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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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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담은 신라 진평왕 재위 기간에 활동한 인물로, 선덕여왕 시기 상대등에 임명되었으나 647년에 여왕을 폐위시키려는 반란을 일으켰다. 비담은 김유신과의 권력 다툼, 여성 통치에 대한 반대 등 복합적인 배경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며, 10여 일 만에 진압되어 처형되었다. 그의 난은 신라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드라마 등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로 재해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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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비담
한글비담
한자毗曇
로마자 표기Bidam
신분 및 직위
국적신라
직위상대등
재임 기간645년 ~ 647년
이전수품
이후알천
군주선덕여왕
종교불교
생애
출생미상
사망일647년 2월 26일 (음력 1월 17일)
사망 원인처형
가족 관계
자녀비후
참여
주요 참여비담의 난

2. 생애

비담의 출생 연도, 부모 등 출생에 대한 사항 및 업적 등에 대해서는 남은 기록이 거의 없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선덕여왕 재위 말기인 645년 화백회의의 수장이자 신라의 최고 벼슬인 상대등에 올랐다.[1]

2. 1. 출생과 초기 생애

비담의 출생 연도, 부모 등 출생에 대한 사항 및 업적 등에 대해서는 남은 기록이 거의 없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선덕여왕 재위 말기인 646년 음력 11월 화백회의의 수장이자 신라의 최고 벼슬인 상대등에 오른 것으로 나타난다.[1]

비담은 알천과 나이가 비슷했고, 진평왕 재위 기간에 벼슬을 했다고 전해진다. 알천이 화랑이었으므로, 비담도 젊은 시절에 화랑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후 공적으로 승진했을 수도 있다.[1] 또 다른 설은 그가 한때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학자였다는 것이다.[1]

그는 알천, 김용춘과 더불어 공주 시절 선덕여왕을 지지하는 세력의 핵심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1]

그의 정치적 세력은 가야 멸망전 당시 가야 멸망에 큰 역할을 했을 수 있으며, 이로 인해 그와 김유신 사이에 갈등이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1]

2. 2. 상대등 임명

645년 화백회의의 수장인 상대등이 되었다.[1] 647년 정월, 선덕여왕 16년에 비담은 염종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1]

2. 3. 비담의 난

647년 정월, 비담은 염종 등과 함께 "여왕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실패했다"라는 명분을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신라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반란으로 기록된다.[1]

김유신월성을 먼저 장악하자, 비담은 명활산성으로 거점을 옮겨 저항했다.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 따르면, 이 반란은 10여 일 만에 진압되었다. 삼국사기 진덕여왕조에는 비담과 염종을 포함한 30명이 647년 정월 17일에 처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

반란 도중 선덕여왕647년 1월 8일 사망하고, 진덕여왕이 즉위했다.

한편, 비담의 반란과 관련된 일화가 전해진다. 반란이 일어난 밤, 월성에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본 비담은 이를 여왕의 몰락을 상징하는 징조로 이용하려 했다. 하지만 김유신은 불타는 허수아비를 연에 매달아 하늘로 띄워 별이 제자리로 돌아간 것처럼 보이게 했고, 이에 비담의 군사들은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고 한다.[2]

2. 3. 1. 배경

645년 선덕여왕은 비담을 최고위 관직인 상대등에 임명했다. 당시 신라는 백제고구려 연합군의 침략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화백회의 귀족들은 왕권 강화를 우려했다. 비담은 이러한 상황에서 여왕의 무능함을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김유신에 맞서 명활산성에 진을 쳤지만, 10여 일 만에 진압되었다. 647년 1월 8일 선덕여왕이 사망하고 진덕여왕이 즉위한 후, 비담과 그의 일족 30명은 처형되었다.[1]

비담의 반란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 대외적 위기: 백제고구려 연합군의 침략으로 신라는 영토와 요새를 잃는 등 국가적 위기에 직면했다.
  • 내부 갈등: 선덕여왕의 불교 장려 정책은 왕실 재정을 악화시켰고, 화백회의 귀족들은 왕권 강화를 경계했다.
  • 당나라의 압력: 당나라는 신라에 군사적 지원을 조건으로 여왕을 폐위하고 당나라 왕족을 새 왕으로 세울 것을 요구했다.
  • 왕위 계승 문제: 왕위 계승 후보였던 비담은 진덕여왕이 화백회의의 승인을 받아 후계자로 지명되자 불만을 품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비담이 김유신의 정치적 음모에 희생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김춘추와 김유신의 동맹은 비담의 권력과 경쟁 구도를 형성했고, 김유신은 비밀 쿠데타를 일으켜 비담을 반역자로 몰아갔다는 것이다.

2. 3. 2. 발단

645년, 선덕여왕은 비담을 최고위 관직인 상대등에 임명했다. 당시 여왕의 건강이 악화되어 대부분의 업무를 비담에게 맡겼다. 그 무렵 신라백제고구려 연합군의 침략으로 서쪽 지역의 40여 개 요새를 빼앗기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한편, 화백회의 귀족들은 군주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고 있었다.[1]

이러한 상황에서 비담은 "여왕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실패했으며, 따라서 여성은 통치를 멈춰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비담은 조정에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왕 다음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고, 백성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명분에 동조하여 신라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반란으로 발전했다.[1] 그는 김유신과 그의 군대가 여왕이 머무는 월성에서 싸울 준비를 하기 위해 자신의 지지자들을 명활산성으로 모았다.

비담의 반란에 관한 일화가 있는데, 비담의 반란이 일어난 밤, 비담은 여왕이 있는 월성에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비담은 미신적인 추종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그것을 여왕의 몰락의 징조로 이용했다.[2] 여왕은 그 소식을 듣고 두려움에 떨었지만 김유신은 그의 반란을 진압할 계획이 있다고 말하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는 불타는 허수아비를 거대한 연에 매달아 하늘에 날려 별이 제자리로 돌아간 것처럼 보이게 했다. 비담의 추종자들은 그것을 보고 크게 낙담하여 사기가 떨어졌다.[2]

비담의 반역 이유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 백제와 고구려 연합군의 끊임없는 침략으로 영토와 요새를 잃었고, 선덕여왕은 가난한 백성을 위해 세금을 낮췄지만, 왕실 재정에 큰 부담을 주면서 많은 사찰과 불상을 세웠다. 당나라 황제는 이를 조롱했고, 설상가상으로 선덕여왕은 황룡사를 짓기로 결정했다. 이는 백성들이 가장 자금이 필요한 시기에 사찰 건설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비담과 염종은 이를 반역의 이유 중 하나로 삼았다.
  • 선덕여왕의 재위 기간 동안 겪었던 굴욕과 손실의 양을 고려할 때, 당나라 황제에 따르면, 그들이 끊임없이 침략을 받은 이유는 주변 국가들이 여성 통치자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신라의 관습에 따르면, 왕이 적통 후계자 없이 사망할 경우, 상대등이 새로운 통치자로서 왕위에 오를 수 있으며, 다른 모든 후보자는 화백회의의 승인을 먼저 받아야 한다. 당시 상대등이었고, 조정에서 좋은 평판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비담은 왕위의 가장 강력한 후보였다. 그러나 진덕여왕은 화백회의의 승인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642년 8월, 백제에 의해 대야성(경상남도 합천군)이 함락되었다. 대야성 탈환을 위해, 대 백제전의 구원군을 요청하고자 왕족 김춘추(후의 무열왕)가 고구려로 갔지만, 고구려로부터의 원군은 얻지 못했다.

643년 9월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백제(나제동맹)를 칠 구원군을 요청했지만, 당으로부터는 원군을 파견하는 조건으로, 여왕을 폐하고 당의 왕실에서 새 왕을 세울 것을 강요받았다. 당의 요구에 대해 신라 국내에서는 친당파와 반당파가 대립했고, 비담은 여왕 자신이 상대등에 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친당파의 선두에 섰다. 647년 정월, 비담은 염종(진골 귀족) 등과 함께 "여주(女君)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라고 외치며 반란을 일으켰다.

2. 3. 3. 전개

645년, 선덕여왕은 비담을 최고위 관직인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당시 여왕의 건강이 악화되어 예전처럼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대부분의 업무를 비담에게 맡겼다. 그 무렵 신라는 백제고구려 연합군의 침략으로 서쪽 지역의 40여 개의 요새를 빼앗기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한편, 화백회의 귀족들은 군주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고 있었다.[1]

643년 9월, 신라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와 백제(나제동맹)를 칠 구원군을 요청했지만, 당나라는 원군 파견의 조건으로 여왕을 폐하고 당나라 왕실에서 새 왕을 세울 것을 강요했다. 당나라의 요구에 대해 신라 국내에서는 친당파와 반당파가 대립했고, 비담은 여왕이 직접 상대등에 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친당파의 선두에 섰다.[2]

647년 정월, 비담은 염종 등과 함께 "여왕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실패했으며, 따라서 여성은 통치를 멈춰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비담은 조정에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왕 다음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고, 백성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명분에 동조하여 신라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반란으로 발전했다. 그는 김유신과 그의 군대가 여왕이 머무는 월성에서 싸울 준비를 하기 위해 자신의 지지자들을 명활산성으로 모았다.[1]

김유신에게 월성을 먼저 장악당한 비담은 명활산성에 진을 치고 대치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비담의 반란은 열흘 남짓 만에 진압되었고, 그의 일족은 몰살되었다. 《삼국사기》 진덕여왕 조에 따르면, 이 난에 연좌되어 사망한 사람은 30명이었다. 비담의 난이 진행되는 도중인 647년 1월 8일, 선덕여왕은 붕어했고, 이어서 진덕여왕이 신라의 제28대 국왕으로 즉위했다.[2]

비담의 반란에 관한 일화가 있는데, 비담의 반란이 일어난 밤, 비담은 여왕이 있는 월성에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비담은 미신적인 추종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그것을 여왕의 몰락의 징조로 이용했다. 여왕은 그 소식을 듣고 두려움에 떨었지만 김유신은 그의 반란을 진압할 계획이 있다고 말하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는 불타는 허수아비를 거대한 연에 매달아 하늘에 날려 별이 제자리로 돌아간 것처럼 보이게 했다. 비담의 추종자들은 그것을 보고 크게 낙담하여 사기가 떨어졌다. 반란은 이후 김유신과 알천에 의해 진압되었다.[2]

2. 3. 4. 진압과 최후

김유신월성을 먼저 장악하자, 비담은 명활산성에 진을 치고 대치하였다.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 따르면, 비담의 반란은 10여 일 만에 진압되었다. 삼국사기 진덕여왕조에 따르면, 비담과 염종을 포함한 그의 일족 30명은 647년 정월 17일에 처형됐다.[1]

비담의 난이 진행되던 중인 647년 1월 8일, 선덕여왕은 승하하였고, 진덕여왕신라의 제28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비담의 반란에 관한 일화가 있는데, 비담의 반란이 일어난 밤, 비담은 여왕이 있는 월성에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비담은 미신적인 추종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그것을 여왕의 몰락의 징조로 이용했다. 여왕은 그 소식을 듣고 두려움에 떨었지만 김유신은 그의 반란을 진압할 계획이 있다고 말하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는 불타는 허수아비를 거대한 연에 매달아 하늘에 날려 별이 제자리로 돌아간 것처럼 보이게 했다. 비담의 추종자들은 그것을 보고 크게 낙담하여 사기가 떨어졌다.[2]

3. 비담의 난에 대한 평가와 해석

비담의 반역 이유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백제와 고구려 연합군의 끊임없는 침략으로 신라는 영토와 요새를 잃었다. 선덕여왕은 백성을 위해 세금을 낮췄지만, 왕실 재정에 부담을 주면서 많은 사찰과 불상을 세웠고, 당나라 황제는 이를 조롱했다. 특히 황룡사 건립은 백성들의 부담을 가중시켰기에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비담과 염종은 이를 반역의 이유 중 하나로 삼았다.[1]

선덕여왕 이후 또 다른 여성 통치자(진덕여왕)가 등장하는 것에 대한 반감도 반역의 이유로 추정된다. 당나라 황제는 여성 통치자가 주변 국가에 두려움을 주지 못한다고 여겼고, 신라의 관습에 따르면 왕이 적통 후계자 없이 사망할 경우 상대등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기에, 당시 상대등이었던 비담은 유력한 왕위 후보였다.[1]

그러나 일부 역사학자들은 비담이 김유신에 의해 정치적으로 조종당한 희생자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김춘추를 위해 절대 왕정을 수립하려 했던 김유신은 김춘추와 자신의 누이를 결혼시켜 동맹을 맺었고, 이는 비담의 권력과 경쟁하게 만들었다. 김유신이 비담의 반역을 조작했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김유신은 선덕여왕의 건강이 악화되자 비밀 쿠데타를 일으켜 궁궐을 포위하고, 비담이 여왕을 배신하고 왕위를 찬탈하려 한다고 모함했다. 여왕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며칠이 지나도 비담과 귀족들이 나타나지 않자 비담의 반역을 믿게 되었고, 비담은 이에 분노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김유신은 여왕을 안심시키며 비담을 진압할 계획이 있다고 말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여왕은 사망했다.[1]

일각에서는 비담이 여성 통치에 진정으로 반대했다면, 선덕여왕 즉위 초기에 반대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반역의 위험성을 고려할 때 비담이 스스로 반역을 주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1]

비담의 난은 신라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귀족들의 영향력은 감소했고, 군주의 권력이 강화되었다. 무열왕(김춘추)은 60개 이상의 법을 통과시켜 중앙 집권 정부를 수립했다. 비담은 '신라 역사상 최대의 반역자'로 여겨지며, 김유신을 자신의 주요 경쟁자로 여겼던 것으로 추정된다.[1]

4. 일화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비담의 난과 관련된 일화가 실려 있다.[1] 비담은 명활산성에 진을 치고 김유신이 이끄는 관군은 월성에 진을 쳤는데, 어느 날 밤 큰 별이 월성에 떨어졌다.[1] 비담이 부하들에게 "이는 틀림없이 여주(女主, 여왕을 낮추어 부른 말)가 패할 징조이다."라고 말하자, 반란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1]

이에 선덕여왕김유신을 불러 대책을 논의하였고, 김유신은 왕을 안심 시킨 후 허수아비에 불을 붙여 연을 띄워 하늘로 올려 보냈다.[1] 그리고 "어제 밤에 떨어진 별이 다시 올라갔다"는 소문을 퍼뜨리자, 관군은 기세를 얻어 반란군을 물리쳤다.[1]

5. 대중문화 속 비담

대중문화에서 비담을 다룬 작품은 다음과 같다.


5. 1. TV 드라마


  •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비담은 진지왕과 미실의 아들로 등장하며, 염종의 계략으로 반란을 일으키지만 김유신의 칼에 찔려 죽는다.
  •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 비담은 신라의 대야성주로 등장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참조

[1] 서적 A World History of Political Thought https://books.google[...] Edward Elgar Publishing 2018-05-25
[2] 서적 Korea's Pastimes and Customs: A Social History https://books.google[...] Homa & Sekey Books 2006-01-01
[3] 문서 「毗」は「毘」の[[字体|異体字]]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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