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성씨)
1. 개요
빈(賓)씨는 중국에서 유래한 성씨로, 대한민국에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3,704명이 있었다. 대구 빈씨는 고려 충렬왕 때 상장군을 지낸 빈서기를 시조로 하며, 담양 빈씨는 독일 출신 귀화 한국인 빈도림을 시조로 한다. 빈(彬)씨는 몽골 출신 빈문을 시조로 하며, 조선 고종 때 대구에 정착했다.
2. 빈(賓)씨
빈(賓)씨는 대한민국의 성씨 중 하나로,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3,704명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2.1. 기원과 역사
빈(賓)씨는 중국의 오랜 성씨로, 갑골문 기록에 따르면 상나라 무정(武丁) 시기(기원전 1250년경) 황실에서 천문을 담당하던 중요한 사관(史官) 가문에서 유래했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전통 있는 가문으로, 주나라 때는 황족(皇族)으로 인정받아 귀족 가문으로 봉해졌다. 중국 빈씨의 발상지는 현재의 중국 산둥성 지난시 장칭구 마산진 빈곡하(賓谷河) 일대로 알려져 있다.
역사 기록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대부였던 빈수무(賓須無, 기원전 723년경~641년경)가 있다. 그는 제나라 환공(桓公) 때 영지왕(令支王)과 고죽왕(孤竹王)의 연합군 20만 명을 3만 명의 군사로 격파하는 큰 공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또한 빈활(賓滑), 빈기(賓起) 부자는 주나라 경왕(景王)의 중신이었으며, 빈비취(賓卑聚), 빈미인(賓媚人), 빈모가(賓牟賈) 등도 춘추전국시대에 명성이 높았던 인물들이다. 특히 빈모가(賓牟賈)는 공자(孔子, 기원전 551년~479년)와 동시대 인물로, 사제(師弟)이자 벗으로서 음악에 관해 토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빈씨는 상나라와 주나라 시기에는 왕실과 관련이 깊은 성씨였으나, 왕조 교체가 잦았던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정치적 격변에 휘말리면서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 왕실에 충성했던 많은 인물들이 연좌제 등으로 인해 화를 입었고, 남은 이들은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이후 송나라, 원나라 시기를 거치며 황허 유역의 산둥성, 허난성, 산시성 등지에 살던 빈씨들은 점차 중국 각지로 흩어졌다.
한국 빈씨의 역사는 고려 후기에 시작된다. 원나라 세조(쿠빌라이 칸) 때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빈은후(賓殷厚)가 고려 원종과의 동맹 관계 속에서 고려에 정착하게 된 것이 그 시작이다. 그는 원 세조의 딸과 고려 태자 심(충렬왕)의 혼례를 주선하기도 했다. 빈은후의 손자인 빈서기(賓瑞奇)는 충렬왕 때 상장군(上將軍)으로서 합단(哈丹)의 침입을 격퇴한 공으로 수성군(壽城君)에 봉해졌다.
빈서기의 아들인 빈우광(賓宇光)은 정동행성 향시와 원나라 회시, 정시를 거쳐 한림학사, 부제학, 대사성, 직제학 등의 관직에 올랐다. 이후 벼슬을 그만두고 1314년 원나라의 서적 4,000여 권을 고려로 들여와 유교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고려 충숙왕은 이를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수성군(壽城君)의 봉작과 식읍을 내렸으며, 이후 후손들이 빈우광을 시조(始祖)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그는 달성(대구) 빈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만년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산림에 은거하며 지냈다.
시조 빈우광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으며, 이들로부터 주요 분파가 나뉘었다.
이후 빈씨 가문에서는 학문과 관직에서 이름을 날린 인물들과 효자, 효부 등이 다수 배출되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들이 많았다.
* 빈광국(賓光國): 중국 상하이에서 상해청년동맹회에 참여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주필을 역임하며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
* 빈상철(賓相哲): 국내외에서 항일 운동을 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 빈영섭(賓永燮, 1887~1936):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3.1 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으며, 1992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 빈영홍(賓永洪, 1876~?): 경상북도 예천군에서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태형을 받았다. 2009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 빈태문(賓泰紋, 1906~1973): 경상남도 진주 출신으로 진주청년동맹, 신간회 진주지회 등에서 활동하며 사회주의 계열 항일 운동을 전개하다 옥고를 치렀으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2. 본관
빈(賓)씨의 주요 본관으로는 대구(수성) 빈씨와 담양 빈씨가 있다.
대구(수성) 빈씨는 고려 충렬왕 때 상장군을 지낸 빈서기(賓瑞奇) 또는 그의 아들 빈우광(賓宇光)을 시조로 본다. 빈서기가 합단적의 침입을 격파한 공으로 수성군(壽城君)에 봉해진 것에서 본관이 유래하였다.
담양 빈씨는 2005년 대한민국으로 귀화한 독일 출신 빈도림(賓道林)을 시조로 한다.
2.2.1. 대구(수성) 빈씨
고려 충렬왕 때 상장군을 지낸 빈서기(賓瑞奇)를 시조로 본다. 그는 원나라에서 고려로 온 빈은후(賓殷厚)의 손자로, 합단적의 침입을 격파한 공으로 수성군(壽城君)에 봉해졌다. 이는 오늘날 대구광역시 수성구 지역에 해당하며, 대구 빈씨라는 본관의 유래가 되었다.
빈서기의 아들 빈우광(賓宇光)은 수성현(壽城縣)에서 태어나 원나라에서 한림학사, 부제학, 대사성, 직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314년, 그는 원나라 황실 도서관인 송비각(宋祕閣)의 서적 4,000여 권을 가지고 고려로 돌아왔는데, 이는 고려의 유교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고려 충숙왕은 그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수성군(壽城君)에 봉하고 식읍을 하사하였다. 이 때문에 후손들은 빈우광을 시조(始祖)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빈우광은 말년에 벼슬을 사양하고 산림에 은거하며 자연을 벗 삼았으며, 그의 독특한 필체인 용학체(龍鶴體)는 당대에 명성이 높았다.
빈우광에게는 응규(應珪), 응서(應瑞), 응기(應璂) 세 아들이 있었다. 이들로부터 각각 대구 지역 중심의 정랑공파(正郞公派), 무주·의령·남해 등지에 분포한 시중공파(侍中公派), 대전 지역 중심의 송산공파(松山公派)가 갈라져 나왔다.
일제강점기에는 대구 빈씨 가문에서도 많은 인물들이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했다.
* 빈광국(賓光國):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상해청년동맹회에 참여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였던 독립신문 주필을 맡아 항일 운동을 펼쳤다.
* 빈상철: 국내외에서 활발히 항일 운동을 전개하다가 1942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 빈영섭(賓永燮, 1887~1936): 전북 장수군 일대에서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등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의 공적은 사후 인정되어 1992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 빈영홍(賓永洪, 1876~미상): 경북 예천군 용문면에서 1919년 4월 독립 만세 시위를 이끌다 일제에 체포되어 태형 90도를 맞는 고초를 겪었다. 2009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 빈태문(賓泰紋, 1906~1973): 경남 진주시 출신으로, 일본 유학 후 진주청년동맹과 신간회 진주지회 간부로 활동하며 사회주의 계열 항일 운동에 참여했다. 이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2.2. 담양 빈씨
담양 빈씨의 시조는 독일 출신 귀화 한국인 빈도림(賓道林)이다. 그는 1953년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으며, 독일 이름은 Dirk Fuendling이었다. 1984년 보훔대학에서 ‘한국어의 의성·의태어에 관한 연구’ 논문으로 한국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같은 해 한국으로 건너와 대구 효성여자대학교에서 독일어과 교수를 지냈고, 1992년부터는 주한 독일대사관에서 통역관으로 일했다. 대사관 근무 중 한국인 이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2000년부터 전라남도 담양군 대덕면 문학리에 정착했으며, 2005년 대한민국으로 귀화하였다.
3.1. 대구(달성) 빈씨
대구 빈씨(大邱 彬氏)의 시조 빈문(彬文)은 몽골 사람으로 청나라 덕종(德宗, 재위 1875년~1908년) 때 원외랑을 지냈다. 그는 조선 고종 때 조선에 들어와 대구에 정착하면서 대구 빈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1930년 국세조사 당시 경기도 용인군 수여면(현 용인시 처인구 일부) 운학리에 살던 빈영선(彬永先)의 증언에 따르면, 빈문(彬文)이 대구에서 살다가 1910년대에 용인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1930년 분포 상황을 보면 서울과 경기도 이천, 용인, 광주(廣州) 등지에 1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