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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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뒤를 이어 신라의 제27대 왕이 된 인물이다. 632년 즉위하여 647년까지 재위하며, 분황사, 영묘사, 첨성대 등을 건립하고, 당나라와의 외교를 통해 백제와 고구려의 위협에 대응했다. 재위 기간 중 비담의 난이 발생하였고, 반란 진압 중에 사망했다. 선덕여왕은 통치 능력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받았으며, 긍정적으로는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졌다는 평가를, 부정적으로는 군사적 실정과 사찰 건립으로 인한 국력 소모에 대한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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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선덕여왕 재위기에 상대등을 지낸 비담은 647년 염종과 함께 "여왕은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며 반란을 일으켰다가 김유신에게 진압되었으며, 그의 반란 배경에는 여성 통치자에 대한 반발, 왕위 계승 다툼, 김유신의 정치적 음모 등 여러 해석이 있다. - 647년 사망 - 김용수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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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복은 신라에서 584년부터 633년까지 사용된 연호이며, 각 연도별 서력 기원과 간지를 표로 정리하여 보여준다.
선덕여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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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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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선덕왕 (善德王) |
본명 | 덕만(德曼), 만(万) |
다른 이름 | 덕만공주(德曼公主) |
국적 | 신라 |
출생일 | 미상 |
사망일 | 647년 2월 20일 (양력) |
재위 | 632년 음력 1월 ~ 647년 2월 20일 (양력) |
자녀 | 없음 |
부왕 | 진평왕 |
모후 | 마야부인 |
형제자매 | 천명공주, 선화공주 |
왕후 | 음갈문왕 |
전임자 | 진평왕 |
후임자 | 진덕여왕 |
묘호 | 없음 |
시호 | 선덕(善德) |
존호 | 성조황고(聖祖皇姑) |
연호 | 건복(建福): 632년 ~ 633년 인평(仁平): 634년 ~ 647년 |
목록 | 제27대 신라 여왕 |
능묘 | 선덕여왕릉(善德女王陵) |
종교 | 불교 |
로마자 표기 | Seondeok yeowang, also Seondeok wang |
즉위 및 재위 | |
즉위 | 632년 |
재위 기간 | 632년 ~ 647년 (15년)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진평왕 |
어머니 | 마야부인 |
생애 및 사망 | |
출생 추정 시기 | 580년 ~ 610년경 |
사망 날짜 | 647년 2월 20일 (음력 1월 8일, 인평 14년) |
사망 장소 | 신라 |
매장 장소 | 경주, 선덕여왕릉 |
불교 관련 | |
사찰 이름 | 성조 (聖祖, 성조) |
2. 생애
진평왕이 아들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진평왕의 왕녀인 덕만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여, "성스러운 조상의 혈통을 이어받은 여황제"라는 뜻을 가진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존호를 올렸다. 《삼국유사》 왕력(王曆) 편은 “김씨 성골의 남자가 다하였으므로 여왕이 왕으로 선 것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29]
출생연도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즉위 당시 50세 전후의 나이로 학자들은 추정한다.[28] 《삼국사기》에는 진평왕의 맏이로, 《삼국유사》에는 형제자매 서열에 관한 기록이 없이 진평왕의 딸로만 기록되었다.
즉위한 해인 건복 49년(632년)에 을제(乙祭) 또는 을찬(乙粲)으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케 하고, 각지에 관리를 파견하여 홀아비, 홀어미, 고아, 독거노인 등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돕게 하였으며, 당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건복 50년(633년) 정월에는 스스로 신궁에 제사를 올리고 여러 주·군의 조세를 1년간 감해 주었다. 또한 8월에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공했다.
즉위 3년째인 건복 51년(634년)부터 '''인평'''(仁平)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해에 분황사(芬皇寺)가 완공되었다.
인평 2년(635년) 겨울에는 이찬 수품(水品)과 용수(龍樹)를 시켜 각지의 민심을 위로하게 하였다. 또한 당으로부터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에 봉해졌다.
인평 3년(636년) 정월에는 수품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3월에 병이 나자 이를 기양하기 위해 황룡사(皇龍寺)에서 큰 법회를 열었다. 같은 해, 자장법사가 불법을 배우기 위해 당으로 들어갔다. 5월에 백제 장군 우소가 여근곡에 쳐들어오자 알천, 필탄 두 장군을 보내 이를 무찔렀다.
인평 5년(638년) 10월에는 고구려가 칠중성을 공격해 왔고, 다시 대장군 알천을 파견해 이를 격퇴하고 불안한 민심을 달랬다.
인평 6년(639년), 북부 국경을 방비하기 위해 하슬라(荷瑟羅)를 북소경(北小京)으로 삼고 사찬 진주(眞珠)를 보내 지키게 하였다.
인평 7년(640년)에는 귀족 자제들을 유학생으로서 당의 국자감에 입학하게 하였다.
인평 9년(642년) 정월에 다시 당에 조공하였다. 7월에 백제의 의자왕이 이끄는 군사들이 신라의 서쪽 40여 개 성을 함락시키고, 여기에 지 당과의 외교 거점이었던 당항성을 공격해오자 당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8월에 백제가 대야성을 함락시켰고, 김춘추의 사위인 이찬 품석(品釋) 등을 죽였다. 정세가 불리해지자 왕은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보장왕은 신라가 차지한 죽령 이북의 땅을 반환할 것을 선제 조건으로 요구하였지만 김춘추가 거절하였기에 그를 감금하였다. 협상이 결렬되자 왕이 김유신을 보내 한강 북부까지 진격하니 보장왕은 김춘추를 풀어주었다.
인평 10년(643년) 정월에도 당에 토산품을 바쳤다. 9월에 당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으나 당 태종은 이를 거절하였고, 인평 11년(644년) 정월에 신라는 다시 당에 조공을 바쳤다. 이에 당 태종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공격을 멈추라고 종용하였다. 이에 연개소문은 “일전에 고구려와 수나라가 전쟁을 벌일 때 그 틈을 타서 신라가 빼앗아간 우리의 영토 500리를 돌려주기 전에는 싸움을 멈출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9월에 왕은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고 백제를 공격하여 일곱 성을 빼앗았다.
인평 12년(645년) 정월에도 당에 조공을 바쳤다. 백제와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자장법사의 건의로 3월에 황룡사탑을 세웠다. 5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자 군사 3만을 파견하여 이를 도왔다. 그러나 그 사이에 백제에게 일곱 성을 빼앗겼다. 11월에는 비담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재위 마지막 해인 647년 정월, 상대등 비담이 염종(廉宗)과 함께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라는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월성에 진을 치고 김유신을 파견하여 비담을 상대하게 하였다.
반란 와중인 1월 8일에 승하하였다. 시호를 ‘'''선덕'''(善德)’이라 하였고, 일전에 예언한 것처럼 낭산(狼山)의 남쪽에 장사지냈다.
2. 1. 즉위 전
덕만공주(德曼)로 태어난 선덕여왕은 진평왕과 마야부인의 딸이었다.[28] 출생연도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학자들은 즉위 당시 나이가 50세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28] 삼국사기에는 진평왕의 맏이로 기록되어 있고,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에 따르면 천명공주가 선덕여왕보다 언니였다고 한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형제자매 서열에 관한 기록 없이 진평왕의 딸로만 기록되었다.[28] 그녀에게는 천명공주와 선화공주 두 명의 동생이 있었지만, 누가 언니였는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2009년 발견된 증거에 따르면 의자왕의 어머니는 사택왕후이며 선화공주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선화공주의 존재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진평왕에게는 왕위를 물려줄 아들이 없었기에, 그는 사위인 김용수(천명공주의 남편)를 후계자로 여기기 시작했다. 이는 김용수가 국가에 공로를 세웠기 때문이었다. 덕만공주는 이 소식을 듣고 아버지에게 왕위 계승 경쟁에 참여할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며, 김용수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도 왕위를 다툴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결연한 의지를 본 진평왕은 그녀에게 왕위에 합당함을 증명할 기회를 주었다. 신라에서 여성이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사도왕후 또한 진평왕의 섭정을 지냈다), 여성 통치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여전히 대다수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덕만공주는 백성들의 신뢰와 지지를 얻기 위해 스스로를 증명해야 했다. 결국 그녀는 성공하여 진평왕의 계승자로 책봉되었다.[11] 하지만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나와 있지 않다.
진평왕이 아들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진평왕의 왕녀인 덕만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여, "성스러운 조상의 혈통을 이어받은 여황제"라는 뜻을 가진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존호를 올렸다. 《삼국유사》 왕력(王曆) 편은 “김씨 성골의 남자가 다하였으므로 여왕이 왕으로 선 것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29]
이 결정은 모든 사람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결과 일부 관리들은 그녀의 즉위를 막기 위해 반란을 계획했다. 631년 5월, 이찬 칠숙(伊飡 柒宿)과 아찬 석품(阿飡 石品)이 반란을 계획했으나, 그들의 계획은 일찍 발각되어 진압되었다. 처벌로 칠숙은 온 가족과 함께 시장에서 참수당했다. 석품은 도망쳐 백제 국경까지 갔으나, 아내가 그리워 나무꾼과 옷을 바꿔 입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집에 돌아오자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2. 2. 즉위 초 (632년 ~ 636년)
선덕여왕은 즉위한 해인 632년에 을제(乙祭) 또는 을찬(乙粲)에게 국정을 총괄하게 하고, 각지에 관리를 파견하여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도왔으며,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29] 진평왕이 아들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덕만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삼국유사》 왕력(王曆) 편은 “김씨 성골의 남자가 다하였으므로 여왕이 왕으로 선 것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29] 학자들은 즉위 당시 선덕여왕의 나이를 50세 전후로 추정한다.[28]633년 정월에는 신궁에 제사를 올리고 여러 주·군의 조세를 1년간 감면해 주었다.[12] 같은 해 8월에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공했다.
634년부터 '''인평'''(仁平)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해에 분황사(芬皇寺)가 완공되었다.
635년에는 이찬 수품(水品)과 용수(龍樹)를 시켜 각지의 민심을 위로하게 하였다. 또한 당나라로부터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에 봉해졌다.[23]
636년 정월에는 수품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3월에 병이 나자 황룡사(皇龍寺)에서 큰 법회를 열었고, 같은 해 자장법사가 불법을 배우기 위해 당나라로 들어갔다.[12] 5월에 백제 장군 우소가 여근곡에 쳐들어오자 알천, 필탄 두 장군을 보내 이를 무찔렀다.[13][14]
선덕여왕은 불교 보호에도 힘썼으며, 자장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불법을 닦게 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 분황사와 영묘사가 완공되었으며, 첨성대(천문대)를 축조했다고도 전해진다. 640년에는 왕족 자제들을 유학생으로서 당나라의 국자감에 입학하게 하여, 당나라 문화가 신라에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2. 3. 즉위 중 (637년 ~ 642년)
선덕여왕은 진평왕이 아들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새로운 왕으로 추대되어, "성스러운 조상의 혈통을 이어받은 여황제"라는 뜻을 가진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존호를 받았다.[29] 즉위년(632년)에 을제에게 국정을 총괄하게 하고, 각지에 관리를 파견하여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도왔으며,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28]633년 정월에는 신궁에 제사를 올리고 여러 주·군의 조세를 1년간 감면해 주었으며, 8월에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공했다. 634년부터 '''인평'''(仁平)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분황사가 완공되었다.[12] 635년에는 각지의 민심을 위로하게 하였고, 당나라로부터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에 봉해졌다. 636년에는 상대등을 임명하고, 황룡사에서 큰 법회를 열었으며, 자장법사가 당나라로 들어갔다. 5월에 백제 장군 우소가 쳐들어오자 알천, 필탄 두 장군을 보내 이를 무찔렀다.[13][14] 638년에는 고구려의 침입을 격퇴하고 민심을 달랬다.
639년 하슬라를 북소경(北小京)으로 삼고 사찬 진주를 보내 지키게 하였다. 640년에는 귀족 자제들을 당나라의 국자감에 유학생으로 입학하게 하였다. 642년 정월에 다시 당에 조공하였으나, 7월에 백제가 신라의 서쪽 40여 개 성을 함락시키고, 당항성을 공격하자 당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8월에 백제가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 등을 죽였다.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으나 보장왕은 신라가 차지한 죽령 이북의 땅을 반환할 것을 요구하였고, 김춘추가 거절하여 협상이 결렬되었다. 이에 김유신을 보내 한강 북부까지 진격하니 보장왕은 김춘추를 풀어주었다.[15]
643년에는 자장이 귀국하여 외침을 막고 백성을 안정시키기 위해 황룡사 9층 목탑 건립을 건의하였다. 여왕은 종교적 헌신으로 백성들을 하나로 모으고 신라가 멸망 직전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탑 건립을 추진했다. 2년 후 탑이 완공되었는데, 이는 황룡사(Hwangnyongsa)라 불렸으며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사찰로 여겨졌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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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3년 9월, 당 태종은 신라의 구원 요청을 거절하였다. 644년 정월, 신라는 다시 당에 조공을 바쳤고, 당 태종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공격을 멈추라고 종용하였다. 연개소문은 신라가 빼앗아간 영토 500리를 돌려주기 전에는 싸움을 멈출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9월에 왕은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고 백제를 공격하여 일곱 성을 빼앗았다.
645년 정월, 당에 조공을 바쳤고, 백제와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자장법사의 건의로 3월에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다. 5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자 군사 3만을 파견하여 이를 도왔으나, 백제에게 일곱 성을 빼앗겼다. 11월에는 비담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선덕여왕 재위 2년차에 농민들을 돕기 위해 첨성대가 건설되었다.[12]

2. 4. 즉위 말 (643년 ~ 647년)
선덕여왕은 즉위 초부터 백성들의 삶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12] 과부, 홀아비, 고아, 빈민, 노인들을 돕기 위해 전국에 왕실 감찰관을 파견했으며,[12] 농민들에게 1년간의 세금 면제를 선포하고 중산층의 세금을 감면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다.[12]633년 8월에는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입했고, 636년 5월에는 백제가 독산성(충청북도괴산군)을 공격하려다 알천, 필탄에게 저지당했다.[23] 638년에는 고구려가 칠중성을 공격해 왔으나, 알천이 이를 격퇴하였다.[23]
642년, 백제 의자왕이 직접 신라를 공격하여 서쪽의 40개 성을 함락시켰고, 윤충 장군은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대야성을 함락시켜 김춘추의 딸과 사위를 처형했다.[13][14] 고구려와 백제는 당항성을 함락시켜 당나라로 가는 중요한 해상 루트를 차단했다.[15] 이에 선덕여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으나, 당 태종은 신라가 여왕을 통치자로 두고 있어 적들이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원을 거절했다.[23]
이러한 위기 속에서, 선덕여왕은 자장의 건의로 황룡사탑을 건립하여 국론을 통합하고 외침을 막고자 했다.[12]
645년 3월에는 황룡사의 9층탑을 창건하였고, 여왕 시대에 분황사와 영묘사가 완공되었다. 영묘사의 건립과 동시에 첨성대(천문대)를 축조했다고도 전해진다.
647년, 상대등 비담이 염종과 함께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라는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12] 비담은 당시 조정에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기에, 그의 반란은 신라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반란이 되었다.[12] 왕은 월성에 진을 치고 김유신을 파견하여 비담을 상대하게 하였다. 김유신과 김알천에 의해 진압되었다.[12] 『삼국사기』에 따르면, 비담과 그의 추종자 30명은 647년 2월 17일(음력)에 처형되었다.[12]
반란 와중인 647년 1월 8일에 승하하였다.[12] 시호를 ‘'''선덕'''(善德)’이라 하였고, 낭산(狼山)의 남쪽에 장사지냈다.[16]
3. 주요 업적
선덕여왕은 재위 초반 민생의 안정에 주력하여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도록 하는 구휼정책을 활발히 추진하였으며, 동아시아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 첨성대를 건립하여 농사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또한 재위 기간에 분황사(芬皇寺)와 영묘사(靈妙寺) 등의 사찰을 건립하였다.
특히 선덕여왕은 웅대한 호국의 의지가 담긴 거대한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다. 황룡사 9층 목탑은 높이 80m의 거대한 탑으로 이를 모두 9층으로 한 이유는 이웃의 9적을 물리쳐서 복속시키기 위해 나라 이름을 새겨넣은 것이다.[30] 선덕여왕은 아버지처럼 불교에 귀의하였다. 그녀의 재위 기간 동안 신라는 많은 사찰, 탑, 불상을 건립하였다. 그 시기에 건립된 유명한 사찰 중 하나는 황룡사이다. 고대 건축 기록에 따르면, 황룡사 9층 목탑은 높이가 68m 또는 80m에 달했는데,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 중 하나였다. 이 탑은 선덕여왕과 신라 백성이 나라를 보호하고 삼국을 통일하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담은 것이었으며, 이러한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불교에 대한 공양이었다. 선덕여왕은 종종 황룡사를 찾아 신라를 위험에서 구할 지혜와 힘을 기원하였다.
분황사, 오릉, 상원사, 흥륜사/경주 흥륜사지한국어, 통도사, 월정사, 백담사, 마곡사 등도 그녀의 재위 기간 동안 건립되었다. 또한, 농민들에게 도움을 준 극동 최초의 전문 천문대로 여겨지는 "첨성대" 또는 첨성대를 건설하였다. 이 탑은 현재 대한민국 경주에 남아 있으며,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 유적이다.
3. 1. 내치
선덕여왕은 아버지처럼 불교에 귀의하였다. 그녀의 재위 기간 동안 신라는 많은 사찰, 탑, 불상을 건립하였다. 그 시기에 건립된 유명한 사찰 중 하나는 황룡사이다. 고대 건축 기록에 따르면, 황룡사 9층 목탑은 높이가 68m 또는 80m에 달했는데,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 중 하나였다. 이 탑은 선덕여왕과 신라 백성이 나라를 보호하고 삼국을 통일하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담은 것이었으며, 이러한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불교에 대한 공양이었다. 여왕은 종종 황룡사를 찾아 신라를 위험에서 구할 지혜와 힘을 기원하였다.분황사, 오릉, 상원사, 흥륜사/경주 흥륜사지한국어, 통도사, 월정사, 백담사, 마곡사 등도 그녀의 재위 기간 동안 건립되었다. 또한, 농민들에게 도움을 준 극동 최초의 전문 천문대로 여겨지는 "첨성대" 또는 첨성대를 건설하였다. 이 탑은 현재 대한민국 경주에 남아 있으며,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 유적이다.
3. 2. 외치
4. 비판 및 한계
5. 평가
선덕여왕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서는 여왕이 왕이 되니 도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 구한이 침략하였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당대 신라인들은 삼국통일의 위업이 선덕여왕 대에 비롯되었다고 인식하였다.[32]
김부식은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며 여왕을 세우는 것은 세상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라고 보았고,[33] 안정복은 여성의 즉위를 유교적 위계질서를 거스르는 것으로 간주하고, 선덕여왕의 사찰 건설을 비판하였다.
현대 학자들은 선덕여왕 시기를 신라의 전환기로 평가한다.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 공격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당과의 친선을 도모하고 불교를 진흥하여 백성을 단합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김춘추와 김유신을 중용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고 평가받는다.[34] 그러나 군사적 실정과 무리한 사찰 건립으로 인한 국력 탕진에 대한 부정적 평가도 존재한다.[35]
6. 기타
- 《삼국유사》 탑상 편에 따르면, 자장법사가 왕에게 황룡사 9층 목탑 건설을 진언한 때는 643년이었다. (삼국사기는 645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에 왕은 김용춘을 시켜 백제에서 기술자 2백 명을 맞아들여 탑을 지었다. 탑의 기둥을 세울 때, 백제 장인 아비지는 백제 멸망의 꿈을 꾸어 일을 멈추었다. 그때 노승 한 명, 장사 한 명이 나타나 기둥을 세우고 사라졌다. 이에 아비지는 마음을 고쳐먹고 탑을 완성했다.
- 《삼국유사》 신주 편에 따르면, 하루는 왕이 병이 깊어 홍륜사의 법척법사를 불러 치료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에 밀본법사를 불러 침실 밖에서 경을 읽게 하였다. 경을 다 읽고 밀본은 막대기를 들어 침실 안으로 던졌다. 이에 늙은 여우 한 마리와 법척이 찔려 뜰 아래로 쓰러졌다. 이에 왕의 병이 당장 나았다.
6. 1. 선덕여왕이 미리 안 세 가지 일
《삼국유사》에는 "선덕왕이 미리 안 세가지 일(善德王知幾三事)"이 수록되어 있다.[31]632년, 당 태종은 빨강, 자주, 하얀색의 모란 그림과 그 씨앗을 선덕여왕에게 선물로 보냈다. 왕은 이를 보고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씨앗을 심어보니 과연 그랬다. 훗날 신하들이 이 일을 물어보니 왕은 “꽃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 이는 배우자 없는 나를 희롱한 것이다.”라고 답했다.[31] 일연은 이 고사를 소개한 뒤, 당 태종이 신라에 세 여왕(선덕, 진덕, 진성)이 있을 것으로 짐작한 점도 함께 칭찬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 일이 진평왕 말년에 벌어진 일로 묘사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 태종 황제가 어느 날 왕후에게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목단 세 송이가 그려진 그림과 함께 실제 씨앗을 보냈고, 왕후가 궁궐 정원에 씨앗을 심자, “꽃은 아름답지만 향기는 별로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꽃이 피고 시들고 지면서 향기가 전혀 나지 않자, 왕후는 그림에 꽃 옆에 나비나 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이는 태종 황제가 자신에게 남편이 없음을 조롱한 것이라고 말했다.[18] 분황사(왕궁의 향기라는 뜻) 사찰은 이러한 조롱에 대한 반응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635년 영묘사(靈廟寺)를 세운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겨울날, 영묘사 옥문지(玉門池)에 개구리가 사나흘 동안 운 일이 있었다. 이에 왕은 각간 알천(閼川), 필탄(弼呑)에게 병사 2천을 주어 서라벌 서쪽 부산(富山) 아래 여근곡(女根谷)을 습격하게 하였다. 여근곡에는 백제 장수 우소(亏召)가 매복해 있었는데, 알천과 필탄은 이를 쳐서 모두 죽였다.[31]
훗날 신하들이 이 일을 물어보니 왕은 “개구리가 심히 우는 모습은 병사의 모습이요, 옥문이란 여자의 음부를 가리킨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백색인데, 이는 서쪽을 뜻한다. 또한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그래서 쉽게 잡을 수 있었다.”라고 답하였다.[31]
삼국사기에서는 옥문지에서 개구리가 운 때를 즉위 5년인 636년 5월로 기록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수도 성진강(城津江) 변에 있는 영묘사(靈妙寺) 경내 옥문(玉門)이라는 연못에서 개구리들이 여러 날 동안 시끄럽게 울었고, 왕후는 장군 두 명에게 정예 병사 2,000명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 여궁곡(輿宮谷, Cradle of Life)을 찾아가 매복해 있는 적군을 기습하여 섬멸하라고 명령했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18] 두 장군은 왕후가 말한 부산(釜山) 근처 여궁곡으로 군대를 이끌고 가서, 그곳에 있던 백제군 500명과 후일 지원을 온 1,200명의 증원군을 모두 격파했다. 왕후는 개구리 울음소리만으로 백제의 침입을 예측한 것에 대해, "화가 난 개구리떼는 군대를 상징한다. 옥문은 여인의 순결을 의미한다. '여인'은 음(陰)의 의미 중 하나이며, 음은 흰색을 뜻하고, 흰색은 서쪽을 나타낸다. 그래서 나는 서쪽에 군대가 매복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라고 설명했다.[18]

어느날 왕이 신하들을 불러 “내가 죽으면 도리천(忉利天)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이는 낭산(狼山) 남쪽에 있다.” 라고 하였다. 이후 왕이 죽은 뒤 신하들은 왕을 낭산 남쪽에 장사지냈다. 이후 679년 문무왕 대에 이르러 선덕왕의 무덤 아래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다. 이는 불경에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라는 내용이 실현된 것이었다.[31]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선덕여왕은 죽기 며칠 전 신하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도리천(忉利天, 뜻: 슬픔과 공덕의 천국) 근처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도리천이 어디냐는 질문에 남산 남쪽이라고 답했다.[18]
6. 2. 가족 관계
진평왕(眞平王, 567~632년, 재위:579~632)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의 딸이다.[37] 천명공주(天明公主)와 선화공주(善花公主)의 자매간으로, 태종 무열왕은 천명공주의 아들이다.[37] 삼국유사에는 선화공주가 백제 무왕의 왕비이자 선덕여왕의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다.[19][20] 남편으로는 김인평(金仁平), 을제(乙祭), 백반(伯飯)이 있었다. 사촌으로는 진덕여왕(金勝曼)이 있다.김유신은 고모 만명부인의 아들이고, 김흠순은 김유신의 남동생이다.
6. 3. 대중문화
- 1986년 KBS 드라마 《원효대사》에서 배우 서우림이 선덕여왕을 연기했다.
- 1992년부터 1993년까지 방영된 KBS 드라마 《삼국기》에서 김혜정이 선덕여왕을 연기했다.
- 2005년 EBS 드라마 《점프》에서 이애정이 선덕여왕을 연기했다.
- 2006년부터 2007년까지 방영된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 이현정이 선덕여왕을 연기했다.
- 2009년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이요원과 남지현이 선덕여왕을 연기했다.
- 2012년부터 2013년까지 방영된 KBS 1TV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 박주미, 손주아, 홍은희가 선덕여왕을 연기했다.
- 2017년 KBS 드라마 《한국사기》에서 안소리가 선덕여왕을 연기했다.
- 2010년 뮤지컬 《선덕여왕》이 공연되었다.
- 2011년 영화 《벽루천》에서 윤소이, 이주연이 선덕여왕을 연기했다.
- 게임 《시드 마이어의 문명 VI》의 확장팩 몰락과 부흥에서 한국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한다.[21]
- 모바일/PC 게임 《라이즈 오브 킹덤즈》에서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 셰리 홀먼의 저서 "Sondok: Princess of the Moon and Stars, Korea, A.D. 595"에 등장한다.
- 온라인 게임 ''Art of War''에서 플레이 가능한 영웅 캐릭터로 등장한다.
- 2005년 SBS 드라마 《서동요》는 선덕여왕의 여동생 선화공주가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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