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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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관녕은 후한 말에서 위나라 시기에 활동한 인물로,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은둔하며 고결한 삶을 살았다. 16세에 고아가 된 후 학문에 정진했으며, 전란을 피해 요동으로 피난하여 공손도, 공손강, 공손공 3대에 걸쳐 사관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했다. 위나라에서 여러 차례 초빙을 받았지만 모두 사퇴했으며, 84세에 사망했다. 관녕은 화흠과의 일화인 '할석단교'로 유명하며, 청렴하고 고결한 인품으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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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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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관녕 |
원어 이름 | 管寧 |
자 | 유안(幼安) |
출생 | 158년 |
출생지 | 산둥성린취 현 |
사망 | 241년 (83세) |
직업 | 작가 |
가족 | 관중 (조상), 관묘 (아들) |
2. 생애
관녕은 16세 때 고아가 되어 힘들게 공부하였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관녕은 거절하였다.[1]
조예가 청주 자사인 정희에게 관녕의 소식을 묻자, 정희는 "관녕은 고결한 삶을 살려 한다기보다는 늙어서 지력과 체력이 쇠퇴했기 때문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1]
2. 1. 어린 시절과 학문
관녕은 16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머니 쪽 친척이 유복하여 관녕에게 장례 부의금을 보냈지만, 관녕은 모두 거절하고 아버지의 장례를 스스로 검소하게 치렀다. 성장한 그는 키가 8척에 달했고, 얼굴에는 아름다운 수염을 길렀다.[1]평원의 화흠, 동향의 병원과 함께 타향에서 유학하며 진식에게서 배웠다.[1]
2. 2. 요동 피난과 은거
후한 말 전란을 피해 요동 땅으로 갔다.[1]공손도, 공손강, 공손공 3대에 걸쳐 벼슬을 권유받았으나, 관녕은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1]
16세에 아버지를 여읜 관녕은 어머니 쪽 친척이 보낸 장례 부의금을 모두 거절하고 아버지의 장례를 검소하게 치렀다. 성장한 그는 키가 8척에 달했고, 아름다운 수염을 길렀다.[1]
평원의 화흠, 동향의 병원과 함께 타향에서 유학하며 진식에게 배웠다.[1]
이후 전란이 일어나자, 요동 태수 공손도의 정치에 대한 평판을 듣고 병원과 평원의 왕렬 등과 함께 요동으로 피난했다. 공손도가 저택을 비워 관녕 등을 환영했지만, 관녕 등은 공손도를 만나자 산중에 암자를 짓고 그곳에 거주했다.[1]
조조가 사공이 되자 관녕을 초빙했지만, 공손강은 이 소식을 관녕에게 전하지 않았다.[1]
중원이 안정되자 요동으로 피난했던 사람들이 잇따라 귀향했지만, 관녕만은 요동에 머물렀다.[1]
2. 3. 위나라의 초빙과 거절
후한 말 전란을 피해 요동 땅으로 도망쳤다.[1]공손도, 공손강, 공손공 3대에 걸쳐 사관을 권유하였으나 관녕은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1]
조조가 사공이 되자 관녕을 초빙했지만, 공손강은 이 소식을 관녕에게 전하지 않았다.[1]
중원이 안정되자 요동으로 피난했던 사람들은 잇따라 귀향했지만, 관녕만은 요동에 머물렀다.[1]
황초 4년 (223년), 위에서 현인을 찾는 조칙이 내려지자, 사도가 된 화흠은 관녕을 천거했다. 조비(문제)가 관녕을 초빙했기에 관녕은 이에 응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때 공손공은 관녕을 위해 직접 군 경계의 남쪽까지 배웅하며, 의복과 기물을 증정했다. 관녕은 그동안 공손도·공손강·공손공에게서 받은 물건을 모두 받았지만, 바다를 건너자 그 물건들에 봉하여 모두 돌려보냈다.[1]
조칙에 의해 태중대부에 임명되었지만, 관녕은 이를 사퇴했다.[1]
조예(명제)가 즉위하자, 태위가 된 화흠은 자신의 관위를 사퇴하고 관녕에게 양보하려 했다. 조예는 내키지 않았다고도 하지만, 관녕을 광록훈으로 임명하도록 조칙을 내리고, 청주 자사에게도 명령하여 그를 청주로 초빙하게 하려 했다. 관녕은 상서를 올려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도 정중하게 이를 사퇴했다.[1]
황초 연간부터 청룡 연간에 걸쳐 이러한 초빙과 사퇴가 반복되었다.[1]
2. 4. 죽음
정시 2년(241년), 태복 도구일, 영녕궁의 위위 맹관, 시중 손옹, 중서시랑 왕기는 상소를 올려 관녕을 천거했다. 관녕에게 수레와 선물이 주어졌지만, 관녕은 노쇠로 인해 사망했다. 향년 84세였다.3. 평가
관녕은 화흠, 병원과 함께 용에 비유되었는데, 화흠은 용의 머리, 병원은 용의 배, 관녕은 용의 꼬리로 평가받았다.[1] 화흠의 인격을 비하하여 절교했다는 할석단교(割席斷交) 고사는 삼국지연의에도 채용되었다.[1]
왕렬은 당시에 관녕 이상으로 명성이 높았지만, 관녕에게는 미치지 못한다고 여겨졌다.[1] 황보밀의 『고사전(高士傳)』에는 백성들이 관녕의 덕에 감화되어 인근에서의 투쟁이 끊어졌다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1]
관녕은 공손연이 야심 찬 인물임을 간파하고, 머지않아 공손공으로부터 지위를 빼앗아 천하에 쟁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했다. 실제로 그렇게 되어 요동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또한, 관녕이 해로(海路)로 피난할 때 폭풍우를 만나 다른 배들은 모두 침몰했지만, 관녕의 배만은 무사했고, 어디선가 빛이 비쳐 무인도에 피신할 수 있었다고 한다.[1]
3. 1. 당대
화흠, 병원과 함께 각각 용의 머리, 용의 배, 용의 꼬리로 비유되었다.[1] 화흠의 인격을 비하하여 절교했다는 할석단교(割席斷交) 고사가 있으며, 소설 『삼국지연의』에도 나온다.[1]왕렬 또한 요동으로 피난하여 생을 마쳤는데, 당시 관녕 이상의 명성을 얻었으나, 관녕에게는 미치지 못한다고 여겨졌다.[1]
『부자』에 따르면, 춘추 시대 제나라 재상 관중의 후예라고 한다.[1] 제나라에서 전(田)씨가 세력을 얻자, 관씨 일족은 제나라를 떠나 노나라와 초나라 땅으로 이주했다.[1] 관녕의 9대 전 조상인 관소경(管少卿)이 연의 영(令)으로서 처음으로 주허(朱虛) 땅에 정착했다고 한다.[1]
공손도와 처음 만났을 때, 관녕은 경전 이야기만 하고 세속적인 화제는 언급하지 않았다.[1] 또한, 산중에 살았던 그의 곁에는 피난민들이 모여들어 마침내 마을을 이루었다.[1] 관녕은 학자로서 행동하고, 같은 학자와만 만나는 것처럼 행동했다.[1] 이 때문에 공손도로부터 안심을 얻었고, 백성들도 그의 덕에 감화되었다고 한다.[1] 백성들이 관녕의 덕에 감화되어, 마침내 인근에서의 투쟁이 끊어졌다는 일화가 황보밀의 『고사전(高士傳)』에 기록되어 있다.[1]
병원은 강직한 성격 탓에 공손도 등 위정자들과의 관계가 여러 번 긴장되었다.[1] 관녕은 병원에게 처세술을 알려주고, 몰래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고 한다.[1]
공손강이 군(郡)을 다스리게 되자, 왕을 칭할 야심을 품게 되었다.[1] 또한, 관녕의 명성을 이용하고자 수단을 써서 부하로 맞이하려 했지만, 막상 관녕의 높은 덕을 직접 보자, 분명하게 태도를 밝힐 수 없었다고 한다.[1]
관녕이 공손공의 곁을 떠날 무렵, 공손연이 야심찬 인물이었기 때문에, 머지않아 공손연이 공손공으로부터 지위를 빼앗아 천하에 큰 혼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했다.[1] 곧 예상대로 되어 요동에서 사망자가 4자릿수에 달했다.[1] 또한, 관녕이 바닷길로 이동했을 때, 폭풍우를 만나 다른 배는 모두 침몰했지만, 관녕의 배만은 무사했을 뿐만 아니라, 어디선가 빛이 비쳐 무인도에 피난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1]
3. 2. 후대
관녕(管寧|관녕중국어)은 화흠, 병원과 함께 용에 비유되었는데, 화흠은 용의 머리, 병원은 용의 배, 관녕은 용의 꼬리로 평가받았다.[1] 화흠의 인격을 비하하여 절교했다는 일화(割席斷交)는 삼국지연의에도 채용되었다.[1]왕열은 당시 관녕 이상으로 명성이 높았지만, 관녕에게는 미치지 못한다고 여겨졌다.[1]
황보밀의 『고사전(高士傳)』에는 백성들이 관녕의 덕에 감화되어 인근에서의 투쟁이 끊어졌다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1]
관녕은 공손연이 야심찬 인물임을 간파하고, 머지않아 공손연이 공손공으로부터 지위를 빼앗아 천하에 쟁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했다. 실제로 그렇게 되어 요동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또한, 관녕이 해로(海路)로 피난할 때 폭풍우를 만나 다른 배들은 모두 침몰했지만, 관녕의 배만은 무사했고, 어디선가 빛이 비쳐 무인도에 피신할 수 있었다고 한다.[1]
4. 성품 및 일화
관녕은 춘추 시대 제나라 재상 관중의 후예라고 한다. 제나라에서 전씨가 두각을 나타낸 후, 관씨 일족은 제나라를 떠나 노(魯)와 초(楚)의 땅으로 이주했다. 관녕의 9대 전 조상인 관소경(管少卿)이 연의 영(令)으로서 처음으로 주허(朱虛)의 땅에 정착했다고 한다.[1]
왕열도 요동으로 피난하여 일생을 마친 인물인데, 그 당시에는 관녕보다 명성이 높았지만, 관녕에게는 미치지 못한다고 여겨졌다.[1]
4. 1. 할석단교(割席斷交)
관녕은 조조의 신하였던 화흠과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냈다. 관녕과 화흠이 함께 밭에서 호미질을 하다가 금조각을 발견했는데, 관녕은 그것을 기와조각처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화흠은 그것을 주워서 던져버렸다.[7]또 한 번은 관녕과 화흠이 함께 방에서 책을 읽는데 길가에 고관대작의 행차가 있었다. 관녕은 변함없이 책을 보는데, 화흠은 책을 덮고 나가서 구경했다. 관녕은 화흠과 자리를 떼어 놓고 “너는 내 친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7] 이 일화는 '관녕이 자리를 떼어 놓고 교제를 끊었다'라는 뜻의 할석단교(割席斷交) 고사성어로, 삼국지연의에도 등장한다.
4. 2. 공손씨와의 관계
병원과 함께 용의 머리, 배, 꼬리로 비유되곤 했다.[1] 화흠의 인격을 비하하여 절교했다는 일화(할석단교)는 소설 『삼국지연의』에도 채용되었다.[1]공손도와 처음 대면했을 때, 관녕은 경전 이야기만 하고 세속적인 화제는 언급하지 않았다. 산중에 살았던 그의 곁에는 피난민들이 모여들어 마침내 마을이 생겼다. 관녕은 학자로서 행동하고, 같은 학자와만 면회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이 때문에 공손도로부터 안심을 받았고, 백성들도 덕에 감화되었다고 한다. 백성들이 관녕의 덕에 감화되어, 마침내 인근에서의 투쟁이 끊어졌다는 일화는 황보밀의 『고사전(高士傳)』에 기술되어 있다.[1]
맹원은 강직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공손도 등 위정자들과의 관계가 여러 번 긴장되었다. 관녕은 맹원에게 처세의 방책을 전하고, 몰래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1]
공손강이 군(郡)을 지배하게 되자, 왕을 칭할 야심을 품게 되었다. 관녕의 명성을 이용하기 위해, 수단을 강구하여 부하로 맞이하려 했지만, 막상 관녕의 덕의 높이를 눈앞에서 보게 되자, 분명하게 태도를 나타낼 수 없었다고 한다.[1]
관녕이 공손공의 곁을 떠날 무렵, 공손연이 야심찬 인물이 되었기 때문에, 머지않아 공손연이 공손공으로부터 지위를 빼앗아 천하에 쟁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했다. 곧 그와 같이 되어, 요동의 사망자는 4자릿수에 달했다. 관녕이 해로(海路)를 진행했을 때는, 폭풍우를 만나 다른 배가 모두 침몰하는 가운데, 관녕의 배만은 무사했을 뿐만 아니라, 어디선가 빛이 비쳐 무인도에 난을 피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1]
4. 3. 기타
화흠과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냈다. 화흠과 함께 밭에서 호미질을 하다가 금 조각을 발견했는데, 관녕은 그것을 기와 조각처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화흠은 그것을 주워서 던져버렸다.관녕과 화흠이 함께 방에서 책을 읽는데 길가에 고관대작의 행차가 있었다. 관녕은 변함없이 책을 보는데, 화흠은 책을 덮고 나가서 구경했다. 관녕은 화흠과 자리를 떼어 놓고 “너는 내 친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7]
화흠이 용의 머리, 병원이 용의 배, 관녕이 용의 꼬리로 평을 받았다. 화흠의 인격을 비하하여 절교했다는 일화(割席斷交)가 있으며, 소설 삼국지연의에도 채용되었다.
마찬가지로 요동으로 피난하여 일생을 마친 왕열도 그 당시에는 관녕 이상으로 명성이 높은 인물이었지만, 관녕에게는 미치지 못한다고 여겨졌다.
황보밀의 『고사전(高士傳)』에는 백성들이 관녕의 덕에 감화되어, 마침내 인근에서의 투쟁이 끊어졌다는 일화가 기술되어 있다.
5. 가계
6. 전기
관녕의 전기에 대한 내용은 황보밀의 《고사전》 권 하와 《삼국지》 권11, 〈위서〉11, 관녕전을 참고했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Sanguozhi
[3]
서적
Sanguozhi
[4]
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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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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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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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세설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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