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자맹 콩스탕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뱅자맹 콩스탕은 1767년 스위스에서 태어나 프랑스 혁명 시기를 거치며 정치, 사상, 문학 분야에서 활동한 자유주의 사상가이다. 그는 '고대인의 자유'와 '현대인의 자유'를 구분하고, 개인의 자유, 법치주의, 제한된 정부, 권력 분립을 강조하며 입헌군주제를 옹호했다. 또한, 소설 『아돌프』를 통해 심리주의 소설의 선구로 평가받았으며,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비판했다. 그의 사상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으며, 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의 민주화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세기 프랑스 철학자 - 샤를 푸리에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초기 사회주의 사상가인 샤를 푸리에는 상업의 폐해와 사회 모순을 비판하며 정념 인력 개념을 제시하고 팔랑주라는 공동체 사회를 구상했으며, 그의 사상은 공상적 사회주의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쳐 현대 사회 사상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 19세기 프랑스 철학자 - 조르주 소렐
조르주 소렐은 프랑스의 사상가로,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며 신화와 직접 행동을 통한 자본주의 전복을 주장했고, 파시즘과 볼셰비즘에 양면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아나코생디칼리즘과 파시즘에 영향을 미쳤다. - 로잔 출신 - 베르나르 추미
베르나르 추미는 해체주의 건축가로서 이론적 배경을 바탕으로 건축의 역할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해왔으며, 라 빌레트 공원,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등의 주요 작품이 있고 컬럼비아 대학교 건축대학원 학장을 역임한 스위스 태생의 건축가, 작가, 교육자이다. - 로잔 출신 - 티메아 바친스키
스위스의 은퇴한 프로 테니스 선수 티메아 바친스키는 WTA 투어에서 단식 4회, 복식 5회 우승, 2016년 리우 올림픽 복식 은메달 획득, 프랑스 오픈 2회 준결승 진출, 2015년 WTA 기량 발전상 수상 등의 업적을 달성했다. - 1830년 사망 - 시몬 볼리바르
시몬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 출신의 남아메리카 독립 운동가, 군인, 정치가로서, '해방자'라는 칭호로 불리며 남아메리카 여러 국가의 독립에 기여하고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에 기반한 통합을 추구했으나 그란 콜롬비아 해체로 이상이 좌절된, 라틴 아메리카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이다. - 1830년 사망 - 도미니크 방담
도미니크 방담은 프랑스 제1제정 시대의 장군으로, 나폴레옹에게 인정받은 군사적 재능과 잔혹한 성격, 그리고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의 공훈, 쿨름 전투 포로, 워털루 전투 이후의 추방 등 파란만장한 삶으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뱅자맹 콩스탕 | |
---|---|
기본 정보 | |
이름 | 앙리-뱅자맹 콩스탕 드 르베크 |
출생일 | 1767년 10월 25일 |
출생지 | 로잔, 스위스 연방 |
사망일 | 1830년 12월 8일 |
사망지 | 파리, 프랑스 왕국 |
국적 | 스위스, 프랑스 |
직업 | 외교관 정치 운동가 작가 정치 철학자 소설가 선출직 정치인 |
학력 | 에든버러 대학교 에를랑겐 대학교 |
![]() | |
로마자 표기 | Henri-Benjamin Constant de Rebecque |
정치 활동 | |
정당 | 공화주의 (1799–1802) 자유주의 (1819–24) 자유주의 (1824–30) |
임기 시작 | 1819년 4월 14일 |
임기 종료 | 1830년 12월 8일 |
선거구 | 사르트 (1819–24) 센 4구 (1824–27) 바랭 1구 (1827–30) |
임명자 | 나폴레옹 1세 |
임기 시작 | 1815년 4월 20일 |
임기 종료 | 1815년 7월 8일 |
임기 시작 | 1799년 12월 25일 |
임기 종료 | 1802년 3월 27일 |
선거구 | 레망 |
문학 활동 | |
활동 시기 | 18세기 19세기 |
장르 | 산문, 에세이, 팸플릿 |
주제 | 정치 이론, 자유주의, 종교, 낭만적인 사랑 |
사조 | 낭만주의 고전적 자유주의 |
주요 작품 | 모든 정부에 적용 가능한 정치 원칙 (1810) 아돌프 (1816) 그 기원, 형태 및 발전에서 고려된 종교에 대하여 (1824–30) |
활동 기간 | 1792–1830 |
2. 생애
뱅자맹 콩스탕은 1767년 스위스 로잔에서 프랑스계 개신교(위그노) 가문에서 태어났다.[32] 그의 아버지 쥘 콩스탕 드 레베크는 네덜란드 공화국군의 고위 장교였고, 어머니 앙리에트-폴린 드 샹디유-빌라르는 그가 태어난 직후 사망했다.[33] 그는 조부모와 가정교사에 의해 교육받았으며, 아버지의 군무로 인해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 각지를 전전했다.
콩스탕은 1782년 에를랑겐 대학교에, 1783년 에든버러 대학교에 들어갔다.[7][8] 에든버러 대학교에서는 앤드루 던컨의 집에 머물렀고 제임스 맥킨토시, 맬컴 레잉과 친구가 되었다.[7][8] 1785년(18세)에는 파리에서 문학가, 철학자들과 교류하였고, 이 때 파리와 영국, 스위스, 네덜란드 등을 오갔다. 그는 이자벨 드 샤리에르(Isabelle de Charrière)를 알게 되었는데, 그녀는 15년간의 서신 왕래를 통해 그의 삼촌 다비드-루이 콩스탕 드 레벡을 매우 잘 알고 있었으며, 콩스탕에게 어머니 같은 멘토 역할을 했다.[9]
1788년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에서 빌헬미나 폰 크람(Wilhelmina von Cramm)과 결혼했으나, 1793년 결혼 생활이 순탄치 않아 이혼했다.[34] 같은 해에 후에 아내가 될 샬로테 폰 할덴베르크를 만났다.[34] 1794년 9월, 콩스탕은 장 랑베르 탈리앵(Jean Lambert Tallien)과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Talleyrand)를 존경하던 제르맹 드 스탈(Germaine de Staël)을 만나 관심을 갖게 되었다.[10] 1795년부터 1811년까지 그들의 지적인 협력은 그들을 당대 가장 유명한 지식인 부부 중 하나로 만들었다.[10] 콩스탕은 1808년 샬로테 폰 하르덴베르크(Charlotte von Hardenberg)와 비밀 결혼을 했지만,[34] 스타르 부인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는 못하고 1811년까지 관계가 지속되었다.[34]
다재다능했던 스타르 부인으로부터 콩스탕은 문학적, 사상적,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받아 1796년에는 그녀의 애인이 되었다. 이듬해 그들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다. 이 무렵부터 실제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하여 여러 선거에 출마했으며, 대부분 스타르 부인과 함께 활동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권력을 장악하자, 그는 반나폴레옹주의자로 몰려 당시 소속되어 있던 트리뷔낭 의원직에서 해임되어 정치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스타르 부인도 반나폴레옹적인 저술을 했다는 이유로 1803년 프랑스에서 추방당했다. 콩스탕도 스타르 부인과 함께 프랑스를 탈출하여 독일을 방문, 괴테, 실러, 빌란트, 슐레겔 형제(슐레겔 형제) 등 독일 문학가들과 교류했다.[14] 그러나 이 무렵 스타르 부인과의 관계는 완전히 소원해졌고, 그녀와의 결별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1814년 프랑스 왕정 복고가 일어나고 루이 18세가 왕이 된 파리로 돌아왔다.[15] 국무원 의원으로서 콩스탕은 입헌 군주제를 제안했다.[15] 그는 쥘리엣 레카미에(레카미에 부인)와 친구가 되었지만, 딸 알베르틴이 빅토르 드 브로이와 결혼했을 때 도박 빚을 갚으라고 요구한 드 스탈 부인과는 불화를 겪었다.[15] 워털루 전투(1815년 6월 18일) 이후, 콩스탕은 아내와 함께 런던으로 이주했다.[15] 1816년 루이 18세에게 「변명서」를 쓰고 용서받아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34] 1817년, 드 스탈 부인이 사망한 해에[15] 그는 파리로 돌아와 복고 시대 정부의 하원인 대의원 의회에 선출되었다.[15] 가장 웅변적인 연설가 중 한 명인 그는 처음에는 ''독립파''로 알려졌고 나중에는 "자유주의자"로 알려진 의회 블록의 지도자가 되었다.[15] 1818년에는 그동안의 정치적 저술을 모은 「헌정 정치 강의」를 출판했다.[34] 그는 프랑스 샤를 10세 시대 복고 동안 반대파가 되었고 1815년부터 1830년 사이에 활동했다.[15] 이후 1830년까지 집필 활동, 강연, 정치 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며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노예 매매 반대 운동 등을 펼쳐 민중으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34]
1830년 12월 8일 파리에서 사망했으며,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다.[18][34] 그의 장례식은 열렬한 지지를 보내던 파리 시민들에 의해 매우 성대하게 치러졌다.[34]
2. 1. 초기 생애
뱅자맹 콩스탕은 1767년 스위스 로잔에서 프랑스계 개신교(위그노) 가문에서 태어났다.[32] 그의 아버지 쥘 콩스탕 드 레베크는 네덜란드 공화국군의 고위 장교였고, 어머니 앙리에트-폴린 드 샹디유-빌라르는 그가 태어난 직후 사망했다.[33] 그는 조부모와 가정교사에 의해 교육받았으며, 아버지의 군무로 인해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 각지를 전전했다.콩스탕은 1782년 에를랑겐 대학교에, 1783년 에든버러 대학교에 들어갔다.[7][8] 에든버러 대학교에서는 앤드루 던컨의 집에 머물렀고 제임스 맥킨토시, 맬컴 레잉과 친구가 되었다.[7][8] 1785년(18세)에는 파리에서 문학가, 철학자들과 교류하였고, 이 때 파리와 영국, 스위스, 네덜란드 등을 오갔다. 그는 이자벨 드 샤리에르(Isabelle de Charrière)를 알게 되었는데, 그녀는 15년간의 서신 왕래를 통해 그의 삼촌 다비드-루이 콩스탕 드 레벡을 매우 잘 알고 있었으며, 콩스탕에게 어머니 같은 멘토 역할을 했다.[9]
2. 2. 결혼과 이혼
1788년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에서 빌헬미나 폰 크람(Wilhelmina von Cramm)과 결혼했으나, 1793년 결혼 생활이 순탄치 않아 이혼했다.[34] 같은 해에 후에 아내가 될 샬로테 폰 할덴베르크를 만났다.[34] 1794년 9월, 콩스탕은 장 랑베르 탈리앵(Jean Lambert Tallien)과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Talleyrand)를 존경하던 제르맹 드 스탈(Germaine de Staël)을 만나 관심을 갖게 되었다.[10] 1795년부터 1811년까지 그들의 지적인 협력은 그들을 당대 가장 유명한 지식인 부부 중 하나로 만들었다.[10] 콩스탕은 1808년 샬로테 폰 하르덴베르크(Charlotte von Hardenberg)와 비밀 결혼을 했지만,[34] 스타르 부인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는 못하고 1811년까지 관계가 지속되었다.[34]2. 3. 정치 활동과 망명
스위스 로잔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였으며, 어머니는 콩스탕이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였다.[33] 교육은 주로 그의 조부모와 아버지가 고용한 가정 교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아버지의 군무로 인해 네덜란드나 영국 등의 유럽 각지를 전전하였다. 1782년에 에를랑겐 대학에, 1783년에 에딘버러 대학에 들어간다.프랑스 혁명의 테러 시대(1793~1794) 이후, 콩스탕은 양원제와 영국 의회와 같은 의회를 지지하는 변호사가 되었다. 프랑스 혁명에서 이러한 정치 사상은 제3년 헌법, 500인 위원회 및 원로원을 낳았다. 18 브르메르 이후, 콩스탕은 압베 시예스의 주장에 따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트리뷔낭에 임명되었지만, 나폴레옹의 부분적인 심각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꺼렸다.[11] 결국 1802년, 초대 집정 나폴레옹은 그의 연설 내용과 스타르 부인(스타르 부인)과의 긴밀한 관계 때문에 콩스탕의 의혹을 확인하고 그를 물러나도록 강요했다.[11]
다재다능했던 스타르 부인으로부터 콩스탕은 문학적, 사상적,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받아 1796년에는 그녀의 애인이 되었다. 이듬해 그들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다. 이 무렵부터 실제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하여 여러 선거에 출마했으며, 대부분 스타르 부인과 함께 활동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권력을 장악하자, 그는 반나폴레옹주의자로 몰려 당시 소속되어 있던 의회 의원직에서 해임되어 정치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스타르 부인도 반나폴레옹적인 저술을 했다는 이유로 1803년 프랑스에서 추방당했다. 콩스탕도 스타르 부인과 함께 프랑스를 탈출하여 독일을 방문, 괴테, 실러, 빌란트, 슐레겔 형제(슐레겔 형제) 등 독일 문학가들과 교류했다.[14] 그러나 이 무렵 스타르 부인과의 관계는 완전히 소원해졌고, 그녀와의 결별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1814년 프랑스 왕정 복고가 일어나고 루이 18세가 왕이 된 파리로 돌아왔다. 국무원 의원으로서 콩스탕은 입헌 군주제를 제안했다. 그는 마담 레카미에와 친구가 되었지만, 딸 알베르틴이 빅토르 드 브로이와 결혼했을 때 도박 빚을 갚으라고 요구한 제르맹 드 스탈과는 불화를 겪었다. 나폴레옹의 백일 천하 동안, 더 자유주의적인 나폴레옹은 콩스탕을 뱅데로 도망치게 했지만, 튀르리로 여러 번 초대되어 1815년 헌장을 위한 변화를 설정하도록 요청받았을 때 돌아왔다.
워털루 전투(1815년 6월 18일) 이후, 콩스탕은 아내와 함께 런던으로 이주했다. 1817년, 드 스탈 부인이 사망한 해에 그는 파리로 돌아와 복고 시대 정부의 하원인 대의원 의회에 선출되었다. 가장 웅변적인 연설가 중 한 명인 그는 처음에는 ''독립파''로 알려졌고 나중에는 "자유주의자"로 알려진 의회 블록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프랑스 샤를 10세 시대 복고 동안 반대파가 되었고 1815년부터 1830년 사이에 활동했다.[15]
2. 4. 왕정복고 이후
1814년 프랑스 왕정 복고가 일어나고 루이 18세가 왕이 된 파리로 돌아왔다.[15] 국무원 의원으로서 콩스탕은 입헌 군주제를 제안했다.[15] 그는 마담 레카미에와 친구가 되었지만, 딸 알베르틴이 빅토르 드 브로이와 결혼했을 때 도박 빚을 갚으라고 요구한 드 스탈 부인과는 불화를 겪었다.[15] 워털루 전투(1815년 6월 18일) 이후, 콩스탕은 아내와 함께 런던으로 이주했다.[15] 1816년 루이 18세에게 「변명서」를 쓰고 용서받아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34] 1817년, 드 스탈 부인이 사망한 해에[15] 그는 파리로 돌아와 복고 시대 정부의 하원인 대의원 의회에 선출되었다.[15] 가장 웅변적인 연설가 중 한 명인 그는 처음에는 ''독립파''로 알려졌고 나중에는 "자유주의자"로 알려진 의회 블록의 지도자가 되었다.[15] 1818년에는 그동안의 정치적 저술을 모은 「헌정 정치 강의」를 출판했다.[34] 그는 프랑스 샤를 10세 시대 복고 동안 반대파가 되었고 1815년부터 1830년 사이에 활동했다.[15] 이후 1830년까지 집필 활동, 강연, 정치 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며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노예 매매 반대 운동 등을 펼쳐 민중으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34] 프리메이슨[17]인 그는 1830년 루이 필립 1세로부터 빚을 갚는 데 도움이 되는 많은 돈을 받았고, 국무원에 임명되었다. 콩스탕은 나중에 빅토르 드 브로이(1785~1870)와 결혼한 알베르틴 드 스탈-홀슈타인(1797~1838)의 아버지였다고 한다.[18] 콩스탕은 1830년 12월 8일 파리에서 사망하여 페르 라셰즈 묘지에 매장되었다.[18][34]2. 5. 사망
1830년 12월 8일 파리에서 사망했으며,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다.[18][34] 그의 장례식은 열렬한 지지를 보내던 파리 시민들에 의해 매우 성대하게 치러졌다.[34] 프리메이슨[17]인 그는 1830년 루이 필립 1세로부터 빚을 갚는 데 도움이 되는 많은 돈을 받았고, 국무원에 임명되었다. 콩스탕은 나중에 빅토르 드 브로이(1785~1870)와 결혼한 알베르틴 드 스탈-홀슈타인(1797~1838)의 아버지였다고 한다.[18]3. 정치 철학
이자벨 드 샤리에르는 콩스탕과 광범위한 서신을 주고받은 네덜란드-스위스 지식인이다.
뱅자맹 콩스탕은 "고대인의 자유와 현대인의 자유"를 구분했다.[19] 고대인의 자유는 시민들이 공공 집회에서의 토론과 투표를 통해 정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권리를 부여하는 참여적인 공화주의적 자유였다.[19] 이러한 참여를 위해서는 시민권은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힘든 도덕적 의무였다. 고대의 자유는 비교적 작고 동질적인 남성 사회로 제한되었다.[19]
반면 현대인의 자유는 시민적 자유, 법치주의, 그리고 과도한 국가 간섭으로부터의 자유를 기반으로 했다.[19] 현대 국가의 규모가 커지고,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거의 모든 사람이 일을 통해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상업 사회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직접 참여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콩스탕은 이러한 상황에서 유권자들은 대표자를 선출하고, 대표자들은 의회에서 국민을 대신하여 정치에 참여함으로서 시민들은 매일의 정치적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19]
뱅자맹 콩스탕은 프랑스 혁명의 여러 측면과 사회·정치적 격변의 실패를 비판했다. 그는 프랑스인들이 고대 공화국의 자유를 현대 국가에 적용하려 했던 방식을 지적하면서, 자유가 개인의 사생활과 국가의 간섭 사이의 경계를 긋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였다.[20] 그는 국가를 재생시키려는 고귀한 정신은 칭찬했지만, 2천 년 동안 사람들의 관습과 필요에 변화가 없었다고 믿는 것은 순진한 것이라고 말했다. 고대 인구는 현대 국가의 규모에 비하면 훨씬 작았으며, 인구가 많은 경우, 국가의 형태나 유형에 관계없이 인간이 정부에서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콩스탕은 고대 국가의 시민들은 공적인 영역에서 더 많은 만족을 얻고 사생활에서는 덜 만족했던 반면, 현대인들은 사생활을 더 중시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콩스탕은 전제정치에 대한 반복적인 비난을 프랑스 정치 철학자 장 자크 루소와 마블리 신부에 대한 비판에 스며들게 했다.[21] 콩스탕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미친 이러한 작가들은 권위를 자유와 혼동하고 국가의 활동을 확장하는 모든 수단을 승인했다. 소위 개혁가들은 앙시앵 레짐의 공적 권력 모델을 사용하여 공화국의 이름으로 가장 절대적인 전제정치를 조직했다. 그는 전제정치에서 유래한 자유의 모순과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공허한 본성을 언급하며 전제정치를 끊임없이 비난했다.
콩스탕은 테러 시대의 해로운 본성을 설명할 수 없는 망상으로 지적했다. 프랑수아 푸레의 말을 빌리자면, 콩스탕의 "전체 정치 사상"은 테러를 정당화하는 방법이라는 이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22] 콩스탕은 혁명가들이 정치적 영역에 재앙적인 과잉 투자를 했다는 것을 이해했다. 생퀼로트와 같은 프랑스 혁명가들은 거리의 주요 세력이었다. 그들은 공개적인 끊임없는 경계를 촉구했다. 콩스탕은 가장 막연한 삶, 가장 조용한 삶, 가장 알려지지 않은 이름조차도 테러 시대에는 보호를 받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만연한 폭도 심리는 많은 올바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억제하고 나폴레옹과 같은 전제군주를 등장시키는 데 기여했다.
콩스탕은 현대 세계에서는 상업이 전쟁보다 우월하다고 믿었다. 그는 나폴레옹의 호전성을 비자유적이며 더 이상 현대 상업 사회 조직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비판했다. 고대 자유는 전쟁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던 반면, 현대 자유의 원칙에 따라 조직된 국가는 다른 모든 평화로운 국가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콩스탕은 왕권이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과도한 힘을 억제하고 균형을 이루는 중립적인 권력으로 기능해야 한다는 새로운 입헌군주제 이론을 제시했다.[24] 이는 18세기 영국 법학자 윌리엄 블랙스톤의 견해와는 달리, 왕을 행정부 수반으로 여기지 않고 중립적인 존재로 보았다.
콩스탕의 구상에서 행정권은 왕이 임명하지만 궁극적으로 의회에 책임을 지는 장관 평의회(내각)에 위임된다. 왕은 "통치하지 않고 다스린다"는 원칙에 따라, 장관이 아닌 책임 있는 행위자가 된다. 왕은 사법 임명권, 의회 해산 및 새로운 선거 소집, 귀족 임명, 장관 해임 등 많은 권한을 가지지만, 행정부의 책임은 장관들에게 있기 때문에 직접 통치하거나 정책을 수립하거나 행정을 지휘할 수는 없었다.[24] 이러한 이론은 브라질(1824년)과 포르투갈(1826년)에서 문자 그대로 적용되었으며, 왕/황제는 행정권 외에도 명시적으로 "조정권"을 부여받았다.[24]
그는 권력 분립을 옹호했지만, 몽테스키외와 달리 네 가지 권력을 제시했다.[24] 군주의 중립적 권력,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가 그것이다. 조정권은 정부의 일부가 아닌 중립적인 권력으로서 군주가 일종의 판사 역할을 한다. 행정권은 군주가 임명한 장관들에게 위임되며, 이들은 집합적으로 정부 수반이 된다. 대표권은 여론 대표권(선출된 기구)과 전통 대표권(세습 귀족원)으로 나뉜다.[24]
콩스탕은 또한 "새로운 유형의 연방주의"에 관심을 가졌는데, 선출된 지방 의회에 권한을 이양하여 프랑스 정부를 분권화하려 했다.[24] 이 제안은 1831년에 선출된 지방 의회가 만들어지면서 결실을 맺었다.[24]
콩스탕은 제국주의와 정복에 반대했으며, 서인도 제도 등지에서의 프랑스 식민 정책을 인종차별적이고 불의하며 인간 평등의 기본 원칙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25] 그는 유색인종 식민지 주민들에게 시민권과 정치적 권리의 확대를 지지했다.[25] 그는 아이티 혁명을 지지했으며, 아이티인들이 세운 제도는 유럽인이 아닌 사람들도 유럽인의 제도와 동등한 제도를 세울 수 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25] 그는 그리스의 독립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옹호하는 확고한 지지자였다.[25]
3. 1. 고대인의 자유와 현대인의 자유
뱅자맹 콩스탕은 "고대인의 자유와 현대인의 자유"를 구분했다.[19] 고대인의 자유는 시민들이 공공 집회에서의 토론과 투표를 통해 정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권리를 부여하는 참여적인 공화주의적 자유였다.[19] 이러한 참여를 위해서는 시민권은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힘든 도덕적 의무였다. 고대의 자유는 비교적 작고 동질적인 남성 사회로 제한되었다.[19]반면 현대인의 자유는 시민적 자유, 법치주의, 그리고 과도한 국가 간섭으로부터의 자유를 기반으로 했다.[19] 현대 국가의 규모가 커지고,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거의 모든 사람이 일을 통해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상업 사회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직접 참여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콩스탕은 이러한 상황에서 유권자들은 대표자를 선출하고, 대표자들은 의회에서 국민을 대신하여 정치에 참여함으로서 시민들은 매일의 정치적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19]
3. 2. 프랑스 혁명 비판
뱅자맹 콩스탕은 프랑스 혁명의 여러 측면과 사회·정치적 격변의 실패를 비판했다. 그는 프랑스인들이 고대 공화국의 자유를 현대 국가에 적용하려 했던 방식을 지적하면서, 자유가 개인의 사생활과 국가의 간섭 사이의 경계를 긋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였다.[20] 그는 국가를 재생시키려는 고귀한 정신은 칭찬했지만, 2천 년 동안 사람들의 관습과 필요에 변화가 없었다고 믿는 것은 순진한 것이라고 말했다. 고대 인구는 현대 국가의 규모에 비하면 훨씬 작았으며, 인구가 많은 경우, 국가의 형태나 유형에 관계없이 인간이 정부에서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콩스탕은 고대 국가의 시민들은 공적인 영역에서 더 많은 만족을 얻고 사생활에서는 덜 만족했던 반면, 현대인들은 사생활을 더 중시한다는 점을 강조했다.콩스탕은 전제정치에 대한 반복적인 비난을 프랑스 정치 철학자 장 자크 루소와 마블리 신부에 대한 비판에 스며들게 했다.[21] 콩스탕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미친 이러한 작가들은 권위를 자유와 혼동하고 국가의 활동을 확장하는 모든 수단을 승인했다. 소위 개혁가들은 앙시앵 레짐의 공적 권력 모델을 사용하여 공화국의 이름으로 가장 절대적인 전제정치를 조직했다. 그는 전제정치에서 유래한 자유의 모순과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공허한 본성을 언급하며 전제정치를 끊임없이 비난했다.
콩스탕은 테러 시대의 해로운 본성을 설명할 수 없는 망상으로 지적했다. 프랑수아 푸레의 말을 빌리자면, 콩스탕의 "전체 정치 사상"은 테러를 정당화하는 방법이라는 이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22] 콩스탕은 혁명가들이 정치적 영역에 재앙적인 과잉 투자를 했다는 것을 이해했다. 생퀼로트와 같은 프랑스 혁명가들은 거리의 주요 세력이었다. 그들은 공개적인 끊임없는 경계를 촉구했다. 콩스탕은 가장 막연한 삶, 가장 조용한 삶, 가장 알려지지 않은 이름조차도 테러 시대에는 보호를 받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만연한 폭도 심리는 많은 올바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억제하고 나폴레옹과 같은 전제군주를 등장시키는 데 기여했다.
3. 3. 상업과 전쟁
콩스탕은 현대 세계에서는 상업이 전쟁보다 우월하다고 믿었다. 그는 나폴레옹의 호전성을 비자유적이며 더 이상 현대 상업 사회 조직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비판했다. 고대 자유는 전쟁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던 반면, 현대 자유의 원칙에 따라 조직된 국가는 다른 모든 평화로운 국가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경향이 있었다.3. 4. 입헌군주제 옹호
콩스탕은 왕권이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과도한 힘을 억제하고 균형을 이루는 중립적인 권력으로 기능해야 한다는 새로운 입헌군주제 이론을 제시했다.[24] 이는 18세기 영국 법학자 윌리엄 블랙스톤의 견해와는 달리, 왕을 행정부 수반으로 여기지 않고 중립적인 존재로 보았다.콩스탕의 구상에서 행정권은 왕이 임명하지만 궁극적으로 의회에 책임을 지는 장관 평의회(내각)에 위임된다. 왕은 "통치하지 않고 다스린다"는 원칙에 따라, 장관이 아닌 책임 있는 행위자가 된다. 왕은 사법 임명권, 의회 해산 및 새로운 선거 소집, 귀족 임명, 장관 해임 등 많은 권한을 가지지만, 행정부의 책임은 장관들에게 있기 때문에 직접 통치하거나 정책을 수립하거나 행정을 지휘할 수는 없었다.[24] 이러한 이론은 브라질(1824년)과 포르투갈(1826년)에서 문자 그대로 적용되었으며, 왕/황제는 행정권 외에도 명시적으로 "조정권"을 부여받았다.[24]
그는 권력 분립을 옹호했지만, 몽테스키외와 달리 네 가지 권력을 제시했다.[24] 군주의 중립적 권력,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가 그것이다. 조정권은 정부의 일부가 아닌 중립적인 권력으로서 군주가 일종의 판사 역할을 한다. 행정권은 군주가 임명한 장관들에게 위임되며, 이들은 집합적으로 정부 수반이 된다. 대표권은 여론 대표권(선출된 기구)과 전통 대표권(세습 귀족원)으로 나뉜다.[24]
콩스탕은 또한 "새로운 유형의 연방주의"에 관심을 가졌는데, 선출된 지방 의회에 권한을 이양하여 프랑스 정부를 분권화하려 했다.[24] 이 제안은 1831년에 선출된 지방 의회가 만들어지면서 결실을 맺었다.[24]
3. 5. 제국주의와 정복 반대
콩스탕은 제국주의와 정복에 반대했으며, 서인도 제도 등지에서의 프랑스 식민 정책을 인종차별적이고 불의하며 인간 평등의 기본 원칙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25] 그는 유색인종 식민지 주민들에게 시민권과 정치적 권리의 확대를 지지했다.[25] 그는 아이티 혁명을 지지했으며, 아이티인들이 세운 제도는 유럽인이 아닌 사람들도 유럽인의 제도와 동등한 제도를 세울 수 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25] 그는 그리스의 독립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옹호하는 확고한 지지자였다.[25]4. 종교관
콩스탕은 40년 동안 종교와 종교적 감정에 대해 연구했다.[26] 종교는 인간 본성에 내재된 사회 현상으로, 어떤 형태로든 항상 완전성을 추구한다고 보았다. 종교적 감정은 적응하고 진화해야 하며, 경직되면 분열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26]
콩스탕은 정치 권력이 시민들의 종교적 신념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주장했다.[26] 각 개인이 어디에서 위안, 도덕적 나침반 또는 신앙을 찾을지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며, 외부 권력은 누군가의 신념이 아닌 이익에 대해서만 행동할 수 있다고 보았다.[26] 그는 또한 공리적인 것으로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종교를 비난했다.[26]
콩스탕은 인간의 진보에 따라 다신교가 쇠퇴하고 유일신교가 발전한다고 생각했다.[27] 신에 대한 믿음 자체가 진화해 왔으며, 기독교, 특히 프로테스탄티즘이 가장 관용적인 형태이며 지적, 도덕적, 영적 진화의 지표라고 주장했다.[27]
5. 소설
콩스탕은 생전에 단 한 권의 소설인 『아돌프(Adolphe, 1816)』만을 출판했다.[15] 이 소설은 결단력 없는 젊은 남자가 나이 많은 애인과 파멸적인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로, 심리주의 소설의 선구로 평가받는다.[15] 감상주의 전통에 따른 1인칭 소설인 『아돌프』는 젊은 남자가 불확실한 덕망의 여성 엘레노르와 사랑에 빠지고 다시 사랑에서 멀어지는 과정에서의 생각을 탐구한다. 콩스탕은 이 소설을 두 가지 사랑에 대한 자전적인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독자들이 연속적인 열정에 반대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수정했다.[15] 완성된 소설에 묘사된 연애는 콩스탕과 안나 린드시의 관계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여겨진다.[15] 이 책은 샤토브리앙의 『르네』나 스탈 부인의 『코린느』와 비교되어 왔다.[15]
1807년 집필되어 1907년 사후 출판된 자전적 소설인 『붉은 수첩(Le Cahier rouge)』과, 1809년경 집필되어 1951년 사후 출판된 자전적 소설 『세실』(Cécile)이 있다.[31] 젊은 시절 콩스탕은 그의 삼촌 다비드-루이 콩스탕 드 레베크의 문학적 친구인 이자벨 드 샤리에와 친분을 맺었다. 그녀는 네덜란드의 여류 작가였으며, 콩스탕은 그녀와 함께 『아르실르 자, 소피 뒤르페 그리고 다른 이들의 편지』(Les Lettres d'Arsillé fils, Sophie Durfé et autres)라는 제목의 서간체 소설을 공동 집필했다.[28]
6. 기타 저서
뱅자맹 콩스탕은 다양한 주제에 걸쳐 폭넓은 저술 활동을 펼쳤다. 1796년에는 『프랑스 현 정부의 힘과 그에 동참해야 할 필요성에 관하여』를 출판하여 당시 프랑스 정부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이듬해인 1797년에는 『정치적 반응들에 관하여』와 『테러의 효과들에 관하여』를 통해 정치적 격변기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1806년에는 『정치 원리』를 출간했으며, 1795년에서 1810년 사이에 집필한 것으로 추정되는 『광대한 국가에서 공화국 헌법의 가능성에 관한 저작의 단편들』은 1991년에 출판되었다. 1814년에는 『유럽 문명과 관련된 정복과 탈취의 정신에 관하여』, 『헌법, 권력 분배 및 입헌 군주제에서의 보장에 관한 성찰』을 출간했다.
1815년에는 『모든 대표 정부에 적용 가능한 정치 원리들, 특히 프랑스의 현행 헌법에 관하여』를 발표했고, 1816년에는 『프랑스에서 당파를 통합할 수 있는 정치 이론에 관하여』를 저술했다. 1818년에는 『산업의 자유에 관하여』와 『1818년 선거에 관하여』를 발표했다.
1818년부터 1820년까지는 『헌법 정치 강의』를 집필했고, 같은 기간 『백일천하에 관한 회상』을 저술했다. 1822년에는 『필랑게리의 저서에 대한 논평』을 발표했으며, 1824년부터 1834년까지는 『종교에 관하여, 그 기원, 형태, 발전으로 고찰함』을 집필했다.
1825년에는 『그리스인들을 위한 기독교 국가들에 대한 호소』를 발표했고, 1829년에는 『문학 및 정치 잡집』을 출간했다. 1833년에는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와의 관계에서 고찰된 로마 다신교에 관하여』를 발표하는 등 다양한 분야의 저서를 남겼다.
7. 콩스탕 사상의 현대적 의의
뱅자맹 콩스탕의 자유주의 사상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중요한 기반이 된다.[29] 개인의 자유와 권리, 제한된 정부, 법치주의, 권력 분립 등은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로 평가받는다. 콩스탕이 제시한 '고대인의 자유'와 '현대인의 자유' 구분은 현대 사회의 정치 참여 방식과 시민의 역할에 대한 논의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그의 사상은 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의 민주화 운동과 자유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콩스탕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비판했는데, 이는 오늘날 국제 관계와 인권 문제에 대한 논의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콩스탕은 개인의 자유를 옹호했지만, 이기심과 자기 이익은 진정한 개인의 자유의 정의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감정적 진실성과 동정심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러한 그의 도덕적, 종교적 사상은 장자크 루소의 도덕적 저술과 임마누엘 칸트와 같은 독일 사상가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30]
8. 한국과의 관계
참조
[1]
서적
Germaine de Staël and Benjamin Constant
Yale University Press
2008
[2]
서적
Classical Liberalism and the Austrian School
Ludwig von Mises Institute
2012
[3]
서적
L'Europe de Coppet – Essai sur l'Europe de demain
LEP Éditions Loisirs et Pėdagogie
2010
[4]
웹사이트
Benjamin Constant: French Liberal Extraordinaire
https://mises.org/li[...]
[5]
논문
A Virtue for Courageous Minds: Moderation in French Political Thought, 1748–1830
2012
[6]
서적
Liberalism: The Life of an Idea
2018
[7]
웹사이트
Benjamin Constant: philosophe, historien, romancier, homme d'état
https://books.google[...]
Ardent Media
1987-11-26
[8]
웹사이트
The Cambridge Companion to Constant
http://assets.cambri[...]
Assets.cambridge.org
2013-09-17
[9]
웹사이트
Cahier Rouge, p. 122
http://commons.wikim[...]
Commons.wikimedia.org
2013-09-17
[10]
일반
Albertine, baroness Staël von Holstein
[11]
서적
Les « Principes de politique » de Benjamin Constant
Librairie Droz
1980
[12]
서적
Benjamin Constant
https://books.google[...]
Ardent Media
1987
[13]
웹사이트
Un journaliste contre-révolutionnaire, Jean-Gabriel Peltier (1760–1825) – Etudes Révolutionnaires
http://etudes-revolu[...]
Etudes-revolutionnaires.org
2013-09-17
[14]
서적
Madame De Stael and the Grand-Duchess Louise
https://archive.org/[...]
1862
[15]
서적
Manuel d'histoire de la Littérature Française
Hachette
1953
[16]
서적
Benjamin Constant: A Biography
Routledge
2002
[17]
웹사이트
Benjamin Constant e la dicotomia tra la libertá degli antichi e la libertá dei moderni. Il filosofo fondatore del liberalismo fu un faro per il massone Bruno Segre
https://www.grandeor[...]
Grand Orient of Italy
2024-02-07
[18]
일반
[19]
웹사이트
Constant, Benjamin, 1988, 'The Liberty of the Ancients Compared with that of the Moderns' (1819), in The Political Writings of Benjamin Constant, ed. Biancamaria Fontana, Cambridge, pp. 309–328
http://www.uark.edu/[...]
Uark.edu
2012-08-05
[20]
일반
[21]
학술지
Constant, Sismondi et la Pologne
https://www.slatkine[...]
2021
[22]
일반
[23]
웹사이트
The Act Additional 1815
https://www.napoleon[...]
[24]
학술지
A democracia coroada. Teoria politica de Imperio do Brasil.
1968-05
[25]
서적
A Turn to Empire: The Rise of Imperial Liberalism in Britain and France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5
[26]
일반
[27]
일반
[28]
논문
Isabelle de Charrière et Benjamin Constant. À propos d'une découverte récente
Voltaire Foundation
1982
[29]
서적
Benjamin Constant, Madame de Staël et le Groupe de Coppet: Actes du Deuxième Congrès de Lausanne à l'occasion du 150e anniversaire de la mort de Benjamin Constant Et Du Troisième Colloque de Coppet, 15–19 juilliet 1980
Voltaire Foundation, Institut Benjamin Constant
1982
[30]
서적
Classical Utilitarianism from Hume to Mill
Routledge
2005
[31]
웹사이트
Benjamin Constant inédit
https://www.lemonde.[...]
2020-02-17
[32]
웹사이트
コンスタン
https://kotobank.jp/[...]
2020-07-02
[33]
웹사이트
Encyclopédie Larousse en ligne - Benjamin Henri Constant de Rebecque dit Benjamin Constant
https://www.larousse[...]
Éditions Larousse
2020-07-02
[34]
웹사이트
CONSTANT Benjamin
https://pere-lachais[...]
2020-07-0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