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드퍼드 축구장 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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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래드퍼드 축구장 화재는 1985년 5월 11일, 잉글랜드 3부 리그 경기 중 브래드퍼드 시티 FC의 밸리 퍼레이드 경기장에서 발생한 대형 화재 참사이다. 경기 시작 전반전 종료 직전, 메인 스탠드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해 56명이 사망하고 265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영국 축구 역사상 최악의 화재 참사로 기록되었으며, 이후 경기장 안전 규정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화재 원인은 불분명하나, 낡은 목조 스탠드와 방화 관리 소홀이 피해를 키운 주요 요인으로 지목되었다. 사고 이후, 밸리 퍼레이드는 재건되었으며,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 활동과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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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퍼드 축구장 화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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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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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일 | 1985년 5월 11일 |
장소 | 밸리 퍼레이드, 브래드퍼드, 웨스트 요크셔, 잉글랜드 |
원인 | 관중이 담배를 끄려다 바닥 틈새로 떨어져 쓰레기에 불이 붙음 |
사망자 | 56명 |
부상자 | 265명 |
조사 | |
조사 | 포플웰 조사 |
검시관 | 제임스 턴불 |
2. 역사적 배경
브래드퍼드 시티 AFC의 홈구장인 밸리 퍼레이드는 1886년 건설되어[1] 오랫동안 사용된 경기장이다. 특히 1908년 잉글랜드 축구 1부 리그 승격 후 축구 건축가 아치볼드 레이치가 설계하여 1911년 완공한[2][3] 메인 스탠드는 1985년 화재 발생 시점까지 70년 넘게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4]
이 메인 스탠드는 목재 구조물이었고, 좌석 아래 틈새로 쓰레기가 쌓이기 쉬워 화재 위험이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었다.[5][6] 실제로 1984년 웨스트 요크셔 카운티 의회는 "부주의하게 버려진 담배가 화재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며 안전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6]
1975년 제정된 스포츠 경기장 안전법(The Safety of Sports Grounds Act 1975)은 경기장 안전 기준을 규정했지만, 당시에는 상위 리그인 1부와 2부 리그 소속 클럽 경기장에만 의무 적용되었다.[62][63] 따라서 1984-85 시즌 당시 3부 리그에 속해 있던 브래드퍼드 시티의 밸리 퍼레이드는 이 법의 적용을 받지 않아 안전 개선 조치가 의무화되지 않은 상태였다.[62]
하지만 브래드퍼드 시티가 1984-85 시즌 3부 리그에서 우승하며 다음 시즌 2부 리그로의 승격이 확정되면서[64] 상황이 바뀌었다. 승격에 따라 1985-86 시즌부터는 경기장 안전법의 적용을 받게 되었고,[62] 클럽은 시즌 마지막 홈 경기가 끝난 후 노후된 목재 스탠드를 철거하고 콘크리트 구조물로 교체하는 등 대대적인 개보수 공사를 시작할 계획이었다.[12][62] 화재는 바로 이 마지막 홈 경기 도중 발생했다.
2. 1. 밸리 퍼레이드 경기장

웨스트 요크셔의 브래드퍼드에 위치한 밸리 퍼레이드 경기장은 1886년에 건설되어 처음에는 매닝햄 럭비 풋볼 클럽의 홈구장으로 사용되었다.[1] 1903년 브래드퍼드 시티 AFC가 창단되면서 이 경기장을 홈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경기장과 스탠드는 기본적인 수준이었으나, 18,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다.[1]
1908년 브래드퍼드 시티가 잉글랜드 축구 1부 리그로 승격하자, 클럽은 시설 개선을 결정하고 유명 축구 건축가 아치볼드 레이치에게 설계를 맡겼다.[2] 1911년에 완료된[3] 이 작업에는 5,300명을 수용하는 메인 스탠드와 7,000명의 서서 보는 관중을 위한 앞쪽 패독 공간이 포함되었다.[2] 메인 스탠드는 "거대한 구조물"로 평가받았지만, 언덕 경사면에 지어져 입구가 모두 뒤편 높은 곳에 있는 독특한 구조였다.[4]
이후 다른 부분에 약간의 변화는 있었으나, 메인 스탠드는 1985년 화재 발생 시점까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4] 축구장 전문가 사이먼 잉글리스는 낡은 지지대 때문에 스탠드 시야가 마치 "소프위드 캐멀 전투기 조종석에서 축구를 보는 것 같다"고 묘사했으며,[5] 좌석 틈새로 쓰레기가 쌓여 화재 위험이 있음을 경고하기도 했다. 실제로 1984년 7월, 카운티 의회 소속 엔지니어는 경기장 개선 지원금 신청과 관련하여 클럽 측에 다시 한번 안전 문제를 지적했다. 의회 서신에는 문제점을 "가능한 한 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내용과 함께, "부주의하게 버려진 담배가 화재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구체적인 경고가 담겨 있었다.[6]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즉각적인 개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85년 3월, 클럽은 새로운 지붕을 설치하기 위한 강철 자재를 반입하는 등 개선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6] 계획에는 노후된 목재 스탠드를 콘크리트로 교체하는 작업도 포함되어 있었으며,[12] 총 예상 비용은 40만파운드였다.[8]
당시 영국의 경기장 안전 규정은 1975년 제정된 '스포츠 경기장 안전법'(The Safety of Sports Grounds Act 1975)에 따랐으나,[62][63] 이 법은 1부 및 2부 리그 클럽 경기장에만 적용되었다.[62][63] 사고 당시 3부 리그 소속이었던 브래드퍼드 시티의 밸리 퍼레이드는 법 적용 대상이 아니었다.[62] 경기장은 이미 76년이나 되어 노후했고, 소방 당국으로부터 여러 차례 화재 위험 경고를 받은 상태였다.[62] 브래드퍼드 시티는 1984-85 시즌 3부 리그 우승으로 다음 시즌 2부 리그 승격이 확정되었기에,[64] 1985-86 시즌부터는 경기장 안전법의 적용을 받게 될 예정이었다.[62] 이에 따라 1985년 5월 11일 시즌 최종전 이후 경기장 개수 공사가 시작될 계획이었다.[62]
2. 2. 1984-85 시즌 브래드퍼드 시티 AFC
1984-85 시즌은 브래드퍼드 시티에게 가장 성공적인 시즌 중 하나였다. 시즌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이미 볼턴 원더러스를 2-0으로 꺾으며 3부 리그 우승을 확정 지은 상태였다.[7] 이는 클럽이 3부 (북부)에서 우승한 지 56년 만에 처음으로 차지한 리그 우승 트로피였다.[8][9]
이에 따라 1985년 5월 11일, 밸리 퍼레이드에서 열린 중위권 팀 링컨 시티와의 시즌 마지막 홈 경기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경기 시작 전에는 브래드퍼드 출신의 주장 피터 잭슨이 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시상식이 열렸다.[7][60]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하기 위해 11,076명의 관중이 경기장을 찾았는데, 이는 시즌 평균 관중 6,610명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수치였다. 이 중 약 3,000명은 화재가 발생하게 될 메인 스탠드에 자리했다.[8][9] 관중석에는 지역 유력 인사들과 브래드퍼드의 자매 도시인 벨기에 베르비에, 서독의 묀헨글라트바흐, 함에서 온 손님들도 포함되어 있었다.[10][11]
하지만 당시 밸리 퍼레이드의 메인 스탠드는 1911년 아치볼드 레이치에 의해 지어진 이후[3] 거의 개축되지 않은 채 낡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4] 축구장 작가 사이먼 잉글리스는 낡은 지지대 때문에 시야가 좋지 않다고 지적하며, 좌석 아래 틈새로 쓰레기가 쌓여 화재 위험이 있음을 경고하기도 했다.[5] 실제로 1984년 7월, 웨스트 요크셔 카운티 의회는 클럽 측에 보낸 서신을 통해 "부주의하게 버려진 담배가 화재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며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6]
브래드퍼드의 지역 신문인 ''텔레그래프 & 아거스''는 경기 당일 "퍼레이드 그라운드를 위한 광택"이라는 제목의 특별호를 발행했다. 이 기사에서는 클럽의 2부 리그 승격에 맞춰 경기장 시설 개선 계획이 진행 중임을 알렸다. 노후된 목재 지붕을 강철로 교체하고,[8] 나무 계단식 관람석을 콘크리트로 대체하는 등 약 40만파운드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는 안전 작업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8][12] 이미 1985년 3월에는 새로운 지붕을 위한 강철 자재가 경기장에 도착해 있었다.[6]
3. 화재 발생
1985년 5월 11일, 브래드퍼드 시티와 링컨 시티의 3부 리그 경기가 열린 밸리 퍼레이드 경기장의 메인 스탠드에서 화재가 발생했다.[59] 당시 브래드퍼드 시티는 이미 다음 시즌 2부 리그 승격이 확정된 상태였고, 경기 전 피터 잭슨 주장에게 우승 트로피가 수여되는 등 축제 분위기였다.[60]
경기는 오후 3시 4분에 시작되었고,[13] 전반 종료 5분 전인 오후 3시 40분경(혹은 오후 3시 44분[10][15]) 메인 스탠드 G 구역 아래에서 처음 불길이 목격되었다.[60] 화재는 한 관중이 버린 담배꽁초가 스탠드 바닥 틈새로 떨어져 아래 쌓여있던 쓰레기에 옮겨붙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16][70][71] 당시 스탠드는 계단 챌판이 없는 구조여서 바닥 아래 공간에 쓰레기가 쉽게 쌓일 수 있었다.[10]
초기 화재 진압 시도는 소화기가 기물 파손 우려로 경기장 사무실에 보관되어 있어 실패했고,[65] 불길은 오래된 목조 스탠드와 아스팔트 방수 펠트 및 콜타르 페인트로 덮인 지붕을 타고 급격히 번져나갔다.[10][65] 불과 4분 만에 스탠드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으며,[11][60] 타는 목재와 녹아내린 지붕 물질이 관중석으로 떨어지고 짙은 검은 연기가 발생하여 대피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10][15]
관중들은 경기장 피치나 스탠드 뒤편 출구로 탈출하려 했으나, 뒤편 출구 대부분은 잠겨 있거나 회전식 문으로 되어 있어 탈출이 쉽지 않았다.[8][10][65] 다행히 스탠드와 피치 사이에 높은 울타리가 없어 많은 사람이 피치로 뛰어내려 압사 사고를 피할 수 있었고,[10] 일부 관중과 외부 사람들의 도움으로 잠긴 출입문 몇 개가 강제로 열리면서 탈출구가 확보되었다.[8][10][15] 혼란 속에서도 선수 존 홀리, 코치 테리 요라스, 경찰, 팬들이 서로 구조를 도왔다.[14][17][18]
소방대는 신고 접수 4분 만에 도착했지만, 이미 불길이 거세고 구조 작업이 우선이었기에 즉각적인 화재 진압은 어려웠다. 화재로 메인 스탠드는 전소되었고, 총 56명이 사망했으며, 이 중 상당수는 연기 흡입으로 인한 질식사였다.[11]
3. 1. 발화 및 초기 확산
경기는 오후 3시 4분에 시작되었고, 하프 타임 5분 전인 오후 3시 44분경 메인 스탠드의 G 구역 뒤편에서 처음 화재 징후가 포착되었다.[10][15] 해설자 존 헬름은 타는 듯한 불빛을 처음 목격했다고 보고했다.[10][15]화재 원인은 한 관중이 떨어뜨린 담배꽁초가 좌석 바닥 틈새로 떨어져, 스탠드 아래 수개월간 쌓여있던 쓰레기에 불이 붙은 것으로 추정된다.[16][70][71] 당시 스탠드 좌석에는 계단 챌판이 없어 바닥 아래 공간에 쓰레기가 쌓이기 쉬운 구조였으며, 한 목격자는 바닥판 아래 약 약 22.86cm 깊이에서 종이나 쓰레기가 타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10] 존 헬름은 인터뷰에서 한 관중이 담배를 떨어뜨린 후 발로 밟아 끄려 했으나 틈새로 빠졌고, 이후 연기가 나 커피를 부었지만 다시 불길이 솟아올랐다고 설명했다.[16] 다른 목격자는 근처 노인이 담배꽁초를 플라스틱 컵에 넣었다가 좌석 아래로 떨어뜨렸고, 타는 냄새가 나자 컵을 찾으려 했지만 이미 불이 시작되었다고 증언했다.[70]
일부 관중은 발밑에서 뜨거움을 느끼기 시작했다.[10] 한 관중이 소화기를 찾으려 스탠드 뒤편으로 갔으나 찾을 수 없었다. 경찰관이 동료에게 소화기를 외쳤지만, 이 요청은 잘못 전달되어 대신 소방대에 무선 연락이 갔고, 전화는 오후 3시 43분에 이루어졌다.[10][11] 경기장 내 소화기는 기물 파손 및 장난 사용 우려로 운영자가 사무실에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기 진화에 사용할 수 없었다.[8][65]
불길은 매우 빠르게 확산되어 눈에 보이기 시작했고, 경찰은 스탠드의 관중들을 대피시키기 시작했다.[10] 목조 스탠드와 아스팔트 방수 펠트 및 콜타르 페인트로 덮인 지붕이 순식간에 불타올랐다.[10][65] 타는 나무와 녹아내린 물질이 지붕에서 관중석으로 떨어졌고, 짙은 검은 연기가 스탠드 뒤편 통로를 가득 메워 탈출을 어렵게 만들었다.[10] 한 목격자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순식간에 번졌고 연기가 숨 막힐 정도였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15]
관중들이 경기장으로 뛰어내리자 부심이 심판 노먼 글로버에게 알렸고, 전반 종료 3분을 남기고 경기가 중단되었다.[13] 스탠드 전체가 불길에 휩싸이는 데는 4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11][60]
팬들은 스탠드 뒤쪽 출구나 경기장 쪽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경기장과 스탠드 사이에 팬들의 난입을 막는 울타리가 없어 경기장으로의 대피는 비교적 용이했으며, 이는 1989년 힐스보로 참사와 같은 압사 사고를 피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뒤편 출구 대부분은 잠겨 있거나 닫혀 있었고, 회전식 문이 탈출을 방해하기도 했다.[8][10][65] 관리자도 부재했지만, 7개의 출입문이 강제로 열리거나 열려 있는 상태로 발견되어 일부 관중이 탈출할 수 있었다.[8][10][15] 세 명의 남성이 문 하나를 부쉈고, 최소 한 개의 문은 외부에서 사람들이 열어주었다.[10][15]
소방대는 신고 접수 4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으나, 이미 스탠드 전체가 거대한 불길과 짙은 연기에 휩싸인 상태였다. 스탠드에 갇힌 사람들을 구조하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즉시 화재 진압에 나서기 어려웠다.
3. 2. 급격한 확산 및 대피
오후 3시 44분, 하프 타임 5분 전에 메인 스탠드 G 구역 뒤쪽에서 첫 화재 징후가 목격되었다.[10][15] 한 관중이 떨어뜨린 담배꽁초가 좌석 아래 수개월간 쌓여 있던 쓰레기 더미에 옮겨붙은 것이 발화 원인으로 추정되었다.[16][70][71] 일부 관중은 발밑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으나[10], 기물 파손 우려로 경기장 내 소화기가 별도로 보관되어 있어 초기 진압 시도가 이루어지지 못했다.[10][65] 한 경찰관이 소화기를 요청하는 외침은 동료에게 잘못 전달되어 대신 소방대 호출로 이어졌고, 오후 3시 43분에야 소방 당국에 신고가 접수되었다.[10][11]불길은 오래된 목재 스탠드와 아스팔트 방수 펠트 및 콜타르 페인트로 덮인 지붕을 타고 매우 빠르게 번져나갔다.[10][65] 산 모양의 지붕 구조는 열기와 가연성 가스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지붕을 따라 옆으로 빠르게 확산되는 결과를 낳았다.[65] 불꽃이 보이자 경찰은 스탠드에서 관중 대피를 시작했으나[10], 불과 4분도 채 되지 않아 스탠드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다.[11][60] 타는 목재와 녹아내린 지붕 물질이 관중석으로 떨어졌고, 짙은 검은 연기가 발생하여 많은 관중이 탈출하려던 스탠드 뒤 통로를 뒤덮으며 시야를 가리고 호흡을 곤란하게 만들었다.[10][15] 한 목격자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순식간에 번졌어요. 그런 건 처음 봤어요. 연기가 숨 막히는 수준이었어요. 숨을 쉬기 힘들 정도였어요."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15]
관중들은 스탠드 뒤쪽 출구나 경기장 쪽으로 필사적으로 대피하려 했다.[10] 다행히 스탠드와 경기장 사이에 팬들의 난입을 막는 높은 펜스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 많은 사람이 경기장으로 뛰어내려 대피할 수 있었고 이는 1989년 힐스보로 참사와 같은 압사 사고를 피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10] 하지만 스탠드 뒤쪽 출구 대부분은 잠겨 있거나 닫혀 있었고, 문을 열어줄 스튜어드도 부족했다.[8][10] 일부 관중이 힘을 합쳐 문을 부수거나 외부의 도움으로 7개의 출입문이 강제로 열리면서 더 큰 인명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8][10][15] 한 생존자는 "팬들이 자물쇠가 채워진 출구로 몰려들면서 공황 상태가 발생했습니다. 건장한 남성 두세 명이 힘을 가해 문을 부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는 탈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증언했다.[15] 스탠드 앞쪽에서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먼저 벽 너머 경기장으로 내려보내는 등 필사적인 탈출이 이루어졌다.[10]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경기장으로 탈출한 팬들과 경찰관들은 스탠드에 남은 다른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 노력했다.[17] 브래드퍼드 시티의 선수였던 John Hawley|존 홀리영어와[14] 당시 코치였던 Terry Yorath|테리 요라스영어 등도 구조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18]
소방대는 최초 신고 접수 후 4분 만에 경기장에 도착했다.[11] 그러나 그 시점에는 이미 화재가 스탠드 전체를 집어삼켜 거대한 불길과 매우 짙은 연기에 직면한 상태였다. 소방대는 스탠드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화재 진압에 집중하기보다는 구조 활동을 우선적으로 진행해야 했다.
3. 3. 구조 및 진압
불길은 매우 빠르게 번져나갔고, 불꽃이 보이자 경찰은 스탠드에서 사람들을 대피시키기 시작했다. 화재가 번지면서 나무로 된 스탠드와 아스팔트 방수 펠트로 덮인 지붕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타는 목재와 녹아내린 물질이 지붕에서 아래 관중석으로 떨어졌고, 짙은 검은 연기가 많은 관중이 탈출하려던 스탠드 뒤쪽 통로를 가득 메웠다.[10] 한 목격자는 BBC에 "정말 순식간에 번졌어요. 그런 건 처음 봤습니다. 연기가 숨 막힐 정도였어요. 숨쉬기 어려웠습니다."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15] 스탠드 전체가 불길에 휩싸이는 데는 4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11]관중들은 스탠드 뒤쪽으로 달려가거나 경기장 안쪽 피치로 내려가 탈출했다. 다행히 스탠드에는 팬들의 피치 난입을 막는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 1989년 힐스보로 참사와 같은 압사 사고는 피할 수 있었다. 당시 촬영된 영상에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일부 관중이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이 담기기도 했다.
뒤쪽 출구 대부분은 잠겨 있거나 닫혀 있었고, 문을 열어줄 안내 요원도 없었다. 하지만 7개의 출입문은 강제로 열리거나 열려 있는 상태였고,[8][10] 세 명의 남성이 문 하나를 부수었으며, 최소 한 개의 출구는 바깥에 있던 사람들이 열어주어 더 많은 인명 피해를 막는 데 기여했다.[10][15] 제프리 미첼은 "팬들이 잠긴 출구로 몰려들면서 공황 상태가 벌어졌습니다. 건장한 남성 두세 명이 힘껏 문을 부쉈어요. 그게 아니었다면 저도 빠져나오지 못했을 겁니다."라고 증언했다.[15] 스탠드 앞쪽에서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벽 너머 아래쪽으로 던져 내려보내 탈출을 도왔다. 피치로 탈출한 사람들은 대부분 구조될 수 있었다.[10]
화재 현장에서는 탈출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 애썼다. 경찰관들도 구조 활동에 참여했다. 한 남성은 불타는 좌석을 넘어 다른 팬을 도우러 갔고,[17] 선수 존 홀리 역시 구조에 힘을 보탰다.[14] 한 경찰관은 팬들을 출구로 안내했지만 문이 닫혀 있어 다른 길로 돌아가야 했다.[10] 브래드퍼드 시티의 코치 테리 요라스는 자신의 가족이 스탠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18] 사람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피치로 달려갔다. 다른 한 선수는 사무실 공간에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기도 했다.[18] 한 팬은 다른 팬의 머리에 붙은 불을 자신의 점퍼로 덮어 끄기도 했다.[11] 탈출한 사람들은 경기장 밖의 이웃집이나 펍으로 옮겨졌고, 일부는 화재 발생 불과 한 시간 뒤에 방송된 TV 프로그램 '월드 오브 스포츠'를 통해 화재 영상을 보게 되었다.
웨스트요크셔 소방 구조대는 오후 3시 43분에 신고를 받고[11] 4분 만에 경기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도착했을 때는 이미 화재가 스탠드 전체를 집어삼킨 상태였고, 거대한 불길과 매우 짙은 연기에 직면했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스탠드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소방대는 즉시 화재 진압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화재로 인해 메인 스탠드는 완전히 파괴되어 타버린 좌석 골조와 철제 난간만 앙상하게 남았다. 사망자 중 일부는 지붕에서 떨어진 방수포 잔해에 덮인 채 좌석에 앉은 자세 그대로 발견되기도 했다. 경찰은 다음 날 오전 4시까지 조명 아래에서 모든 시신을 수습했다. 화재로 총 56명이 사망했으며, 상당수는 연기 흡입이 원인이었지만 일부는 병원으로 옮겨진 뒤 숨졌다.[11]
4. 피해 상황
이 화재는 영국 축구 역사상 최악의 화재 참사로 기록되었으며, 1971년 이브록스 참사 이후 영국 축구계에서 발생한 가장 큰 인명 피해 사고였다.[10] 총 56명이 사망하고 265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2][10] 사망자 대부분은 브래드퍼드 시티 팬이었으나, 링컨 시티 팬 2명도 포함되었다.[14]
이 비극적인 사건은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마거릿 대처 당시 영국 총리,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등이 애도의 메시지를 보냈으며,[15]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 튀니지의 셰들리 클리비 대통령, 스페인의 펠리페 곤살레스 총리 등 세계 각국 지도자들도 위로를 전했다.[38]
당시 브래드퍼드 시티의 회장이었던 스태포드 헤긴보텀은 "우리의 날이 될 뻔했다"며 안타까움을 표했고, 테리 요라스 코치는 "내 인생 최악의 날"이라고 회고했다.[11] 현장을 지휘했던 배리 오스본 경찰서장은 참혹한 장면에 많은 경찰관이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11]
이 참사는 생존자와 목격자들에게 깊은 정신적 상처를 남겼다. 당시 12세였던 크리스토퍼 해먼드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아버지에게 미친 영향을 보며 사건의 심각성을 깨달았다고 말했으며, 그의 아버지는 생존자 죄책감으로 상담 치료를 받아야 했다.[39]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목발을 짚고 있던 17세의 매튜 와일드만은 다른 팬들의 도움으로 탈출했지만, "그날의 끔찍한 기억이 아직도 있지만, 우리가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의 인간성에 대해 생각한다"고 회상했다.[40]
4. 1. 사망자 및 부상자
화재로 총 56명이 사망했으며,[2][11] 이 중 54명은 브래드퍼드 시티 팬이었고 2명은 링컨 시티 팬이었다.[14] 사망자 중 상당수는 연기 흡입으로 인해 사망했으나, 일부는 병원으로 옮겨진 후 숨졌다.[11] 사망자 중에는 화장실을 통해 탈출하려던 3명, 스탠드 뒤쪽 중앙의 K 출구와 6번부터 9번까지의 회전식 출입구에서 발견된 27명, 좌석에서 사망한 노인 2명이 포함되었다.[10] 일부는 회전식 출입구 아래로 기어가려다 압사하기도 했다.[10] 사망자 중 11명은 18세 미만이었고, 23명은 65세 이상이었다.[19] 최고령 희생자는 86세의 클럽 전 회장 새뮤얼 퍼스(샘 퍼스)로,[10][15] 그는 화재로 인한 화상으로 병원에서 치료 중 사망했다.[60] 또한, 브래드퍼드 시티 선수였던 도널드 굿먼이 초대한 여자친구와 친구들도 모두 이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66]이 외에도 265명 이상의 지지자가 부상을 입었으며,[10] 많은 부상자들이 심각한 화상과 그 후유증으로 인해 장기간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60] 경찰의 구조 활동과 현장에 있던 팬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희생자 수는 더 늘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60]
4. 2. 피해자 치료 및 브래드퍼드 화상 치료 센터
화재 이후 많은 희생자들을 치료한 데이비드 샤프 교수에 의해 브래드퍼드 화상 치료 센터(Bradford Burns Unit)가 설립되었다. 그는 브래드퍼드 왕립 병원(Bradford Royal Infirmary)에서 부상자들을 치료하면서 영국 성형외과 의사의 10%에 해당하는 인원의 지원을 받았다. 샤프는 이 치료 과정에서 민감한 부위에 균일한 압력을 가하는 브래드퍼드 슬링(Bradford Sling)[20]을 개발했으며, 이 슬링은 현재 화상 치료에 국제적으로 사용되고 있다.[21]화재 직후, 샤프는 200명이 넘는 환자들의 부상을 계획하고 치료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실험적인 치료법이 사용되었다. 화재 당시 17세였던 매튜 와일드먼은 "나는 온갖 새로운 피부 이식 기술로 다섯 번이나 다른 실험을 받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얼굴이 자연적으로 회복되도록 돕는 약물을 주사받았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22]
이 화재 사고는 브래드퍼드 대학교에 성형외과 및 화상 연구 그룹이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다.[77] 이 연구 그룹은 최첨단 연구 시설과 임상 데이터를 바탕으로 영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저명한 성형외과 의사를 배출하고 있다.[77] 또한 오랜 연구 활동을 통해 연구 범위는 암, 색소성 소양증, 탈모 등 피부 과학 전반으로 확대되었다.[77]
화재 25주년인 2010년 5월 11일, 브래드퍼드 대학교는 성형외과 및 화상 연구 부서를 확장하여 영국 최대 규모의 피부 과학 학술 연구 센터인 '브래드퍼드 축구장 화재 기념 연구 센터'를 설립했다.[23][77] 이 대학은 피부와 머리카락에 관한 영국 내 최대 연구 그룹을 위해 전 세계에서 최고 수준의 연구자들을 유치하고 있다.[77]
5. 화재 이후의 조사와 법적 대응
화재 참사 이후, 올리버 포플웰 경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 위원회가 구성되어 사고 원인과 책임을 규명하기 위한 조사를 진행했다.[24] 조사 결과, 경기장 시설의 안전 문제와 관리 소홀이 지적되었으며, 특히 낡은 목재 관람석 아래 쌓인 쓰레기가 주요 화재 위험 요소였음이 드러났다.[25] 또한, 축구 훌리건 방지 목적이 아닌 일반적인 출입 통제를 위해 잠겨 있던 출입문이 피해를 키운 요인 중 하나로 밝혀졌다.
조사 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영국 내 스포츠 경기장의 안전 규정이 강화되었으며, 특히 목재 관람석의 신규 설치 금지 및 기존 노후 관람석 폐쇄, 관람석 내 흡연 금지 등의 조치가 포함된 새로운 법률이 제정되었다.[24]
한편, 화재 피해자 및 유족들은 브래드퍼드 시티 구단과 웨스트 요크셔 광역 카운티 의회를 상대로 법적 소송을 제기했으며, 법원은 구단과 카운티 의회 양측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26][27]
그러나 조사 과정과 결과, 책임 소재 규명에 대해서는 이후에도 논란이 제기되었다. 화재 생존자이자 유족인 마틴 플레처는 구단 경영진의 책임 회피와 조사 과정의 미흡함을 지적하며 추가적인 의혹을 제기했고,[26][36] 전직 화재 조사관 등 전문가들도 포플웰 조사의 한계를 지적하며 재조사를 촉구하기도 했다.[53] 플레처는 당시 구단주였던 스태포드 헤긴보텀 소유의 다른 사업체들에서 과거 여러 차례 화재가 발생했던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37] 이러한 재조사 요구는 2016년 독립 경찰 불만 위원회(IPCC)에 의해 공식적으로 거부되었다.[54]
5. 1. 포플웰 조사 위원회
1985년 5월 13일, 레온 브리턴 당시 내무 장관은 영국 하원에서 고등법원 판사인 올리버 포플웰 경을 위원장으로 하는 사고 조사 위원회를 설치한다고 발표했다.[73] 이 위원회는 흔히 '포플웰 조사 위원회'라고 불린다.[24]포플웰 조사 위원회는 조사 결과, 브래드퍼드 시티 구단이 관람석 아래 쌓인 쓰레기가 화재 위험을 초래한다는 경고를 여러 차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6] 웨스트 요크셔 경찰은 5월 15일, 현장 근처 관객의 증언을 토대로 관객의 부주의한 담배꽁초 처리가 화재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발표했다.[70][71] 한 증언에 따르면, "저는 5살 된 딸과 함께 관전하고 있었는데, 근처에 앉아 있던 3명의 노인 중 한 명이 흡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흡연하던 남성은 담배꽁초를 플라스틱 컵에 넣었는데, 그 컵을 좌석 아래로 떨어뜨렸습니다. 그의 동료가 플라스틱이 연소되면서 탄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고 지적하자, 남성은 바닥 아래로 들어가 컵을 찾기 시작했지만, 그때 이미 바닥 아래에서 불이 시작되었고, 순식간에 불이 번졌습니다."[70] 위원회는 버려진 담배꽁초와 더불어, 교체 비용 문제로 방치된 낡은 목재 관람석 아래 쌓여 있던 종이 쓰레기가 풋볼 리그 역사상 최악의 참사를 일으키는 데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결론지었다.[25] 또한 사고 당시 많은 경기장에는 축구 훌리건 행위를 막기 위한 펜스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브래드퍼드의 메인 관람석에는 펜스가 없어 대부분의 관중이 경기장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만약 펜스가 있었다면 사망자 수는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출입구 회전식 문은 잠겨 있었고, 이를 열어줄 직원도 없어 일반 출입구를 통한 탈출은 불가능했으며, 이 경로를 이용하려던 많은 팬들이 사망하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포플웰 조사 위원회는 영국 축구 경기장의 안전을 개선하기 위한 새로운 법률 도입을 이끌었다.[24] 위원회의 중간 보고서와 최종 보고서는 1975년 스포츠 경기장 안전법이 적용 대상 범위가 너무 제한적이라고 지적하며, 500명 이상을 수용하는 모든 실내외 경기장으로 방화 대책법 적용을 확대해야 한다고 권고했다.[63] 주요 권고 사항에는 영국 스포츠 경기장에 새로운 목재 관람석 설치 금지,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기존 목재 관람석의 즉각적인 폐쇄, 그리고 다른 목재 관람석에서의 흡연 금지 등이 포함되었다.[24]
1986년 최종 보고서가 공표되자[60], 내무성은 이를 수용하여 1987년 기존 법률을 개정하고 경기장의 새로운 건축 기준 등 안전 기준을 명시한 "스포츠 경기 시설의 방화 및 안전법"(The Fire Safety and Safety of Places of Sport Act 1987)을 제정했다.[74][63] 이 법에 따라 새로운 목조 경기장 건설은 금지되었다.[64] 또한, 경기장 운영의 안전 및 경비 가이드라인을 담은 내무성 발행 지침서 "그린 가이드" 역시 포플웰 보고서의 내용을 반영하여 개정되었다.[63]
하지만 포플웰 조사 결과와 그 과정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2010년, 화재 생존자이자 힐스버러 참사 목격자이기도 한 마틴 플레처는 화재 당시 구단 수뇌부의 책임 회피와 미흡한 조사 과정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26] 그는 포플웰 보고서가 힐스버러 참사 이후의 테일러 보고서에 비해 수준이 낮고 실망스럽다고 평가하며, 가족 4명을 잃은 화재에 대해 여전히 많은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고 주장했다.[36] 플레처는 2015년 『56: 브래드퍼드 화재 이야기』(Fifty-Six: The Story of the Bradford Fireeng)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이 책에서는 화재 발생 전 18년 동안 당시 브래드퍼드 시 구단주였던 스태포드 헤긴보텀이 소유한 다른 사업체들에서 총 8건의 화재가 발생했으며, 이 중 상당수가 큰 피해를 남기고 거액의 보험금 지급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폭로했다.[37]
전직 소방서 화재 조사관이었던 나이젤 아담스는 플레처의 책에 자극받아 새로운 조사를 촉구하는 데 동참했다. 그는 1985년 당시 영국의 화재 조사가 초기 단계였음을 인정하면서도, 포플웰 조사가 점화원을 찾는 데 사용된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고, 조사가 너무 성급하게 단 며칠 만에 마무리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같은 날 발생한 다른 사건(버밍엄 시 폭동)까지 조사 범위에 포함시킨 것은 조사의 신뢰성을 떨어뜨린다고 비판했다.[53] 아담스는 플레처의 주장이 악의적이거나 과장된 것이 아니며, 제시된 사실만으로도 사건을 재검토해야 할 도덕적 당위성이 충분하다고 강조했다.[53] 그러나 이러한 재조사 요구에도 불구하고, 2016년 1월 26일 독립 경찰 불만 위원회(IPCC)는 관련 조사를 거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54]
5. 2. 법적 소송 및 보상
1985년 7월, 화재 사망자들에 대한 심리가 열렸고, 검시관 제임스 턴불은 사고사 결론을 권고했으며 배심원단도 이에 동의했다.[26] 1986년, 사고 당시 근무했던 경찰관 데이비드 브리튼과 화재로 가족을 잃은 수잔 플레처는 브래드퍼드 시티 구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1987년 2월 23일, 조셉 캔틀리 경은 클럽에게 3분의 2의 책임을, 당시 폐지된 카운티 의회에게 3분의 1의 책임을 물었다.[26]캔틀리 경은 클럽이 1차적인 안전 의무를 지니며, 카운티 의회는 감독 기능을 소홀히 하여 법적 의무를 위반했다고 판시했다. 그는 "클럽의 책임이 훨씬 더 크다"고 판단하며 책임 비율을 배분했다.[27] 웨스트 요크셔 광역 카운티 의회는 1971년 화재 예방법에 따른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28] 반면, 법적 조치에 참여했던 안전 보건 집행 위원회는 책임이 없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마이클 오그덴 QC는 브래드퍼드 시티 구단이 반복적인 경고에도 불구하고 '화재 예방에 대해 전혀 또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고 강하게 비판했다.[29] 이는 웨스트 요크셔 소방 구조대가 1984년 7월 18일 구단 비서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경기장 개선 사항과 메인 스탠드의 화재 위험을 구체적으로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발생한 일이었다. 당시 회장이었던 스태포드 헤긴보텀 역시 반대 심문에서 경기장의 화재 위험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33]
캔틀리 경은 판결 당시 "그들(클럽)은 잘못했고, 권한을 가진 누구도 화재 위험을 인식하지 못한 것 같았다. 누구도 마땅히 받아야 할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사실은, 누구도 시설의 안전에 관심이 없었다."라고 지적했다.[32] 다만 그는 "헤긴보텀, 토도프, 이사회 또는 그들 중 누구라도 스탠드를 사용하는 관람객의 안전에 고의적이고 무관심했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이며, 고의성은 없었으나 위험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과실이 있었음을 명확히 했다.[34]
소송 결과, 부상자 및 유족들에 의해 총 154건 이상의 청구(민간인 110명, 경찰관 44명)[30]가 처리되었으며,[31] 총 보상금은 약 2000만파운드에 달했다. 이 금액은 클럽이 가입한 보험으로 충당되었다.[30] 1988년에는 첫 보상금이 지급되어 40명 이상의 생존자들이 각각 최대 4만파운드를 받았다. 당시까지 생존자들을 위해 마련된 기금에서도 400만파운드 이상이 지급되었으며, 부상의 장기적인 영향이 드러남에 따라 추가 지급이 이루어졌다.[35]
화재 이후에도 책임 규명과 관련된 논란은 계속되었다. 2010년, 화재 생존자이자 힐스버러 참사 목격자이기도 한 마틴 플레처는 화재 당시 구단 수뇌부와 이후 조사 과정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당시 구단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실제적인 책임을 지지 않았고, 발생했던 과실의 수준에 대해 누구도 제대로 책임을 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화재 책임이 있는 주주들이 여전히 구단을 소유한 상태에서 공적 자금이 투입된 것을 비판했다.[26] 또한 올리버 포플웰 경이 이끈 공식 조사가 힐스버러 참사 이후의 테일러 보고서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형편없는 작품"이었다고 평가하며, 여전히 많은 의문이 해소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36]
플레처는 2015년 Fifty-Six: The Story of the Bradford Fire|56: 브래드퍼드 화재 이야기eng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화재 당시 브래드퍼드 시 구단주였던 스태포드 헤긴보텀이 소유했던 여러 사업체에서 과거 18년 동안 총 8건의 화재가 발생했으며, 이 중 상당수가 큰 규모의 보험금 지급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폭로했다.[37] 전직 화재 조사관 나이젤 아담스는 플레처의 책을 높이 평가하며 포플웰 조사의 부적절성을 지적하고 새로운 조사를 촉구하는 데 동참했다. 그는 조사가 성급하게 진행되었고 과학적 근거가 부족했을 수 있다는 의문을 제기했다.[53] 그러나 2016년 1월 26일, 독립 경찰 불만 위원회(IPCC)는 재조사 요구를 공식적으로 거부했다.[54]
6. 사회적 반응 및 추모 활동
1985년 7월, 희생자들에 대한 심리가 열렸고, 검시관 제임스 턴불은 사고사 결론을 권고했으며 배심원단도 이에 동의했다. 이듬해인 1986년, 화재 생존자이자 참사로 가족을 잃은 수잔 플레처와 당시 근무했던 경찰관 데이비드 브리튼은 브래드퍼드 시티 클럽과 웨스트 요크셔 광역 카운티 의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1987년 2월 23일, 조셉 캔틀리 경은 클럽에 3분의 2, 카운티 의회에 3분의 1의 책임을 묻는 판결을 내렸다.[26]
캔틀리 경은 판결 이유로 클럽의 1차적인 안전 관리 의무와 카운티 의회의 감독 의무 태만을 지적했다. 특히 카운티 의회는 법적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않거나 무시하여 관람객에 대한 일반적인 법적 의무를 소홀히 했다고 밝혔다.[27] 웨스트 요크셔 광역 카운티 의회는 1971년 화재 예방법에 따른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28] 재판 과정에서 마이클 오그덴 QC는 반복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클럽이 '화재 예방에 대해 전혀 또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고 강하게 비판했다.[29] 판사 역시 "사실은, 누구도 시설의 안전에 관심이 없었다."라고 지적하며 클럽의 안전 불감증을 질타했다.[32]
소송의 핵심 증거는 웨스트 요크셔 소방 구조대가 1984년 7월 클럽 측에 보낸 두 통의 편지였다. 이 편지들에는 경기장 개선 요구 사항과 메인 스탠드의 구체적인 화재 위험성이 명시되어 있었다. 당시 클럽 회장이었던 스태포드 헤긴보텀은 법정에서 경기장의 화재 위험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시인했다.[33] 다만 캔틀리 경은 클럽 관계자들이 고의적으로 관람객의 안전을 무시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화재 위험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마땅히 기울여야 할 주의를 다하지 않은 잘못이 있다고 덧붙였다.[34]
이 소송을 통해 부상자 및 유족 등 총 154명(민간인 110명, 경찰관 44명) 이상이 제기한 청구가 처리되었으며,[30][31] 지급된 총 보상금은 약 2000만파운드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금액은 클럽이 가입한 보험으로 충당되었다.[30] 1988년에는 첫 보상금이 지급되어 40명 이상이 각각 최대 4만파운드를 받았다. 당시까지 생존자 지원을 위해 마련된 항소 기금은 400만파운드 이상을 지급했으며, 부상의 장기적인 영향이 드러남에 따라 추가 지급이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되었다.[35]
참사 직후 구단 관계자들은 큰 충격을 표현했다. 스태포드 헤긴보텀 회장은 "우리의 날이 될 뻔했습니다"라고 말했고, 테리 요라스 당시 코치는 "내 인생 최악의 날"이라고 회고했다.[11] 지역 경찰서장이었던 배리 오스본 경감은 현장의 참혹함에 많은 경찰관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11]
이 비극은 팬들에게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당시 12세였던 크리스토퍼 해먼드는 20년 후 인터뷰에서 "당시에는 어려서 심각성을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 아버지가 받은 영향을 보면서 우리가 겪었던 일의 무게를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 토니는 사고 다음 날 경기장을 다시 찾아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이후 몇 년간 상담 치료를 받으며 다른 경기에 가지 못했다.[39] 당시 17세였고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목발을 짚고 있던 매튜 와일드만은 다른 팬들의 도움으로 탈출했지만,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는 "끔찍한 기억이 여전히 남아있지만, 동시에 우리를 도와주었던 사람들의 인간애를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40]
6. 1. 애도 및 지원
이 비극은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으며,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마거릿 대처 당시 영국 총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등 여러 국가 지도자들이 애도의 뜻을 전했다.[15][61][67]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 튀니지의 셰들리 클리비 대통령, 스페인의 펠리페 곤살레스 총리 등도 애도 메시지를 보냈다.[38]참사 발생 48시간 이내에 피해자 지원을 위한 브래드퍼드 재난 구호 기금(Bradford Disaster Appeal Fund)이 설립되었고,[74] 최종적으로 350만파운드 이상이 모금되었다.[60][61] 기금 마련을 위해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1985년 7월에는 리즈 유나이티드의 홈구장인 엘런드 로드에서 1966년 FIFA 월드컵 결승전에 출전했던 잉글랜드와 서독 선수들이 재회 경기를 가졌으며, 이 경기에서 잉글랜드가 6-4로 승리했다.
또한, 제리 앤 더 페이스메이커스의 제리 마스든을 포함한 여러 음악가들이 '더 크라우드'(The Crowd)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로저스와 해머스타인의 뮤지컬 회전목마의 삽입곡인 "You'll Never Walk Alone"을 녹음했다.[74][75] 이 곡은 1963년 제리 앤 더 페이스메이커스가 발표하여 리버풀 FC의 응원가로 유명해진 곡이다. 더 크라우드의 버전은 영국 싱글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으며,[41] 음반 판매 수익금은 브래드퍼드 대학교와 브래드퍼드 로열 병원이 협력하여 설립한 화상 치료 부서에 기부되었다. 이 부서는 이후 10년 이상 브래드퍼드 시티의 공식 자선 단체로 활동했다.
화재 30주년인 2015년에는 "You'll Never Walk Alone"의 새로운 버전이 브래드퍼드의 볼티지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 이 녹음에는 데인 마이클, 척클 형제, 클라이브 잭슨 등 여러 아티스트가 참여했으며, 수익금 전액은 브래드퍼드 로열 병원 화상 치료 부서에 기부되었다.[42]
한편, 잉글랜드 축구 협회(FA)는 참사 직후인 1985년 5월 18일에 열린 FA컵 결승전(에버턴 FC 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시작 전에 희생자들을 위한 묵념의 시간을 가졌고, 양 팀 선수들은 검은 완장을 착용하고 경기에 임했다.[72]
6. 2. 추모식 및 기념비
1985년 7월, 밸리 퍼레이드의 불탄 스탠드 아래에서 종교 통합 추모식이 열렸으며, 6,000명의 관중이 참석했다. 추모식장에는 스탠드의 불탄 나무 조각으로 만든 거대한 기독교 십자가가 세워졌다. 또한, 재난 직후 지역 주민들에게 도움을 준 브래드퍼드의 아시아계 인도 아대륙 커뮤니티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추모식의 일부는 우르두어와 펀자브어로 진행되었다.
현재 밸리 퍼레이드에는 두 개의 기념비가 있다. 하나는 1986년 12월 경기장 재개장 시 저지 섬에 거주하던 실비아 그라우코브가 기증한 조각상으로, 화재가 시작된 스탠드 끝에 설치되었다. 다른 하나는 2002년 메인 스탠드를 750만 파운드로 재건한 후 클럽에서 기증한 것으로, 메인 입구 옆에 위치한다. 이 기념비는 검은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정면에는 희생자들의 이름과 나이가 금색으로 새겨져 있고, 앞에는 추모객들이 꽃과 기념품을 놓을 수 있는 플랫폼이 마련되어 있다.
브래드퍼드 시청 앞에도 1986년 5월 11일에 공개된 쌍둥이 기념 조각상이 있다. 이 조각상은 브래드퍼드의 자매 도시인 독일 함에서 기증했으며,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화재 이후, 브래드퍼드 시티는 희생자들을 영구적으로 기리기 위해 유니폼 셔츠 소매에 검은색 트림(띠)을 사용하겠다고 발표했다.
7. 밸리 퍼레이드 재건 및 안전 규정 강화
올리버 포플웰 경이 주재한 포플웰 조사 위원회[24]는 화재 이후 경기장 안전 문제를 조사하고 새로운 법률 제정을 이끌었다. 조사 결과, 관람석 아래 쌓인 쓰레기가 화재 위험을 초래한다는 경고를 구단이 받았음에도 이를 방치한 사실이 드러났다.[25] 노후된 목재 관람석과 관리 부실이 참사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당시 많은 경기장과 달리 메인 관람석에는 훌리건 방지용 펜스가 없어 관중 대부분이 경기장으로 대피할 수 있었으나, 잠긴 출입문 때문에 다른 경로로 탈출하려던 이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다음 관람석("브래드퍼드 엔드")의 팬들은 경기장과 분리된 펜스를 직접 무너뜨려야 했다.
1985년 7월 사망자 심리에서는 사고사로 결론 내려졌으나, 이후 유족 등이 제기한 소송에서 법원은 구단과 당시 웨스트 요크셔 광역 카운티 의회에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26] 조셉 캔틀리 판사는 구단에 3분의 2, 카운티 의회에 3분의 1의 책임을 물으며, 특히 구단이 반복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화재 예방에 거의 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고 지적했다.[27][29] 판사는 최종 판결에서 "권한을 가진 누구도 화재 위험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시설 안전에 마땅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32] 이후 150건 이상의 손해배상 청구가 처리되었으며, 총 보상액은 2000만파운드에 달했다.[30]
화재 생존자이자 유족인 마틴 플레처 등은 초기 조사와 책임 규명이 미흡했다고 비판하며, 특히 당시 구단주였던 스태포드 헤긴보텀 소유 사업체들의 과거 화재 이력과 보험금 수령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26][36][37] 이러한 주장은 새로운 조사 요구로 이어졌으나, 2016년 독립 경찰 불만 위원회(IPCC)는 재조사를 거부했다.[53][54] 참사 이후 진행된 조사와 법적 공방은 경기장 안전 문제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7. 1. 경기장 재건

밸리 퍼레이드가 재개발되는 동안, 브래드퍼드 시티는 홈 경기를 위해 인근의 여러 경기장을 임대하여 사용해야 했다. 여기에는 리즈의 엘런드 로드, 허더즈필드의 리즈 로드, 그리고 브래드퍼드의 럭비 리그 경기장인 오즈달 스타디움이 포함되었다.[74][76]
오즈달 스타디움을 소유한 브래드퍼드 시의회는 브래드퍼드 시티를 해당 경기장으로 유치하려 했으나[76], 약 6,000명의 브래드퍼드 시티 열성 팬들은 전통적인 홈 구장인 밸리 퍼레이드로 돌아가기를 강력히 원했다.[76] 결국 화재 사고 13개월 후인 1986년 6월, 총 공사비 260만파운드 규모의 재개발 계획이 시작되었다.[76] 이 비용의 상당 부분은 웨스트 요크셔 주에서 부담했으며, 나머지는 브래드퍼드 시티와 풋볼 리그의 보조금으로 충당했다.[76]
6개월간의 공사를 통해 경기장은 기존의 입석 스탠드를 철거하고 현대적인 좌석식 스탠드로 개축되었다.[76] 재개장을 기념하기 위해 1986년 12월 14일, 브래드퍼드 시티는 피터 실턴과 케빈 키건 등이 포함된 잉글랜드 XI와 친선 경기를 가졌고, 이 경기에서 2-1로 승리했다.[74]
이후에도 밸리 퍼레이드는 구단의 재정 상황에 맞춰 여러 차례 개수 공사를 거쳤으며[76], 2000년대에는 스탠드 증축을 통해 수용 인원을 25,136명으로 늘렸다.[76] 오늘날 밸리 퍼레이드는 화재 참사 당시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현대적인 전 좌석 경기장으로 탈바꿈했다. 화재 이전의 모습 중 남아있는 것은 메인 스탠드 옆의 기존 클럽하우스 건물과 "브래드퍼드 엔드" 스탠드 뒤편 홀리웰 애쉬 레인(Hollywell Ash Lane)을 따라 있는 측면 지지벽뿐이다.
7. 2. 링컨 시티 FC에 미친 영향
화재로 사망한 56명 중 2명은 링컨 시티 지지자였다.[14]링컨 시티는 이 화재 이후 큰 영향을 받았다. 1986년에는 4부 리그로 강등되었고, 1987년에는 다시 강등되어 풋볼 리그에서 자동 강등된 최초의 팀이 되었다. 비록 1988년 바로 풋볼 리그로 복귀하여 2011년 다시 강등되기 전까지 23년간 리그에 잔류했지만, 이 시기의 갑작스러운 부진은 화재가 선수들에게 미친 심리적 충격과 더불어, 화재 이후 강화된 새로운 안전 규정이 링컨 시티의 홈구장인 싱실 뱅크에 미친 재정적 부담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당시 싱실 뱅크의 목재 구조물 스탠드(세인트 앤드루스 스탠드, 메인 스탠드, 레일웨이 엔드 테라스 지붕)가 화재 위험 시설로 지정되면서 경기장 수용 인원이 일시적으로 0명으로 줄어드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링컨 시티 이사회는 화재 직후 1년간 구장 개조에 110.00000000000001만파운드를 투입했으며, 이후 10년간 총 300만파운드 규모의 시설 개선을 진행했다. 특히 1990년 개조 공사 후 홈 엔드 스탠드를 화재 당시 사망한 링컨 시티 팬 빌 스테이시(Bill Stacey)와 짐 웨스트(Jim West)를 기리기 위해 '스테이시-웨스트 스탠드'(Stacey-West Stand)로 명명했다. 링컨 시티는 매년 브래드퍼드에서 열리는 추모식에 대표를 파견하고 있으며, 2007년부터 2009년까지는 화재 당시 브래드퍼드 시티의 주장이었던 피터 잭슨(Peter Jackson)이 링컨 시티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
두 팀은 화재 이후 1989년 4월, 힐스버러 참사 피해 지원을 위한 자선 경기를 통해 밸리 퍼레이드에서 처음으로 다시 만났다.[44]
7. 3. 안전 규정 강화 (대한민국에 미친 영향)
영국의 축구 경기장에 대한 화재 대책은 1975년 제정된 스포츠 경기장 안전법(The Safety of Sports Grounds Act 1975)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62][63] 그러나 이 법은 1부 리그 및 2부 리그 클럽의 경기장에 한정되었으며,[62][63] 화재 사고 당시 3부 리그 소속이었던 브래드퍼드 시티의 홈구장 밸리 퍼레이드는 이 법의 적용을 받지 않았다.[62] 해당 경기장은 건설된 지 76년이 지나 노후화되었고, 소방 당국으로부터 방화 문제에 대해 여러 차례 경고를 받은 상태였다.[62]브래드퍼드 시티는 1984-85 시즌 3부 리그에서 우승하여, 1936-37 시즌 이후 처음으로 2부 리그 승격이 결정되었다.[64] 이에 따라 다음 시즌부터는 경기장 안전법 1975가 적용될 예정이었으며,[62] 1985년 5월 11일 최종전을 마친 후 경기장 개수 공사에 들어갈 계획이었다.[62]
화재 참사 이후, 레온 브리턴 당시 내무 장관은 5월 13일 영국 하원에서 고등법원 판사 Oliver Popplewell|올리버 포플웰영어을 위원장으로 하는 사고 조사 위원회 설치를 발표했다.[73] 포플웰 위원회는 중간 보고서 및 최종 보고서에서 1975년 법률의 적용 대상 범위가 너무 제한적이라고 지적하며, 옥외뿐만 아니라 실내 경기를 포함하여 500명 이상을 수용하는 모든 경기장은 방화 대책법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고 권고했다.[63]
1986년 위원회의 최종 보고서가 공표된 후,[60] 내무성은 이를 받아들여 1987년 기존 법률을 개정하고, 경기장의 새로운 건축 기준 등 안전 기준을 정한 "스포츠 경기 시설의 방화 및 안전법"(The Fire Safety and Safety of Places of Sport Act 1987)을 제정했다.[74][63] 이 법의 주요 내용 중 하나는 새로운 목조 경기장의 건설을 금지하는 것이었다.[64] 또한, 내무성이 발행하는 경기장 운영의 안전 및 경비 지침서인 "그린 가이드" 역시 포플웰 보고서의 내용을 반영하여 개정되었다.[63]
8. 논란 및 추가 조사 요구
브래드퍼드 축구장 화재 이후 공식적인 조사 결과와는 별개로 여러 논란과 함께 추가적인 조사 요구가 제기되었다. 특히 화재 생존자이자 작가인 마틴 플레처는 자신의 저서 "Fifty-Six: The Story of the Bradford Fire|56: 브래드퍼드 화재 이야기eng"를 통해 당시 구단주였던 스태포드 헤긴보텀과 관련된 의혹을 제기하며 사건의 진상 규명에 대한 새로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37] 플레처의 주장은 일부 전문가들의 지지를 얻어 새로운 조사 촉구로 이어졌으나, 공식적인 재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53][54] 또한, 은퇴한 형사 레이몬드 팔코너가 화재 발생과 관련하여 특정 인물(에릭 베넷)의 자백이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또 다른 논란이 일기도 했으나, 이 주장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반론이 제기되었다.[55][57][58]
8. 1. 마틴 플레처의 주장 및 새로운 조사 요구
2010년, 브래드퍼드 시 화재 생존자이자 힐스버러 참사의 목격자이기도 했던 마틴 플레처는 화재 당시 구단 수뇌부와 이후의 조사 과정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당시 구단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실제적인 책임을 지지 않았고, 발생했던 과실의 수준에 대해 누구도 제대로 책임을 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화재 책임이 있는 주주들이 여전히 구단을 소유한 상태에서 공적 자금이 지원된 점을 지적했다.[26] 또한, 올리버 포플웰이 힐스버러 참사에 대해 논란이 될 만한 발언을 한 이후, 플레처는 포플웰 조사 위원회의 보고서가 테일러 경의 보고서만큼 철저하지 못했으며, 내용 역시 실망스럽다고 평가했다.[36]이후 플레처는 2015년, Fifty-Six: The Story of the Bradford Fire|56: 브래드퍼드 화재 이야기eng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화재 당시 브래드퍼드 시티 구단주였던 스태포드 헤긴보텀이 소유했던 여러 사업체에서 과거 18년 동안 총 8건의 화재가 발생했으며, 이 중 상당수가 큰 피해를 남기고 거액의 보험금 지급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폭로했다.[37]
플레처의 책은 전직 화재 조사관 나이젤 아담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아담스는 플레처의 주장에 동의하며 새로운 조사를 촉구했다. 그는 플레처의 책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1985년 당시 영국의 화재 조사가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었고 과학적 엄밀성이 부족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브래드퍼드 화재 조사가 단 며칠 만에 성급하게 마무리된 점, 그리고 같은 날 발생한 버밍엄 폭동 사건까지 조사 범위에 포함시킨 점 등을 문제 삼으며 포플웰 조사 위원회의 조사가 부적절했다고 비판했다.[53] 아담스는 플레처가 제기한 의혹들이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사건을 다시 조사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53]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조사 요구에도 불구하고, 2016년 1월 26일 독립 경찰 불만 위원회(IPCC)는 관련 조사를 진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54]
8. 2. 에릭 베넷 관련 논란
2015년 4월 17일, 은퇴한 형사 레이몬드 팔코너는 브래드퍼드 ''텔레그래프 앤 아거스''의 보도를 통해, 경찰이 화재를 일으켰다고 자백한 호주 남성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55] 화재 30주년을 맞아 여러 언론은 이 남성을 에릭 베넷으로 지목했는데, 그는 호주에서 브래드퍼드에 사는 조카를 방문 중이었으며 사건 당일 경기에 참석했던 인물이다.[56] 보도에 따르면, 베넷의 조카로 알려진 레슬리 브라운리는 자신의 삼촌이 화재를 자백했다는 주장을 부인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레이몬드 팔코너 은퇴 형사의 진술을 전혀 믿지 않는다. 팔코너가 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어디서 얻었는지 모르겠다… 이 보고서[다큐멘터리]의 부정확성은 놀랍다."[57]한편, 레이몬드 팔코너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이전에 다니엘 테일러가 가디언 지면을 통해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테일러는 "''브래드퍼드 텔레그래프 앤 아거스''는 그를 '최고의 형사'라고 묘사했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 영국에서 가장 심각한 사법 오판 중 하나로 꼽히는 브래드퍼드 캐롤 윌킨슨 살인 사건에 연루된 형사 중 한 명이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한 남성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살인죄로 20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다."고 지적했다.[58]
9. 결론
이 화재는 영국 축구 역사상 최악의 화재 참사로 묘사되었으며, 1971년 1971년 이브록스 참사에서 66명의 관중이 사망한 이후 최악의 축구 관련 참사였다.[14] 이 비극은 엄청난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전 세계적인 지지를 이끌어냈으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비롯하여 마거릿 대처 총리,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등이 애도의 뜻을 표했다.[15] 또한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 벨기에의 셰들리 클리비 총리, 스페인의 펠리페 곤살레스 총리로부터도 애도의 메시지를 받았다.[38]
구단 회장 스태포드 헤긴보텀은 "우리의 날이 될 뻔했습니다"라고 말했으며, 테리 요라스 코치는 이 사건을 "내 인생 최악의 날"이라고 묘사했다.[11] 당시 지역 경찰서장 배리 오스본 경감은 많은 경찰관들이 부상자들의 심각한 화상 상태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증언했다.[11]
이 재앙은 팬들에게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화재 당시 12세였던 크리스토퍼 해먼드는 20년 후 인터뷰에서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얼마나 큰 영향을 받았는지 알게 되면서 우리가 무엇을 겪었는지 알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 토니는 생존에 대한 죄책감으로 상담 치료를 받아야 했고, 몇 년간 다른 경기에 가지 못했다.[39] 당시 17세였던 매튜 와일드만은 목발을 짚고 있었으나 다른 팬들의 도움으로 탈출했다. 그는 "도시의 모든 사람이 비탄에 잠겼지만, 놀라운 수의 자원봉사자들이 있었습니다. [...] 그날의 끔찍한 기억이 아직도 있지만, 우리가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의 인간성에 대해 생각합니다"라고 회상했다.[40]
화재 이후 다양한 추모 활동이 이어졌다. 2014년, 연극 단체 'Funny You Should Ask'(FYSA)는 화재 희생자 56명을 기리는 연극 'The 56'을 초연했다. 이 연극은 생존자와 희생자 가족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공연 수익금은 브래드퍼드 화상 치료 센터에 기부되었다.[45][46][47] 폴 피르스는 'Four Minutes to Hell: The Story of the Bradford City Fire'(2005)를 출판했는데,[48] 제목은 화재 발생 후 스탠드가 전소되기까지 걸린 시간을 의미한다.[49] 화재로 아버지, 형제, 삼촌, 할아버지를 잃은 마틴 플레처는 재난의 원인을 파헤치고 자신의 경험을 담은 책 '56: The Story of the Bradford Fire'(2015)를 썼다.[50] 2010년 5월 1일, 화재 25주년을 맞아 BBC의 축구 프로그램 '풋볼 포커스'가 밸리 퍼레이드에서 생방송으로 진행되었으며, 테리 요라스와 존 헨드리 등의 인터뷰를 다루었다.[51] 1986년 요크셔 텔레비전은 존 헬름이 진행하는 다큐멘터리 'Bradford City – A Year of Healing'을 방영했는데, 이 프로그램은 당시 클럽 회장이었던 스태포드 헤긴보텀이 익명의 협박 편지와 낙서 등으로 56명의 사망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을 추궁당했던 사실을 조명했다.[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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