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18세기 문학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18세기 유럽 문학은 소설 장르의 발달과 계몽주의 및 낭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이 시기에는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초기 소설들이 등장했으며, 서간체 소설, 감상 소설, 고딕 소설 등 다양한 하위 장르가 나타났다. 계몽주의 시대에는 사회 비판과 개인의 감정을 탐구하는 작품들이, 낭만주의 시기에는 열정과 신비, 이국적인 소재를 다루는 작품들이 등장했다. 프랑스, 영국, 독일 등 각 지역에서 고전주의, 계몽주의, 낭만주의가 혼재된 다양한 문학적 흐름이 나타났으며, 번역을 통해 다양한 언어권의 작품들이 소개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8세기 문학 - 질풍노도
    《질풍노도》는 18세기 후반 독일에서 일어난 문학 운동으로, 자연적 개성을 존중하고 감정적 극단과 주관성을 강조하며,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프리드리히 실러 등의 작가들이 반귀족적 경향의 작품을 발표했다.
  • 18세기 문학 - 낭만주의
    낭만주의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중반 유럽을 중심으로 계몽주의와 신고전주의에 반발하여 나타난 예술 운동으로, 감정, 상상력, 개인주의, 자연 숭배, 과거에 대한 향수를 강조하며 정치, 사회 변화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18세기 문학
18세기 문학
18세기 문학
18세기 문학 시대
시기1701년 - 1800년
국가별 특징
영국18세기 영국 문학
오거스탄 문학
미국18세기 미국 문학
프랑스18세기 프랑스 문학
시대별 특징
연대기적 시대계몽주의 시대
낭만주의 시대
오거스탄 시대
세기별17세기 문학
19세기 문학

2. 유럽 문학의 흐름

18세기 유럽 문학은 계몽주의 시대에 시작하여 점차 낭만주의로 나아갔다. 17세기에 완성된 고전주의 문학 전통은 18세기에 계승되었으나, 17세기와는 다른 점이 많았고, 이전 세기의 수준을 뛰어넘는 작품도 나오지 않아 '의고전주의(擬古典主義)'라고 불린다.

1715년 루이 14세가 죽은 후,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대두하고 국제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지배 계급에 대한 비판도 점차 대담해졌다. 과학의 발전은 이성주의와 진보 사상을 촉진했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회의(懷疑)를 알고, 뉴턴의 과학과 존 로크의 경험주의를 배운 작가들은 '이성(理性)'과 '진보'를 모토로 문학에서 절대왕정과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유물론이나 무신론으로까지 나아갔다. 이른바 계몽 사상과 계몽 문학이 개화(開化)한 것이다.

드니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편집한 《백과전서》는 이러한 계몽적 동향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들의 노력은 프랑스 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1]

한편, 18세기에는 인간의 정열과 감수성을 존중하는 문학도 나왔다. 프레보는 18세기 초부터 정열적인 소설을 썼으며, 드니 디드로는 감수성을 예찬했고, 장 자크 루소의 연애소설은 독자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았다. 이성주의에 만족하지 못한 독자들은 영국이나 독일 등 다른 나라의 낭만적인 문학 작품을 통해 새로운 감성을 접하기 시작했다. 1750년대에는 낭만주의적 경향이 나타나서 1780년대에 이르면 그것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전반적으로 18세기는 17세기 후반에 발달한 고전주의 문학을 계승, 발전시킨 시대라 할 수 있다.

장르별로 보면 서정시는 매우 부진하였다. 앙드레 셰니에는 유일한 예외지만, 그의 작품도 19세기가 되어서야 인정을 받았다. 고전주의의 영향을 덜 받은 소설은 발달하였는데 특히 풍자소설은 우수한 것이 있다. 피에르 쇼데를로 드 라클로나 마르키 드 사드 등의 소설도 지금에 이르러서는 어떤 의미에서 주목되고 있다. 극에서는 고전극에 대한 드니 디드로의 시민극 제창이 탁견이었으나 실작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피에르 드 보마르셰가 프랑스 혁명 직전에 독특한 작풍으로 인기를 모았다.

2. 1. 계몽주의 문학

18세기는 계몽주의 시대로, 이성합리성을 강조하며 사회 비판, 풍자, 과학적 탐구를 중시하는 문학 작품들이 나타났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발전하여 영국, 독일 등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7세기에 완성된 고전주의 문학은 18세기에 계승되었으나, 18세기 고전주의는 17세기와 다르고 이전 세기 수준을 능가하는 작품이 없어 의고전주의(擬古典主義)라 불린다. 한편, 고전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문학도 나타났다.

17세기 말 ‘신구 논쟁’에서 보듯, 과학의 진보는 이성주의와 진보 사상을 촉진했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회의(懷疑)를 알고, 뉴턴의 과학과 존 로크의 경험주의를 배운 작가들은 ‘이성’과 ‘진보’를 모토로 절대왕정과 가톨릭 교회를 비판했고, 일부는 유물론이나 무신론으로 나아갔다. 계몽사상과 계몽문학이 개화(開化)한 것이다.

드니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편집한 《백과전서》는 이러한 계몽적 동향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이들의 노력은 프랑스 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1]

1761년 장 자크 루소의 《줄리, 또는 신 엘로이즈》, 1762년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이 출판되었다.

1778년 볼테르와 장 자크 루소, 1784년 드니 디드로가 사망하며 프랑스 철학은 계몽주의 자유 사상가들을 잃었다.

칸트는 1784년 논문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계몽이란 인간이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년이란 남의 지도 없이 지성을 발휘할 능력이 없는 상태이며, 미성년 상태가 자기 책임이라는 것은 지성 결핍이 아니라 지성을 발휘할 결의와 용기가 없음을 뜻한다. ‘힘써 현명하여라!’, ‘네 자신의 지성을 발휘할 용기를 가져라!’가 계몽의 슬로건이다.”

2. 1. 1. 프랑스 계몽주의 문학

17세기에 완성된 고전주의 문학 전통은 18세기에도 이어졌다. 마리보의 여러 작품과 몽테스키외, 볼테르의 간결한 문체, 그리고 볼테르의 비극 작품 등은 고전주의의 영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18세기 고전주의는 17세기와는 다른 점이 많았고, 이전 세기의 수준을 뛰어넘는 작품도 나오지 않아 '의고전주의(擬古典主義)'라고 불린다.

한편, 18세기에는 고전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문학도 등장했다. 1715년 루이 14세가 사망한 후,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대두하고 국제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지배 계급에 대한 비판이 점차 대담해졌다. 특히 과학의 발전은 이성주의와 진보 사상을 촉진했는데, 이러한 징조는 이미 17세기 말 '신구 논쟁'에서도 나타났다. 베르사유 궁전을 중심으로 번성하며 질서, 균형, 절제를 중시했던 고전주의 문학은 시대의 요구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회의(懷疑)를 알고, 뉴턴의 과학과 존 로크의 경험주의를 배운 작가들은 '이성(理性)'과 '진보'를 모토로 문학에서 절대왕정과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유물론이나 무신론으로까지 나아갔다. 이른바 계몽(啓蒙)사상과 계몽문학이 개화(開化)한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18세기 후반에 더욱 철저해졌다. 이들은 '철학자'라고 불렸지만, 형이상학적 사색에 몰두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치, 경제, 종교, 과학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가진 행동적인 문학자를 가리켰다. 드니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편집한 《백과전서》는 이러한 계몽적 동향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들의 노력은 직접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프랑스 혁명을 통한 구(舊)제도 타파의 원동력이 되었다.[1]

볼테르1752년 풍자 단편 소설 《미크로메가스》를 출판했는데, 이 작품은 우주 여행자들이 지구를 방문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후 과학 소설로 알려지게 될 여러 요소들을 처음으로 담은 작품 중 하나이다. 1759년에는 《캉디드》를 출판하여 낙관론을 비판했다.

장 자크 루소는 1761년 《줄리, 또는 신 엘로이즈》, 1762년 《에밀》을 출판하여 계몽주의 사상을 널리 알렸다.

1778년에는 볼테르와 장 자크 루소가 사망했고, 1784년에는 드니 디드로가 사망하면서 프랑스 철학은 계몽주의를 이끈 주요 사상가들을 잃었다. 그러나 루소의 사상은 낭만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1. 2. 영국 계몽주의 문학

18세기는 17세기 후반에 발달한 고전주의 문학을 계승, 발전시킨 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알렉산더 포프, 조지프 애디슨(1672-1719), 조너선 스위프트 등과 같이 인생 비판과 사회 풍자를 다룬 문학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이성, 양식(良識), 진리, 현실성, 합리주의가 존중되었고, 서민 계몽과 사회 비평은 문인들의 주요 임무였다. 인간성은 시대와 환경을 초월하여 불변한다는 신념 아래, 개별성보다는 보편성을 구현하는 문학이 더 높이 평가되었다.[5]

존 로크(1632-1704)는 개인의 생명, 자유, 재산에 대한 자유권을 보장하기 위해 사법, 행정, 입법의 3권 분립을 주장했다. 그의 정치사상은 왕권당과 민권당에 의한 정당 정치 확립, 중산 계급 발흥, 저널리즘 발달과 맞물려 정치와 문학을 밀접하게 연결시켰다.[1]

1703년 최초의 일간 신문이 탄생한 이후, 다양한 정기 간행물이 등장했다. 특히 1711년 애디슨과 리처드 스틸(1672-1729)이 창간한 <스펙테이터>는 건전한 유머와 우아한 필치로 구시대의 방종한 풍습을 바로잡고, 종교와 정치적 관용을 역설하며, 여성 교양 향상을 통해 편견과 미신을 배척하고자 했다. 이는 오랫동안 동종 신문의 모범이 되었다.

중산 계급의 부상은 독자층 확대로 이어져 다니엘 디포, 새뮤얼 리처드슨, 헨리 필딩, 로렌스 스턴 등의 소설가들을 배출했다. 이들은 가공적이고 낭만적인 내용 대신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찾고 성격 묘사를 중시하는 사실적인 근대 소설을 선보였다. 이들 소설 중 일부는 유럽 대륙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

18세기 후반 문단의 중심이었던 새뮤얼 존슨 박사는 그리스도교적 모랄리스트로서 고전주의적 문학관을 견지했다. 그는 새롭게 등장하던 낭만주의 문학에 대해서는 이해와 공감이 부족했지만, 풍부한 학식,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 건전한 지혜를 보여주었다.

2. 1. 3. 독일 계몽주의 문학

18세기 유럽계몽주의 시대로, 독일 계몽주의는 30년 전쟁의 영향으로 선진국보다 늦게 발전했지만,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과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제 계몽주의를 통해 성장했다.

칸트는 1784년 논문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에서 계몽을 "인간이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정의하며, 자신의 지성을 활용하여 외부 진리를 극복하는 적극적인 정신 운동이라고 설명했다.

볼프의 제자 곳셰트는 독일 계몽주의 문학의 대표 주자로, 독일어 문법 정립과 사전 편찬에 기여하고 독일 연극계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프랑스 고전주의를 모방하여 합리주의에 치우친 문학관으로 비판받았다.

이에 스위스의 보트머와 브라이팅거는 문학의 목적을 도덕 교화와 오락에 두고, 바로크적 난해함을 피하며 명확한 표현을 추구했다. 또한 문학에서 비합리적 요소를 인정하고 정서와 상상력에서 비롯된 '공상'의 권리를 주장하여 곳셰트에 반박하며, 영국 문학을 독일에 소개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당시 곳셰트, 보트머, 브라이팅거 외에도 슈나벨, 하라, 브로케스 등은 계몽적, 교훈적 시를 썼다. 반면, 하게도른, 게레르트, 빌란트 등은 현세의 삶을 긍정하고 기쁨과 향락을 노래한 로코코 문학의 대표 시인으로 활동했다.

2. 2. 낭만주의 문학

18세기에는 계몽주의 사상이 발전하면서 이성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는 이러한 이성주의에 대한 반발로 감성과 개인의 경험, 자연과의 교감을 중시하는 낭만주의 문학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드니 디드로는 감수성을 예찬했으며, 장 자크 루소의 연애소설은 독자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았다.[1] 1761년 출판된 장 자크 루소의 ''줄리, 또는 신 엘로이즈''와 1762년에 출판된 ''에밀''은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프레보는 18세기 초부터 정열적인 소설을 썼다.

이성에 만족하지 못한 독자들은 영국이나 독일 등 다른 나라의 낭만적인 문학 작품을 통해 새로운 감성을 접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18세기 말 낭만주의의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774년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고뇌''를 통해 예술철학에서 낭만주의 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2. 2. 1. 낭만주의의 태동

18세기 말, 영국독일을 중심으로 낭만주의 문학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1750년대부터 낭만주의적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1780년대에 이르면 이러한 경향이 문학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18세기 영국에서는 이성, 양식, 진리, 현실성, 합리주의를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서민 계몽과 사회 비평을 중시하는 문학이 주를 이루었다. 존 로크의 정치사상은 3권 분립을 주장하며 정당 정치 확립, 중산 계급 발흥, 저널리즘 발달에 영향을 주었고, 이는 문학과 정치를 밀착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703년 최초의 일간 신문이 탄생한 후, 다양한 정기 간행물이 등장했다. 특히 1711년 조지프 애디슨리처드 스틸이 창간한 <스펙테이터>는 건전한 유머와 우아한 필치로 사회 풍습을 비판하고 종교와 정치적 관용을 역설하며 여성 교양 향상을 주장했다. 이러한 계몽주의적 분위기는 중산층 독자층을 확대시켰고, 대니얼 디포, 새뮤얼 리처드슨, 헨리 필딩, 로렌스 스턴과 같은 소설가들이 등장하여 일상생활을 소재로 한 사실적인 근대 소설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18세기 후반, 새뮤얼 존슨은 그리스도교적 모랄리스트로서 고전주의 문학관을 옹호했지만, 새로운 낭만주의 문학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다. 그러나 그의 풍부한 학식과 인간에 대한 통찰력은 문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연극계에서도 새로운 관객층이 등장하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존 게이의 풍자 희극 외에도 권선징악적인 멜로드라마가 인기를 끌었으며, 올리버 골드스미스, 리처드 브린슬리 셰리든의 희극과 조지 릴로의 가족 비극이 주목받았다. 1731년 조지 릴로의 희곡 《런던 상인》은 드루리 레인 로열 극장에서 성공을 거두며, 멜로드라마 장르의 시초가 되었다. 1738년 새뮤얼 존슨은 유베날리스의 《유베날리스의 세 번째 풍자》를 모방한 시 《런던》을 출판하여 고전 작가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자 했다.

3. 지역별 문학

18세기 유럽 각 지역에서는 다양한 문학적 특징이 나타났다. 에스파냐에서는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신고전주의가 유행했으며, 레안드로 페르난데스 데 모라틴, 라몬 데 라 크루스, 호세 카달소 등의 작가들이 활동했다. 러시아에서는 표트르 1세의 서구화 정책에 따라 문학의 세속화가 가속화되었고, 칸테미르를 비롯한 여러 작가들이 프랑스 문학의 영향을 받아 고전주의 문학을 발전시켰다. 18세기 말에는 카람진과 라디시체프로 대표되는 주정주의 작가들이 등장하여 소설 부문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1]

3. 1. 남유럽 문학

1681년 칼데론의 죽음과 함께 에스파냐 문학의 ‘황금세기’는 막을 내렸다. 18세기 초 에스파냐에는 부르봉가 출신의 국왕이 들어섰고, 에스파냐는 정치·문화적으로 프랑스에 완전히 종속되었다.[1]

문예사조의 주류였던 ‘신(新)고전주의’도 프랑스에서 유입되었다. 주목할 만한 작가로는 희곡 〈아가씨가 승낙할 때〉를 쓴 레안드로 페르난데스 데 모라틴, 짧은 소극(笑劇)으로 실생활을 그린 라몬 데 라 크루스, 산문 〈모로코 통신〉을 쓴 호세 카달소 등이 있다. 이 밖에 우화시(寓話詩)를 쓴 사마니에고, 이리아르테 등도 있었다.[1]

3. 2. 러시아 문학

17세기와 18세기 전환기에 표트르 대제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 적극적으로 서구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새로운 시대', 즉 러시아식 근대가 시작되었다.[1]

사회 전반이 급속도로 서구화되면서 문학의 세속화도 빨라졌다. 교회와 관련 없는 잡지나 문학 작품이 처음으로 인쇄되어 많은 독자를 확보했다. 문학과 사회생활의 관계가 밀접해져 문학은 사회의 변화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했다.[1]

군사 및 행정 분야에서 서구 제도의 도입은 표트르 대제 통치 기간에 거의 완료되었지만, 문학 분야의 서구화는 이보다 다소 늦게 진행되었다. 예를 들어, 표트르 대제 시대를 반영하는 Повесть о Василии Кориотском|바실리 코리오츠키의 이야기ru 등은 여전히 이전 시대의 이야기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표트르 대제와 동시대 인물로는 노브고로드의 대주교인 프로코포비치가 르네상스 시대의 인물처럼 박학다식한 것으로 알려졌을 뿐이다.[1]

프랑스 문학을 소개하고 자신의 풍자시를 통해 러시아 문학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인물은 깊은 교양을 소유한 칸테미르(1708-1744)였다. 그 후 트레자코프스키, 로모노소프, 수마로코프가 등장하여 프랑스 문학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 18세기 중엽에는 고전주의가 문학의 모든 장르를 지배하는 경향이 나타났다.[1]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화려한 부분 중 하나를 장식하는 러시아 근대 문학은 18세기에 그 기반이 확립되었고, 시 분야에서도 혁신이 일어나 새로운 시 작법이 성립되었으며, 연극과 저널리즘이 그 뒤를 따랐다.[1]

산문, 즉 소설 부문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은 18세기 말에 등장하는 주정주의 작가들이다. 이성만능과 규범 엄수를 대신하여 감정의 우위를 주장하는 주정주의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카람진과 라디시체프가 있다.[1]

4. 18세기 문학의 번역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에서는 외국어 작품의 번역이 더욱 보편화되었다. 특히 프랑스어에서 영어로, 또는 그 반대로 번역된 작품이 흔했으며,[2] 아랍어에서 그리스어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주요 세계 언어로 쓰인 작품도 마찬가지로 널리 퍼졌다. 1708년, 사이먼 옥클리는 이븐 투파일의 ''하이 이븐 야크단''을 아랍어에서 영어로 처음 직접 번역했으며, 마이클 워들은 현존하는 에우리피데스의 모든 저작을 영어로 번역한 최초의 인물로, 그의 작품은 1782년에 4권으로 출판되었다.

18세기의 번역은 일반적으로 자유롭고 느슨했는데, 번역가들이 의도한 독자에게 더 어필하기 위해 텍스트를 변경하고 자신의 창작물을 추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존 록먼은 프랑스어 번역을 원본 텍스트에 큰 변화를 주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버전"이라고 칭했다. 불분명한 표기는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고, 복잡한 번역 고리를 초래했다. 어떤 경우에는 소설 작품이 프랑스어에서 영어로 번역된 후, 다시 영어에서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는데, 두 번째 번역가는 자신이 번역하는 작품이 원본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2]

주목할 만한 18세기의 아시아 출신 번역가로는 1774년 네덜란드 의학 서적 ''카이타이 신쇼''를 일본어로 번역하여 일본에서 번역된 최초의 서양 작품 중 하나가 되도록 한 스기타 겐파쿠가 있다.

1704년부터 1717년까지, 앙투안 갈랑은 아라비아 민담을 바탕으로 한 ''천일야화''(영어로는 ''아라비안 나이트''로도 알려짐)를 출판했다.[6] 그의 판본은 12권으로 출판되었으며, 이후 유럽 문학과 이슬람 세계에 대한 태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갈랑의 ''야화'' 번역본은 유럽 전역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으며, 이후 갈랑의 출판업자는 갈랑의 동의 없이 그의 이름을 사용하여 ''야화''의 후속 버전을 썼다.

5. 한국 문학과의 비교

18세기 한국 문학은 실학 사상의 영향을 받아 현실 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작품들이 등장했다.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과 같은 실학파 문인들은 백성들의 삶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며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판소리탈춤 같은 서민 문학도 발전했다.

같은 시기 유럽에서도 다양한 문학 작품들이 등장했다. 윌리엄 카우퍼의 ''더 태스크''(1785), 로버트 번스의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쓴 시집''(1786)은 민족성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보마르셰의 ''피가로의 결혼''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에 의해 오페라로 각색되었다. 올라다 에퀴아노의 ''올라다 에퀴아노의 흥미로운 생애 이야기''(1789)는 노예 서사 문학의 중요한 작품이다.

이처럼 18세기 한국과 유럽 문학은 사회 변화와 민족성에 대한 관심을 반영했지만, 각기 다른 문화적 배경 속에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한국 문학은 실학을 바탕으로 현실 비판 의식을 강조하고, 서민 문학 발달을 통해 문학 향유층을 확대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가진다.

5. 1. 조선 후기 문학의 특징

실학 사상의 등장과 사회 변화는 조선 후기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연암 박지원, 다산 정약용 등 실학파 문인들은 새로운 문학 작품과 사상을 선보였다. 또한, 판소리, 탈춤 등 서민 문학이 발달하여 그 의미를 더했다.

5. 2. 서구 문물 수용과 문학의 변화

18세기 후반, 서구에서는 다양한 문학 작품이 출간되고 새로운 사조가 등장했다. 1785년 윌리엄 카우퍼는 무운시집 ''더 태스크''를 출판했고, 1786년 로버트 번스는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쓴 시집''을 출판하여 민족성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1] 같은 해 보마르셰의 희곡 ''피가로의 결혼''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오페라로 각색되기도 했다.[1] 1789년에는 노예 서사인 ''올라다 에퀴아노의 흥미로운 생애 이야기''가 출판되었다.[1]

1794년 앤 래드클리프는 고딕 소설 ''유돌포의 수수께끼''를 발표했고,[1] 1795년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윌리엄 워즈워스와 만나 1798년 공동 시집 ''서정 민요집''을 출판하여 낭만주의 시의 중심 텍스트가 되었다.[1] 1796년 매튜 루이스는 반가톨릭 고딕 소설 ''수도사''를 출판했고, 샬럿 스미스는 소설 ''마치몬트''를, 메리 헤이스는 ''엠마 코트니의 회고록''을 출판했다.[1]

참조

[1] 웹사이트 A Vindication of Natural Society https://oll.libertyf[...] Online Library of Liberty 1756-01-01
[2] 서적 The Spread of NovelsTranslation and Prose Fiction in the Eighteenth Century Princeton
[3] 웹사이트 Full text http://www.gutenberg[...] 2012-03-17
[4] 웹사이트 Swift, the Battle of the Books http://andromeda.rut[...] 2006-01-02
[5] 문서 Satire#Classifications of satire
[6] 서적 Selected Tales Penguin Classics
[7] PhD Imagining the Morlacchi in Fortis and Goldoni https://era.library.[...] University of Alberta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