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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트라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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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르트라십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노르웨이 상선단을 관리하기 위해 설립된 조직이다. 1940년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 이후, 노르웨이 정부, 영국 정부, 독일 간의 상선 통제권 경쟁 속에서, 런던에 사무실을 두고 설립되었다. 노르트라십은 연합군의 전쟁 노력에 기여하고 망명 정부의 재정을 지원했으며, 전쟁 후 노르웨이 해운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쟁 기간 중 선원 안전 문제, 영국과의 톤수 협상, 내부 갈등 등 다양한 과제에 직면했지만, 1945년 종전 후 조직을 청산했다. 노르트라십은 냉전 시기, 9.11 테러 이후에도 유사한 역할을 수행하는 조직으로 재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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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트라십
개요
명칭노르웨이 해운 무역 사절단
로마자 표기Noreuwei Haeun Muyeok Sajeoldan
영어 명칭Norwegian Shipping and Trade Mission
약칭Nortraship
설립
설립일1940년
해산
해산일1945년
역할
주요 역할제2차 세계 대전 중 노르웨이 상선대 관리
소재지
본부런던
뉴욕 사무소뉴욕
중요성
의의"역사상 가장 큰 해운 회사"로 불림
노르웨이 망명 정부의 주요 자금 조달원
관련 정보
관련 사건제2차 세계 대전
관련 국가노르웨이

2. 전간기의 노르웨이 상선단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노르웨이 상선단은 전쟁으로 인한 손실을 회복하고, 드라이카고 선박과 유조선 분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특히 1930년대는 다른 주요 해운 국가들과는 대조적으로 노르웨이 상선단에게는 뚜렷한 성장기였다. 1938년 말 기준으로 노르웨이는 전 세계 화물 운송량의 약 7%를 담당했으며, 영국,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 4위 규모의 상선단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성장은 주로 신규 선박 건조에 힘입은 결과였고, 이는 노르웨이 선박의 평균 선령을 낮추는 효과를 가져왔다. 새로 건조된 선박의 상당수는 디젤 엔진을 동력으로 사용했는데, 노르웨이 선박의 약 62%가 디젤 엔진을 탑재한 반면, 당시 일본은 약 27%, 영국은 25% 수준에 머물렀다. 노르웨이 상선단에서 유조선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42%에 달했으며, 이는 전 세계 유조선 운송 능력의 18%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노르웨이 선주들은 대공황이라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감수하며 새로운 선박 건조에 적극적으로 투자하여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선박 운영을 지원하는 관련 산업들 역시 이 시기에 함께 성장했다. 대표적인 선급 협회인 DNV를 비롯하여 선박 중개인, 보험 회사, 해운 전문 은행 등이 규모를 키웠다. 노르웨이 정부 또한 관련 규정을 제정하고 개선하며, 기술자와 항해사를 양성하는 교육 기관을 설립하는 등 다방면으로 상선단의 발전을 지원했다.

3.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노르웨이는 공식적으로 중립국이었지만, 1940년 4월 9일 독일의 침공 (베저위붕 작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전쟁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 초기 단계에서 노르웨이는 중립 유지에도 불구하고 선박 58척과 약 400명의 선원을 잃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노르웨이 상선단은 손실을 복구하고 현대화에 힘썼으며, 특히 유조선과 건화물선 분야에서 크게 확장했다. 1930년대는 다른 주요 해운국들과 달리 노르웨이에는 성장의 시기였다. 1938년 말 기준으로 노르웨이는 전 세계 선박 톤수의 약 7%를 보유하여 영국,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 4위의 해운 강국이었다. 또한, 신규 선박 건조에 집중하여 선박의 평균 연령을 낮추었고, 보유 선박의 약 62%가 당시로서는 현대적인 디젤 엔진을 사용했다(일본 약 27%, 영국 25%와 비교). 특히, 노르웨이 선단의 약 42%는 현대식 유조선으로 구성되어 전 세계 유조선 톤수의 약 18%를 차지했다. 이는 대공황 시기에도 신규 선박 발주에 적극적이었던 노르웨이 선주들의 과감한 투자 덕분이었다. 선급 협회인 Det Norske Veritas를 비롯한 선박 중개, 보험, 금융 및 정부의 규제와 교육 지원 역시 이러한 성장에 기여했다.

독일의 침공 이전, 이미 노르트라십 운영의 기반이 되는 중요한 조치들이 마련되고 있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영국과의 '톤수 협정'(Scheme Agreementeng)이었다. 이 협정은 공식적으로는 영국 정부와 노르웨이 선주 협회 사이에 체결되었는데, 이는 노르웨이 정부가 직접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국가의 중립성을 유지하려는 의도였다. 협정에 따라 노르웨이는 보유 유조선의 3분의 2를 포함한 상당수 선박을 영국에 대여하고, 그 대가로 영국으로부터 필수적인 물자를 공급받기로 했다. 이를 통해 영국은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노르웨이의 현대적인 유조선단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노르웨이 상선단은 연합국에게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당시 영국 상선대는 상대적으로 위축되고 있었고, 미국은 중립법으로 인해 자국 선박을 전쟁 지역에 투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노르웨이와 비슷한 규모의 상선대를 보유했던 네덜란드는 독일의 보복을 우려하여 영국과의 유사한 협정 체결을 거부했다.

노르웨이 정부는 전쟁 발발에 대비해 자국 선박들과의 비상 연락 체계를 구축해 두었다. 또한, 독일 잠수함의 어뢰 공격 위험을 줄이기 위해 많은 노르웨이 선박들이 영국의 호송선단 보호 하에 항해했다. 이러한 조치는 선박과 선원의 안전을 높이는 효과가 있었지만, 중립국의 지위를 유지해야 하는 노르웨이가 사실상 영국의 편에 서는 것처럼 보이게 하여 중립성 논란을 야기했다.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와 유사한 상황이었다.

4. 노르웨이 침공 이후

베저위붕 작전이 시작되면서 노르웨이 상선단의 보존과 통제권 확보가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노르웨이 정부, 영국 정부, 그리고 나치 독일은 이 상선단의 통제권을 놓고 경쟁했다. 당시 노르웨이 상선단의 약 15%는 독일 지배 하의 해역에 있어 연합군 측의 손실로 여겨졌으며, 나머지 85%의 선박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영국은 덴마크 상선단의 경우처럼 노르웨이 상선단을 압류하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노르웨이가 전쟁에 참여할 의사를 보였고 런던 주재 노르웨이 대사의 항의가 있어 실행하지 않았다. 반면, 나치 독일과 그 협력자 비드쿤 크비슬링은 무선 통신을 통해 노르웨이 선박들에게 독일 통제 하의 해역으로 돌아올 것을 명령했지만, 노르웨이 선장들은 이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독일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1940년 4월 12일, 영국 해상운송부(Ministry of Shipping)는 노르웨이 측과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노르웨이 상선이 연합군 지배 하의 항구로 운항하는 것을 조건으로 보험 문제를 임시로 해결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영국 해군성은 이 내용을 모든 노르웨이 상선에 무선으로 전송했다.[2]

이후 상선단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로 부상했다. 영국 정부는 노르웨이 상선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를 원했지만, 런던에 있던 노르웨이 해운 전문가들은 노르웨이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는 독립적인 조직 설립을 선호했다. 최종 결정은 노르웨이 정부의 몫이었으나, 당시 정부는 독일군의 진격을 피해 이동 중이었기 때문에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다.

결국 런던에서 열린 회의를 통해 독립적인 노르웨이 조직을 설립하기로 결정되었고, 이는 1940년 4월 노르트라십(Nortraship)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노르트라십 설립 직후, 노르웨이 정부는 상선단을 런던과 뉴욕에서 공동 관리한다는 초기 계획을 밝혔으나, 영국의 반대에 부딪혔다. 영국의 압력 하에 노르웨이 정부는 1940년 4월 22일, 노르웨이 상선단 전체를 정부가 징발하는 법령을 채택했다. 이 법령에 따라 상선단의 관리는 런던에 본부를 두어야 했으며, 노르웨이 해상운송부 장관 외이빈드 로렌첸(Øivind Lorentzen)이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이 조치로 인해 1,000척 이상의 선박과 약 30,000명의 선원을 관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해운 회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4. 1. 노르트라십 설립과 초기 운영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이 시작되면서 노르웨이 상선단의 보존과 통제권 문제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노르웨이 정부, 영국 정부, 그리고 나치 독일은 상선단의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했다. 전체 상선단의 약 15%는 독일 지배 하의 해역에 있어 연합군 측의 손실로 간주되었고, 나머지 약 85%의 선박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전개되었다.

영국은 덴마크의 경우처럼 노르웨이 상선단을 압류하는 방안을 고려했으나, 노르웨이가 전쟁에 참여할 의사를 보였고 런던 주재 노르웨이 대사의 항의로 인해 실행되지 않았다. 한편, 나치 독일과 노르웨이 협력자 비드쿤 크비슬링은 무선 통신을 통해 노르웨이 선박들에게 독일 통제 하의 해역으로 귀환할 것을 명령했으나, 노르웨이 선장들은 이를 무시했다.

독일의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 1940년 4월 12일, 영국 해상운송부(Ministry of Shipping)는 노르웨이 측과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은 노르웨이 상선이 연합군 지배 하의 항구로 운항하는 것을 조건으로 보험 문제를 임시로 해결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영국 해군성은 이 내용을 모든 노르웨이 상선에 무선으로 전송했다.[2] 이후 상선단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노르웨이 대사는 영국 정부와 런던 주재 노르웨이 운송사 양측의 요구를 조율해야 했다. 영국 정부는 노르웨이 상선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를 원했지만, 노르웨이 운송사 측은 독립적인 노르웨이 조직 설립을 강력히 주장했다. 최종 결정 권한은 노르웨이 정부에 있었으나, 당시 정부는 독일군의 진격을 피해 이동 중이었기 때문에 원활한 소통이 어려웠다.

1940년 4월 16일, 런던의 노르웨이 상공회의소에서 노르웨이 선사 관계자들이 모여 상선단 운영을 위한 조직 구성 계획을 논의했다. 이 회의에는 노르웨이 대사 에리크 콜반(Erik Colban)과 선주 잉골프 올센(Ingolf Hysing Olsen) 등이 참석했다. 초기에는 영국 해상운송부와의 협력 방안이 제시되었으나, 회의 참석자들은 노르웨이의 이익과 선단 수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독립적인 조직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이 의견이 받아들여지면서, 1940년 4월 19일 런던 시티의 리든홀 스트리트 144번지에 사무실을 마련하며 노르트라십(Nortraship)이 신속하게 설립되었고, 다음 날인 4월 20일부터 운송 전문가들이 합류하기 시작했다.

캐나다 핼리팩스 소재 대서양 해양 박물관에 있는 노르웨이 해군, 육군, 상선단 기념비


노르트라십 설립 직후, 노르웨이 정부는 상선단을 런던과 뉴욕에서 공동으로 관리한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이는 런던의 노르웨이 대사에게 예상치 못한 소식이었으며, 영국 정부 역시 이 계획에 반대했다. 영국의 압력 하에 노르웨이 정부는 1940년 4월 22일, 롬스달의 스투구플라텐(Stuguflåten)에서 회의를 열고 노르웨이 상선단 전체를 정부가 징발하는 법령을 채택했다. 이 법령에 따라 상선단의 관리는 런던에 본부를 두어야 했으며, 노르웨이 해상운송부 장관 외이빈드 로렌첸(Øivind Lorentzen)이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이 조치로 인해 1,000척 이상의 선박과 약 30,000명의 선원을 관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해운 회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새롭게 설립된 노르트라십은 여러 가지 중요한 과제에 직면했다. 약 1,000척에 달하는 선박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영국 및 당시 중립국이었던 미국과의 협력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시급했다. 또한 자격을 갖춘 전문 인력이 심각하게 부족했으며, 가용 인력 중 상당수는 독립적인 성향이 강해 조직 관리에 어려움이 따랐다. 노르트라십 직원 중 일부가 개인적인 해운 관련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문제 해결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조직의 최고 경영진은 대부분 노르웨이인이었으나, 하위 직급에서는 영국인과 미국인 인력에 상당 부분 의존했다. 다만 회계 부서는 예외적으로 영국의 주요 회계 법인이 직원 채용을 담당했다. 1940년 10월 기준으로 노르트라십 런던 본부에는 230명의 직원이 근무했으며, 이듬해인 1941년 10월에는 직원 수가 350명으로 증가했고 그중 약 3분의 1이 노르웨이인이었다. 같은 시기 뉴욕 지사에는 200명 이상의 직원이 있었으며, 절반 이상이 노르웨이인이었다.

법적인 문제 해결도 중요했다. 특히 점령된 노르웨이에 남아있는 선주 소유의 선박을 노르트라십이 합법적으로 처분할 수 있는지 여부가 핵심 쟁점이었다. 이 문제는 노르웨이 정부가 "노르웨이 선주를 대신하여 활동할 관리인"을 임명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다. 만약 이러한 조치가 없었다면, 노르트라십 소속 선박들이 미국과 같은 중립국 항구에서 압류될 위험이 있었다. 논의 끝에, 당시 트롬쇠에 있던 노르웨이 정부는 1940년 5월 18일 법령을 통해 외이빈드 로렌첸을 공식 관리인으로 임명했다.

초기 영국과의 협정이 임시적이었기 때문에 보험 문제도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선박 운항에는 다양한 종류의 보험이 필요했지만, 기존 보험사들과 Det Norske Veritas(DNV, 노르웨이 선급 협회) 본사가 점령된 노르웨이에 있어 보험 가입이 단절된 상태였다. 1940년 5월 28일, 외이빈드 로렌첸은 영국 해상운송부와 "이해 각서(Memorandum of Understanding)"에 서명하여 향후 3개월간의 보험 문제를 해결했다. 이 각서는 이후 전쟁 기간 동안의 보험 계약의 기초가 되었다. 선급 문제는 노르트라십이 뉴캐슬어폰타인에 있는 DNV 사무소를 통해 전 세계 DNV 지사를 관리하는 방식으로 해결되었다.

프랑스 공방전이 연합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면서 영국은 더 많은 선박 지원을 요구했고, 동시에 선원 임금 통일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노르웨이 선원들의 임금은 영국 선원들보다 훨씬 높았다. 정치적인 고려 끝에 노르트라십은 1940년 6월 20일 영국과 협약을 체결하여 노르웨이 선원의 임금을 삭감하는 대신, 그 차액을 전쟁 후 지급될 기금으로 적립하기로 합의했다. 이 임금 문제는 훗날 전후 노르웨이에서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4. 2. 초기 과제와 법적 문제

1941년 10월: 350명1941년 기준 약 1/3이 노르웨이인뉴욕 사무소 직원 수1941년 10월 기준: 200명 이상절반 이상이 노르웨이인



법적인 문제 해결도 시급했다. 가장 중요한 쟁점은 노르트라십이 나치 독일 점령 하의 노르웨이에 있는 선주 소유의 선박을 합법적으로 처분할 수 있는지 여부였다. 만약 노르트라십이 선박에 대한 법적 권한을 확보하지 못하면, 해당 선박들이 미국과 같은 중립국 항구에서 압류될 위험이 있었다. 이 문제는 노르웨이 망명 정부가 직접 나서 해결했다. 당시 트롬쇠에 있던 노르웨이 정부는 1940년 5월 18일 법령을 통해 외빈 로렌츠를 "노르웨이 선주를 대신하여 활동할 관리인"으로 공식 임명함으로써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보험 문제 역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기존에 노르웨이 선박 보험을 담당하던 회사들이 대부분 점령된 노르웨이에 있었기 때문에 보험 계약 유지가 불가능해졌다. 또한, 선급(선박의 안전 및 기술 표준 인증)을 담당하던 Det Norske Veritas(DNV)의 본사 역시 노르웨이에 있어 업무가 중단된 상태였다. 보험 문제는 1940년 5월 28일, 외빈 로렌츠가 영국 해운부와 "이해 각서"에 서명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이 각서는 초기 3개월간의 보험 문제를 해결했으며, 이후 전쟁 기간 동안의 보험 계약의 기초가 되었다. 선급 문제는 노르트라십이 영국 뉴캐슬어폰타인에 있는 DNV 사무소를 통해 전 세계 DNV 지사를 조정하고 관리하는 방식으로 해결되었다.

5. 런던과 뉴욕 사무소 간 갈등

노르트라십(Nortraship)의 초기 조직 구성이 완료되자, 조직 운영의 사업적 측면이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노르트라십은 노르웨이 망명 정부의 주요 수입원이었으므로, 전쟁 수행에 기여하는 동시에 최대한의 이익을 창출하도록 관리되어야 했다. 영국에 할당된 선박들은 고정된 운임률을 적용받고 보조금을 받았지만, 나머지 선박들, 이른바 "자유 선박"들은 주로 당시 중립국이었던 미국을 위해 시장 가격으로 운항하며 수익을 창출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노르웨이가 독일에 점령당했을 때, 여러 미국 항구에서는 독일 영사들이 노르웨이 선박에 접근하여 노르웨이로 회항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노르웨이 영사관은 최선을 다해 대응했으며, 런던 주재 노르웨이 대사와의 협의를 통해 뉴욕에 '노르웨이 해운 위원회'Norwegian Shipping Committeeeng를 설립했다. 그러나 영국과의 협정에 따라 1940년 6월 5일부터 일부 선원의 임금이 삭감된 반면, "자유 선박"에 승선한 선원들의 임금은 인상되면서 선원 관리 문제가 발생했다. 또한, 나치공산주의 세력의 선동으로 선원들의 사기가 저하되고 탈영이 발생하는 등 어려움이 따랐다.

한편, 프랑스 공방전이 연합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면서 영국은 더 많은 선박 지원을 요구하는 등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노르트라십 내부에서는 주요 활동 무대 중 하나인 뉴욕에 제대로 된 사무소를 두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의견이 커졌다. 노르웨이 대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침공 가능성에 대비한 안전 문제와 많은 노르트라십 선박이 미국 항구에 기항한다는 상업적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1940년 5월 21일, 노르트라십 대표단을 뉴욕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5월 24일 영국 외무부 장관 핼리팩스 경에게 통보되었고, 영국 외무부는 마지못해 이를 수용했다.

1940년 6월 11일 뉴욕에 도착한 대표단은 기존에 설립된 위원회와 협력하려 했으나, 조직 운영 방식과 특히 "자유 선박"의 운송 수입 관리 문제를 놓고 갈등이 불거졌다. 당시까지는 선주나 미국 내 대리인이 수입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뉴욕의 노르웨이 해운 전문가들은 이러한 방식의 유지를 요구하며 반발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노르트라십의 최고 책임자였던 외빈 로렌츠가 직접 문제 해결을 위해 뉴욕으로 향했다. 그는 1940년 7월 5일 뉴욕에 도착하여 임시 위원회와 회의를 가진 후, 7월 15일 위원회를 해산시키고 노르트라십의 공식 뉴욕 사무소를 설립했다. 뉴욕 사무소는 맨해튼 브로드 스트리트 80번지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외빈 로렌츠가 뉴욕에 머무는 동안, 런던에서는 노르웨이 선주 협회의 영국 대표였던 잉골프 휴싱 올센이 임시 책임자를 맡게 되면서 새로운 갈등이 시작되었다. 두 주요 사무소의 책임자인 로렌츠와 올센은 원활하게 협력하지 못했고, 갈등은 점차 심화되었다. 결국 트리그베 리에 공급 및 해운 장관이 이 문제를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다루게 되었다. 1940년 10월 25일, 노르웨이 망명 정부는 런던과 뉴욕 사무소를 "각자 독립적으로 선박을 운영하는 병렬 기업"으로 규정하며 사실상 분리 운영을 결정했다. 이는 관리 선박의 분할로 이어졌다.

1940년 11월 21일 기준 노르트라십 사무소별 관리 선박 수
사무소관리 선박 수 (고래잡이 선박 제외)
런던570척
뉴욕282척



이러한 런던과 뉴욕 사무소 간의 갈등 외에도 노르트라십은 운영 기간 동안 다양한 내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5. 1. 통화 전략과 선주들의 반발

노르트라십은 방대한 선단을 운영하며 상당한 비용이 발생했기 때문에 체계적인 통화 전략 수립이 중요했다. 1940년 8월 1일, 훗날 해운 장관이 되는 아르네 순데는 노르트라십의 통화 전략을 공식화했다. 이 전략의 핵심은 비용 지불은 파운드 스털링으로 하고 미국 달러 사용은 피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당시의 통화 상황과 전쟁 이후 예상되는 경제 환경을 고려한 조치였다.

그러나 노르트라십의 운영 방식, 특히 "자유 선박" 관리 문제를 둘러싸고 일부 선주들의 반발이 나타났다. 1940년 가을, 노르트라십 뉴욕 사무소는 프레드. 올센 & Co. 소유 선박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뉴욕에 거주하던 선주 토마스 올센은 자신이 직접 선박을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노르트라십의 방침에 반기를 들었다. 외빈 로렌츠 노르트라십 대표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올센은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노르웨이 망명 정부에 직접 문제를 제기하기까지 했다. 이에 트리그베 리에 공급 및 해운 장관은 올센의 행동을 "반역에 가까운 행동"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5]

올센 외에도 노르트라십의 정책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선주들이 있었다. 결국 1941년 2월 18일, 노르웨이 국외에 있는 선주들의 이익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미국 노르웨이 선주 회의'American Norwegian Shipowners Conferenceeng가 설립되었다. 이러한 반발의 배경에는 당시 노르웨이 망명 정부가 노동당 소속이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 해운 회사를 국유화할지도 모른다는 일부 선주들의 우려도 작용했다.

선주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노르웨이 정부는 적극적으로 나섰다. 망명 정부 총리는 국유화 가능성을 부인했으며, 1941년 3월 전보를 통해 전쟁이 끝나면 노르트라십이 관리하던 모든 선박을 가능한 한 빨리 원래 소유주에게 반환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르트라십 내부의 갈등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외빈 로렌츠 대표의 아들 페르 A. 로렌츠가 운영하던 노팔 라인Nopal Lineeng이 노르트라십 정책과 상충되는 방식으로 선박을 관리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로렌츠 대표의 입지가 약화되었고, 이는 그의 비판자들에게 지속적인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또한, 독자적인 행보로 유명했던 선주 힐마르 렉스텐 역시 노르트라십의 규정을 어기며 마찰을 빚는 등, 조직 내외의 갈등 요소는 계속해서 존재했다.

6. 선원 문제와 안전

1940년 여름과 가을, 제2차 세계 대전 중 선박 손실이 급증하면서 노르트라십은 심각한 선원 부족 문제에 직면했다. 1940년 4월 9일부터 12월 30일까지 96척의 선박과 수백 명의 선원을 잃었으며, 대부분 북대서양 항로에서 발생한 손실이었다. 이로 인해 많은 노르웨이 선원들이 비교적 안전한 미국에서 육상 근무를 찾거나 덜 위험한 지역을 운항하는 다른 나라 선박으로 옮겨가는 현상이 나타났다.

선원 부족 문제는 노르웨이 망명 정부와 노르트라십에게 큰 부담이었고, 선원 단체들은 임금 인상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1941년 6월 런던에서 임금 협상이 시작되어 같은 해 9월 1일부터 적용되는 새로운 임금 협약이 체결되었으며, 이는 기존보다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영국 정부는 이러한 임금 인상에 비판적이었으나, 노르트라십과 노르웨이 정부는 선원들의 요구를 외면하기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이후 1942년 12월 1일부터는 더 높은 임금을 보장하는 두 번째 협상이 타결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유지되었다.

전시 상황의 특수성은 엄격한 규율의 필요성을 제기했지만, 이 역시 쉽지 않은 문제였다. 노르웨이 망명 정부는 1940년 7월 12일, 18세 이상 모든 노르웨이 시민의 등록 및 지정 업무 종사를 의무화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영국 내에 자체적인 사법 관할권이 없어 법 집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문제는 1941년 5월 22일 영국 정부가 제정한 연합국 (해사 법원) 법 1941을 통해 일부 해소되었다. 이 법은 연합국 정부가 영국 영토 내에 자체 법원을 설립하여 가장 심각한 경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건을 재판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한편, 선원들의 안전 확보 또한 중요한 과제였으며, 전쟁 중 많은 인명과 선박 손실이 발생했다.[2]

6. 1. 선원 안전 조치

선박에 가장 큰 위협은 추축국잠수함이었지만, 기뢰, 수상 습격자, 항공기 폭격 또한 매우 두려운 대상이었다. 이러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주요 조치 중 하나는 20척에서 100척에 이르는 대규모 상선단을 해군 함정이 호위하는 호송선단 시스템이었다.

1940년 초기에는 노르웨이 선박들이 무장하지 않았으나,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른 잠수함이나 저고도 항공기에 대응하기 위한 총기와 같은 방어 수단이 추가되었다. 1945년 봄까지 약 1,700명의 노르웨이 선원이 자국 선박의 포수로 등록되었으며, 이 외에도 약 900명의 영국 해군 포수가 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선박들은 자기 기뢰에 의한 피해를 막기 위해 감자 처리(degaussing)를 받았으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선원들에게는 방수 기능이 있는 생존복이 지급되었다. 보안 유지 역시 중요한 요소였는데, 운항 경로와 목적지에 대한 정보는 엄격한 기밀로 유지되었다. 이는 "말 조심, 배를 침몰시킨다(Loose lips sink ships)"라는 유명한 슬로건으로 강조되었다.

이러한 다양한 안전 조치에도 불구하고 전쟁 중 노르트라십의 손실은 상당했다. 총 30,000명 가량의 노르웨이 선원 중 3,670명이 해상에서의 전투 및 사고로 목숨을 잃었으며, 이들과 함께 승선했던 977명의 외국인 선원도 희생되었다. 또한 총 706척의 선박이 적의 공격 등으로 인해 손실되었다.[2]

7. 영국의 톤수 요구와 미국의 참전

노르웨이 선박 대부분이 연합국을 위해 운항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41년 4월 영국은 더 많은 톤수를 요구했다. 이는 노르웨이와 노르트라십에게 민감한 문제였다. 노르웨이는 영국과 동맹 관계였고 영국에 의존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립국인 미국에서 운항하는 "자유 선박"이 전후 노르웨이 재건에 필요한 미국 달러를 창출하고 있었다. 또한 영국 제도로 향하는 항해는 위험 부담이 컸으며, 노르트라십은 현대적인 노르웨이 유조선이 다른 무역에 더 효율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면에는 영국과 미국이 전쟁을 이용하여 불공정한 경쟁 우위를 확보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노르웨이의 우려도 있었다.

1941년 3월 19일 영국 해운부와의 회의에서 초기 상호 이해가 이루어져, 노르트라십은 "자유 선박" 50만 톤을 영국에 이전하기로 했다. 이 합의는 10월에 공식적으로 서명되었으나, 톤수 이전 작업은 그 전에 시작되었다.

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국 및 중립국의 총 손실(GRT)을 보여주는 표; 북대서양이 분명히 상위에 있다.


런던의 노르트라십(흐싱 올센 휘하)은 영국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던 반면, 뉴욕의 노르트라십(로렌첸 휘하)은 보다 실용적인 입장을 취했다. 대서양 해전에서 연합군의 손실이 급증하자, 영국은 1941년 4월 29일 모든 노르웨이 선박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노르웨이 측에는 예상치 못한 요구였다. 노르트라십의 뉴욕 사무소는 미국 해사 위원회를 통해 미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고, 노르웨이 선박이 미국의 수입 및 수출에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했다.[6]

영국 및 미국 해운 행정부와의 어려운 협상 끝에, 1941년 10월 10일 새로운 톤수 협정이 서명되었다. 이 협정에 따라 영국은 사실상 모든 노르웨이 선박의 4분의 3을 용선하게 되었다. 협상 과정에서 노르트라십은 미국 달러 운송 수입 확보, 연합군 상선대 관리에서 영국과 동등한 지위 확보, 전쟁 후 노르웨이 해운 권리에 대한 보장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통화 문제에서는 노르트라십의 입장이 어느 정도 관철되었으나, 연합군 상선대 관리를 위한 영-노르웨이 해운 위원회가 설립되었음에도 실질적인 동등 지위 확보는 미흡했으며, 전후 해운 정책에 대한 영국의 약속은 모호한 수준에 그쳤다. 1940년 4월 9일부터 1942년 4월 9일까지 2년 동안 노르웨이 유조선은 총 157척이 615차례 항해하여 690만 톤의 석유를 운송했으며, 이는 영국 제도 전체 요구량의 약 3분의 1에 해당했다.

1941년 12월 7일,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면서 노르트라십의 상황은 극적으로 변화했다. 미국이 중립을 유지할 때는 선박 부족과 운임 상승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지만, 미국이 참전한 후 영국 전시 수송부와 미국 전시 해운 행정국이 호그마니 협정을 통해 정책을 조율하면서 노르트라십과 최고 협상가인 에를링 데케 네스는 노르웨이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7. 1. 비밀 기금과 전후 처리

노르웨이가 전쟁에 휘말렸을 때, 노르웨이 선원들은 다른 연합국 선원들보다 임금이 상당히 높았다. 영국 정부는 이것이 다른 연합국 선원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임금 삭감을 요구했다. 1940년 여름, 임금 차액을 특별 기금에 적립하여 전쟁 후 노르웨이 전쟁 선원들을 위해 사용한다는 내용의 협약이 체결되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이 기금은 약 4300만노르웨이 크로네에 달했다.[3]

레이프 베텔센을 대변인으로 하는 소수의 목소리는 정부와 선원 단체가 제안한 대로 이 돈을 어려운 선원과 선원의 미망인에 대한 지원으로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선원들에게 직접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정부가 1954년 2월 노르웨이 대법원에서 승소한 긴 법적 절차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많은 반감이 생겼고, 이 문제는 1972년 노르웨이 의회가 총 1.55억노르웨이 크로네사례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할 때까지 영구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그 후 모든 선원 또는 그들의 생존 친족은 항해했던 달마다 180NOK를 받았다. 이 지연된 사건을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전쟁 참전 용사였던 토레 호르베 해군 소장이었다.

8. 내부 갈등과 전후 노르트라십

노르트라십은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전 세계적으로 수만 명의 인력이 일하는 거대한 조직이었기에, 내부적인 문제들도 발생했다. 주요 갈등 중 하나는 외이빈 로렌첸이 이끄는 뉴욕 지사와 잉골프 후싱 올센이 이끄는 런던 지사 사이의 경쟁이었다. 각 지사는 경험 많은 선주들이 이끌고 있었다. 특히 힐마르 레크스텐은 두 지사 모두에서 활동하며 여러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런던 도착 초기부터 후싱 올센과 마찰을 빚었으며, 노르트라십이 관리해야 할 선박의 보험금을 자신의 계정으로 부당하게 챙기려 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레크스텐은 유능한 해운업자였으나, 여러 지도자와의 갈등 끝에 결국 조직에서 밀려났다. 또한, 1940년 가을부터 노르웨이 배급 및 재건부 장관, 1942년부터 노르웨이 해운부 장관을 역임한 아르네 순데 역시 레크스텐의 지원을 받아 노르트라십 지사 운영에 개입하려 했으나, 외무 장관 트리그베 리나 총리 요한 니가르즈볼에 의해 번번이 저지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노르트라십의 주요 임무는 종료되었지만, 조직의 완전한 청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난 직후, 노르트라십은 연합군의 연합 해사 당국(United Maritime Authority)의 통제 하에 전후 해운 질서 재편 작업을 지원했다. 1945년 9월 30일부로 노르웨이 선박에 대한 징발이 종료되었고, 선박들이 원래 선주들에게 반환되면서 노르트라십은 선박 보상금 지급 및 각종 청구권 문제를 해결하는 등 방대한 청산 작업을 시작했다. 공식적인 노르트라십 조직은 1958년 7월 30일에 해산되었고, 남은 업무는 관련 정부 부처로 이관되어 처리되었다. 최종적인 정산 작업은 1964년에야 마무리되었다.

노르웨이 스타베른에 있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서 전사한 노르웨이 선원을 기리는 기념비


이러한 내부 갈등에도 불구하고 노르트라십의 활동은 전반적으로 성공적이었다. 노르웨이는 전쟁 중에도 자국 상선단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는 연합군의 전쟁 수행 능력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또한 노르트라십은 노르웨이 망명 정부의 중요한 재정적 기반이 되었으며, 전쟁 이후 노르웨이 해운 산업이 빠르게 재건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1964년 트리그베 리가 노르웨이 의회에 제출한 최종 보고서에 따르면, 노르트라십이 전쟁 기간과 전후 복구 과정에서 노르웨이 사회에 기여한 총 재정적 기여는 12.19억노르웨이 크로네에 달했다.

냉전 시기에는 전쟁과 같은 비상사태 발생 시 노르웨이 상선단을 운영할 조직의 명칭으로 '노르트라십'이라는 이름이 다시 사용되었다. 이 비상 조직은 냉전이 끝난 1991년에 해체되었다. 그러나 2001년 9·11 테러 이후 해운 안보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면서, 노르웨이 선주협회는 2002년 1월 1일 비상 대응 위원회를 설립하고 '노르트라십'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이 위원회는 노르웨이 해운 산업 각 분야를 대표하는 6명의 민간 전문가와 국방부 대표 1명, 총 7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어 운영되고 있다.

9. 대중문화

2022년, 군나르 비케네 감독의 노르웨이 영화 ''전쟁 선원''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노르웨이 호송 작전에 참여했던 선원들과 그 가족들이 겪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다루었다.[4][5]

참조

[1] 웹사이트 NRK TV - Vår ære og vår makt: I krig og kjærleik - 10.01.2010 http://tv.nrk.no/ser[...] Tv.nrk.no 2010-01-10
[2] 서적 Berg 1997: 154
[3] 웹사이트 Nortraships hemmelige fond - Norgeshistorie https://www.norgeshi[...] 2022-10-19
[4] 웹사이트 Gunnar Vikene's hit War Sailor selected as Norway's Oscar entry https://nordiskfilmo[...] 2022-12-11
[5] 웹사이트 'War Sailor': a Maltese co-produced epic film that lives up to the title https://timesofmalta[...] 2022-12-11
[6] 웹인용 NRK TV - Vår ære og vår makt: I krig og kjærleik - 10.01.2010 http://tv.nrk.no/ser[...] Tv.nrk.no 2010-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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