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비투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비투스는 전설에 따르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순교한 기독교 성인이다. 그는 모데스투스, 크레센티아와 함께 순교했으며, 6~7세기 동안 다양한 순교 이야기가 전해졌다. 비투스는 이탈리아, 슬라브 지역 등에서 숭배받았으며, 특히 슬라브 지역에서는 비도브단 축일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댄서, 배우, 간질 환자 등의 수호 성인으로 여겨지며, 14 성인 중 하나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존재로도 여겨진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구마사 - 페르가몬의 안티파스
  • 구마사 - 워런 부부
    워렌 부부는 미국의 초자연 현상 조사 및 작가 부부로, 다양한 사건들을 조사하고 오컬트 박물관을 운영했으며, 영화 컨저링 유니버스의 기반이 되었으나 비판과 논란 또한 존재한다.
  • 303년 사망 - 성 게오르기우스
    성 게오르기우스는 3~4세기 로마 제국 시대에 순교한 로마 군 장교로, 용을 물리치는 전설로 기사도의 상징이 되었으며 잉글랜드, 조지아 등의 수호성인으로 4월 23일에 축일을 기념한다.
  • 303년 사망 - 육기
    육기는 동오 황실과 관련된 인물로, 오나라 멸망 후 서진에서 문인 관료로 활동하며 문학적 재능을 발휘했고, 팔왕의 난 시기에는 군 지휘관으로 활동하다 모함으로 처형당했다.
비투스
기본 정보
성 비투스, 뉘른베르크 연대기, 1493년
성 비투스, 뉘른베르크 연대기, 1493년
존칭 접두사성인
이름비투스
출생일290년
사망일303년경 (12~13세)
축일6월 15일
숭배 장소로마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출생지마차라델발로, 시칠리아
사망지루카니아, 현대의 바실리카타주, 이탈리아
칭호순교자, 거룩한 조력자
상징가마솥, 수탉 또는 사자와 함께 묘사됨
수호배우
코미디언
리예카
체코슬로바키아
무용가

간질
마차라델발로, 시칠리아
포리오, 이스키아
늦잠
프라하
류마티스성 무도병 (성 비투스 무용)
세르비아
뱀 물림
폭풍
바차, 독일
체벤, 니더작센주
호이, 네덜란드
이 클람푸스 비투스
주요 성지해당 없음
이름 정보
라틴어 이름Vitus
이탈리아어 이름San Vito di Lucania
체코어 이름Svatý Vít
영화 정보
관련 영화비투스 (영화)

2. 순교

14세기 필사본에 묘사된 비투스, 모데스투스, 크레센티아의 순교


전설에 따르면 비투스, 모데스투스, 크레센티아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치하에서 순교했다. 그들의 공경에 대한 가장 초기의 증언은 "히에로니무스 순교록"에서 제공된다.[5] "히에로니무스 순교록"에는 "시칠리아에서, 비투스, 모데스투스, 크레센티아"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이 가장 중요한 세 개의 필사본에 모두 있다는 사실은, 이 필사본들의 공통 원본에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원본은 5세기에 등장했다. 같은 ''순교록''은 같은 날짜에 9명의 순교자 명단의 맨 앞에 있는 비투스에 대한 또 다른 언급을 담고 있으며, 장소를 에볼리, "루카니아", 즉 투스카 해와 타란토 만 사이에 있는 이탈리아 남부의 로마 지방으로 명시하고 있다. 두 경우 모두 동일한 순교자 비투스일 가능성이 크다.

J. P. 키르슈[5]에 따르면, 5세기에 세 성인에 대한 대중적 공경에 대한 증언은 그들이 역사적 순교자임을 증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물론, 그들의 순교 시기나 세부 사항에 대한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

6세기와 7세기 동안 그들의 순교에 대한 순전히 전설적인 이야기가 나타났는데, 이는 다른 전설, 특히 포티투스의 전설에 기반을 둔 것으로 보이며, 환상적인 기적에 대한 설명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전설에 따르면, 비투스는 루카니아의 원로원 의원의 7세 아들이었다(어떤 버전에서는 12세로 묘사). 그는 자신의 믿음에서 돌아서게 하려는 아버지의 시도에 저항했는데, 여기에는 다양한 형태의 고문이 포함되었다. 그는 그의 스승 모데스투스와 비투스의 유모였던 모데스투스의 아내 크레센티아와 함께 루카니아로 도망쳤다. 그는 거기에서 로마로 끌려가 악령을 몰아내는(퇴마) 일을 했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아들이 악령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그는 엑소시즘에 성공했지만, 기독교에 충실했기 때문에, 그와 그의 스승들은 고문을 받았다. 기적에 의해 한 천사가 셋을 루카니아로 데려왔고, 그곳에서 그들은 견뎌낸 고문으로 인해 죽었다. 사흘 뒤, 비투스는 플로렌티아라는 존경받는 부인에게 나타났고, 그녀는 그들의 시신을 발견하여 그들이 쓰러진 곳에 묻었다.

6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비투스 순교의 일화가 유포되었다. 그에 따르면, 비투스는 루카니아의 지배자(이교도)의 아들이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버리라는 요구에 저항했기 때문에 고문을 받았다. 그는 신앙의 스승이었던 모데스투스, 그의 아내이자 유모였던 크레센티아와 함께 도망쳤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아들이 소유한 악마에게 붙잡혀 로마로 끌려갔다. 신앙을 버리지 않은 비투스 일행 3명은 다시 고문을 받았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나, 천사에 의해 3명은 루카니아로 돌아갔다. 거기서, 3명은 고문 끝에 참수되었다고 한다.

그림과 조각에서는, 솥에 들어가거나 닭 또는 사자와 함께 묘사된다. 이는, 고문으로 비투스가 끓는 솥 안에 던져졌지만, 기적적으로 무사했다는 전승에 따른 것이다.

2. 1. 전승



전설에 따르면 비투스, 모데스투스, 크레센티아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순교했다.[5] 그들의 공경에 대한 초기 증언은 "히에로니무스 순교록"에서 "시칠리아에서, 비투스, 모데스투스, 크레센티아"라고 기록된 것이다. 이 기록은 가장 중요한 세 개의 필사본에 모두 존재하며, 이는 5세기에 등장한 공통 원본에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순교록''에는 에볼리와 루카니아에서 순교한 비투스에 대한 언급도 있는데,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5]

J. P. 키르슈는 5세기에 세 성인에 대한 대중적 공경이 있었음을 역사적 순교자임을 증명하는 증거로 보았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역사적 기록, 순교 시기나 세부 사항은 전해지지 않는다.[5]

6세기와 7세기에는 다른 전설, 특히 포티투스의 전설을 바탕으로 환상적인 기적을 덧붙인 순교 이야기가 나타났다. 이 전설에 따르면, 비투스는 루카니아 원로원 의원의 아들(7세 또는 12세)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강요와 고문에도 신앙을 지켰고, 스승 모데스투스와 그의 아내이자 비투스의 유모였던 크레센티아와 함께 루카니아로 도망쳤다. 이후 로마로 끌려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아들에게 악령을 몰아내는 퇴마를 행했지만, 기독교 신앙 때문에 스승들과 함께 고문을 받았다. 기적으로 천사가 이들을 루카니아로 데려왔고, 고문으로 인해 그곳에서 죽었다. 사흘 뒤, 비투스는 플로렌티아라는 부인에게 나타나 시신을 발견하고 묻도록 했다.

6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유포된 비투스 순교 일화에 따르면, 비투스는 루카니아 지배자(이교도)의 아들이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버리라는 아버지의 요구와 고문에 저항했다. 그는 신앙의 스승 모데스투스, 그의 아내이자 유모였던 크레센티아와 도망쳤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아들에게 붙잡혀 로마로 끌려갔다. 신앙을 버리지 않은 3명은 다시 고문을 받았고, 기적이 일어나 천사에 의해 루카니아로 돌아갔다. 거기서 3명은 고문 끝에 참수되었다고 한다.

그림과 조각에서 비투스는 솥에 들어가거나 닭 또는 사자와 함께 묘사되는데, 이는 끓는 솥에 던져졌지만 기적적으로 무사했다는 전승을 따른 것이다.

2. 2. 역사적 근거

6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루카니아 지배자(이교도)의 아들 비투스가 기독교 신앙을 버리라는 아버지의 요구에 저항하여 고문을 받았다는 순교 일화가 유포되었다. 비투스는 신앙의 스승 모데스투스, 그의 아내이자 유모였던 크레센티아와 함께 도망쳤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아들이 소유한 악마에게 붙잡혀 로마로 끌려갔다. 신앙을 버리지 않은 비투스 일행 3명은 다시 고문을 받았으나, 천사에 의해 루카니아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고문 끝에 참수되었다고 한다.

그림과 조각에서 비투스는 솥에 들어가거나 닭 또는 사자와 함께 묘사되는데, 이는 비투스가 끓는 솥 안에 던져졌지만 기적적으로 무사했다는 전승을 따른 것이다.

3. 공경

비투스에 대한 존경은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서 빠르게 퍼져나갔으며,[17] 그레고리오 1세는 시칠리아에 비투스에게 헌정된 수도원을 언급했다. 로마에서도 매우 일찍부터 숭배가 이루어져 교황 젤라시오 1세 (492–496)는 그에게 헌정된 사당을 언급했다.[17]

756년, 아보트 풀라드가 성 비투스의 유물을 생드니 대수도원으로 가져왔고, 이후 독일 코르베이의 아보트 와린에게 전달되어 836년 코르베이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코르베이를 중심으로 성 비투스에 대한 존경심은 베스트팔렌과 독일 동부 및 북부 지역으로 퍼져나갔다.[17] 925년, 독일의 하인리히 1세가 보헤미아 공작 바츨라프에게 성 비투스의 손뼈를 선물하면서 프라하에서 그의 인기가 높아졌고, 이 유물은 성 비투스 대성당의 성물이 되었다.[17] 카를 4세는 1355년 파비아에서 가져온 성 비투스의 다른 유물을 프라하로 옮겼다.[6]

성 비투스 대성당은 옛 제국 수도인 프라하의 주요 교회이다.


성 비투스에 대한 존경은 슬라브족 땅에서 매우 인기를 얻었으며, 그의 이름(스베티 비드/Sveti Vidsr)은 빛의 신 스베토비드에 대한 더 오래된 숭배를 대체했을 수 있다.[7] 세르비아에서 그의 축일인 비도브단은 코소보 전투와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암살 등 역사적 사건들과 연관되어 코소보 신화의 일부가 되었으며, 비투스는 세르비아 왕국의 수호 성인이었다.[8][9] 헝가리와 불가리아, 크로아티아에서도 성 비투스는 중세 초부터 널리 존경받았다.[17] 네덜란드에서 비투스는 윈쇼텐과 고이 지역의 수호 성인이며, 힐베르쉼, 부섬, 나르덴의 주요 가톨릭 교회가 성 비투스에게 헌정되어 있다.

비투스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14 성인 중 한 명으로, 특히 무도병("성 비투스 춤")에 대항하여 간구되었다.[17] 그는 종종 갈까마귀와 사자, 끓는 타르와 녹은 납의 솥에서 기적적으로 탈출했다는 전설에 따라 팜나무 잎을 든 젊은이로 묘사된다.[17]

성인 모데스투스와 크레센티아의 이름은 11세기에 로마 달력에 추가되어[10] 1969년까지 함께 기념되었으나, 이후 로마 전례력에서 제거되었다. 비투스는 여전히 가톨릭 교회의 성인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로마 순교록에 6월 15일로 포함되어 있다.[11][12]

비투스는 크로아티아 리에카,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치미나와 비타, 포리오, 사프리, 토렐라 데이 롬바르디, 라포네, 네덜란드의 고이 지역, 코스타리카의 산 비토, 벨기에의 생 비트 마을의 수호 성인이다.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의 여러 지역은 그의 이름을 따서 장크트 파이트로 불린다.

성인의 축일은 "성 비투스 날에 비가 오면, 30일 동안 계속 비가 올 것이다."라는 날씨 관련 속담의 주제이기도 하다.

3. 1. 확산

비투스에 대한 존경은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서 빠르게 퍼져나갔으며,[17] 그레고리오 1세는 시칠리아에 비투스에게 헌정된 수도원을 언급했다. 로마에서도 매우 일찍부터 숭배가 이루어져 교황 젤라시오 1세 (492–496)는 그에게 헌정된 사당을 언급했다.[17]

756년, 아보트 풀라드가 성 비투스의 유물을 생드니 대수도원으로 가져왔고, 이후 독일 코르베이의 아보트 와린에게 전달되어 836년 코르베이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코르베이를 중심으로 성 비투스에 대한 존경심은 베스트팔렌과 독일 동부 및 북부 지역으로 퍼져나갔다.[17] 925년, 독일의 하인리히 1세가 보헤미아 공작 바츨라프에게 성 비투스의 손뼈를 선물하면서 프라하에서 그의 인기가 높아졌고, 이 유물은 성 비투스 대성당의 성물이 되었다.[17] 카를 4세는 1355년 파비아에서 가져온 성 비투스의 다른 유물을 프라하로 옮겼다.[6]

성 비투스에 대한 존경은 슬라브족 땅에서 매우 인기를 얻었으며, 그의 이름(Sveti Vid)은 빛의 신 스베토비드에 대한 더 오래된 숭배를 대체했을 수 있다.[7] 세르비아에서 그의 축일인 비도브단은 코소보 전투와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암살 등 역사적 사건들과 연관되어 코소보 신화의 일부가 되었으며, 비투스는 세르비아 왕국의 수호 성인이었다.[8][9] 헝가리와 불가리아, 크로아티아에서도 성 비투스는 중세 초부터 널리 존경받았다.[17] 네덜란드에서 비투스는 윈쇼텐과 고이 지역의 수호 성인이며, 힐베르쉼, 부섬, 나르덴의 주요 가톨릭 교회가 성 비투스에게 헌정되어 있다.

비투스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14 성인 중 한 명으로, 특히 무도병("성 비투스 춤")에 대항하여 간구되었다.[17] 그는 종종 갈까마귀와 사자, 끓는 타르와 녹은 납의 솥에서 기적적으로 탈출했다는 전설에 따라 팜나무 잎을 든 젊은이로 묘사된다.[17]

성인 모데스투스와 크레센티아의 이름은 11세기에 로마 달력에 추가되어[10] 1969년까지 함께 기념되었으나, 이후 로마 전례력에서 제거되었다. 비투스는 여전히 가톨릭 교회의 성인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로마 순교록에 6월 15일로 포함되어 있다.[11][12]

비투스는 크로아티아 리에카,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치미나와 비타, 포리오, 사프리, 토렐라 데이 롬바르디, 라포네, 네덜란드의 고이 지역, 코스타리카의 산 비토, 벨기에의 생 비트 마을의 수호 성인이다.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의 여러 지역은 그의 이름을 따서 장크트 파이트로 불린다.

성인의 축일은 "성 비투스 날에 비가 오면, 30일 동안 계속 비가 올 것이다."라는 날씨 관련 속담의 주제이기도 하다.

3. 2. 슬라브 지역

세르비아에서 비도브단으로 알려진 그의 축일은 특히 역사적으로 중요하다.[17] 비투스 신앙은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로 퍼져나갔다. 교황그레고리오 1세는 시칠리아에 있던 비투스에게 헌정된 수도원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로마에서도 성인으로 숭배받았으며, 교황 젤라시오 1세는 로마에 있던 그의 교회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756년, 생 드니 수도원의 승려 풀라드에 의해 성 비투스의 유물이 프랑스로 옮겨졌고, 이후 독일의 코르베이 수도원(:en:Corvey Abbey)으로 보내졌다. 코르베이 수도원으로부터 베스트팔렌 및 동부·북부 독일로 성 비투스 신앙이 퍼져나갔다. 프라하에서 성 비투스 신앙이 높아진 것은 925년에 동프랑크 왕 하인리히 1세가 보헤미아 공작 바츨라프 1세에게 성인의 손뼈를 보낸 데서 시작되며, 이 유물은 현재 프라하의 성 비투스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비투스 신앙은 슬라브 제국에서 굳건했으며, 그의 이름(Sveti Vid)은 옛 이교의 빛의 신 스반토비드 신앙으로 대체되었다. 크로아티아 내에는 123개의 성 비투스에게 헌정된 교회가 있다.

중세 후기, 독일이나 라트비아 등에서는 성 비투스의 상 앞에서 춤을 추며 그의 축일을 기념했다. 이 춤은 신경성 질환에서 보이는 무도병을 '성 비투스의 춤'이라고 통칭하는 원인이 되었다. 비투스는 댄서, 배우, 희극 배우, 간질 환자의 수호 성인으로 여겨졌다. 또한, 비투스는 번개나 동물로부터의 공격, 과도한 수면으로부터 보호해 준다고 여겨지며, 프라하와 보헤미아의 수호 성인이다.

3. 3. 수호성인

비투스 신앙은 곧바로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로 퍼져나갔다. 교황그레고리오 1세는 시칠리아에 있던 비투스에게 헌정된 수도원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17] 매우 빠르게 로마에서도 성인으로 숭배받았으며, 교황 젤라시오 1세 (재위 492년-496년)는 로마에 있던 그의 교회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17]

756년, 생 드니 수도원의 승려 풀라드에 의해 성 비투스의 유물이 프랑스로 옮겨졌다고 한다.[17] 이후 생 드니 수도원에서 독일에 있는 코르베이 수도원(:en:Corvey Abbey)으로 유물이 보내졌다.[17] 이 코르베이 수도원으로부터 베스트팔렌 및 동부·북부 독일로 성 비투스 신앙이 퍼져나가게 되었다.[17] 프라하에서 성 비투스 신앙이 높아진 것은, 925년에 동프랑크 왕 하인리히 1세가 보헤미아 공작 바츨라프 1세에게 성인의 손뼈를 보낸 데서 시작된다.[17] 이 유물은 현재 프라하의 성 비투스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17]

비투스 신앙은 슬라브 제국에서 굳건했으며, 그의 이름(Sveti Vid)은 옛 이교의 빛의 신 스반토비드 (Svantvid) 신앙으로 대체되었다.[17] 크로아티아 내에는 123개의 성 비투스에게 헌정된 교회가 있다.[17]

중세 후기, 독일이나 라트비아 등에서는 성 비투스의 상 앞에서 춤을 추며 그의 축일을 기념했다.[17] 이 춤이 신경성 질환에서 보이는 무도병을 '성 비투스의 춤'이라고 통칭하는 원인이 되었다.[17] 춤을 추며 비투스의 축일을 기념한 고사에서, 비투스는 댄서, 배우, 희극 배우, 간질 환자의 수호 성인으로 여겨졌다.[17] 또한, 비투스는 번개나 동물로부터의 공격, 과도한 수면으로부터 보호해 준다고 여겨지며, 프라하와 보헤미아의 수호 성인이다.[17] 세르비아에서 비도브단으로 알려진 그의 축일은 특히 역사적으로 중요하다.[17]

4. 한국과의 관계

참조

[1] 서적 The Book of Saints: A Comprehensive Biographical Dictionary Bloomsbury
[2] 서적 The Avenel Dictionary of Saints Avenel Books
[3] 서적 The Oxford Dictionary of Saints Oxford University Press
[4] 웹사이트 Saint Vitus https://web.archive.[...] Saints.sqpn.com 2013-12-23
[5] 문서 the article http://www.newadvent[...]
[6] 서적 Prague. The Crown of Bohemia, 1347-1437 https://books.google[...]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22-08-11
[7] 웹사이트 SVIBOR – The Meaning and the Origin of the Word https://web.archive.[...] Mzos.hr 2013-12-23
[8] 간행물 The role of St. Vitus Day in modern Serbian history http://www.serbianst[...] North American Society for Serbian Studies Spring 1990
[9] 서적 History of World War I. https://books.google[...] Marshall Cavendish 2002-01-01
[10] 문서 Calendarium Romanum Libreria Editrice Vaticana
[11] 문서 Martyrologium Romanum Libreria Editrice Vaticana
[12] 문서 General Instruction of the Roman Missal http://www.salesiane[...]
[13] 웹사이트 A sacramental spirituality for Methodism https://www.theway.o[...] Society of Jesus 2021-05-04
[14] 서적 The Book of Saints: A Comprehensive Biographical Dictionary Bloomsbury
[15] 서적 The Avenel Dictionary of Saints Avenel Books
[16] 서적 The Oxford Dictionary of Saints Oxford University Press
[17] 저널 The role of St. Vitus Day in modern Serbian history https://web.archive.[...] North American Society for Serbian Studies 2022-03-2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