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멀로니
1. 개요
브라이언 멀로니는 1939년 퀘벡주에서 태어난 캐나다의 정치인으로, 변호사와 기업인을 거쳐 1983년부터 1984년까지 야당 당수를 지냈다. 1984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캐나다의 제18대 총리로 취임, 1993년까지 재임했다. 재임 기간 동안 미국과의 자유 무역 협정(FTA) 체결, 북미 자유 무역 협정(NAFTA) 체결, 상품 및 서비스세(GST) 도입, 헌법 개혁 시도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환경 보호 및 외교 정책에도 힘썼으며, 1993년 정계에서 은퇴한 후에는 변호사, 기업인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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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칭 접두사 | 각하 |
|---|---|
| 이름 | 마틴 브라이언 멀로니 |
| 존칭 접미사 | 캐나다 추밀원 (PC) 캐나다 훈장 (CC) 퀘벡 국가 훈장 (GOQ) |
| 출생일 | 1939년 3월 20일 |
| 출생지 | 퀘벡주 베이코모 |
| 사망일 | 2024년 2월 29일 |
| 사망지 | 미국 플로리다주 팜비치 |
| 안장 장소 | 노트르담데네주 묘지, 몬트리올, 퀘벡 |
| 정당 | 캐나다 진보보수당 (1955년–2003년) 캐나다 보수당 (2003년 이후) |
| 배우자 | 밀라 피브니츠키 (1973년 결혼) |
| 자녀 | 4명, 캐롤라인, 벤 포함 |
| 친척 | 제시카 멀로니 (며느리) |
| 학력 | 세인트 프랜시스 자비에르 대학교 (문학사) 댈하우지 대학교 (학위 없음) 라발 대학교 (법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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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위 | 총리 |
|---|---|
| 순서 | 18대 |
| 임기 시작 | 1984년 9월 17일 |
| 임기 종료 | 1993년 6월 25일 |
| 군주 | 엘리자베스 2세 |
| 총독 | 잔 소베 레이 하낫이션 |
| 부총리 | 에릭 닐슨 돈 마잔코스키 |
| 이전 총리 | 존 터너 |
| 다음 총리 | 킴 캠벨 |
| 직위 | 야당 대표 |
|---|---|
| 임기 시작 | 1983년 8월 29일 |
| 임기 종료 | 1984년 9월 17일 |
| 이전 대표 | 에릭 닐슨 |
| 다음 대표 | 존 터너 |
| 직위 | 진보보수당 대표 |
|---|---|
| 임기 시작 | 1983년 6월 11일 |
| 임기 종료 | 1993년 6월 13일 |
| 이전 대표 | 에릭 닐슨 (임시) |
| 다음 대표 | 킴 캠벨 |
| 선거구 | 샤를부아 |
|---|---|
| 임기 시작 | 1988년 11월 21일 |
| 임기 종료 | 1993년 10월 25일 |
| 이전 의원 | 샤를앙드레 아믈랭 |
| 다음 의원 | 제라르 아슬랭 |
| 선거구 | 마니쿠아강 |
| 임기 시작 | 1984년 9월 4일 |
| 임기 종료 | 1988년 11월 21일 |
| 이전 의원 | 앙드레 말테 |
| 다음 의원 | 샤를 랑글루아 |
| 선거구 | 센트럴노바 |
| 임기 시작 | 1983년 8월 29일 |
| 임기 종료 | 1984년 9월 4일 |
| 이전 의원 | 엘머 맥케이 |
| 다음 의원 | 엘머 맥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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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진보보수당의 정치인 -
존 디펜베이커
존 디펜베이커는 변호사 출신으로 캐나다 하원 의원, 진보보수당 대표를 거쳐 1957년 캐나다 총리에 취임하여 캐나다 권리장전을 제정하고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
캐나다 진보보수당의 정치인 -
킴 캠벨
킴 캠벨은 캐나다의 정치인이자 변호사로, 1993년 캐나다의 제19대 총리를 역임했으며, 법무부 장관과 국방부 장관을 거쳐 총리 퇴임 후 외교관, 학자, 국제 기구 리더로 활동했다. -
캐나다의 변호사 -
폴 마틴
캐나다의 제21대 총리인 폴 마틴은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재임하며 재정 적자 감소에 기여하고 동성 결혼 합법화를 이끌었으나, 후원금 스캔들과 소수 정부 운영의 어려움, 그리고 미국 미사일 방어 프로그램 참여 거부 등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
캐나다의 변호사 -
장 크레티앵
장 크레티앵은 1993년부터 2003년까지 캐나다의 20대 총리를 역임했으며, 퀘벡 분리주의에 맞서 연방주의를 옹호하고 경제 개혁을 추진했다. -
댈하우지 대학교 동문 -
미셸 트뤼도
캐나다 전 총리 피에르 엘리 트뤼도의 막내아들인 미셸 트뤼도는 1998년 백컨트리 스키 중 익사 사고로 사망했으며, 그를 기리는 기념 장미나무가 개발되었다. -
댈하우지 대학교 동문 -
휴 맥레넌
캐나다의 소설가이자 수필가인 휴 맥레넌은 영국계와 프랑스계 캐나다인 관계를 탐구한 작품과 핼리팩스 대폭발을 배경으로 한 작품 등으로 캐나다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총독 문학상을 다섯 차례 수상하고 맥길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저명한 작가들을 양성했다.
2. 어린 시절과 교육
1939년 3월 20일 퀘벡주 베코모에서 아일랜드계 이민자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전기 기사였으며, 멀로니는 자식들이 베코모를 벗어나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바랐다. 그는 뉴브런즈윅주 채텀에 있는 사립 세인트토머스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노바스코샤주 앤티고니시에 있는 세인트프랜시스사비에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대학 시절, 그는 캠퍼스 내 보수당 클럽에 가입하고, 합동 대서양 대학 의회에서 총리를 맡는 등 적극적으로 정치 활동에 참여했다. 1956년 존 디펜베이커의 리더십 선거 운동을 지원했다. 영어와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사교적인 성격으로, 1961년 퀘벡주로 돌아와 라발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했다.
3. 변호사와 기업인 시절
멀로니는 1964년 몬트리올의 주요 로펌(현재 노턴 로즈 풀브라이트)에 변호사로 합류하여, 캐나다 아이언 오어 컴퍼니와 캐나다 전기 주식회사 등을 위한 노동 협상에서 전문성을 발휘했다. 1965년 부친이 사망하면서,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1973년에는 세르비아인 밀라 피브니츠키와 결혼했다.
1974년부터 1975년까지 퀘벡주 건설업의 폭력과 부패를 조사하는 클리슈 위원회에서 활동하며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퀘벡주에서 보수당의 주요 조직자이자 기금 모금자로 활동했다. 1976년 연방 진보보수당 대표 경선에 출마했으나, 3차 투표에서 탈락했다.
1976년 멀로니는 캐나다 아이언 오어 컴퍼니의 부회장이 되었고, 1977년부터 1983년까지 회장직을 역임하며 노사 관계 관리에 힘썼으며, 회사 운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1983년 진보보수당 대표 경선에 다시 출마하여, 최종 투표에서 조 클라크를 꺾고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4. 야당 당수 시절 (1983-1984)
1983년부터 1984년까지 캐나다의 야당 당수이자 센트럴노바 지역구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멀로니는 당내 갈등을 봉합하고, 선거 조직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성격상 온건하고 화해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경제, 프랑스어 사용 소수민족 권리, 미국-캐나다 관계, 연방-지방 관계 등에서 민간 부문 강화와 정부 개입 축소를 주장했다.
5. 총리 재임 (1984-1993)
1984년 총선에서 존 터너 총리의 자유당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며 캐나다 역사상 최다 의석(211석)을 확보했다. 퀘벡주에서 58석을 획득하며 퀘벡주 국수주의자들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고, 1984년 9월 17일 캐나다의 18대 총리로 취임했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상품 및 서비스 세(GST)를 도입하고,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1989년 1월 1일 발효)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체결하는 등 경제 정책을 추진했다. 미치레이크 협정과 샬럿타운 협정을 통해 퀘벡 주의 헌법 승인을 얻고자 노력했으나, 두 협정 모두 실패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에 강경한 입장을 취하여 넬슨 만델라 석방에 기여했으며, 걸프 전쟁 당시 캐나다군을 연합군에 파병했다. 1991년 미국과 산성비 및 이산화 황 배출 감소를 위한 대기질 지수 협정을 체결하고, 여러 국립공원을 지정하는 등 환경 정책에도 힘썼다.
5.1. 경제 정책
멀로니 행정부 초기 2년은 내각의 우유부단함과 스캔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으나, 1987년 미치레이크 협정과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을 발표하면서 국정 운영의 동력을 얻었다.
자유무역협정은 1988년 총선의 핵심 쟁점이 되었고, 보수당은 자유무역협정에 반대하는 자유당을 압도하며 재집권에 성공했다. 자유무역협정은 1989년 1월 1일 발효되었다.
1991년 1월 1일, 멀로니 정부는 새로운 상품 및 서비스 세금(GST)을 도입하여 큰 논란을 일으켰다. 멀로니는 상원에서 GST 법안 통과를 위해 상원의원 수를 늘리는 방법을 사용했다.
1990년대 초반 불경기로 인해 재정 적자가 심화되었지만, 보수당은 자유 무역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1992년 멕시코를 포함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체결하였다.
비평가들은 자유무역협정에 1990년대 초반 불경기의 심각성을 비난하였으나 보수당은 공개 무역 정책을 지속하였고, 멕시코를 포함한 북미자유무역협정을 협상하였다. 1992년 가을, 멀로니의 인기는 다른 헌법 협정을 조정하면서 역사상 다른 어느 총리보다 낮았다. 이른바 샬럿타운 협정은 수많은 위임과 협상 끝에 무산되었고, 전국 국민 투표에서 거절되었다.
5.2. 헌법 개혁
멀로니는 "명예와 열정"으로 퀘벡 주를 헌법에 포함시키겠다고 약속하며 퀘벡 주 국수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는 미치레이크 협정(1987년)과 샬럿타운 협정(1992년)을 통해 퀘벡 주의 헌법 승인을 얻고자 노력했다.
미치레이크 협정은 캐나다 내에서 퀘벡을 "독특한 사회"로 인정하고, 다른 주들에게도 여러 권한을 부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 협정은 엘리야 하퍼를 비롯한 일부의 반대와 클라이드 웰스의 비준 철회로 인해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특히, 미치레이크 협정의 좌절 과정에서 멀로니가 "주사위 던지기" 발언을 한 것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후 멀로니는 조 클락을 헌법 담당 장관으로 임명하고 샬럿타운 협정을 추진했다. 이 협정은 주 정부의 권한 강화, 토착 자치 정부 인정, 캐나다 대법원 및 상원 개혁 등 광범위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1992년 국민투표에서 퀘벡을 포함한 전국에서 과반수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5.3. 환경 정책 및 외교 정책
멀로니는 경제와 헌법 정책 외에도 외교와 환경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와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달리, 아파르트헤이트에 강경한 입장을 취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한 경제 및 외교 제재를 지지했다. 1990년 넬슨 만델라 석방 직후, 만델라는 캐나다의 지지에 대해 공개적으로 감사를 표했다.
걸프 전쟁 당시, 멀로니는 캐나다군을 연합군에 파병했다.
멀로니는 환경 보호에도 적극적이었다. 2006년, 캐나다 역사상 "가장 푸른" 총리로 선정되었다. 1991년, 미국과 산성비 및 이산화 황 배출 감소를 위한 대기질 지수 협정을 체결했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환경 보호법을 통과시키고, 8개의 새로운 국립공원을 지정했다.
6. 정계 은퇴 (1993)
1993년 2월, 멀로니는 정계 은퇴를 발표했다. 헌법 개정 실패, 경제 불황, GST에 대한 반감, 낮은 지지율 등으로 인해 그의 정치적 입지는 약화되었다. 그는 1993년 6월 25일, 킴 캠벨에게 총리직을 넘겨주고 정계를 떠났다.
1993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2석만을 얻는 참패를 당했고, 하원 내 공식 정당 지위를 상실했다. 많은 이들은 멀로니의 실패와 낮은 인기를 캐나다 정치 역사상 전례 없는 불행으로 비난했다.
7. 은퇴 이후
1993년부터 멀로니는 로펌 노턴 로즈 풀브라이트(이전 오질비 레노)의 수석 파트너로 활동했다. 1997년 6월, 연방 자유당 정부는 에어버스 스캔들에서 멀로니가 사기를 저질렀다는 잘못된 고발에 대해 사과했다.
1998년, 멀로니는 포브스 잡지의 국제판인 〈포브스 글로벌 비지니스 앤드 파이낸스〉의 의장이 되었고, 캐나다 훈장을 받았다.
2014년, 몬트리올에 본사를 둔 대중매체 회사 퀘베코르 Inc.의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8.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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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고록: 1939~1993(2007년)
멀러니의 회고록 회고록: 1939~1993은 2007년 9월 10일에 출간되었다. 멀러니는 피에르 엘리엇 트뤼도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군 복무를 회피한 것을 비판하고, 젊은 시절의 트뤼도가 반유대주의적 민족주의적 견해를 가지고 파시스트 독재자들을 숭배했다는 내용의 자료들을 긍정적으로 언급했다. 저명한 자유당 전략가인 탐 액스워시는 트뤼도는 그의 성숙한 견해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역사가이자 전 국회의원이자 트뤼도의 전기 작가인 존 잉글리시는 "이런 식으로 역사를 뒤져 명성을 깎아내리려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