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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와디스와프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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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와디스와프 3세는 다양한 언어로 불린 폴란드, 헝가리, 달마티아, 크로아티아의 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이며, 1424년 크라쿠프에서 태어나 1444년 바르나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는 1434년 폴란드 왕위에 올랐으며, 1440년 헝가리 왕으로 선출되었으나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직면하여 십자군 원정을 이끌었다. 바르나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망하면서 헝가리와 폴란드는 혼란에 빠졌고, 그의 사후에는 다양한 전설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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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와디스와프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브와디스와프의 인장
브와디스와프의 인장 세부 묘사
칭호폴란드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
통치 기간1434년–1444년
대관식1434년 7월 25일, 바벨 대성당
이전 통치자브와디스와프 2세
섭정즈비그니에프 올레스니츠키 (1434년–1438년)
이후 통치자왕위 공백기 (1444년–1447년)
카지미에시 4세 (1447년)
칭호 (헝가리/크로아티아)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왕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에 의해 이의 제기됨
통치 기간 (헝가리/크로아티아)1440년–1444년
대관식 (헝가리/크로아티아)1440년 7월 17일, 세케슈페헤르바르 대성당
이전 통치자 (헝가리/크로아티아)알브레히트
이후 통치자 (헝가리/크로아티아)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
왕조야기에우워 왕조
아버지브와디스와프 2세
어머니조피아 홀샨스카
출생일1424년 10월 31일
출생지폴란드 왕국, 크라쿠프
사망일1444년 11월 10일 (20세)
사망지오스만 제국, 바르나 (현재의 불가리아)
종교로마 가톨릭

2. 왕의 명칭

브와디스와프 3세는 여러 언어로 불렸다. 각 언어별 명칭은 하위 섹션을 참고하면 된다.

2. 1. 라틴어

Wladislaus Dei gracia Polonie, Hungarie, Dalmacie, Croacie etc. rex necnon terrarum Cracouie, Sandomirie, Syradie, Lancicie, Cuyauie, Lithuanie princeps supremus, Pomeranie, Russieque dominus et heres etc.la

2. 2. 폴란드어

Władysław, z Bożej łaski Król Polski, Węgier, Dalmacji, Chorwacji, ziemi krakowskiej, sandomierskiej, sieradzkiej, łęczyckiej, kujawskiej, Wielki Książę Litewski, pan i dziedzic Pomorza i Rusi|브와디스와프, 즈 보제이 와스키 크룰 폴스키, 벵기에르, 달마치, 호르바치, 지에미 크라코프스키에이, 산도미에르스키에이, 시에라츠키에이, 웽치츠키에이, 쿠야프스키에이, 비엘키 크시옹제 리테프스키, 판 이 지에지츠 포모자 이 루시pl

2. 3. 헝가리어

Ulászló, Isten kegyelméből Lengyelország, Magyarország, Dalmácia és Horvátország, valamint Krakkó, Sandomierz, Sieradz, Łęczyca, Kuyavia vidékének királya, Litvánia nagyhercege, Pomeránia és Ruténia ura és örököse|울라슬로, 이슈텐 케그옐메뵐 렝기에로르사그, 머저로르사그, 달마치어 에시 호르바트오르사그, 발러민트 크러코, 산도미에슈, 시에라츠, 웬치차, 쿠야비어 비데케네크 키라야, 리트바니아 너지헤르체게, 포메라니아 에시 루테니아 우러 에시 외뢰쾨셰hu

2. 4. 리투아니아어

Vladislovas, Dievo valia karalius Lenkijos ir žemių Krokuvos, Sandomiro, Sieradžo, Lenčycos, Kujavijos, Lietuvos didysis kunigaikštis, Pomeranijos ir Rusios valdovas ir paveldėtojas, etc.|블라디슬로바스, 디에보 발리아 카랄리우스 렌키요스 이르 제미ų 크로쿠보스, 산도미로, 시에라조, 렌치초스, 쿠야비요스, 리에투보스 디디시스 쿠니가이크슈티스, 포메라니요스 이르 루시오스 발도바스 이르 파벨데토야스lt

2. 5. 영어

Vladislaus by God's grace king of Poland, Hungary, Dalmatia, Croatia, and lands of Kraków, Sandomierz, Sieradz, Łęczyca, Kuyavia, Supreme Prince of Lithuania, lord and heir of Pomerania and Ruthenia|신의 은총을 받은 폴란드, 헝가리, 달마티아, 크로아티아의 왕이자 크라쿠프, 산도미에슈, 셰라츠, 웽치차, 쿠야비아의 땅, 리투아니아의 대공이자 포메라니아루테니아의 군주이자 상속자 브와디스와프영어

2. 6. 한국어 번역

Wladislaus Dei gracia Polonie, Hungarie, Dalmacie, Croacie etc. rex necnon terrarum Cracouie, Sandomirie, Syradie, Lancicie, Cuyauie, Lithuanie princeps supremus, Pomeranie, Russieque dominus et heres etc.|블라디슬라우스 데이 그라치아 폴로니에, 훙가리에, 달마치에, 크로아치에 에트 체테라 렉스 네크논 테라룸 크라코우이에, 산도미리에, 시라디에, 란치치에, 쿠야우이에, 리투아니에 프린켑스 수프레무스, 포메라니에, 루시에퀘 도미누스 에트 헤레스la[1]

Władysław, z Bożej łaski Król Polski, Węgier, Dalmacji, Chorwacji, ziemi krakowskiej, sandomierskiej, sieradzkiej, łęczyckiej, kujawskiej, Wielki Książę Litewski, pan i dziedzic Pomorza i Rusi|브와디스와프, 즈 보제이 와스키 크룰 폴스키, 벵기에르, 달마치, 호르바치, 지에미 크라코프스키에이, 산도미에르스키에이, 시에라츠키에이, 웽치츠키에이, 쿠야프스키에이, 비엘키 크시옹제 리테프스키, 판 이 지에지츠 포모자 이 루시pl[1]

Ulászló, Isten kegyelméből Lengyelország, Magyarország, Dalmácia és Horvátország, valamint Krakkó, Sandomierz, Sieradz, Łęczyca, Kuyavia vidékének királya, Litvánia nagyhercege, Pomeránia és Ruténia ura és örököse.|울라슬로, 이스텐 케그옐메뵐 렌기에로르사그, 머저로르사그, 달마치아 에스 호르바트오르사그, 발러민트 크라코, 산도미에시, 시에라츠, 웽치차, 쿠야비어 비데케네크 키라야, 리트바니아 너지헤르체게, 포메라니아 에스 루테니아 우러 에스 외뢰쾨셰hu[1]

Vladislovas, Dievo valia karalius Lenkijos ir žemių Krokuvos, Sandomiro, Sieradžo, Lenčycos, Kujavijos, Lietuvos didysis kunigaikštis, Pomeranijos ir Rusios valdovas ir paveldėtojas, etc.|블라디슬로바스, 디에보 발리아 카랄리우스 렌키요스 이르 제미우 크로쿠보스, 산도미로, 시에라조, 렌치초스, 쿠야비요스, 리에투보스 디디시스 쿠니가이크슈티스, 포메라니요스 이르 루시요스 발도바스 이르 파벨데토야스lt[1]

Vladislaus by God's grace king of Poland, Hungary, Dalmatia, Croatia, and lands of Kraków, Sandomierz, Sieradz, Łęczyca, Kuyavia, Supreme Prince of Lithuania, lord and heir of Pomerania and Ruthenia|블라디슬라우스 바이 갓즈 그레이스 킹 오브 폴란드, 헝가리, 달마티아, 크로아티아, 앤드 랜즈 오브 크라쿠프, 산도미에시, 시에라츠, 웽치차, 쿠야비아, 수프림 프린스 오브 리투아니아, 로드 앤드 헤어 오브 포메라니아 앤드 루테니아영어[1]

신의 은총을 받은 폴란드, 헝가리, 달마티아, 크로아티아의 왕이자 크라쿠프, 산도미에슈, 셰라츠, 웽치차, 쿠야비아의 땅, 리투아니아의 대공이자 포메라니아루테니아의 군주이자 상속자 블라디슬라우스.[1]

3. 생애

15세기, 옥스퍼드 대학교 보들리 도서관에 소장된 기도서에 묘사된 브와디스와프 3세


브와디스와프 3세는 브와디스와프 2세와 조피아 홀샨스카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피아스트 왕조의 혈통을 이은 이복 누이 야드비가와 그녀의 약혼자 프리드리히 2세에게 왕위 계승 우선권이 있다는 반대 세력에 직면했다. 그러나 야드비가의 죽음으로 이 문제는 해결되었고,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2세와 폴란드 마그나트(대귀족)들 사이에서 브와디스와프 3세에게 왕위를 계승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브와디스와프 3세와 그의 어머니 조피아에 대한 반발은 컸다. 10세에 즉위한 국왕은 추기경 즈비그니에프 올레시니츠키를 중심으로 한 궁정 고문단의 보좌를 받았다.

브와디스와프 3세의 통치는 시작부터 어려웠다. 대관식은 반대파 슐라흐타인 스피트코 츠 멜슈틴에 의해 방해받았고, 다음 날 수도 크라쿠프에서 열린 전통적인 민중의 환영 행사는 마조프세의 성속 제후들이 자리를 다투는 바람에 무효화되었다. 성장한 국왕이 국정에 대해 발언해도, 사실상의 섭정인 올레시니츠키 추기경은 이를 무시했고, 이는 1438년 표트르코프에서 소집된 세임에서 "국왕이 14세가 되었으므로 친정을 시작한다"는 선언이 나온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1440년, 브와디스와프 3세는 헝가리 국왕으로 추대되었지만, 이는 여러 문제를 안고 있었다. 헝가리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폴란드 귀족들은 헝가리와의 동군연합에 반대했다. 또한, 전임 국왕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알브레히트 2세의 미망인 엘리자베트는 임신 중이었고, 태어날 아이에게 헝가리 왕위를 잇게 하려 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브와디스와프 3세는 헝가리 왕위를 수락하고 엘리자베트 지지파와의 2년간의 내전에서 승리했다. 그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로부터 지원을 받았고, 그 대가로 오스만 제국에 대한 십자군을 조직할 것을 맹세했다. 18세의 국왕은 야기에우워 왕조와 폴란드 내 문제는 등한시하고 십자군에 대한 열정에 불타올랐다.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라는 칭호와 함께 교황 특사 줄리아노 체자리니는 브와디스와프 3세에게 2년간 오스만 제국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약속받으려 했다. 오라데아에서 1443년에 맺어진 10년 휴전 조약에 대해, 이교도는 신뢰할 수 없으므로 전투를 계속해야 한다는 주장을 국왕은 받아들였다.

오스만 제국은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에 있었지만, 브와디스와프 3세는 오스만 제국이 유럽 전역에 미칠 수 있는 힘을 인식하지 못했다. 1444년 11월 10일 바르나 전투에서 후냐디 야노슈의 제지를 뿌리치고 제국군 중앙으로 돌격, 술탄 직속 친위대 예니체리의 반격을 받아 전사했다. 줄리아노 체자리니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브와디스와프 3세는 미혼으로 자녀 없이 사망했다(얀 두고슈의 연대기에서는 그가 동성애자였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헝가리 왕위는 엘리자베트의 아들 라슬로 5세가 어린 나이에 계승했고, 폴란드 왕위는 3년의 공위 기간을 거쳐 동생 카지미에시 4세가 계승했다.

3. 1. 유년 시절과 폴란드 왕위 계승 (1424-1434)

얀 마테이코가 그린 1425년 크라쿠프 바벨 대성당에서의 브와디스와프 3세 세례식


브와디스와프는 1424년 10월 31일 크라쿠프에서 브와디스와프 2세와 조피아 홀샨스카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이미 고령이었고, 세 명의 왕비를 잃은 후였기에, 남자 후계자의 탄생은 기적이라고 여겨졌다.[1] 1425년 2월 중순 바벨 대성당에서 그니에즈노 주교이자 폴란드의 대주교였던 보이치에흐 야스트젬비에츠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2] 포즈난 주교 안제이 우스카르츠와 크라쿠프 주교인 즈비그니에프 올레시니츠키 추기경을 비롯한 여러 정치인과 주변 국가의 왕실 사절들이 참석했다.[3] 세례식은 매우 성대했으며, 세례식이 있었던 가장 가능성 높은 날은 2월 18일이지만, 역사가들과 여러 자료들 사이에서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4]

1427년, 폴란드 귀족(슈와흐타)은 야기에우워 왕조 반대 운동을 시작하여 브와디스와프 2세의 아들들을 폴란드 왕위 계승자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들은 브와디스와프 2세의 아들이 피아스트 왕조와 앙주 가문의 카페 왕조와 혈연 관계가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같은 해, 소피아 왕비는 간통 혐의를 받았고, 이로 인해 갈등이 심화되었다.[5] 브와디스와프 2세와 거물급 귀족들 사이에 아들들의 계승을 보장하기 위한 협정이 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반대파는 브와디스와프 2세의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인 야드비가와 약혼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를 지지했다.[6] 그러나 1431년 12월 야드비가 공주가 소피아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과 함께 사망하면서 음모는 해결되었다.[7]

브와디스와프 3세 치세기간인 약 1435년경에 만들어진 "폴란드 왕"에서 토너먼트 장갑. ''Armorial equestre de la Toison d'Or'' 미니어쳐.


1434년 10세의 나이로 폴란드 왕위에 오른 브와디스와프 3세는 추기경 즈비그니에프 올레시니츠키를 우두머리로 한 궁정 고문단의 보좌를 받았다. 브와디스와프의 치세는 시작부터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대관식에는 반대파 슐라흐타 중 한 명인 스피트코 츠 멜슈틴에 의해 방해를 받았고, 다음 날 수도 크라쿠프에서 벌어진 전통적인 민중에 의한 새로운 왕의 환호는 마조프세의 성속 제후들이 자리를 차지하려고 서로 데려온 종자들을 다투게 했기 때문에 무효화되었다. 또한 성장한 국왕이 국사에 관한 발언을 해도, 사실상의 섭정인 올레시니츠키 추기경은 이를 무시했으며, 이 사태는 1438년 표트르코프에서 소집된 세임에서 "국왕이 14살이 되었기 때문에 친정을 시작한다"라는 선언이 나온 뒤에도 변하지 않았다.

3. 2. 섭정 정치와 국내 갈등 (1434-1438)

브와디스와프 3세의 치세는 즉위 초부터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다. 1434년 그의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2세가 사망하면서, 불과 10세의 나이로 폴란드 왕위에 올랐다.[1] 추기경 올레시니츠키를 중심으로 한 섭정 평의회가 구성되어 어린 왕을 대신해 국정을 운영했다.[1]

그러나 브와디스와프 3세의 즉위는 순탄치 않았다. 대관식은 반대파 귀족(슐라흐타)인 스피트코 츠 멜슈틴에 의해 방해받았고,[2] 다음 날 크라쿠프에서 열린 전통적인 시민들의 환영 행사 역시 마조프셰의 성직자와 귀족들 간의 다툼으로 무산되었다.[2]

15세기 기도서에 묘사된 어린 브와디스와프 3세. 방패에는 폴란드 백수리가 보인다.


이러한 혼란의 배경에는 피아스트 왕조의 후손을 왕위에 올리려는 귀족들의 움직임이 있었다.[6] 이들은 브와디스와프 2세의 이복 누이 야드비가와 그녀의 약혼자 프리드리히 2세를 지지했으나, 야드비가의 사망으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귀족들은 여전히 피아스트 왕조의 후손을 왕위에 올리려 했으며, 지에모비트 5세가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다.[6]

올레시니츠키 추기경은 어린 왕을 대신해 국정을 운영하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5] 그는 왕실 고문단을 구성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으며,[5] 1434년에는 포즈난에서 의회를 소집하여 브와디스와프 3세의 왕위 계승을 보장받으려 했다.[5] 그러나 이러한 독단적인 행동은 소폴란드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5]

지그문트 올레슈니츠키(추기경)는 브와디스와프의 왕위 계승권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올레시니츠키의 권력 독점에 대한 반감이 커져갔다.[6] 일부 귀족들은 후스파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 성직자의 권력에 맞서려 했다.[6] 이들은 올레시니츠키에게 대관식을 연기하도록 압력을 가했고,[6] 1434년 7월에는 오파투프에서 독자적인 의회를 열어 대책을 논의하기도 했다.[6]

1438년, 피오트르쿠프에서 열린 세임(Sejm, 폴란드 의회)은 브와디스와프 3세의 친정을 선언했다.[2]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올레시니츠키 추기경에게 있었고, 그는 국왕의 발언을 무시하며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했다.[2]

3. 3. 리투아니아 내전 (1434-1438)

브와디스와프 3세의 즉위 초기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스러웠고, 이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에 위협이 되었다. 브와디스와프 3세의 외삼촌인 슈비트리가일라는 폴란드에 반기를 들고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선포했다. 그는 볼히니아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군과 싸우고 반(反)폴란드 동맹을 맺었다. 1431년 6월, 그는 튜턴 기사단과 협정을 맺었고, 튜턴 기사단은 기습적으로 전쟁을 선포하고 폴란드 영토로 군대를 진군시켰다. 휴전 후 브와디스와프가 왕위에 오르자 전쟁이 재개되었다. 상황은 브와디스와프와 폴란드인들이 리투아니아 귀족들을 슈비트리가일라에 대항하게 하고 그를 몰아내려는 외교적 노력으로 빠르게 전환되었다.

야쿠프 코빌란스키가 지휘하는 약 4,000명의 폴란드 군대는 지기만타스 케이스투타이티스와 미하우 지기만타이티스가 이끄는 리투아니아군을 지원했고, 연합군은 1435년 9월 1일 빌코미에르 전투에서 슈비트리가일라와 그의 동맹인 지기만타스 코리부트 및 리보니아 기사단을 격파했다. 슈비트리가일라는 동쪽으로 도망쳤지만, 결국 대공국에 거주하는 루테니아인들의 지지를 잃고 1438년 몰다비아로 망명하여 내전은 종식되었다.

이 전투는 리보니아 기사단장 프랑코 케르스코르프와 '''콤투르''' 지휘관이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히면서 리보니아 기사단을 제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435년 12월 4일 리보니아 동맹 협정은 공식적으로 그들의 십자군 성격을 종식시켰고, 1435년 12월 31일 브제시치 쿠야프스키에서 공식 평화 조약이 체결되어 튜턴 기사단과 리보니아 기사단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내정에 간섭하거나 방해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이 조약으로 폴란드-튜턴 전쟁 (1431년-1435년)이 종식되었다.

3. 4. 헝가리 왕위 계승과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1440-1444)

1440년, 브와디스와프 3세는 헝가리 국왕으로 추대되었으나, 이는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당시 헝가리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폴란드 귀족들은 헝가리와의 동군연합에 반대했다. 또한, 전임 헝가리 왕 알브레히트 2세의 미망인 엘리자베트는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 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브와디스와프 3세는 헝가리 왕위를 수락했고, 엘리자베트 지지파와의 2년간의 내전에서 승리하여 헝가리 왕위에 올랐다. 그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지원을 받아 오스만 제국에 대항한 십자군 원정을 준비했다. 18세의 젊은 왕은 야기에우워 왕조폴란드 내부 문제는 등한시하고 십자군 원정에 대한 열정에 불타올랐다.

오라데아에서 1443년에 맺어진 10년 휴전 조약에 대해, 교황 특사 줄리아노 체자리니는 이교도는 신용할 수 없으니 전투를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브와디스와프 3세는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오스만 제국은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에 있었지만, 브와디스와프 3세는 오스만 제국이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칠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결국 1444년 11월 10일 바르나 전투에서 후냐디 야노슈의 제지를 뿌리치고 술탄의 직속 친위대 예니체리의 돌격을 받고 전사했다.[3]

3. 5. 바르나 전투와 죽음 (1444)

1444년 브와디스와프 3세는 십자군을 이끌고 오스만 제국과의 바르나 전투에 참전했다. 1443년 오라데아에서 맺어진 10년 휴전 조약에 대해, 이교도는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전투를 계속하겠다는 국왕의 주장은 받아들여졌다. 오스만 제국은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에 있었으나, 브와디스와프 3세는 오스만 제국이 유럽 전역에 미칠 수 있는 힘을 인식하지 못했다.

1444년 11월 10일 바르나 전투에서 브와디스와프 3세는 후냐디 야노시의 제지를 뿌리치고 오스만 제국 군대의 중앙으로 돌격했다. 그러나 술탄 직속 친위대 예니체리의 반격을 받고 전사했다. 줄리아노 체자리니도 이 전투에서 함께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브와디스와프 3세는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패배했던 독일 기사단 총장 율리히 폰 운긴겐과 똑같은 과오를 범했다.

바르나 전투의 브와디스와프 3세. 얀 마데지코의 미완성 그림.


브와디스와프 3세의 죽음으로 십자군은 패배했고, 폴란드헝가리는 위기에 처했다. 그는 미혼으로 자식 없이 죽었으며(얀 두고시의 연대기에서는 그가 동성애자였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헝가리 왕위는 라슬로 5세가 어린 나이에 계승했고, 폴란드 왕위는 3년간의 공위 기간을 거쳐 동생 카지미에시 4세가 계승했다.

4. 유산과 전설

브와디스와프 3세의 헝가리 왕으로서의 유산은 기존 기록에서 합스부르크가(家)에 의해 훼손되었다. 《연대기》(Annales)에 제시된 그의 통치에 대한 묘사는 "합스부르크 선전"으로 묘사되는 주장들을 포함하는 일관된 논쟁으로 구성되었다. 블라디스와프 3세의 헝가리 왕위 계승은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는 종종 터키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실패한 찬탈자로 묘사되었다. 1442년 12월 그와 만난 후 엘리자베트 룩셈부르크가 갑자기 사망하자 블라디스와프 3세가 그녀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사후, 브와디스와프 3세는 많은 노래와 시에서 기념되었다.

바벨 대성당에 있는 블라디스와프 3세의 묘비(켄타프). 왕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고 그의 무덤은 비어 있다.


불가리아 바르나에는 블라디스와프 3세의 이름을 딴 주요 대로와 주거 지역이 있다. 1935년 바르나에는 블라디스와프 바르넨치크(Władysław Warneńczyk)라는 이름의 공원 박물관이 개장했으며, 고대 트라키아식 봉분(무덤) 위에 상징적인 묘비(켄타프)가 세워졌다. 바르나에는 블라디스와프의 이름을 딴 축구팀도 있었는데, 현재 그 후계자는 PFC 체르노 모레 바르나로 알려져 있다.

포르투갈의 전설에 따르면, 브와디스와프 3세는 바르나 전투에서 살아남아 오랜 여행을 거쳐 마데이라 섬에 도착했다.[7] 아폰수 5세는 그에게 마데이라 제도의 카보 기라오(Cabo Girão)를 하사하고, 죽을 때까지 영지로써 보증했다.[7] 브와디스와프는 "알레망의 엔리케"(Henrique Alemão; 독일인 하인리히)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아폰수 5세의 중매로 아네스란 귀족의 딸[8]과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다. 또한 알렉산드리아의 카타리나의 동반기사(''O Cavaleiro de Santa Catarina'')가 되어, 1471년 마달레나 두 마르에 카타리나와 막달라 마리아에게 봉헌된 교회를 건립했다고 한다.[9][10] 이 교회는 아드라시오 데 마키코(''da Adoração de Machico'')의 공방에서 제작된 성 요아킴(''São Joaquim'')과 성 안나(Saint Anne)의 금문의 만남을 주제로 한 회화(16세기 초)에 묘사되었는데, 그 뒷 배경에 브와디스와프의 모습이 등장한다.[7]

일부 학자들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브와디스와프 3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미국 듀크 대학교의 역사학자 마누엘 로사(Manuel Rosa)는 2010년 스페인에서 출판한 저서 『콜럼버스: 말하지 않은 이야기』에서, 브와디스와프 3세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친부라는 결론을 내렸다.[5][6]

로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여러 정황 증거들이 콜럼버스가 브와디스와프 3세의 친자이며 당시 유럽의 왕족과 귀족들은 이를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한다.

정황 증거내용
귀족과의 결혼평민 출신이라는 정설과 달리 콜럼버스는 포르투갈 왕의 허가를 받고 포르투갈 귀족의 딸과 결혼했는데,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학문적 지식콜럼버스가 지니고 있던 지리, 천문학, 지도에 대한 지식과 형제들과 통신할 때 사용했던 암호는 고도의 교육을 필요로 했을 것이며, 이는 그가 학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동안 자기 학습으로 학문을 익혔다는 정설과는 맞지 않는다.
유서 위조1498년에 작성된 그의 마지막 유서에는 "나는 제노바에서 태어났다"라고 적혀 있지만, 이 유서는 그의 사후 80년이 지난 후 그의 유산을 노리는 이탈리아인들에 의해 그의 이름을 "콜롬보"로 위조된 것이다.
문장의 유사성콜럼버스가 사용했던 문장은 폴란드 왕가의 문장과 매우 유사하다.
초상화의 왕관세비야의 알카사르 궁전에 있는 콜럼버스의 초상화에서 그의 소매에 왕관이 감춰져 있었다.
외모적 특징남유럽에서는 드물지만 폴란드 지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붉은 머리, 하얀 피부, 파란 눈이 콜럼버스의 외모적 특징이다. (브와디스와프 3세의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2세는 리투아니아 출신이며, 그의 할머니 조피아 호르샨스카는 루시 지역 출신이다).



로사는 폴란드 정부에 크라쿠프 왕궁에 안치되어 있는 브와디스와프 2세의 유해 등에 대한 DNA 감정을 요청하고 있다. 세비야 대성당에 유해가 있는 콜럼버스의 DNA는 이미 채취되었으므로, 이 감정을 통해 콜럼버스가 브와디스와프 3세의 친자임이 증명될 것이기 때문이다. 5년 전에 콜럼버스와 그의 형제들의 DNA가 채취되어 전 유럽에서 콜럼버스 가문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477명의 사람들의 DNA와 대조되었지만, 그의 친족이나 후손은 명확하지 않았다. 당시 폴란드설은 아직 제기되지 않았고, 검사의 예상 밖이었다.

4. 1. 유산

브와디스와프 3세는 미혼으로 자식이 없었으며, 얀 두고시의 연대기에서는 그가 동성애자였을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5] 헝가리 왕위는 과거 경쟁자였던 엘리자베트(이미 사망)의 아들 라슬로 5세가 어린 나이에 계승했고, 폴란드 왕위는 3년간의 공위 기간을 거쳐 동생 카지미에시 4세가 계승했다.

카지미에시 4세는 1454년 라슬로의 누이 엘리자베트와 결혼했고, 그들의 손자 중 한 명인 러요시 2세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종조부 브와디스와프 3세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헝가리 왕으로서 브와디스와프 3세의 유산은 기존 기록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훼손되었다. 그의 통치에 대한 묘사는 "합스부르크 선전"으로 묘사되는 주장들을 포함하여 일관된 논쟁으로 구성되었다. 블라디스와프 3세의 헝가리 왕위 계승은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는 종종 튀르크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실패한 찬탈자로 묘사되었다. 또한 1442년 12월 그와 만난 후 엘리자베트 룩셈부르크가 갑자기 사망하자, 브와디스와프 3세가 그녀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사후, 브와디스와프 3세는 많은 노래와 시에서 기념되었다.[7]

불가리아 바르나에는 브와디스와프 3세의 이름을 딴 주요 대로와 주거 지역이 있다. 1935년 바르나에는 브와디스와프 바르넨치크(Władysław Warneńczyk)라는 이름의 공원 박물관이 개장했으며, 고대 트라키아식 봉분(무덤) 위에 상징적인 묘비(켄타프)가 세워졌다. 바르나에는 브와디스와프의 이름을 딴 축구팀도 있었는데, 현재 그 후계자는 PFC 체르노 모레 바르나로 알려져 있다.

4. 2. 전설

포르투갈의 전설에 따르면, 브와디스와프 3세는 바르나 전투에서 살아남아 오랜 여행을 거쳐 마데이라 섬에 도착했다.[7] 아폰수 5세는 그에게 마데이라 제도의 카보 기라오(Cabo Girão)를 하사하고, 죽을 때까지 영지로써 보증했다.[7] 브와디스와프는 "알레망의 엔리케"(Henrique Alemão; 독일인 하인리히)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아폰수 5세의 중매로 아네스란 귀족의 딸[8]과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다. 또한 알렉산드리아의 카타리나의 동반기사(''O Cavaleiro de Santa Catarina'')가 되어, 1471년 마달레나 두 마르에 카타리나와 막달라 마리아에게 봉헌된 교회를 건립했다고 한다.[9][10] 이 교회는 아드라시오 데 마키코(''da Adoração de Machico'')의 공방에서 제작된 성 요아킴(''São Joaquim'')과 성 안나(Saint Anne)의 금문의 만남을 주제로 한 회화(16세기 초)에 묘사되었는데, 그 뒷 배경에 브와디스와프의 모습이 등장한다.[7]

일부 학자들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브와디스와프 3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미국 듀크 대학교의 역사학자 마누엘 로사(Manuel Rosa)는 2010년 스페인에서 출판한 저서 『콜럼버스: 말하지 않은 이야기』에서, 브와디스와프 3세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친부라는 결론을 내렸다.[5][6]

로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여러 정황 증거들이 콜럼버스가 브와디스와프 3세의 친자이며 당시 유럽의 왕족과 귀족들은 이를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한다.

정황 증거내용
귀족과의 결혼평민 출신이라는 정설과 달리 콜럼버스는 포르투갈 왕의 허가를 받고 포르투갈 귀족의 딸과 결혼했는데,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학문적 지식콜럼버스가 지니고 있던 지리, 천문학, 지도에 대한 지식과 형제들과 통신할 때 사용했던 암호는 고도의 교육을 필요로 했을 것이며, 이는 그가 학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동안 자기 학습으로 학문을 익혔다는 정설과는 맞지 않는다.
유서 위조1498년에 작성된 그의 마지막 유서에는 "나는 제노바에서 태어났다"라고 적혀 있지만, 이 유서는 그의 사후 80년이 지난 후 그의 유산을 노리는 이탈리아인들에 의해 그의 이름을 "콜롬보"로 위조된 것이다.
문장의 유사성콜럼버스가 사용했던 문장은 폴란드 왕가의 문장과 매우 유사하다.
초상화의 왕관세비야의 알카사르 궁전에 있는 콜럼버스의 초상화에서 그의 소매에 왕관이 감춰져 있었다.
외모적 특징남유럽에서는 드물지만 폴란드 지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붉은 머리, 하얀 피부, 파란 눈이 콜럼버스의 외모적 특징이다.(브와디스와프 3세의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2세는 리투아니아 출신이며, 그의 할머니 조피아 호르샨스카는 루시 지역 출신이다).



로사는 폴란드 정부에 크라쿠프 왕궁에 안치되어 있는 브와디스와프 2세의 유해 등에 대한 DNA 감정을 요청하고 있다. 세비야 대성당에 유해가 있는 콜럼버스의 DNA는 이미 채취되었으므로, 이 감정을 통해 콜럼버스가 브와디스와프 3세의 친자임이 증명될 것이기 때문이다. 5년 전에 콜럼버스와 그의 형제들의 DNA가 채취되어 전 유럽에서 콜럼버스 가문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477명의 사람들의 DNA와 대조되었지만, 그의 친족이나 후손은 명확하지 않았다. 당시 폴란드설은 아직 제기되지 않았고, 검사의 예상 밖이었다.

5. 갤러리

바르나의 브와디스와프 3세의 상징적인 영묘. 고대 트라키아식 토묘.

참조

[1] 웹사이트 São Joaquim e Santa Ana http://www.museuarte[...]
[2] 웹사이트 A Lenda... Henrique Alemão ou Ladislau III https://web.archive.[...]
[3] 웹사이트 Henrique Alemão- Ladislau III da Polónia https://web.archive.[...]
[4] 웹사이트 Diocese do Funchal http://www.diocesedo[...] 2011-10-02
[5] 웹사이트 Christopher Columbus was son of Polish king http://www.telegraph[...]
[6] 웹사이트 Christopher Colombus Polish, Portuguese? Historians claim explorer was son of exiled King Vladislav III http://www.dailymail[...]
[7] 웹사이트 São Joaquim e Santa Ana http://www.museuarte[...]
[8] 웹사이트 A Lenda... Henrique Alemão ou Ladislau III https://web.archive.[...]
[9] 웹사이트 Henrique Alemão- Ladislau III da Polónia https://web.archive.[...]
[10] 웹사이트 Diocese do Funchal http://www.diocesedo[...] 2011-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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