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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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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종오는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출신의 군인으로, 한국 전쟁 당시 6사단장과 9사단장을 역임하며 춘천 전투, 백마고지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활약했다. 1944년 일본 주오대학 재학 중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일본군 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해방 후에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참위로 임관했다. 한국 전쟁 중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이후 합동참모의장과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대장으로 예편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고향의 교육 발전에 기여하여 부강중학교와 부강공업고등학교(현 세종하이텍고등학교)를 설립했다. 17개의 훈장을 받았으며, 1966년 폐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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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김종오 (1961년)
한국어 표기김종오 (金鍾五, 金钟五)
산남(山南)
출생1921년 5월 22일
출생지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청주군 부용면 외천리 (현재 대한민국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외천리)
사망1966년 3월 30일 (향년 44세)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본관김해 김씨
종교유교(성리학) → 천주교(세례명: 요셉)
군 경력
소속일본 제국 육군
대한민국 육군
복무 기간1944년 ~ 1945년 (일본 제국 육군)
1946년 ~ 1965년 (대한민국 육군)
최종 계급일본 제국 육군 소위
대한민국 육군 대장
주요 지휘 보직육군본부
합동참모본부
지휘제1연대
제6보병사단
제9보병사단
육군사관학교
제1군단
제5군단
제1군사령부
합동참모의장
육군참모총장
참전제2차 세계 대전
국공내전
한국 전쟁
춘천-홍천 전투
동락리 전투
영천 전투
현리 전투
백마고지 전투
서훈태극무공훈장 포함 17개 훈장
기타 이력
기타 이력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묘소국립서울현충원 장군 제2묘지 1호
모교주오 대학

2. 생애



김종오는 한국 전쟁 당시 육군 대령으로 제6사단장으로, 조선인민군의 기습 남침에 맞서 춘천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32] 1950년 7월 준장으로 진급, 동락리 전투희천 전투에서 6사단 7연대를 이끌고 조선인민군을 격파했다. 이후 9사단장으로서 백마고지 전투에서 중공군에 맞서 승리했다.

전쟁 이후 합동참모의장과 제15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고, 5.16 군사정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을 맡아 잠시 정치에 참여하기도 했다.

1965년 4월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으며, 1966년 3월 30일 폐암으로 사망했다.[27]

2. 1. 초기 생애 및 학창 시절

1921년 5월 22일 충청북도 청주시 부용면 외천리(현 청주시)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30] 일본 주오대학 법학부에 재학 중이던 1944년,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일본군관학교에서 임관 교육을 받던 중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다.[30] 귀국 후에는 좌익 세력이 결성한 학병동맹에 대항하여 만들어진 학병단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30]

1946년 1월 15일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하여 육군 참위(소위)로 임관하였다.[31] 군번은 31번이었다.[8] 1946년 2월 26일부터 전라북도에서 김백일 중위[9]의 지휘 아래 제3연대 창설에 참여했다. 1947년 12월 1일에는 경기도를 담당하는 제1연대장[10]을 맡았다.

2. 2. 일본군 복무 및 해방

1944년 일본 주오대학 재학 중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일본군 장교로 임관 교육 중 해방을 맞고 귀국하였다.[30] 귀국 이후 좌익 세력이 결성한 학병동맹에 대항하여 만들어진 학병단에 들어가 활동하기도 하였다.[30]

2. 3. 대한민국 국군 임관

1946년 1월 15일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해 육군 참위(소위)로 임관하였다.[31] 군번은 10031번이다.[1] 1947년 육군 제1연대장이 되었다. 1949년에는 대령이 되었다.

1946년 1월 대한민국 육군의 전신인 남조선국방경비대에 입대, 1월 22일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명되었다.

1946년 2월 26일부터 전라북도에서 김백일 중위[9]의 지휘 아래 제3연대 창설에 참여했다.

1947년 12월 1일, 경기도를 담당하는 제1연대장[10]을 맡았다.

2. 4. 38선 분쟁과 북한군 격퇴

1949년부터 38선에서는 남북 간 무력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했고, 5월 4일에는 좌파 장교들이 다수의 병사를 이끌고 북한으로 망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38선에 가까운 춘천에 주둔하고 있던 제8연대 제1대대의 절반(대대장 표무원을 포함한 장교 4명, 병사 213명)이 북한 측으로 망명했다. 다음 날인 5월 5일에는 제8연대 제2대대 대대장 강태무와 병사 150명이 월북했다.[11]

이러한 사건을 시작으로 제1연대가 경비하던 의정부에서도 북한군의 침투가 잦아졌다. 연대장 김종오는 월북을 가장하여 수용하러 온 북한군 부대를 공격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정보국의 김창룡 대위와 상의하여, 38선을 왕래하는 이중 스파이를 이용해 북한군에게 "한 개 대대가 5월 8일에 사직리를 거쳐 연곡으로 월북할 테니 수용 조치를 취해 달라"고 전하게 했다. 제8연대의 집단 월북 직후였기 때문에 북한군 측은 이를 신뢰했고, 보도 관계자까지 불러 수용 준비를 했다.

5월 7일, 한 개 중대로 하여금 월북을 가장하게 하고, 동쪽에서 2개 중대, 서쪽에서 1개 소대를 우회시켜 수용하러 온 부대의 퇴로를 차단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우회하던 2개 중대가 길을 잘못 들어 북한군과 조우하여 교전했다. 북한군은 위장을 눈치챈 듯 중대를 수용하러 오지 않았다. 전투는 격렬했고, 2개 중대는 철수하여 작전은 실패로 끝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서쪽에서 침투하여 무전이 통하지 않아 잠복 자세로 대기하고 있던 1개 소대가 1개 중대 정도의 북한군을 포착하여 공격했다. 소대는 104명을 사살하고 포로 13명을 얻었으며, 소총 100여 정, 기관총 1정을 노획하여 철수했고, 결과적으로 작전은 성공했다.[2][3]

1950년 6월 10일, 제6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12]

3. 한국 전쟁

1947년 육군 제1연대장을 역임했고, 한국 전쟁 발발 당시 육군 대령으로 제6사단의 사단장이었다. 1950년 7월 준장으로 진급하였다.[31]

3. 1. 춘천 전투와 초기 방어

한국 전쟁 개전 당시 육군 대령으로 제6사단의 사단장이었던 김종오는 낌새를 수상히 여겨 춘천에 주둔한 육군 제6사단 제7연대에 1950년 6월 22일부터 경계태세 강화와 동시에 전 장병의 외출을 금지시키도록 명령했다.[32] 그 덕분에 조선인민군 2만 4천 명은 6월 25일 새벽 춘천을 기습공격했지만 40% 이상의 전력을 상실한 채 춘천 지역 점령에 실패했다.[32] 춘천 전투에서 6사단은 3일간 조선인민군과 대치하며 춘천을 확보했고 조선인민군의 진군을 성공적으로 차단했으나,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충주로 철수하면서 조선인민군은 6월 27일 저녁 10시에 춘천을 점령했다.[32]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육군 제6사단에는 조선인민군 제2사단 (리청송 소장)과 독립전차연대의 지원을 받은 조선인민군 제12사단 (전우 소장)이 침공해 왔다. 대한민국 육군 제6사단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용전했다. 이 전투 (국경선 개전)에서 조선인민군은 춘천 공략이 지연되었고, 조선인민군 제2사단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제2사단을 수원에 투입하여 대한민국 육군 주력을 포착하려던 조선인민군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게 된다.

6월 27일, 홍천에 적의 압력이 가해져 춘천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대한민국 육군 본부와의 연락이 닿자, 김백일로부터 "귀관의 판단으로 중앙선 연선에서 지구전을 펼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육군 본부와의 연락은 두절되었다. 제6사단은 저항하며 원주로 정연하게 후퇴했다. 6월 30일, 홍천이 함락되어 조선인민군은 행동의 자유를 얻었지만, 예정보다 4일이나 늦어진 것은 이후의 전황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제6사단은 원주로 철수하여 전면 방어를 준비했다.

3. 2. 지연전과 낙동강 방어선

한국 전쟁 발발 당시 제6보병사단을 지휘했던 김종오는 북한군의 진격을 5일간 지연시켰다.[2] 음성군에서 북한군 제48여단을 공격하여 수천 명을 사살하고 97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 이 공로로 김종오는 준장으로 진급했다.[2]

7월 1일, 제6사단은 원주를 포기하고 충주-제천 선까지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7연대는 신림리 고개를 방어하고, 주력 부대는 충주 북쪽의 한강 선을 방어했다. 그러나 한강 선의 한국군 주력 부대와 제6사단 사이에는 90km 이상의 간극이 발생했고, 육군 본부가 있는 수원이 노출되었다. 7월 3일, 육군 본부는 제6사단에 안성 부근에서 충주까지 방어하도록 명령했고, 김종오는 제2연대 제2대대를 성환 방면, 제19연대를 안성 동쪽, 제7연대를 충주로 급파하여 방어했다.

7월 4일, 육군 본부는 제6사단에 "일부를 가지고 제8사단의 전진을 엄호하는 동시에 전력을 다해 안성 동쪽-음성 선을 확보하라"고 명령했다. 김종오는 충주의 제7연대를 음성으로 급파하고 제2연대 주력을 충주에 머물게 하여 제8사단의 전진을 엄호하게 했다. 음성에 파견된 제7연대는 박성철 소장이 지휘하는 제15사단 제49연대를 매복으로 격퇴했다.

7월 5일 밤, 제6사단 사령부를 충주에서 증평으로 이동했다. 이때 사단의 전선은 70km까지 펼쳐져 있었다. 7월 6일, 제7연대는 무극리를 탈환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역습을 받아 음성의 옛 진지로 후퇴했다.

7월 7일, 충주 북쪽 한강 선에서 북한군 제12사단이 도하를 시작했지만 제3대대는 이를 격퇴했다. 7월 8일, 북한군 제12사단과 최광 소장이 지휘하는 북한군 제1사단이 공격을 시작했고, 제2연대는 수안보로 철수했다. 7월 9일, 제2연대는 반격을 시작했지만 한계에 다다랐고, 적이 양익을 포위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화천리까지 후퇴했다. 7월 10일에는 제7연대와 제19연대 주력이 집결했다.

7월 12일, 북한군 제1사단이 공격을 시작했다. 제6사단은 소백산맥으로 철수했다. 7월 13일, 이화령과 조령관 남쪽에 제2연대, 제19연대를 점령시키고 제7연대를 제2선에 배치했다. 7월 14일, 북한군 제1사단은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7월 15일, 유재흥[13] 준장이 지휘하는 제2군단이 창설되어 제6사단과 제8사단이 편입되었다. 제6사단은 북한군 제1사단의 총공격에 격퇴되어 16일에 옥녀봉-풍명산 선으로 후퇴했다.

좌익의 제1사단과의 사이에 30km의 간극이 생겼고, 그곳에 제15사단이 남하했기 때문에 제2군단은 영강 선으로 후퇴하고 1개 대대를 화녕장에 급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후, 제6사단은 영강을 장애물 삼아 최용진 소장이 지휘하는 북한군 제13사단의 맹공을 막아냈지만 7월 25일에는 영강 남안의 진지가 잠식되었다.

7월 27일, 증원된 백선엽 준장이 지휘하는 한국군 제1사단이 도착했고, 이후 8월까지 제1사단과 함께 2개 사단과의 혈전이 이어졌다. 8월 2일, 제2군단의 명령에 따라 제6사단은 낙동강을 도하하여 용기동 일대에 배치되었다.

8월 3일, 낙동강을 도하한 북한군 제1사단이 공격을 시작했다(8월 공세). 제6사단은 군위 남쪽의 신녕까지 후퇴했다. 신녕에서는 오백룡 소장이 지휘하는 북한군 제8사단이 가세하여 8월 중 제6사단은 2개 사단과 교전했다.

9월 공세에서 제6사단은 북한군 제8사단과 교전했다. 9월 5일, 우익의 북한군 제8사단이 격퇴되어 영천이 위기에 놓였기 때문에 제1사단은 제11연대, 제6사단은 제19연대를 군단에 배속시켰다.

9월 6일, 북한군 제8사단은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제6사단의 변특공대[14][15]는 선봉의 전차 8대를 파괴했다. 북한군 제8사단은 미국 공군의 대규모 폭격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이후에는 야간에 소부대로 전초 진지를 습격하는 정도로 그쳤다.

3. 3. 백마고지 전투

1952년 9사단장으로 부임하여 백마고지 전투에서 중공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2] 10일 동안 9사단은 중국 제35군 예하 3개 사단에 맞서 백마고지를 방어한 끝에 중공군을 격퇴하였다.[4]

3. 4. 북진과 중공군 개입

한국 전쟁 발발 당시 제6보병사단을 지휘하고 있던 김종오는 북한군의 진격을 5일간 지연시켰다.[2] 음성군에서 북한군 제48여단을 공격하여 수천 명을 사살하고 97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4] 이러한 공로로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1950년 9월,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 참여하였으나 작전 중 부상을 입었다. 이후 제9보병사단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가 본부로 복귀하였다.

1950년 10월, 김종오가 이끄는 육군 제6사단 제7연대는 희천 전투에서 조선인민군 18사단의 1개 연대를 물리치고 희천을 점령하였다.[32] 그러나 10월 중순, 중공군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에 침입하면서 상황이 급변하였다. 제6사단은 초산, 벽동 등으로 진격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제2연대와 제7연대가 궤멸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 혼란 속에서 김종오는 차량 사고로 부상을 입었고, 장도영 준장이 제6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17]

1950년 10월 31일, 제9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1951년 5월, 북한군과 중공군의 5월 공세 당시 제3사단을 지휘하며 분전했으나, 아군 부대의 후퇴와 중공군의 추격으로 인해 많은 병력을 잃었다.[18]

1952년, 다시 제9보병사단 사단장으로 임명되어 백마고지 전투에 참전했다.[2] 10일 동안 그의 사단은 중공군 제38군 예하 3개 사단에 맞서 백마고지를 방어하며 격전을 벌였다. 김종오는 적절한 예비대 투입과 부대 교대로 장병들의 사기를 유지하며 고지를 사수했다.[20] 이 전투에서 제9사단은 약 3,5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중공군은 1만 명 이상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 공로로 수훈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20]

4. 한국 전쟁 이후

한국 전쟁 당시 김종오가 이끄는 6사단 7연대는 동락리 전투에서 조선인민군에게 승리하였다. 1950년 10월 희천 전투에서는 조선인민군 18사단의 1개 연대를 격파하고 희천을 점령했다. 이후 9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백마고지 전투에서 중공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한국 전쟁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한국군 지휘관으로 백선엽과 김종오가 꼽힌다.[25] 백선엽은 부대 편성을 유지하며 끈기 있는 작전을 펼치는 강점이 있었고, 김종오는 날카로운 전과를 올리는 강점이 있었다.[25]

임부택은 김종오의 지휘에 대해 "항상 전반을 보던 침착한 지휘 통솔이었다"고 평가했다.[26] 진종채(진종채한국어)는 김종오가 완벽주의자에 가깝고 빈틈이 없으며 책임감이 강한 성격이었다고 회고했다.[25]

김종오는 고향의 교육 발전에도 기여했다. 부강초등학교 증축, 부강중학교와 세종하이텍고등학교의 전신인 부강공업고등학교, 외천초등학교, 갈원초등학교, 현도중학교 건설을 지원했다.[27]

1962년 8월 필립 찰스 하비브가 미국에 보낸 문서에는 "육군의 우수한 지휘관이며, 박정희 의장은 그의 능력에 점차 의존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기록되어 있다.[28]

4. 1. 군 주요 직책 역임

1947년 육군 제1연대장이 되었고, 한국 전쟁 개전 당시 육군 대령으로 제6사단의 사단장이었다. 1950년 7월 준장으로 진급하였다.[32] 한국 전쟁 이후에는 합동참모의장과 제15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하였다.

한국 휴전 협정 이후, 김종오는 제1군단 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합동참모의장과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했다. 1962년, 대장으로 진급하였고, 1965년 육군에서 예편했다.[2]

김종오가 역임한 주요 군직책은 다음과 같다.

기간직책비고
1947년육군 제1연대장
한국 전쟁 개전 당시육군 제6사단장대령
1950년 7월육군 준장진급
1950년제9보병사단 사단장
1954년 2월제1군단장[21]
1954년 10월육군 중장진급
1956년 9월제5군단장
1957년 7월육군교육총장[22]
1959년 2월 23일육군참모차장[23]
1960년 8월제1군 사령관
1960년 10월합동참모회의 의장
1961년 6월육군참모총장대장 진급
1965년 4월예비역 편입대장


4. 2. 5.16 군사정변 참여

5.16 군사정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을 맡음으로 잠시 정치인의 길을 걷기도 하였다.[30]

4. 3. 예편과 사망

1965년 4월, 김종오는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였다.[2] 1966년 3월 30일 오전 9시 25분,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폐암으로 사망하였다.[24] 장례식은 육군 본부에서 불교 의례로 거행되었으며,[5]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24]

5. 학교 설립

세종특별자치시부강중학교와 부강공업고등학교(현 세종하이텍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33]

6. 상훈

훈장수여 날짜
태극무공훈장1953년 12월 26일[1]
Legion of Merit|리전 오브 메리트영어1951년 9월 25일[2]
Distinguished Service Cross|수훈 십자 훈장영어(미국)1953년 4월 29일[3]
Legion of Merit|리전 오브 메리트영어1953년 6월 9일[4]
Legion of Merit|리전 오브 메리트영어1962년 10월 12일[5]
Legion of Merit|리전 오브 메리트영어1965년 2월 5일[6]


7. 학력


  • 中央大学|주오 대학교일본어 법학과 중퇴[1]
  • 군사영어학교 1기 졸업[1]
  • 조선경비보병학교 초등군사반 졸업[1]
  • 통위부 보병학교 초등군사반 졸업[1]
  • 대한민국 육군공병학교 고등군사반 졸업[1]
  • 대한민국 육군포병학교 고등군사반 졸업[1]
  • 대한민국 육군보병학교 고등군사반 졸업[1]
  • 대한민국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2기[1]

참조

[1] 웹사이트 [6· 25전쟁의 명장] 백마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종오 장군' https://blog.naver.c[...] 국방부 블로그 2022-03-04
[2] 웹사이트 김종오(金鍾五) http://encykorea.aks[...] 2022-03-04
[3] 웹사이트 "백마고지 전투 영웅 '김종오 장군' 계승해야" http://www.sjsori.co[...] 2022-03-04
[4] 웹사이트 [6·25 결정적 전투들] ⑨ 백마고지전투 https://www.korea.kr[...] 2022-03-04
[5] 웹사이트 김종오 장군 3일 육군장 https://www.joongang[...] 2022-03-04
[6] 웹사이트 「6·25전쟁 60주년 특별기획」 白善燁이 만난 6·25전쟁의 영웅들 http://monthly.chosu[...] 2023-06-07
[7] 웹사이트 민기식(閔機植) http://people.aks.ac[...] 2024-12-04
[8]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上巻
[9] 문서 旧満軍上尉。のち韓国陸軍中将。朝鮮戦争中に航空機事故にて戦死。
[10]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上巻
[11]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上巻
[12] 문서 編成は第2連隊、第7連隊、第19連隊、第16砲兵大隊、工兵大隊。春川-洪川正面の警備を担当した。
[13] 문서 元日本軍大尉。のち韓国陸軍中将
[14] 문서 第19連隊第1大隊で編成した卞圭英少尉以下6人の特攻隊。
[15]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下巻
[16] 문서 元日本軍准尉。のちに韓国陸軍中将。
[17] 서적 韓国戦争第4巻 国連軍の再反攻と共産軍の春季攻勢 かや書房
[18] 문서 第6師団、第12師団、第32師団
[19] 뉴스 三准將(삼준장) 少將(소장)에 昇任(승임) http://www.busan.com[...] 2019-11-12
[20] 웹사이트 Chong O. Kim http://valor.militar[...] Military Times 2014-09-25
[21] 뉴스 第一軍團長 金鍾五 少將 赴任 http://www.busan.com[...] 2019-11-12
[22] 뉴스 政府人士發令 http://www.busan.com[...] 2019-11-12
[23] 뉴스 陸·海參謀總長更迭 http://www.busan.com[...] 2019-11-12
[24] 뉴스 김종오 장군 3일 육군장 https://www.joongang[...] 2016-12-04
[25] 뉴스 남도현의 Behind War:김종오 장군(10)-② "조국 통일도 못해보고 눈을 감으니 한스럽다" http://premium.chosu[...] 2018-07-13
[26]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下巻
[27] 뉴스 백마고지 전투의 신화 김종오 장군 탄신제 http://www.sejongin.[...] 2019-03-04
[28] 뉴스 1962년 미 대사관 기밀문건 https://shindonga.do[...] 2020-07-22
[29] 웹사이트 Kim Chong Oh https://valor.milita[...] Military Times 2019-06-22
[30] 웹사이트 김종오 https://terms.naver.[...]
[31]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32] 서적 변질되어가는 한국현대사의 실상 상(上) 종소리
[33] 뉴스 백마고지 전투 승리 김종오 장군 재조명 https://news.naver.c[...] 2016-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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