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시 (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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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시는 촉한의 인물로, 유비, 제갈량, 장완을 섬겼다. 유장 휘하에서 면죽현령을 지내다가 유비에게 귀순하여 독군종사, 장가 태수, 익주전부사마를 역임했다. 관우에게 전장군 임명을 전달하며 황충과의 동격 임명에 분노한 관우를 설득했다. 유비의 황제 즉위를 반대하여 영창군 종사로 좌천되었으나, 제갈량의 남정에 참여하고, 제갈량 사후 장완을 보좌하며 간의대부를 지냈다. 그의 아들 비립은 서진의 산기상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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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시 (촉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비시 |
원어 이름 | 費詩 |
로마자 표기 | Fèi Shī |
자 | 공거 (公舉) |
출생지 | 쓰촨성러산시 |
사망 시기 | 234년 이후 |
직업 | 관료 |
소속 | 촉한 |
주요 활동 | 간의대부 역임 |
가족 | 비립 (아들) |
관직 경력 | |
초대 임관 | 유장 휘하 |
주요 관직 | 면죽현 현령 (綿竹令) 장가태수 (牂牁太守) 간의대부 (諫議大夫) |
최종 관직 | 간의대부 |
생애 | |
주요 활동 시기 | 삼국시대 (주로 촉한) |
섬긴 군주 | 유장 유비 유선 |
2. 생애
비시(費詩|비시중국어)는 러산시 인근인 사천성 건위군 남안현 출신으로, 원래 익주자사(현재의 사천성과 충칭시를 포괄) 유장 밑에서 면죽현 현령을 지냈다.[1]
유비가 익주를 공격할 때 유장을 섬기며 면죽현령을 지냈으나, 솔선하여 항복하고 유비의 신하가 되었다. 214년 익주를 빼앗은 후, 219년까지 장가군 태수 등 다양한 직책을 맡았다.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관우에게 파견되어 전장군 임명을 알렸으나, 황충이 후장군으로 임명된 것에 분노하자 비시는 고조가 소하·조참을 제쳐두고 한신을 최고위에 앉힌 고사를 들어 설득, 관우는 감동하여 잘못을 깨닫고 장군 직위를 받았다.
건안 25년 (220년), 유비가 황제로 옹립되려 하자, 비시는 상소를 올려 반대하였고, 분노한 유비는 비시를 영창종사(永昌從事)로 좌천했다.
하지만 비시는 능력을 인정받아 건흥 3년(225년) 남정에 제갈량을 보좌하며 군무를 맡았다. 이후 위에 배반한 맹달을 내응시키려고 제갈량이 편지를 보내려 하자, 비시는 맹달이 소인배라며 편지를 보낼 가치가 없다고 간언했다. 제갈량은 개의치 않고 편지를 보냈으나, 맹달은 결국 위의 토벌군에 패해 살해되었다.
제갈량 사후, 장완이 집정을 시작할 때도 생존하여 간의대부에 임명되었다.
『삼국지』 비시전 주에 인용된 『촉세보』에 따르면, 아들 비립은 서진의 산기상시가 되었다. 비시 이후, 익주의 비씨 중에서 명성·위계를 얻은 자는 대부분 그의 자손이었다고 한다. 다만, 『화양국지』에서는 비립의 아버지를 다른 사람인 비읍으로 기록하고 있다.[16]
2. 1. 유장 휘하에서의 활동
유비가 익주를 공격할 때, 비시는 유장 휘하의 광한군 면죽현령이었다. 그는 유비에게 항복했고, 유비는 촉을 평정한 뒤 비시를 독군종사로 삼았다.[1] 이후 장가 태수로 임명되었다가, 다시 익주전부사마로 전임되었다.[2]2. 2. 촉한에서의 관직 생활
유비가 촉을 평정한 뒤 비시를 독군종사(督軍從事)로 임명했다.[1] 이후 비시는 장가 태수, 익주전부사마(益州前部司馬) 등 여러 직책을 역임했다.[1] 219년,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자 비시는 관우에게 파견되어 전장군 임명을 알렸다.[2] 관우는 황충이 후장군에 임명된 것에 불만을 품었으나, 비시는 한 고조의 고사를 인용하며 관우를 설득하여 임명을 받아들이게 했다.[3][4]비시는 관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설득하였다.
2. 3. 유비의 즉위 반대와 좌천
220년, 유비가 황제 즉위를 꾀하자, 비시는 조위를 멸망시키기 전에 황제에 즉위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며 강하게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5] 그는 유방이 초한 쟁패에서 그의 경쟁자 항우를 물리친 후에야 황제를 칭한 것을 예로 들었다.[5] 상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이에 분노한 유비는 비시를 영창군 종사(永昌從事)로 좌천시켰다.[6]
습착치는 비시의 이러한 행동을 어리석다고 평가하며, 유비의 조치가 적절했다고 옹호했다.[7] 배송지는 습착치의 평가에 동의했다.[8]
2. 4. 제갈량과의 관계
비시는 제갈량의 남정에 참여하여 군무를 보좌했다. 건흥 3년(225년), 제갈량이 남정을 떠날 당시 비시는 제갈량을 보좌하며 군무를 맡았다.[1]제갈량이 위나라에 투항한 맹달에게 내응을 권유하는 서신을 보내려 하자, 비시는 맹달이 소인배라며 반대했다. 과거 유장을 배신하고 유비에게 항복한 전적을 들어 맹달에게 확고한 충성이 없다고 주장하며 서신 교환에 반대한 것이다.[11] 하지만 제갈량은 비시의 간언을 듣지 않고 맹달과 서신을 주고받았다.[11] 맹달은 제갈량에게 위나라에 반역할 뜻을 비췄으나, 결국 위나라 사마의에게 토벌당해 처형되었다.[13] 제갈량은 맹달의 진정성을 의심하여 구원하지 않았다.[13]
2. 5. 장완 보좌와 사망
費詩|비시중국어는 제갈량 사후, 장완이 병권을 이어받자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임명되었다.[14]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14]3. 가계
비시는 아들 비려를 두었으며, 비려는 서진에서 산기상시를 지냈다.[15] 비시의 후손들은 익주에서 명성을 얻은 유능한 관료가 많았다.[15]
4. 평가
비시는 강직하고 충성스러운 신하였지만, 때로는 지나치게 곧은 성격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5][6] 유비의 즉위를 반대하고 맹달과의 서신 교환을 반대한 일화는 그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11] 그러나 그의 능력과 충성심은 유비, 제갈량, 장완 등에게 인정받아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14]
습착치는 비시가 유비에게 한 간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7]
> "애초에 창업 군주는 천하를 평정한 후에야 올바른 지위에 오르는 것이며, 후계 군주는 자신의 입지를 빠르게 굳혀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으려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혜공이 아침에 포로가 되자 저녁에는 아들 회공이 옹립되었고, 광무제는 경시제가 생존해 있는 동안에 황제 칭호를 사용했다. 그들이 주상을 잊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겠는가? 아니다, 사직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선주(유비)는 정의로운 군대를 규합하여 역적을 토벌하려 한다. 적은 강력하고 재앙은 심각하여 주상은 서거하고 국가는 멸망하여 두 조상(전한의 고조, 후한의 광무제)의 사당은 끊어져 제사를 받지 못한다. 만약 황족 중 뛰어난 인물이 없다면 누가 이를 계승할 수 있겠는가. 선조를 계승하여 천자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함양(진을 멸망시킨 고조) 시대와 다르며, 정의로 역적을 토벌하는데 어찌 양보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때에 덕이 있는 인물을 옹립하여 왕통을 받들게 하고, 민중을 마음으로부터 정도(正道)로 돌아오게 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옛 제도를 보여주고, 정의를 따르는 자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정의에 어긋나는 자들을 모두 두려워하게 하는 것을 알지 못했으니, 이는 어리석고 분별없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비시가 좌천된 것은 당연하다."
배송지는 습착치의 논설 중 이것이 가장 뛰어나다고 칭찬했다.[8]
5.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도 비시는 등장하며, 사적과 마찬가지로 황충과 동격으로 여겨져 분노하는 관우를 타이르고 오호대장군의 지위를 받게 한다. 다만, 유비의 황제 즉위를 간언하여 좌천된 경위나, 맹달의 내응책을 간언한 것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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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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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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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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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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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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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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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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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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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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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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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完訳 華陽国志
志学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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