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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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병원(後漢)은 후한 시대의 인물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하게 자랐지만 학문에 정진하여 명성을 얻었다. 그는 황건적의 난을 피해 요동으로 피신하여 유정을 돕고 공손도를 설득하여 유정의 가족을 구했으며, 조조에게 등용되어 사공에 이르렀다. 조조의 아들 조충의 죽음 이후 합장을 거절하는 등 강직한 면모를 보였으며, 조조 사후에는 조비의 보좌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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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원 (후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邴原 (병원) |
| 한자 | 邴原 |
| 로마자 표기 | 병원 |
| 자 | 根矩 (근구) |
| 신상 정보 | |
| 출생 | 생년 미상 |
| 출신지 | 청주 북해군 주허현 |
| 사망 | 사망지 미상 |
| 관직 정보 | |
| 주요 직책 | 오관중랑장 장사 |
| 섬긴 군주 | 공융 → 공손도 → 조조 |
2. 생애
병원은 11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다. 이웃집 서당에서 글을 읽고 싶어 했으나 돈이 없어 망설였는데, 서당 선생이 이를 알고 무료로 가르침을 베풀었다. 병원은 뛰어난 재능을 보여 겨울 동안 『효경』과 『논어』를 암송했다.[1]
성장한 병원은 훌륭한 품행으로 명성을 얻었다. 더 넓은 학문의 길을 걷고자 손숭을 찾아갔으나, 손숭은 고향의 정현을 먼저 스승으로 삼으라 권했다. 병원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밝혔고, 결국 손숭은 병원의 재능을 인정했다. 병원은 진류의 한탁, 영천의 진식, 여남의 범방, 탁군의 노식 등 당대의 명사들을 찾아가 학문을 닦았다. 이 과정에서 술을 끊고 학문에 정진하는 모습을 보여 주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병원은 가족과 함께 울주산으로 피신했다. 이후 공융의 추천을 받았으나, 황건적의 세력이 강성하여 요동으로 향했다. 요동에서 병원은 유정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태수 공손도는 유정을 시기하여 죽이려 했으나, 병원은 위험을 무릅쓰고 유정을 숨겨주고 태사자에게 의탁하게 했다. 또한 공손도에게 유정의 가족을 풀어줄 것을 간언하여 관철시켰다.
요동에서 1년여를 보낸 병원은 관녕의 권유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조조에게 발탁되어 사공연이 되었고, 208년에는 아들 조충을 잃은 조조의 합장 제안을 예법에 어긋난다며 거절했다.
210년, 병원은 승상징사로 임명되어 장범과 함께 조조의 부재 시 조비를 보좌했다. 조비가 위나라 태자가 되었을 때도 동요하지 않는 강직한 모습을 보였다. 조조는 병원을 덕이 높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인재로 평가했으며, 병원은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했다.
2. 1. 어린 시절과 학문
병원은 11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집이 가난하여 고아가 되었다. 이웃집 서당 옆을 지나가다 울자, 선생이 이유를 물었다. 병원은 "고아는 상처받기 쉽고, 가난하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학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부모 형제가 다 있습니다. 그들이 고아가 아니고 학문을 할 수 있는 것이 부러워서 눈물이 났습니다."라고 답했다. 선생은 그를 불쌍히 여겨 공부를 허락했고, 병원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학업 능력을 보여 한 겨울 동안 『효경』과 『논어』를 암송했다.성장한 병원은 훌륭한 품행을 유지하며 유학을 결심했다. 안구의 손숭을 찾아갔으나, 손숭은 병원에게 향리의 정군을 아느냐고 물으며 스승 삼기를 거절했다. 손숭은 정현의 학문이 진정한 학자의 표본이라며, 병원이 정군을 제쳐두고 천 리를 여행해 온 것은 '정군을 옆집 사람 취급'하는 것과 같다고 타이르자, 병원은 "선생님의 말씀은 쓴 약, 좋은 침과 같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반박했다. 그는 산에 올라 옥을 캐는 사람과 바다에 들어가 진주를 캐는 사람을 비유하며, 자신이 정군을 옆집 사람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바라는 바가 다를 뿐이라고 주장했다. 손숭은 병원의 식견에 감탄하며 서적을 나눠주겠다고 했지만, 병원은 스승을 구하고 학문을 시작하는 것은 고귀한 사상을 가진 사람과 통하기 위함이며, 나눔이라는 것이 있어야 비로소 성립하는 교제와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적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손숭의 마음을 존중하여 서적을 받아 돌아갔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자 서적을 전부 집어넣고 여행을 떠났다.
병원은 술을 좋아했지만, 여행을 떠나 돌아오기까지 8~9년 동안 거의 입에 대지 않았으며, 수행원도 없이 혼자 걷고, 행장을 짊어지고, 각고면려했다. 진류에서는 한탁, 영천에서는 진식, 여남에서는 범방, 탁군에서는 노식과 교류하거나 스승으로 모셨다. 헤어질 때 그들은 병원이 술을 마시지 않자 쌀과 고기를 보냈지만, 병원은 술이 학업을 방해한다며 거절하고, 다만 전별의 의미로 한 번만 술자리를 열겠다고 하여 함께 술을 마셨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마셔도 조금도 취하지 않을 정도로 주량이 셌다. 귀향한 후에는 손숭에게 서적을 돌려주고 자신의 마음을 말했다.
2. 2. 요동 피신과 귀환
병원은 주에서 초빙되었지만 거절하고 출사하려 하지 않았다. 184년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자, 일족과 당을 이끌고 울주산의 산중으로 난을 피해 도망쳤다. 북해국의 상이었던 공융이 병원을 유도(관리 추거의 한 과목)로 추천하여, 『병원별전』에 따르면 스스로 서신을 보내 설득했지만, 병원은 황건적이 성행했기에 그대로 요동으로 갔다.[1] 『병원별전』에 따르면, 한 번 군에 소환되어 공조주부에 임명된 후, 공융에게서 계좌로 발탁되었다. 그 후, 공융이 아끼던 사람이 죄를 범하자 죽이려고 했는데, 병원은 단 한 사람만 목숨을 구걸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공융의 행위를 『시경』을 인용하여 비판하자, 공융은 농담이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병원은 "사람을 죽이려 하면서 농담을 해도 되는 세상이 어디 있느냐"고 말했고, 공융은 답변에 곤란하게 되었다. 이후 뇌물로 어지러워진 정치에 염증을 느껴 울주산의 산중으로 도망쳤다고 한다.요동에서는 동군인 유정과 함께 용기무략의 소유자로 여겨졌다. 태수인 공손도는 유정을 두려워하고 미워했기에, 가족을 모두 체포하여 유정을 살해하려 했다. 그러나 유정은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공손도가 유정을 숨기면 동죄라는 포고를 내렸기에, 궁지에 몰린 유정은 병원의 집을 찾았다. 『위씨춘추』에 따르면, 유정이 병원에게 "궁조회입(궁지에 몰린 새가 품으로 들어온다)"이라고 말하자, 병원은 "어찌 이 품으로 들어올 줄 알았는가"라고 대답하고, 그를 숨겼다고 한다. 한 달 남짓 지나자, 동래군의 태사자가 귀향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유정을 그에게 맡겼다. 그리고 공손도를 향해 "유정의 지략을 당신은 두려워했다. 그러나 유정은 이미 도망했고, 그 지략이 사용되려 한다. 원한을 두 배로 만들지 않도록 유정의 가족을 용서하는 것이 득책이다"라고 말하며, 유정의 가족을 석방하고 고향까지 돌아갈 수 있도록 여행 경비를 보내주었다.
병원은 그 후에도 요동에 1년 동안 머물렀지만, 거처에 몸을 의탁하는 사람이 수백 채였고, 유학하는 선비도 그 밑으로 모여들었다. 강직하고 직언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공손도에게 박해받을 것을 걱정한 관녕의 권유를 받아들여 귀향했다(관녕전의 『부자』에서).[1] 『병원별전』에 따르면 고향을 떠난 지 10여 년이 지났다.
『병원별전』에 따르면, 병원은 귀향한 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흠모받았으며, 학문에서 정현과 견줄 만한 명성을 떨쳤다. 마침내, 후한의 실권을 장악한 조조에게 소환되어 사공연이 되었다.[1]
2. 3. 조조의 등용과 관직 생활
병원은 11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다. 이웃집 서당에서 글을 읽고 싶어 했으나 돈이 없어 망설였는데, 서당 선생이 이를 알고 무료로 가르침을 베풀었다. 병원은 뛰어난 재능을 보여 겨울 동안 『효경』과 『논어』를 암송했다.[1]성장한 병원은 훌륭한 품행으로 명성을 얻었다. 더 넓은 학문의 길을 걷고자 손숭을 찾아갔으나, 손숭은 고향의 정현을 먼저 스승으로 삼으라 권했다. 병원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밝히며 손숭에게 가르침을 청했고, 결국 손숭은 병원의 재능을 인정하고 책을 나누어 주었다. 병원은 손숭의 호의에 감사하면서도 책은 받지 않고, 진류의 한탁, 영천의 진식, 여남의 범방, 탁군의 노식 등 당대의 명사들을 찾아가 학문을 닦았다. 이 과정에서 술을 끊고 학문에 정진하는 모습을 보여 주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병원은 가족과 함께 울주산으로 피신했다. 이후 공융의 추천을 받아 관직에 나아갈 기회를 얻었으나, 황건적의 세력이 강성하여 요동으로 향했다. 요동에서 병원은 용맹한 유정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태수 공손도는 유정을 시기하여 죽이려 했으나, 병원은 위험을 무릅쓰고 유정을 숨겨주고 태사자에게 의탁하게 했다. 또한 공손도에게 유정의 가족을 풀어줄 것을 간언하여 관철시켰다.
요동에서 1년여를 보낸 병원은 관녕의 권유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조조에게 발탁되어 사공연이 되었고, 208년에는 아들 조충을 잃은 조조의 합장 제안을 예법에 어긋난다며 거절하기도 했다.
210년, 병원은 승상징사로 임명되어 장범과 함께 조조의 부재 시 조비를 보좌했다. 조비가 위나라 태자가 되었을 때도 동요하지 않는 강직한 모습을 보였다. 조조는 병원을 덕이 높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인재로 평가했으며, 병원은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했다.
2. 4. 성품과 일화
병원은 어릴 적부터 학문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11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배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웃 서당에서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눈물을 흘릴 정도로 학문에 대한 갈망이 컸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서당 선생은 병원에게 무료로 글을 가르쳐 주었고, 병원은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단기간에 『효경』과 『논어』를 암송할 정도였다.[1]병원은 성장하면서 훌륭한 품행을 갖춘 인물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학문에 대한 깊이와 넓이를 추구하는 자세가 돋보였다. 안구의 손숭을 찾아가 배움을 청했을 때, 손숭은 고향의 정현을 스승으로 삼을 것을 권했다. 하지만 병원은 "산에 올라 옥을 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바다에 들어가 진주를 캐는 사람도 있습니다."라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는 획일적인 가르침보다는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추구하는 병원의 학문관을 보여준다.
병원은 술을 좋아했지만, 학문에 정진하기 위해 8~9년간 술을 끊고 홀로 유학길에 올랐다. 진류의 한탁, 영천의 진식, 여남의 범방, 탁군의 노식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류하며 학문의 폭을 넓혔다. 스승들과 헤어질 때, 그들은 병원이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을 알고 쌀과 고기를 보냈지만, 병원은 술이 학업을 방해한다며 사양했다. 다만, 스승들의 배려에 감사하며 한 번만 술자리를 허락했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아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병원은 강직하고 소신 있는 성격으로도 유명했다. 황건적의 난 이후 공융이 북해의 상으로 있을 때, 병원은 공융의 잘못된 행동을 시경을 인용하여 비판하기도 했다. 요동에서는 태수 공손도가 유정을 죽이려 하자, 위험을 무릅쓰고 유정을 숨겨주고 그의 가족까지 보호해 주었다. 이러한 행동은 병원의 용기와 의리, 그리고 정의로움을 보여준다.
병원은 조조에게 초빙되어 사공연이 되었고, 조충이 사망했을 때 조조가 합장을 제안했지만, 예에 어긋난다며 거절했다. 또한, 조비가 위의 태자가 되었을 때도 주변 사람들과 달리 평온한 태도를 유지하며, 주군보다 아버지가 더 중요하다는 소신을 밝혔다. 이러한 모습은 병원이 권력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강직한 인물임을 보여준다.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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