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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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정래는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1943년 전라남도 순천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1970년 단편 '누명' 등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주요 작품으로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이 있으며, 한국 사회의 역사와 민족 문제를 다루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작품 활동 외에도 출판, 교육, 사회 활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만해대상 등을 수상했다. 그러나 소설을 역사적 자료로 주장하거나, 일본 유학자를 친일파로 규정하는 등의 발언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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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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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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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조정래 |
한글 | 조정래 |
한자 | 趙廷來 |
로마자 표기 | Jo Jeong-rae |
출생일 | 1943년 8월 17일 |
출생지 | 전라남도 순천시 |
국적 | 대한민국 |
직업 | 소설가, 대학교수 |
언어 | 한국어 |
활동 기간 | 1970년 - |
종교 | 불교 |
배우자 | 김초혜 |
자녀 | 조도현 (아들) |
영향 받은 인물 | 오영수(소설가) |
공식 웹사이트 | 조정래 공식 사이트 |
작품 활동 | |
장르 | 소설 |
주제 | 한국의 역사 |
대표 작품 |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
데뷔 작품 | 「누명」 |
수상 내역 | |
수상 | 2003년 제1회 동리상 2006년 제11회 현대불교문학상 2014년 제1회 심훈문학상 |
기타 정보 | |
학력 | 동국대학교 |
2. 약력
조정래는 1943년 8월 17일 전라남도 승주군(현재 순천시) 쌍암면 선암사에서 태어났다. 순천남국민학교(1949년), 광주서중학교(현 광주제일고등학교)(1956년), 보성고등학교(1959년)를 거쳐 1962년 동국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하여 1966년에 졸업했다.
1966년 군에 입대하여 1969년 제대했으며, 1967년 김초혜와 결혼했다. 1970년 「陋名」, 「선생님 기행한국어」으로 문단에 데뷔하였다. 1972년 중경고등학교 교사를 역임하였으나, 10월 유신 이후 교직을 그만두었다. 1973년 『월간문학』 편집을 맡았고, 1978년 민예사를 설립했다.
1981년 현대문학상, 1982년 대한민국문학상, 1984년 소설문학작품상, 1991년 단재문학상, 1998년 노신문학상을 수상했다. 201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더불어민주당 후보 문재인을 지지했다.[6]
연도 | 내용 |
---|---|
1943 | 전라남도 승주군 쌍암면 선암사(현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에서 출생 |
1947 | 순천읍 행동으로 이사 |
1949 | 순천남국민학교 입학 |
1950 | 충청남도 논산군(현 논산시)으로 이사 |
1953 |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으로 이사 |
1956 | 광주서중학교 입학 |
1959 | 서울특별시로 이사하여 보성고등학교 입학 |
1962 | 동국대학교 국문과 입학 |
1966 | 군 입대 |
1967 | 김초혜와 결혼 |
1969 | 제대 |
1970 | 「陋名」,「선생님 기행한국어」으로 문단 데뷔 |
1971 | 장남 도현 출생 |
1972 | 중경고등학교 교사 역임 |
1973 | 『월간문학』 편집 |
1978 | 민예사 설립 |
1981 | 현대문학상 수상 |
1982 | 대한민국문학상 수상 |
1984 | 소설문학작품상 수상 |
1991 | 단재문학상 수상 |
1998 | 노신문학상 수상 |
2. 1. 출생과 성장
조정래는 1943년 8월 17일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승주군(현 순천시) 쌍암면 선암사에서 태어났다.[2] 아버지 조종현은 한용운이 총재로 있던 승려 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재무위원을 맡았던 승려이자 시조 시인이었다.[5] 일제의 불교황국화 정책에 따라 결혼하여, 조정래는 조종현이 부주지로 있던 선암사에서 태어났다. 4남 4녀 중 넷째로 본관은 함안이다.1945년 광복 후, 조종현은 토지 분배 문제로 주지와 대립하다 여순사건 때 주지의 모함으로 죽을 뻔했다. 이러한 경험은 소설 『태백산맥』에 법일스님이 소작인 편을 들다 좌익으로 몰리는 이야기로 반영되었다.
1949년 순천남국민학교(현 순천남초등학교)에 입학한 해에 논산으로 이사했으나, 이듬해 6.25 전쟁이 일어났다.[13] 1.4 후퇴 때 피난지에서 지주 소작제의 모순을 처음 알게 되었다. 1953년 아버지가 벌교상업고등학교 국어교사가 되면서 삼촌들이 살던 벌교로 이사했다.
어릴 적부터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조정래는 초등학교 시절 여러 대회에서 수상했다.[2]
2. 2. 학창 시절과 문학 입문
조정래는 1943년 전라남도 순천시의 선암사에서 태어났다.[2]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당시 장려되었던 세속적인 불교 승려였고, 어머니는 박성순이었다.[5] 4남 4녀 중 차남이었으며, 유년 시절을 선암사에서 보냈다. 1949년 순천남국민학교에 입학했으나,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피난을 가야 했다. 1952년부터 등교를 재개할 수 있었고, 1956년 광주서중학교(현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959년에는 서울 보성고등학교로 진학했다.[5]1960년 4·19 혁명으로 수업이 중단된 기간 동안 어니스트 헤밍웨이, 알베르 카뮈, 기 드 모파상 등의 문학 작품에 몰두했다. 다른 학교 학생들과 함께 농촌 활동을 병행하는 문예 활동을 하며 시, 소설, 동화 등을 쓰기 시작했다.[5] 1년 뒤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는데, 농촌 사회활동에 뜻이 있어 이과반에 적을 두고 있던 그는 3학년에 이르러 국문과로 진학 목표를 세웠다.[2]
1962년 동국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하여 홍신선, 강희근 등을 만났다. 처음에는 시를 쓰다가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1963년 ‘창작문학회’를 결성했다. 오영수를 초빙하여 강의를 듣게 하거나, ‘소설가를 대학교수로 초빙하라’는 요구를 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오영수와는 사제(師弟) 관계를 맺었다. 또한 이 무렵 김초혜를 만나 연애를 했다.[5] 대학에서 전공과목과 함께 2급 정교사 자격증을 따서 1966년에 졸업하고 군에 입대했으며, 1967년 같은 과 김초혜와 결혼하였다.[2] 1966년 육군에 입대하여 KATUSA(주한미군에 배속된 한국군)에 배속되었다. 1969년 3월 제대했지만 교사직을 구하지 못하고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5]
동구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근무하던 1970년에 《현대문학》 6월호에 '누명'이 첫회 추천되어 등단하였으며, 12월호에 '선생님 기행'이 추천 완료되었다.[2] 오영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단편 「陋名」, 「선생님 기행한국어」이 실리면서 문단에 데뷔했다.[5] 이후 그는 문학에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3]
2. 3. 문단 데뷔와 작가 활동
1970년 《현대문학》 6월호에 '누명'이 첫 회 추천되었고, 12월호에 '선생님 기행'이 추천 완료되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3][5] 1971년에는 《현대문학》에 중편 '20년을 비가 내리는 땅', 《신동아》에 단편 '빙판'을 발표하였으며, 연좌제를 비판한 단편 '어떤 전설'(《현대문학》 1971년), 베트남 전쟁을 비판한 중편 '청산댁'(《현대문학》 1972년) 등을 발표했다.1972년 중경고등학교로 전근하였으나, 정부 비판적인 작품으로 인해 보수주의 성향의 학교 교장과 마찰을 빚었다. 결국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를 위한 악법인 유신 헌법이 만들어져 민주주의가 억압받은 10월 유신 이후 교직을 그만두었다.[5]
1973년 월간문학 편집장이 되었고(~1975년),[5] 1974년 중편 《황토》를 발표하였다. 1976년 '허깨비춤', '방황하는 얼굴', '검은 뿌리', '비틀거리는 혼' 등의 단편과 장편 '대장경'을 민족문학대계의 일환으로 완성했다. 그리고 포켓용 문예 월간지 《소설문예》를 인수, 10월호부터 발간(~1977. 10.)하였는데,[5] 이때 연재를 맡은 집필진 가운데는 친일연구로 유명한 임종국도 있었다.
1977년에는 민예사 대표를 맡았으며,[5] '어떤 솔거의 죽음'을 발표하였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직후 광주를 방문하여 계엄군들의 참혹한 폭행과 살인 현장, 그 이후의 상황들을 직접 보게 된다.[2] 이 경험은 "직접 체험을 소설로 써서는 안 된다"는 작가로서의 원칙을 바꾸게 했고, 훗날 《태백산맥》 집필로 이어지게 되었다.[2]
1983년 6월부터 《현대문학》에 《태백산맥》 연재를 시작하였다. 1985년에는 한국문학의 주간을 맡았으며, 《태백산맥》 연재 집필을 위해 안양의 성 나자로 마을에 매달 10일씩 칩거하였다.[2]
2. 4. 태백산맥 필화 사건
태백산맥|태백산맥중국어은 3부가 나온 1988년 하반기부터 조정래는 새벽마다 걸려오는 공갈협박 전화에 시달렸고(1997년까지 10여 년이나 이어졌다) 4부를 쓰던 1989년부터 모든 수사관이 내사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들려왔으며 출판사 사무실로 경찰이 찾아오기도 했다.[14]1992년 대검찰청은 "소설 태백산맥|태백산맥중국어은 분명 문제가 있지만, 이미 350만 부 이상이 팔린 책을 법으로 문제 삼는 것은 과히 적절하지 않기에 문제 삼지 않는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일반인이 교양으로 읽으면 괜찮지만, 대학생이나 노동자가 읽으면 이적 표현물 탐독죄로 의법 조처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1994년 8개의 반공단체들로부터 조정래는 5백여 개에 달하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당시 사법사상 가장 긴 고발장)당하게 된다.(서울지검1994형제39663)
나아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에 의한 명예훼손 고발까지 당했다. 6월부터 경찰 수사가 시작되고 조정래는 경찰에 불려가 수사를 받았지만, 경찰의 수사 태도에 대한 반발로 경찰 수사를 거부했고,[15] 이 해에 임권택 감독이 영화화한 태백산맥|태백산맥중국어이 발표되었다. 검찰로 넘어간 태백산맥|태백산맥중국어의 이적 혐의에 대한 수사는 1998년에 수사 날짜가 통보되었는데, 당초 반공단체가 제시했던 5백여 개가 넘는 혐의 사실을 120여 개로 간추리고, 그 120여 개의 혐의에 대한 '객관적 자료'를 조정래에게 요구하였으며 한 가지라도 '객관적 자료'를 제시하지 못하면 그것으로 유죄혐의가 될 수 있음을 통보하였다.
이에 조정래는 당시 5월 15일부터 한강을 집필하던 중이었지만 집필을 중단하고 일주일 동안 17권의 책을 찾아 제출하였고 2005년 5월에 태백산맥|태백산맥중국어은 최종적으로 무혐의 처분되었다.
3. 작품 세계
조정래의 대표작은 『태백산맥』(1983~1989), 『아리랑』(1995), 『한강』(2002)이다. 이 세 작품은 한국 현대사를 다룬 대하 역사 3부작으로 불리며, 1983년 시작해 2002년 완결되어 한국에서 1,000만 부 이상 판매되는 기록을 세웠다.[4] 『태백산맥』은 1945년 일본 식민 지배 종식부터 1950년 한국 전쟁 발발까지 5년간을,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1]
조정래는 친북, 반일 성향의 한국 좌파로 평가받는다.[5][7] 그의 작품은 한국인의 역사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태백산맥』은 반미·친북 정서가 유행하던 시기에 "필독서"로 여겨져 700만 부 이상 판매되었고,[5][7] 『아리랑』은 350만 부 이상 판매되며 한국인의 대일관에 영향을 주었다.[7]
2020년, 조정래는 자신의 소설에 나오는 역사적 자료가 객관적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비판받고 있다.[8][5] 그는 "일본 유학을 다녀오면 무조건 친일파가 된다"며 친일파 처벌을 위한 법 제정을 주장했고,[8][5] 진중권은 이를 "시대착오적 민족주의"라고 비판했다.[8]
3. 1. 주제 의식
조정래 작품의 주요 주제는 한국 분단의 사회경제적 원인과 한국 통일에 대한 고찰이다. 이는 「한 그 그늘의 자리」, 「유형의 땅」, 「인간의 계단」, 「박토의 혼」 등 그의 후기 단편 소설에서도 나타난다. 초기 작품인 「청산댁」, 「퐁녀석 교사」, 「비탈진 음지」, 「천동설 시대」, 「이방지대」 등은 전통적인 시골 생활을 재구성하여 삶의 부조리를 풍자하는 경향을 보인다.[1]그의 대표작인 『태백산맥』(1983-1989)과 『아리랑』(1995)은 현대 고전으로 평가받으며, 2002년 발표된 『한강』과 함께 현대 한국사를 다룬 3부작을 이룬다. 이 시리즈는 한국에서 1,000만 부 이상 판매되는 기록적인 성공을 거두었다.[4] 『태백산맥』은 일본 식민 지배 종식부터 한국 전쟁 발발까지 5년간의 이념 갈등을,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1]
조정래는 친북, 반일 성향의 한국 좌파로 평가받는다.[5][7] 『태백산맥』은 반미·친북한 정서 속에서 "필독서"로 여겨져 700만 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5][7] 한국인의 대북관에 영향을 주었다.[5] 『아리랑』 또한 350만 부를 판매하며 한국인의 대일관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7] 이영훈은 『반일종족주의』에서 『아리랑』을 "광기에 찬 증오의 역사소설"이라고 비판했지만,[7] 많은 한국인이 『아리랑』을 "역사"로 인식하고 "민족의 수난"을 생각하며 읽었다.[7]
2020년, 조정래는 자신의 소설 속 역사적 자료가 객관적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비판을 받고 있다.[8][5] 그는 "일본 유학을 다녀오면 무조건 친일파가 된다"며 친일파 처벌을 위한 법 제정을 주장했고,[8][5] 진중권은 이를 "시대착오적 민족주의"라고 비판했다.[8] 조정래는 친일파를 단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5] 이는 광기 어린 사고방식이라는 비판을 받는다.[5]
3. 2. 작품 목록
조정래 작가는 장편, 중편, 단편 소설을 포함한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다.구분 | 출판 연도 | 제목 | 비고 |
---|---|---|---|
단편 | 1970년 | 누명 | |
1972년 | 이런 식이더이다 | ||
1973년 | 거부반응 | ||
타이거 메이저 | |||
1974년 | 빙하기 | ||
동맥 | |||
1978년 | 마술의 손 | ||
중편 | 1972년 | 청산댁 | 청산댁일본어, 梶井陟(카지이 노보루) 번역 (1973) |
1973년 | 비탈진 음지 | ||
1974년 | 황토 | ||
1981년 | 유형의 땅 | ||
1983년 | 박토의 혼 |
장편 소설 목록은 ==== 장편 소설 ==== 하위 섹션을 참조하면 된다. 대표작으로는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이 있으며, 이 세 작품은 한국 현대사를 다룬 대하 역사 3부작으로 불린다.
그의 중·단편 소설들은 초기에는 전통적인 시골 생활의 부조리를 풍자하는 경향을 보였고, 후기에는 한국 분단의 원인과 통일 문제를 다루었다.
3. 2. 1. 장편 소설
조정래의 대표작은 『태백산맥』(1983~1989), 『아리랑』(1995), 『한강』(2002)으로, 이 세 작품은 현대 한국사를 다룬 대하 역사 3부작으로 불린다. 1983년 시작해 2002년 완결된 이 3부작은 한국에서 1,000만 부 이상 판매되는 기록적인 성공을 거두었다.[4] 각 소설은 10권이 넘는 분량으로 현대 한국의 격동적인 역사를 다룬다. 『태백산맥』은 1945년 일본 식민 지배 종식부터 1950년 한국 전쟁 발발까지 5년간을,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1]
3. 2. 2. 중·단편 소설
조정래 작가는 다양한 중·단편 소설을 집필했다. 초기 작품들은 주로 전통적인 시골 생활을 재구성하여 삶의 부조리를 풍자하는 경향을 보였다. 대표적인 초기 단편 소설로는 「청산댁」(1972), 「퐁녀석 교사」(1971), 「비탈진 음지」(1973) 등이 있다.[1]반면, 후기 작품들은 한국 분단의 사회경제적 원인과 한국 통일에 대한 고찰을 주요 주제로 다루었다. 「한 그 그늘의 자리」(1977), 유형의 땅(1981), 「인간의 계단」(1982), 「박토의 혼」(1983) 등이 이에 해당한다.[1]
'''단편'''
- 1970년, 누명
- 1972년, 이런 식이더이다
- 1973년, 거부반응
- 1973년, 타이거 메이저
- 1974년, 빙하기
- 1974년, 동맥
- 1978년, 마술의 손
'''중편'''
- 1972년, 청산댁
- 1973년, 비탈진 음지
- 1974년, 황토
- 1981년, 유형의 땅
- 1983년, 박토의 혼
조정래의 중·단편 소설 중 일부는 외국어로 번역되어 소개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청산댁」은 梶井陟(카지이 노보루)에 의해 일본어로 번역되어 1973년 창토사(創土社)에서 출판되었다.
4. 논란
2020년, 소설 《태백산맥》을 둘러싼 내용이 허위라는 논쟁 속에서 조정래는 자신의 역사적 자료가 객관적이라고 주장했지만, 소설을 역사적 자료라고 주장한 것은 비판받고 있다. 또한 "일본 유학을 다녀오면 무조건 친일파가 된다. 민족반역자가 된다"며, "(그들이) 일본의 죄악에 대해 감싸주고 역사를 왜곡하는 자를 처벌하는 새로운 법을 만들고 있다. 내가 여기서 적극적으로 나서고 싶다. 사회적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8][5]
이에 대해 진중권은 "여기까지 오면 광기다. 시대착오적 민족주의 속에 잠재된 극우적 경향이 무분별하게 발현된 것"이며, "(문재인 대통령의 딸도 일본 국사관대학에서 유학했는데, ‘일본 유학하면 친일파’라면 조정래 선생님이 설치하라는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에 회부되어 민족반역자로 처단될 것이다"라고 비판했다.[8]
조정래는 등단 50주년 기념 기자 간담회에서 “일본에 유학하면 무조건 친일파가 된다”, “민족의 정기를 위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반민특위를 부활시켜야 한다. (한국 내) 약 150만 명에 달하는 친일파를 단죄해야 한다”고 말했다.[5] 조선일보는 대일본제국이 없으니 21세기 대한민국에 친일파는 없다며, “150만 명이라는 숫자도 터무니없지만, 이 사고방식에는 광기마저 느껴진다”라고 비판하고, 조정래의 아버지가 일본의 불교 속세화 정책에 의해 유입된 사상을 믿는 승려였던 것을 언급하며, 일본 유학자를 친일파로 규정한다면, 일본의 조선 통치 덕분에 태어난 당신은 누구인가라고 비판하고 있다.[5]
4. 1. 『태백산맥』 이적성 논란
《태백산맥》은 3부가 나온 1988년 하반기부터 조정래 작가가 공갈협박 전화에 시달렸고, 1989년부터는 수사기관의 내사 소문이 들려왔으며, 출판사에 경찰이 찾아오기도 했다.[14] 1992년 대검찰청은 "소설 《태백산맥》은 분명 문제가 있지만, 이미 350만 부 이상이 팔린 책을 법으로 문제 삼는 것은 과히 적절하지 않기에 문제 삼지 않는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도, "대학생이나 노동자가 읽으면 이적 표현물 탐독죄로 의법 조처한다"는 단서를 달았다.[14]1994년 8개의 반공단체는 조정래 작가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고,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는 명예훼손으로 고발했다. 경찰 수사가 시작되었지만, 조정래 작가는 경찰의 수사 태도에 반발하여 수사를 거부했다.[15] 검찰로 넘어간 《태백산맥》의 이적 혐의에 대한 수사는 1998년에 수사 날짜가 통보되었는데, 반공단체가 제시했던 5백여 개의 혐의 사실 중 120여 개에 대한 '객관적 자료'를 조정래 작가에게 요구했다. 조정래 작가는 당시 집필 중이던 《한강》 집필을 중단하고 일주일 동안 17권의 책을 찾아 제출했고, 2005년 5월에 《태백산맥》은 최종적으로 무혐의 처분되었다.
《태백산맥》은 반미·친북 성향이 유행하던 당시 “필독서”로 여겨져 700만 부가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5][7] 한국인의 대북(對北朝鮮)관에 친북적인 영향을 주었다.[5]
4. 2. 친일파 발언 논란
조정래는 친북 성향뿐 아니라 반일 성향도 강한 한국 좌파로 알려져 있다.[5][7] 그의 작품 『태백산맥』은 반미·친북 정서가 유행하던 시기에 "필독서"로 여겨져 700만 부나 팔렸으며,[5][7] 『아리랑』 역시 350만 부가 팔려 한국인의 대일관에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7] 이영훈은 『반일종족주의』에서 『아리랑』을 "광기에 찬 증오의 역사소설"이라고 비판했지만,[7] 많은 한국인들은 『아리랑』을 통해 "민족의 수난"을 떠올리며 역사를 인식했다. 이러한 독자들은 중년에 이르러 문재인 정권을 지지하게 되었고, 조정래의 영향력은 더욱 커지고 있다.[7]2020년, 『태백산맥』의 내용이 허위라는 논란 속에서 조정래는 자신의 역사적 자료가 객관적이라고 주장했지만, 소설을 역사적 자료로 내세운 점은 비판을 받았다. 그는 "일본 유학을 다녀오면 무조건 친일파가 된다. 민족반역자가 된다"며, 이들을 처벌하기 위한 법 제정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입장을 밝혔다.[8][5] 이에 대해 진중권은 "여기까지 오면 광기다. 시대착오적 민족주의 속에 잠재된 극우적 경향이 무분별하게 발현된 것"이라고 비판하며, 문재인 대통령의 딸도 일본 국사관대학에서 유학했음을 지적했다.[8]
조정래는 등단 50주년 기념 기자 간담회에서 "일본에 유학하면 무조건 친일파가 된다", "민족의 정기를 위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반민특위를 부활시켜야 한다. (한국 내) 약 150만 명에 달하는 친일파를 단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 조선일보는 21세기 대한민국에는 친일파가 존재할 수 없으며, 150만 명이라는 숫자도 터무니없다고 비판했다. 또한, 조정래의 아버지가 일본 불교의 영향을 받은 승려였음을 언급하며, 일본 유학자를 친일파로 규정하는 논리의 모순을 지적했다.[5]
5. 수상 내역
연도 | 수상 내역 | 작품 |
---|---|---|
1981년 | 제27회 현대문학상 | 《유형의 땅》 |
1982년 | 대한민국문학상 | 《인간의 문》 |
1984년 | 소설문학작품상 | 《메아리 메아리》 |
1988년 | 성옥문화상 | 《태백산맥》 |
1989년 | 동국문학상 | 《태백산맥》 |
1991년 | 단재문학상 | 《태백산맥》 |
1998년 | 제1회 노신문학상 | |
2001년 | 광주시문화예술상 | |
2001년 | 제9회 자랑스러운 보성인상 | |
2003년 | 제1회 동리상 | |
2003년 | 제7회 만해대상 | |
2006년 | 제11회 현대불교문학상 소설부문 | |
2014년 | 제1회 심훈문학상 |
6. 기타
1943년 8월 17일 전라남도 승주군(현재 순천시) 쌍암면 선암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종현[5]은 세속적인 불교 승려였고, 어머니는 박성순이었다. 4남 4녀 중 차남으로, 유년 시절을 선암사에서 보냈다.
1947년 선암사를 떠나 순천읍 행동으로 이사했다. 1949년 순천남국민학교에 입학했으나, 1950년 한국 전쟁으로 피난을 갔다. 1952년부터 등교를 재개하여, 1956년 광주서공립중학교(현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하고, 1959년에는 서울 보성고등학교로 진학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수업이 중단된 기간 동안 문학 작품에 몰두하며 습작 활동을 했다.
1962년 동국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하여, 1963년 ‘창작문학회’를 결성하고, 오영수와 사제(師弟) 관계를 맺었다. 1966년 육군에 입대하여 KATUSA(주한미군에 배속된 한국군)에 배속되었다. 입대 중인 1967년 1월 29일 김초혜와 결혼했다. 1969년 제대 후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1970년 오영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단편 「陋名」, 「선생님紀行한국어」이 실리면서 문단에 데뷔했다.[5] 1972년 중경고등학교 교사직을 얻었으나, 1973년 그만두고 『월간문학』의 편집 일을 맡았다. 1976년 『소설문예』 운영에 참여했다. 1978년 ‘민예사’를 설립하여 출판업을 시작했다. 1981년 「유형의 땅한국어」으로 현대문학상을, 1982년 「인간의 문한국어」으로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했다.
201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더불어민주당 후보 문재인을 지지했다.[6]
참조
[1]
웹사이트
Jo Jung-Rae biographical PDF
http://klti.or.kr/ke[...]
[2]
서적
Land of the Banished
Asia Publishers
[3]
웹사이트
Jo Jung-Rae LTI Korea Datasheet
http://klti.or.kr/ke[...]
[4]
서적
Korean Writers: The Novelists
Minumsa Press
[5]
웹사이트
【萬物相】趙廷来氏「日本に留学したら親日派」
https://www.chosunon[...]
2020-10-17
[6]
뉴스
「SC초점」 "이 후보가 대통령 돼야" 대선판에 뛰는 ★들
http://v.entertain.m[...]
2017-05-01
[7]
뉴스
<W解説>「韓国人が日本留学に行ってきたら親日派になる」=韓国の「反日」に多大な影響の小説家
https://www.wowkorea[...]
2020-10-22
[8]
뉴스
韓国有名小説家「日本留学に行けば親日派」…元大学教授「ここまでくれば狂気」
https://japanese.joi[...]
2020-10-12
[9]
웹사이트
조정래 (チョ・ジョンネ)
http://focus.chosun.[...]
2011-09-20
[10]
웹사이트
조정래 인물정보
http://people.search[...]
2011-09-20
[11]
웹사이트
チョウ・ジョンネ デジタルアーカイブ 詳細情報
http://porta.ndl.go.[...]
2011-09-20
[12]
웹사이트
[유인경이 만난 사람]소설 ‘정글만리’ 작가 조정래 “뗄 수 없는 한·중 젊은층의 관계에 양국 미래 달려” - 주간경향
http://weekly.khan.c[...]
2013-11-12
[13]
기타
[14]
기타
[15]
기타
[16]
뉴스
최민수·유오성 KBS ‘한강’ 주인공
http://www.mediagaon[...]
국민일보
2015-09-03
[17]
뉴스
최민수, 드라마 제작사로부터 2억원 피소
http://www.mediagaon[...]
머니투데이
2015-09-03
관련 사건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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