[33]



그는 자연에서 직접 그리기보다는 드로잉을 바탕으로, 또는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사진이나 빅토리아 시대 삽화가들의 대중적인 판화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선호했다.[34] 격자 사용으로 캔버스에 디자인을 옮긴 후, 두 가지 색상으로 빠른 밑칠을 하고 완전히 건조시킨 뒤 최종 색상을 적용하는 방식을 사용했다.[35] 지커트는 주제를 연작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었으며,[39] 특히 실내 장면, 베네치아 풍경(특히 1903-04년 여행 중 다수의 인물이 등장하는 기법 개발[11]), 음악 홀 및 극장 장면,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 정물화는 거의 그리지 않았다.

''The Basket Shop, Rue St Jean, Dieppe'', 1911–1912년, 애버딘 기록 보관소, 갤러리 및 박물관


음악 홀 그림에서는 복잡하고 모호한 시점을 선택하여 관객, 공연자, 오케스트라 간의 공간적 관계를 혼란스럽게 묘사했다.[36] 인물들의 고립된 몸짓과 시선,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향한 관객들의 모습 등을 통해 인물 간의 소통 부재라는 주제를 탐구했다.[36] 또한 벽지 패턴이나 건축 장식을 강조하여 추상적인 아라베스크를 만들고 공간을 평면화했으며, 이는 드가의 작품처럼 예술 자체의 인공성을 드러내는 장치였다.[36] 1888년 《가티의 케이티 로렌스》(Katie Lawrence at Gatti's)는 당대 유명 가수를 묘사했지만, 저속하다는 비판과 함께 소재가 예술에 너무 천박하다는 논란을 일으켰다.[8][9]

''Ennui'', 1914년, 테이트 브리튼


캠던 타운 시기에는 침대에 누워 있는 음울한 여성 누드화를 통해 기존의 관습적인 누드화에 도전했다.[43] 특히 남성 인물이 포함된 네 점의 누드화에 《캠던 타운 살인 사건》이라는 제목을 붙여 큰 논란을 일으켰으나,[43] 이 그림들은 폭력보다는 슬픔과 사색의 분위기를 담고 있으며, 원래 다른 제목으로 전시되기도 했다.[43] 이 시기 작품들은 두꺼운 임파스토와 좁은 톤 범위로 그려졌는데,[16] 지커트 자신은 두꺼운 유화 물감에 대해 "세상에서 가장 장식적이지 않은 물질"[37]이라며 혐오감을 표현하기도 했지만, 이 기법은 이후 루시안 프로이드, 프랜시스 베이컨, 프랭크 아우어바흐 등 영국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38]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권태》(Ennui, 1914년경)는 빅토리아 시대 이야기 그림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실내에서 심리적으로 소외된 부부의 모습을 묘사한다.[17]

1910년대와 1920년대에 그의 초기 그림의 어둡고 우울한 색조는 점차 밝아졌고,[39] 지커트는 《브라이튼 피에로》(Brighton Pierrots, 1915)와 《빅토르 르쿠르 초상》(Portrait of Victor Lecour, 1921–24)과 같은 작품에서 예상치 못한 색조를 새로운 대담함과 병치했다. 그의 여러 자화상은 일반적으로 배우로서의 그의 초기 경력과 일치하는 역할 놀이의 요소를 보여주었다. 《라자루스는 단식을 푼다》(Lazarus Breaks His Fast, 1927년경)와 《가정 폭군》(The Domestic Bully, 1935–1938년경)이 그 예이다. 지커트의 후기 작품은 헬렌 레소어가 "거친 캔버스에 따뜻한 밑칠 위에 빠르게 붓질하거나 (또는 그 반대로), 제한된 범위 내에서 얇게 씻어낸 물감을 선호하여 밑칠이 '보이게' 한다"라고 묘사한 물감을 보여준다.[40] 후기에는 사진(아내 테레즈 레소어가 찍은 스냅 사진이나 뉴스 사진)이나 빅토리아 시대 삽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그림을 제작했다.[24][25] 사진이나 삽화를 격자를 이용해 캔버스로 옮겼으며, 이 격자 선은 완성된 그림에서도 종종 보인다.[24] 빅토리아 시대 삽화를 재해석하여 포스터 같은 색감으로 칠하고 서사적, 공간적 맥락을 변형시킨 작품들을 '영국 에코'(English Echoes)라고 불렀다.[25] 이러한 후기 작업 방식은 동시대에는 쇠퇴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오늘날에는 척 클로스나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업을 예견한 진보적인 시도로 평가받기도 한다.[24]

지커트는 예술에서 주제의 중요성을 주장하며 "모든 위대한 소묘가들은 이야기를 한다"고 말했지만,[30] 주제를 객관적이고 초연하게 다루었다. 맥스 코즐로프는 "너무 많은 것을 말하지 않는 방법은 지커트에게 가장 힘든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라고 썼으며, 이는 그의 그림의 의도적인 미완성과 색상의 "신경쇠약적인 침착함"으로 입증된다.[41] 화가 프랭크 아우어바흐에 따르면 "지커트의 초연함은 그의 억제되지 않은 방식에서 점점 더 분명해졌다. 그는 스냅 사진과 언론 사진에 의존하는 것을 명백히 했고, 다른 죽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복사하고, 사용하고, 빼앗았으며, 자신의 작품 생산에 크고 커져가는 역할을 한 조수들의 서비스도 광범위하게 사용했다."[42]

5. 유산과 영향

2021–2022년, 리버풀의 워커 미술관에서 《지커트: 예술의 삶》 회고전이 열려 지커트의 그림 약 100점과 드로잉 200점이 전시되었다. 이는 30년 만에 영국에서 열린 가장 큰 규모의 지커트 회고전으로 자평되었다.[52] 미술 평론가 조나단 존스는 이 전시를 통해 지커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상한 인물"로 드러났으며, "이러한 불안한 시각 속에 그의 현대성이 자리 잡고 있다"고 평했다.[53]

2022년 4월 28일부터 9월 18일까지 테이트 브리튼은 60년 만에 처음으로 테이트에서 대규모 지커트 회고전을 개최했다. 70개 이상의 공공 및 개인 소장품에서 가져온 150점 이상의 작품을 선보였으며, 30년 만에 가장 광범위한 회고전으로 자평했다. 이 전시는 파리프티 팔레와 협력하여 기획되었고, 2022년 말과 2023년 사이에 파리에서 순회 전시될 예정이었다.[54] 조나단 존스는 이 전시에 대해 "당신을 단순한 도덕적 또는 정치적 진실을 넘어선 곳으로 데려간다"며, 지커트를 "그의 시대에 뭉크, 반 고흐 또는 오토 딕스만큼 강력할 수 있는 유일한 영국 예술가"라고 평가했다.[55]

한편, 미술계에서는 지커트가 영국 미술계에 미친 영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추측에 근거하여 지커트와 살인마 잭을 연결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불쾌감을 표하는 의견도 있다.

참조

[1] 서적 Baron et al. 1992, p. 33.
[2] 웹사이트 British National Archives http://www.nationala[...] Government of the United Kingdom 2014-01-19
[3] 웹사이트 SICKERT, Walter Richard http://www.oxfordart[...]
[4] 서적 Baron et al. 1992, p. 34.
[5] 서적 Corbett, David Peters, ''Walter Sickert'', p. 13.
[6] 서적 Baron et al. 1992, p.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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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서적 Baron et al. 1992, pp. 15–17.
[9] 서적 Baron et al. 1992, p. 15.
[10] 웹사이트 Biography of Walter Sickert https://www.stepheno[...]
[11] 서적 Upstone, 2009, pp. 9–11.
[12] 서적 Upstone 2009, p. 47.
[13] 서적 Upstone 2009, p. 39.
[14] 서적 Baron et al. 1992, p. 153.
[15] 서적 Baron et al. 1992, p.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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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서적 Baron et al. 1992, p. 156.
[19] 웹사이트 Mary Godwin 1887–1960 https://www.louiseko[...] 2018-07-08
[20] 서적 Baron and Sickert 2006, p. 80.
[21] 서적 Hartley 2013, pp. 189–90.
[22] 서적 Sickert et al. 1981, p.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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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뉴스 The Master of the Blur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2002-04-11
[25] 서적 Sickert et al. 1981, pp. 102–103.
[26] 서적 Sickert et al. 1981, p. 93.
[27] 서적 Soames 1999, pp. 308–309.
[28] 서적 Shone and Curtis 1988, p. 9.
[29] 웹사이트 Illustrious Past Members of the RBA https://royalsociety[...] 2020-06-15
[30] 서적 Baron 1980.
[31] 서적 Sickert et al. 1981, pp. 9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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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서적 Walter Sickert: the Complete Writings On Art Ox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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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Youtube 【切り裂きジャック】画家が犯人説!?未解決事件を絵画から読み解け!【ウォルター・シッカート】 https://www.youtube.[...] 山田五郎 2023-05-16
[57] 웹사이트 Walter Sickert http://www.wetcanvas[...] WetCanv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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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웹사이트 Walter Sickert, THE CAMDEN TOWN NUDES http://www.courtauld[...] Courtauld
[60] 서적 真相 -"切り裂きジャック"は誰なのか? 講談社 2003-01-31
[61] Youtube 【切り裂きジャック】画家が犯人説!?未解決事件を絵画から読み解け!【ウォルター・シッカート】 https://www.youtube.[...] 山田五郎 2023-05-16
[62] 문서 にもかかわらず、コーンウェル曰く「絶対家には飾りたくない」とのことである。
[63] 문서 コーンウェルは著書の中で、本人がシッカートの義理の甥に確認したことにより推測している。
[64] 웹사이트 Jack The Ripper's Bedroom http://www.mancheste[...] Manchester City Gallery
[65] 문서 切り裂きジャック事件の推理は、いくつもあるがどれも決定的な物証はない。
[66] 웹사이트 Casebook Patricia Cornwell and Walter Sickert: A Primer http://www.casebook.[...] 2012-12-30
[67] 웹사이트 ArtCycropedia http://www.artcyclop[...] 2013-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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