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 7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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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방 7년 전쟁은 1563년부터 1570년까지 덴마크-노르웨이와 스웨덴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칼마르 동맹 해체 이후 발트해 패권을 두고 벌어진 이 전쟁은, 덴마크의 스웨덴 재정복 시도와 스웨덴의 발트해 진출 시도가 주요 원인이었다. 전쟁은 스웨덴의 엘프스보리 성 반환, 발트해의 덴마크 주권 인정, 그리고 세 왕관 문장 분쟁의 미해결을 담은 슈테틴 조약으로 종결되었으며, 양측의 국경 변화는 없었지만, 스웨덴은 에스토니아를 영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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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 7년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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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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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개요 | |
분쟁 명칭 | 북방 7년 전쟁 |
전쟁의 일부 | 북방 전쟁 및 리보니아 전쟁 |
시기 | 1563년 8월 13일 – 1570년 12월 13일 (7년 4개월) |
장소 | 북유럽 |
원인 | 칼마르 연합 해체에 대한 덴마크의 불만 |
결과 | 평화 협상 및 결과 참고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덴마크-노르웨이 뤼베크 자유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1569년 7월 이후) |
교전국 2 | 스웨덴 |
지휘관 | |
덴마크-노르웨이, 뤼베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지휘관 | 프레데리크 2세 Daniel Rantzau(사망) Herluf Trolle(사망) Otte Rud(사망) Franz Brockenhuus(사망) Peder Huitfeldt Jacob Brockenhuus Peder Skram Kristoffer Throndsen Hans Lauritsen Bartholomeus Tinnappel Friedrich Knebel 지그문트 아우구스투스 |
스웨덴 지휘관 | 에리크 14세 요한 3세 Jakob Bagge Klas Horn Charles de Mornay Claude Collart Bo Birgersson Grip(사망) 야코브 헤스테스코 |
결과 | |
슈테틴 조약 (1570년) | 전쟁 이전 상태로 회귀 in 스칸디나비아 스웨덴은 리보니아에서의 소유물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지불금과 교환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대한 스웨덴의 승리 덴마크는 북유럽의 최고 강대국이 됨 스웨덴은 150,000 riksdaler를 지불해야 했음 스웨덴은 뤼베크에 75,000 달러를 지불해야 했음 |
피해 규모 | |
스웨덴 | 100,000명 사망 |
기타 | 막대한 피해 발생 |
2. 역사적 배경
칼마르 동맹은 1397년부터 1523년까지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세 스칸디나비아 왕국의 연합이었으나, 덴마크의 지배에 대한 스웨덴의 지속적인 반감으로 인해 결국 붕괴되었다.[7] 1471년 브룬케베리 전투에서 스웨덴이 승리하면서 본데-스투레 귀족들의 지도 아래 강력한 반(反) 연합 운동이 형성되었다. 1520년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는 스웨덴을 재정복하고 스톡홀름 학살을 통해 반연합 세력에게 잔혹한 보복을 가했다.[8] 스톡홀름의 주요 시민들을 포함한 80명이 넘는 귀족 남녀가 처형되었지만, 이 결과는 크리스티안 2세에게 심각한 역효과를 가져왔다.[7] 이 폭력은 향후 수년간 스웨덴에서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8] 1521년부터 1523년까지 스웨덴 독립 전쟁이 성공하면서 동맹은 깨졌다. 크리스티안 2세는 교황으로부터 규탄을 받았고, 1523년 퇴위했다.[9]
구스타프 1세 바사는 농민과 한자 도시인 뤼베크와 단치히의 지원을 받아 1523년 6월 스웨덴의 통제권을 강화하고 왕위에 올랐다. 바사 치하에서 칼마르 동맹은 최종적으로 해체되었고, 스웨덴은 덴마크-노르웨이와 경쟁하는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7] 그러나 1523년 당시 스웨덴은 덴마크의 오레순 세금이 지배하고, 북해 접근이 엘프스보리(현재 예테보리 근처) 부근 20km 구간으로 제한되는 등 취약한 입장에 있었다. 게다가 덴마크는 발트해를 장악하여 스웨덴의 이동을 제한했다.
구스타프 1세 바사는 1544년 유럽 최초의 토착 상비군 중 하나를 창설하는 등 스웨덴의 군사 구조를 바꾸었다. 병사들은 평시에는 집에 머물면서 세금 감면으로 봉급을 받았지만, 집합하여 훈련을 받아야 했다. 이 시스템은 나중에 스웨덴 할당 제도로 확장되었다. 구스타프 1세 바사가 1560년 사망할 때까지, 농민 10명 중 1명은 국왕이 요구하는 곳 어디든 국내외에서 복무해야 하는 병사를 제공해야 했다.
한편, 덴마크는 스웨덴의 강대화를 위협으로 여기며 주시해왔고, 기회만 된다면 다시 스웨덴을 정복하려고 획책하고 있었다. 1558년, 발트 지역에서 리보니아 전쟁이 발발하자 스웨덴은 이 전쟁에 참전했다.
2. 1. 칼마르 동맹의 해체와 스웨덴의 독립
칼마르 동맹은 1397년부터 1523년까지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세 스칸디나비아 왕국의 연합이었으나, 덴마크의 지배에 대한 스웨덴의 지속적인 반감으로 인해 결국 붕괴되었다.[7]1471년 브룬케베리 전투에서 스웨덴이 승리하면서, 본데-스투레 귀족들의 지도 아래 강력한 반(反) 연합 운동이 형성되었다. 1520년,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는 스웨덴을 재정복하고 스톡홀름 학살을 통해 반연합 세력에게 잔혹한 보복을 가했다.[8] 스톡홀름의 주요 시민들을 포함한 80명이 넘는 귀족 남녀가 처형되었지만, 이 결과는 크리스티안 2세에게 심각한 역효과를 가져왔다.[7] 이 폭력은 향후 수년간 스웨덴에서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8] 1521년부터 1523년까지 스웨덴 독립 전쟁이 성공하면서 동맹은 깨졌다. 크리스티안 2세는 교황으로부터 규탄을 받았고, 1523년 퇴위했다. 그 후임인 덴마크 국왕 프리드리히 1세와 크리스티안 3세는 주로 덴마크-노르웨이 및 홀슈타인의 종교 개혁과 백작의 싸움 내전에 관심을 돌렸고, 스웨덴과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평화로웠다.[9]
스웨덴에서는 내부 권력 공백과 크리스티안 2세의 퇴위가 결합되어, 구스타프 1세 바사가 농민과 한자 도시인 뤼베크와 단치히의 지원을 받아 1523년 6월 스웨덴의 통제권을 강화하고 왕위를 주장할 기회를 제공했다. 바사 치하에서 칼마르 동맹은 최종적으로 해체되었고, 스웨덴은 덴마크-노르웨이와 경쟁하는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7] 1523년 구스타프 1세 바사의 스웨덴은 취약한 입장에 있었다. 덴마크의 오레순 세금이 지배하고, 카테가트의 엘프스보리(현재 예테보리 근처) 부근 20km 구간으로 제한된 북해 접근이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덴마크는 발트해를 장악하여 스웨덴의 이동을 제한했다.
구스타프 1세 바사는 스웨덴의 군사 구조를 바꾸었는데, 북방 7년 전쟁에서는 즉각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스웨덴의 운명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1544년 구 스칸디나비아의 Uppbåd(긴급시 각 지역에서 일정 수의 병력을 소집할 수 있는 권리) 개념을 이용하여 유럽 최초의 토착 상비군 중 하나를 창설했다. 병사들은 평시에는 집에 머물면서 세금 감면으로 봉급을 받았지만, 집합하여 훈련을 받아야 했다. 이 시스템은 나중에 스웨덴 할당 제도로 확장되었다. 구스타프 1세 바사가 1560년 사망할 때까지, 농민 10명 중 1명은 국왕이 요구하는 곳 어디든 국내외에서 복무해야 하는 병사를 제공해야 했다.
덴마크는 1523년 스웨덴이 독립하고 칼마르 동맹이 붕괴된 이후 스웨덴의 강대화를 위협으로 여기며 주시해왔다. 기회만 된다면 다시 스웨덴을 정복하려고 획책하고 있었다. 그리고 1558년, 발트 지역에서 리보니아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스웨덴은 이 전쟁에 참전했다.
2. 2. 발트해 지역의 패권 경쟁
칼마르 동맹은 1397년부터 1523년까지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세 스칸디나비아 왕국의 연합이었으나, 덴마크의 지배에 대한 스웨덴의 지속적인 반감으로 인해 결국 붕괴되었다.[7]1471년, 스웨덴은 브룬케베리 전투에서 승리하여 본데-스투레 귀족들의 지도 아래 강력한 반연합 운동을 형성했다. 1520년,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는 스웨덴을 재정복하고 스톡홀름 학살에서 반연합 세력에 대한 잔혹한 보복을 가했다.[8] 스톡홀름의 주요 시민들을 포함한 80명이 넘는 귀족 남녀가 처형되었지만, 이는 오히려 스웨덴에서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7][8] 결국 1521년부터 1523년까지 스웨덴 독립 전쟁이 일어나 동맹은 깨졌다. 크리스티안 2세는 교황으로부터 규탄을 받았고, 1523년 퇴위했다.[9]
이후 구스타프 1세 바사가 농민과 한자 도시인 뤼베크와 단치히의 지원을 받아 1523년 6월 스웨덴의 통제권을 강화하고 왕위를 주장했다. 바사 치하에서 칼마르 동맹은 최종적으로 해체되었고, 스웨덴은 덴마크-노르웨이와 경쟁하는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7] 그러나 1523년 당시 스웨덴은 덴마크의 오레순 세금이 지배하고, 북해 접근이 엘프스보리(현재 예테보리 근처) 부근 20km 구간으로 제한되는 등 취약한 입장에 있었다. 게다가 덴마크는 발트해를 장악하여 스웨덴의 이동을 제한했다.
구스타프 1세 바사는 스웨덴의 군사 구조를 바꾸어, 1544년 유럽 최초의 토착 상비군 중 하나를 창설했다. 병사들은 평시에는 집에 머물면서 세금 감면으로 봉급을 받았지만, 집합하여 훈련을 받아야 했다. 이 시스템은 나중에 스웨덴 할당 제도로 확장되었다. 구스타프 1세 바사가 1560년 사망할 때까지, 농민 10명 중 1명은 국왕이 요구하는 곳 어디든 국내외에서 복무해야 하는 병사를 제공해야 했다.
한편, 덴마크는 1523년 스웨덴이 독립하고 칼마르 동맹이 붕괴된 이후 스웨덴의 강대화를 위협으로 여기며 주시해왔다. 기회만 된다면 다시 스웨덴을 정복하려고 획책하고 있었다. 그리고 1558년, 발트 지역에서 리보니아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스웨덴은 이 전쟁에 참전했다.
2. 3. 리보니아 전쟁의 발발
덴마크는 1523년 스웨덴이 독립하고 칼마르 동맹이 붕괴된 이후 스웨덴의 강대화를 위협으로 여기며 주시해왔다. 기회만 된다면 다시 스웨덴을 정복하려고 획책하고 있었다. 그리고 1558년, 발트 지역에서 리보니아 전쟁이 발발하자 스웨덴은 이 전쟁에 참전했다.3. 전쟁의 원인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2세는 1563년 스웨덴에 선전포고했다. 당시 덴마크는 스웨덴의 발트 해 진출 시도를 경계하고 있었다. 스웨덴은 핀란드를 통해 발트 해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고, 덴마크령 에스토니아를 침공하려 했다. 프레데리크 2세는 에스토니아에도 군대를 파견했지만, 주요 전장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였다.
덴마크와 스웨덴은 발트 해 연안 영토를 놓고도 갈등을 빚었다. 1562년 스웨덴 국왕 에리크 14세는 나르바를 점령하기 위해 핀란드 만을 봉쇄했고, 이는 이 지역에 이해관계를 가진 덴마크와 뤼베크(한자 동맹)와의 분쟁을 야기하여 프레데리크 2세의 강경책으로 이어졌다.[13]
당시 스웨덴은 리보니아 전쟁으로 인해 전력이 분산되었고, 에리크 14세의 정신 이상 등 덴마크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1563년 발트 해 남부 본홀름 해협 해전에서 핀란드인 제독 클라우스 호른에게 패배하며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3. 1. 덴마크의 스웨덴 재정복 야욕
크리스티안 3세와 구스타프 1세 바사가 각각 1559년과 1560년에 사망한 후, 덴마크와 스웨덴 양국은 에릭 14세와 프레데리크 2세라는 젊고 호전적인 군주를 맞이하게 되었다. 프레데리크 2세는 덴마크의 지도 아래 칼마르 동맹의 부활을 원했지만, 에릭 14세는 덴마크의 지배적인 위치를 깨뜨리려 했다.[10]1559년 즉위 직후, 프레데리크 2세는 고령의 야전 사령관 요한 란차우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안겨준 디트마르시를 공격하여 복수하도록 명령했다. 이듬해 덴마크는 발트 해의 섬 사아레마(외셀)를 점령하며 확장을 계속했다.[11]

1561년, 발트 해 북부의 튜턴 기사단 국가의 상당 부분이 고트하르트 케틀러에 의해 세속화되자 덴마크와 스웨덴 모두 리보니아 전쟁에 개입하려 했다.[12] 이 전쟁 중에 에릭 14세는 덴마크가 에스토니아를 정복하려는 계획을 방해했다. 에릭 14세는 발트 해를 지배하려 했고, 프레데리크 2세에게 전통적으로 스웨덴의 문장인 세 왕관을 덴마크 국장에서 제거하도록 압박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13] 이는 크리스티안 3세와 구스타프 1세 바사 이후로 계속된 분쟁의 핵심이었다.
1563년 2월, 스웨덴 사절단이 에릭 14세와 헤센의 크리스티나와의 결혼을 협상하기 위해 헤센으로 파견되었지만 코펜하겐에서 억류되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에릭 14세는 자신의 문장에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문장을 추가하고 이 상징들을 제거하라는 덴마크의 요청을 거부했다.
에릭 14세가 러시아 무역을 방해하기 위해 도입한 무역 장애와 철회된 무역 특권에 분노한 뤼베크(한자 동맹)는 덴마크와의 전쟁 동맹에 가입했다. 발트 해 무역을 장악하고자 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도 참전했다. 1563년 8월에 전쟁이 공식적으로 선포되기 전인 5월에 소규모 충돌이 발생했다.
덴마크는 1523년 스웨덴이 독립하고 칼마르 동맹이 붕괴된 이후 스웨덴의 강대화를 위협으로 여기며 주시해왔다. 기회만 된다면 다시 스웨덴을 정복하려고 획책하고 있었다. 1563년, 프레데리크 2세는 스웨덴에 선전포고를 하며 덴마크의 스웨덴 재정복 야욕을 드러냈다.
3. 2. 스웨덴의 발트해 진출 시도
크리스티안 3세와 구스타프 1세 바사가 각각 1559년과 1560년에 사망한 후, 덴마크와 스웨덴 두 나라 모두 에릭 14세와 프레데리크 2세라는 젊고 매파적인 군주를 맞이하게 되었다. 프레데리크 2세는 덴마크의 지도 아래 칼마르 동맹의 부활을 구상했지만, 에릭 14세는 덴마크의 지배적 위치를 깨뜨리려 했다.[10]
1559년 즉위식 직후,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2세 국왕은 노령의 야전 사령관 요한 란차우에게 굴욕적인 덴마크의 패배를 복수할 것을 명령했다. 이는 몇 주 만에 패배하여 덴마크-노르웨이 왕관 아래 들어온 작은 농민 공화국 디트마르시를 상대로 한 것이었다. 이듬해 덴마크는 발트 해의 섬 사아레마아(외셀)를 점령하며 확장을 계속했다.[11]
1561년, 발트해 북부의 튜턴 기사단 국가의 상당 부분이 대장 고트하르트 케틀러에 의해 속령화되자 덴마크와 스웨덴 모두 리보니아 전쟁에 개입하려 했다.[12] 이 전쟁 중에 스웨덴의 에릭 14세 국왕은 덴마크가 에스토니아를 정복하려는 계획을 성공적으로 방해했다. 그는 발트해를 지배하려 했고, 프레데리크 2세에게 전통적으로 스웨덴의 문장인 세 왕관을 덴마크 국장에서 제거하도록 계속해서 압박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13] 이것은 크리스티안 3세와 구스타프 1세 바사 이후로 계속된 분쟁의 골자였다. 1563년 2월, 스웨덴 사절단이 에릭 14세의 헤센의 크리스티나와의 결혼을 협상하기 위해 헤센으로 파견되었지만 코펜하겐에서 억류되었다. 보복으로 에릭 14세는 자신의 문장에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문장을 추가하고 이 상징들을 제거하라는 덴마크의 요청을 거부했다.
에릭 14세가 러시아 무역을 방해하기 위해 도입한 무역 장애와 철회된 무역 특권에 분노한 뤼베크 자유 도시는 덴마크와의 전쟁 동맹에 가입했다. 발트해 무역을 장악하고자 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도 참전했다. 1563년 8월에 전쟁이 공식적으로 선포되기 전인 5월에 소규모 충돌이 발생했다.
3. 3. 세 왕관 문장 분쟁
크리스티안 3세와 구스타프 1세 바사가 각각 1559년과 1560년에 사망한 후, 덴마크와 스웨덴 양국은 에릭 14세와 프레데리크 2세라는 젊고 호전적인 군주를 맞이하게 되었다. 프레데리크 2세는 덴마크의 지도 아래 칼마르 동맹의 부활을 꿈꿨지만, 에릭 14세는 덴마크의 지배적인 위치를 깨뜨리려 했다.[10]1561년, 발트해 북부의 튜턴 기사단 국가의 상당 부분이 대장 고트하르트 케틀러에 의해 속령화되자 덴마크와 스웨덴 모두 리보니아 전쟁에 개입하려 했다.[12] 이 전쟁 중에 에릭 14세는 덴마크가 에스토니아를 정복하려는 계획을 성공적으로 방해했다. 그는 발트해를 지배하려 했고, 프레데리크 2세에게 전통적으로 스웨덴의 문장인 세 왕관을 덴마크 국장에서 제거하도록 계속해서 압박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13] 이것은 크리스티안 3세와 구스타프 1세 바사 이후로 계속된 분쟁의 핵심이었다.
1563년 2월, 스웨덴 사절단이 에릭 14세와 헤센의 크리스티나와의 결혼을 협상하기 위해 헤센으로 파견되었지만 코펜하겐에서 억류되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에릭 14세는 자신의 문장에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문장을 추가하고 이 상징들을 제거하라는 덴마크의 요청을 거부했다.
4. 전쟁의 경과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2세는 1563년 스웨덴에 선전포고했다. 스웨덴은 핀란드를 통해 발트 해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고, 당시 덴마크령 에스토니아(에스틀란트)를 침공하려 했다. 프레데리크 2세는 에스틀란트에도 군대를 파견했지만 주요 전장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였다. 당시 덴마크령 스코네와 속국 노르웨이에서 스웨덴 침공을 시작했다. 덴마크와 스웨덴은 발트 해 연안 영토를 놓고도 다투었는데, 1562년 스웨덴 국왕 에리크 14세는 나르바를 점령하기 위해 핀란드 만을 봉쇄했다. 이 봉쇄는 이 지역에 이해관계를 가진 덴마크와 뤼베크(한자 동맹)와의 분쟁을 야기하여 프레데리크 2세의 강경책으로 이어졌다.[1]
스웨덴은 리보니아 전쟁으로 인해 전력이 분산되었고, 에리크 14세의 정신 이상 등 덴마크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1563년, 발트 해 남부 본홀름 해협 해전에서 핀란드인 제독 클라우스 호른에게 패배하며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1]
1565년, 클라스 호른은 할란드와 스코네 지방을 공격하고, 보후슬렌과 우데발라를 여러 차례 공격했다. 덴마크군은 베스테르예틀란드 지방의 뢰되세를 불태웠다. 에리크 14세는 처음에는 직접 군대를 이끌었으나, 이후 닐스 보이예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닐스 보이예는 1564년 8월 28일 바르베리를 점령했다. 다니엘 란츠아우가 이끄는 덴마크군은 1565년 10월 20일 악스토르나 전투에서 스웨덴군을 격파했다.
해상에서는 스웨덴이 우세했다. 클라스 호른이 이끄는 스웨덴 해군은 덴마크-뤼벡 연합 함대를 독일 해안까지 추격하여 대부분 격파했다. 이후 호른은 에레순 해협으로 이동하여 통행세를 부과했다. 1565년 6월 4일, 메클렌부르크 해안에서 벌어진 부호 전투에서 덴마크-뤼벡 연합 함대 사령관 헤르루프 톨레가 치명상을 입었다. 1565년 7월 7일, 보른홀름 근처 해전에서 클라스 호른의 스웨덴 해군은 오토 루드가 지휘하는 덴마크-뤼벡 해군을 격파하고 덴마크 기함 예게르메스터호를 나포했다. 이 승리로 스웨덴은 그해 발트해 동부 해상 지배권을 확보했다.
스웨덴은 방어가 허술한 노르웨이 옘틀란드를 점령했으나, 트뢴델라그 주지사의 지휘를 받는 노르웨이군의 반격으로 빠르게 탈환되었다.[14] 1564년 클로드 콜라르가 이끄는 스웨덴군은 다시 옘틀란드, 헤르예달렌, 트뢴델라그, 트론헤임 시까지 재점령했다.[14] 초기에는 현지 주민들의 저항이 거의 없었지만, 이후 스웨덴군이 트뢴델라그 주민들을 학대하고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면서 스웨덴 침략에 대한 저항 의식이 싹트게 되었다.[14]
스웨덴은 노르웨이 동부도 공격했다. 남동부에서는 보후스 요새를 점령했지만 1566년에 상실했다. 1567년에는 다른 부대가 외스테르달렌 계곡을 지나 하마르를 점령하고 오슬로로 진격했다.[15]
1564년 8월, 에릭 14세는 블레킹에를 공격하여 점령했으나, 덴마크는 이후 이를 탈환했다.[16] 에릭 14세의 정신이상은 스웨덴의 전쟁 수행 능력을 저하시켰다. 덴마크는 지쳐있었고, 란츠아우가 약 8,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스몰란드와 외스터예탈란드를 공격하기 전까지는 대규모 공격을 하지 않았다.[16] 란차우는 1567년 겨울, 솜멘 호수의 얼음을 가로질러 외스터예탈란드를 약탈했다.[16]
1568년, 스웨덴 공작 요한은 그의 형제 에릭 왕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했다.[17] 요한 3세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오른 그는 덴마크와 협상을 시작했고, 같은 해 11월 18일 로스킬레에서 평화 협정 초안을 작성했다. 그러나 이는 스웨덴에 의해 거부되었고, 1569년에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덴마크는 공격하여 11월 13일 바르베리를 탈환했다. 반면 스웨덴은 스코네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4. 1. 초기 전투 (1563년 ~ 1564년)
1563년 5월, 야코브 브로켄후스(Jakob Brockenhuus)가 이끄는 덴마크 함대가 발트해로 출항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5월 30일, 보른홀름 해전에서 공식적인 전쟁 선포 없이 덴마크 함대가 야코브 바게(Jakob Bagge)가 이끄는 스웨덴 해군을 공격했으나 패배했다.[1]독일 왕실 사절들이 평화 협상을 위해 파견되었지만, 로스토크(Rostock) 회담에 스웨덴 측은 나타나지 않았다. 1563년 8월 13일, 덴마크와 뤼베크(한자 동맹) 사절들이 스톡홀름(Stockholm)에서 전쟁을 선포했다. 같은 달, 프레데리크 2세는 엘프스보리를 공격했다.[1] 덴마크군은 할란드(Halland)에서 2만 5천 명의 정규 용병으로 구성된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스웨덴의 서쪽 관문인 엘프스보리 요새(Älvsborg Fortress)를 공격, 9월 4일 3일간의 포격과 6시간의 돌격 끝에 함락시켰다. 이로써 덴마크는 스웨덴의 북해(North Sea) 접근을 차단, 중요한 소금(salt) 수입을 막는 목표를 달성했다.[1] 이후 에리크는 할름스타드(Halmstad)를 공격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스웨덴의 반격은 덴마크 정규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왕이 군대를 떠난 후 샤를 드 모르네(Charles de Mornay)가 지휘관이 되었지만, 마레드 전투에서 덴마크군에게 패했다.[1]
9월 11일, 외란드(Öland) 근해에서 해전이 벌어진 후 전쟁은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1]
프레데리크 2세는 1563년 스웨덴에 선전포고했다. 스웨덴은 핀란드를 통해 발트 해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고, 당시 덴마크령이었던 에스토니아(에스틀란트) 침공을 시도했다. 프레데리크 2세는 에스틀란트에도 군대를 파견했지만 주요 전장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였다.[1] 당시 덴마크령 스코네와 속국 노르웨이에서 스웨덴 침공이 시작되었다. 덴마크와 스웨덴은 발트 해 연안 영토를 놓고도 다투었는데, 1562년 에리크 14세는 나르바 점령을 위해 핀란드 만을 봉쇄했다. 이 봉쇄는 이 지역에 이해관계가 있던 덴마크와 뤼베크(한자 동맹)와의 분쟁을 야기, 프레데리크 2세의 강경책으로 이어졌다.[1]
스웨덴은 리보니아 전쟁으로 전력이 분산되었고, 에리크 14세의 정신 이상 등 덴마크에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1563년, 발트 해 남부 본홀름 해협 해전에서 핀란드인 제독 클라우스 호른에게 패배하며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1]
4. 2. 스웨덴의 반격과 해상 우위 (1565년 ~ 1566년)
1564년 5월 30일, 야코브 바게가 이끄는 스웨덴 해군과 헤르루프 톨레가 이끄는 덴마크-뤼벡 연합 해군이 갓란드와 외를란드 사이에서 해전을 벌였다. 이 해전에서 야코브 바게는 포로로 잡혔고, 발트해 최대 군함 마르스(Makalös)호가 침몰했다. 스웨덴 해군은 스톡홀름으로 후퇴했으나, 해상 봉쇄는 유지되었다. 클라스 호른이 새 사령관이 되어 8월 14일 외를란드 북쪽 융프룬 섬 근처에서 덴마크 함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승패는 가려지지 않았다.1565년, 클라스 호른은 할란드와 스코네 지방을 공격하고, 보후슬렌과 우데발라를 여러 차례 공격했다. 덴마크군은 베스테르예틀란드 지방의 뢰되세를 불태웠다. 에리크 14세는 처음에는 직접 군대를 이끌었으나, 이후 닐스 보이예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닐스 보이예는 1564년 8월 28일 바르베리를 점령했다. 다니엘 란츠아우가 이끄는 덴마크군은 1565년 10월 20일 악스토르나 전투에서 스웨덴군을 격파했다.
해상에서는 스웨덴이 우세했다. 클라스 호른이 이끄는 스웨덴 해군은 덴마크-뤼벡 연합 함대를 독일 해안까지 추격하여 대부분 격파했다. 이후 호른은 에레순 해협으로 이동하여 통행세를 부과했다. 1565년 6월 4일, 메클렌부르크 해안에서 벌어진 부호 전투에서 덴마크-뤼벡 연합 함대 사령관 헤르루프 톨레가 치명상을 입었다. 1565년 7월 7일, 보른홀름 근처 해전에서 클라스 호른의 스웨덴 해군은 오토 루드가 지휘하는 덴마크-뤼벡 해군을 격파하고 덴마크 기함 예게르메스터호를 나포했다. 이 승리로 스웨덴은 그해 발트해 동부 해상 지배권을 확보했다.
1566년 1월, 스웨덴은 노르웨이 영토였던 보후슬렌의 보후스 요새를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다니엘 란츠아우는 군대를 베스테르예틀란드로 이동시켰다. 해상에서는 클라스 호른이 계속해서 발트해에서 통행세를 징수했다. 1566년 7월 26일, 외를란드 해역에서 결정적이지 않은 해전이 벌어졌다. 7월 28일에는 해상 폭풍으로 덴마크-뤼벡 해군의 절반이 침몰했다. 이후 클라스 호른은 육군 지휘를 맡았고, 9월 9일에 사망했다.
4. 3. 노르웨이 전선 (1564년 ~ 1567년)
스웨덴은 방어가 허술한 노르웨이 옘틀란드를 점령했으나, 트뢴델라그 주지사의 지휘를 받는 노르웨이군의 반격으로 빠르게 탈환되었다.[14] 그러나 노르웨이군은 스웨덴 영토로 반격하지 않았다. 1564년 클로드 콜라르가 이끄는 스웨덴군은 다시 옘틀란드, 헤르예달렌, 트뢴델라그, 트론헤임 시까지 재점령했다.[14] 초기에는 현지 주민들의 저항이 거의 없었지만, 이후 스웨덴군이 트뢴델라그 주민들을 학대하고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면서 스웨덴 침략에 대한 저항 의식이 싹트게 되었다.[14] 베르겐후스 주지사 에리크 로젠크란츠는 3,500명의 현지 농민을 강제 동원하여 자신의 정규군 50명을 지원하게 했다. 스웨덴은 베르겐후스를 다음 목표로 삼았으나, 400명의 스웨덴 병사가 트뢴델라그에서 격퇴되었다. 스웨덴은 옘틀란드와 헤르예달렌을 계속 점령했고, 이 지역들은 1570년 평화협정 이후 덴마크-노르웨이에 의해 회복되었다.[15]스웨덴은 노르웨이 동부도 공격했다. 남동부에서는 보후스 요새를 점령했지만 1566년에 상실했다. 1567년에는 다른 부대가 외스테르달렌 계곡을 지나 하마르를 점령하고 오슬로로 진격했다.[15] 이들은 스키엔스피오르드까지 진격하여 스키엔을 불태웠다. 그러나 오슬로 시민들은 침입자들이 도시를 점령하기 전에 스스로 도시에 불을 질렀다. 남동쪽에서 더 많은 스웨덴군이 오슬로 근처 아케르후스 요새 점령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이들은 가는 길에 콩헬레와 사르프스보르그를 불태웠다. 그러나 에리크 로젠크란츠와 덴마크-노르웨이 국왕의 부대, 그리고 현지군에 의해 오슬로에서 격퇴되었다. 스웨덴군은 북동쪽으로 후퇴하면서 하마르를 불태우고,[15] 하마르 대성당 유적과 주교의 요새 궁전인 하마르후스를 파괴했다.
4. 4. 덴마크의 반격과 소모전 (1567년 ~ 1570년)
1564년 8월, 에릭 14세는 블레킹에를 공격하여 점령했으나, 덴마크는 이후 이를 탈환했다.[16] 에릭 14세의 정신이상은 스웨덴의 전쟁 수행 능력을 저하시켰다. 덴마크는 지쳐있었고, 란차우가 약 8,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스몰란드와 외스터예탈란드를 공격하기 전까지는 대규모 공격을 하지 않았다.[16] 란차우는 1567년 겨울, 솜멘 호수의 얼음을 가로질러 외스터예탈란드를 약탈했다. 그는 모든 들판과 집을 불태우고 가축을 파괴했다.[16] 란차우 군대는 솜멘 호수의 얼음 위로 진군했기 때문에 홀라베덴을 통해 그의 퇴로를 차단하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1568년 2월 중순에 할란드로 돌아왔다.[16]이 기간 동안 전쟁 당사국들 사이에 평화를 이루려는 시도가 있었다. 협상가에는 포메라니아 공작, 프랑스 사절 샤를 댕케, 페르디난트 1세와 막시밀리안 2세 황제가 포함되었다. 황제들은 덴마크와 스웨덴이 리보니아 전쟁 중에 리보니아에서 얻은 영토를 반환하기를 원했지만, 스웨덴은 이러한 요구를 거부했다.[17]
1568년, 스웨덴 공작 요한은 그의 형제 에릭 왕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했다.[17] 요한 3세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오른 그는 덴마크와 협상을 시작했고, 같은 해 11월 18일 로스킬레에서 평화 협정 초안을 작성했다. 그러나 이는 스웨덴에 의해 거부되었고, 1569년에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덴마크는 공격하여 11월 13일 바르베리를 탈환했다. 반면 스웨덴은 스코네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5. 슈테틴 조약과 전쟁의 결과
결국 양측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애매한 형태로 휴전했다. 양국의 국경선에는 변동이 없었지만, 덴마크는 에스토니아 재점령에 실패하고 스웨덴이 영유하게 되었다. 전쟁 종결 당시 덴마크는 사아레마아섬과 쿠를란트에 있는 주교구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곧 이 지역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양도하게 된다.[27]
1570년 프리드리히 2세와 요한 3세의 사절이 폼머른의 슈테틴에서 슈테틴 조약을 맺고 전쟁을 종결했다. 스웨덴은 덴마크에 점령지 반환 배상금을 지불하는 대신 덴마크의 왕위 계승권 주장을 포기하게 했다. 이 전쟁이 끝나자 스웨덴은 리보니아 전쟁에 복귀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양국의 국력을 소모시켰고 상호 관계 악화를 초래하여 이후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5. 1. 슈테틴 조약 (1570년)
1570년 9월 슈테틴에서 회의가 시작되었고, 같은 해 12월 13일 슈테틴 조약이 체결되면서 평화가 찾아왔다. 스웨덴 국왕은 노르웨이, 스코네, 할란드, 블레킹게, 외틀란드에 대한 주장을 철회했고, 덴마크는 스웨덴에 대한 주장을 철회했다. 발트해는 덴마크의 주권 해역으로 선포되었으며, 칼마르 동맹은 해체되었다. 스웨덴은 엘프스보리 성을 150000USD에 상환하고 나포한 군함을 반환해야 했다. 그러나 세 왕관 문장에 대한 분쟁은 해결되지 않아 이후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10]양측 모두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아, 결국 애매한 형태로 휴전이 이루어졌다. 양국의 국경선에는 변동이 없었지만, 덴마크는 에스토니아 재점령에 실패했고, 스웨덴이 영유하게 되었다. 전쟁 종결 당시 덴마크는 사아레마아섬과 쿠를란트에 있는 주교구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곧 이 지역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양도하게 된다.[27]
프리드리히 2세와 요한 3세의 사절은 폼머른의 슈테틴에서 슈테틴 조약을 맺고 전쟁을 종결했다. 스웨덴은 덴마크에 점령지 반환 배상금을 지불하는 대신 덴마크의 왕위 계승권 주장을 포기하게 했다. 이 전쟁이 끝나자 스웨덴은 리보니아 전쟁에 복귀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양국의 국력을 소모시켰고 상호 관계 악화를 초래하여 이후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5. 2. 전쟁의 결과
덴마크-노르웨이와 스웨덴 간의 전쟁 결과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각에서는 덴마크의 승리로 전쟁이 끝났다고 주장하지만,[18][19][20][13][21] 다른 일각에서는 결론 없이 끝났다고 주장한다.[22][23][24][25][26]결국 양측 모두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애매한 형태로 휴전이 되었다. 양국의 국경선에는 변동이 없었지만, 덴마크는 에스토니아 재점령에 실패하고 스웨덴이 영유하게 되었다. 전쟁 종결 당시 덴마크는 사아레마아섬과 쿠를란트에 있는 주교구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곧 이 지역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양도하게 된다.[27]
1570년에 프리드리히 2세와 요한 3세의 사절이 폼머른의 슈테틴에서 슈테틴 조약을 맺고 전쟁은 종결되었다. 스웨덴은 덴마크에 점령지 반환 배상금을 지불하는 대신 덴마크의 왕위 계승권 주장을 포기하게 했다. 이 전쟁이 끝나자 스웨덴은 리보니아 전쟁에 복귀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양국의 국력을 압박하고 상호 관계 악화를 초래하여 이후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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