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이 다다즈미 (1710년)
1. 개요
사카이 다다즈미는 에치젠 쓰루가 번주 사카이 타다키쿠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형 사카이 치카모토가 마에바시 번 번주가 되었으나 아들이 없어 양자가 되어 가문을 계승했다. 1731년 가독을 상속받았고, 1740년 오사카 성대에 임명된 후, 1744년 니시노마루 노중이 되어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를 보좌했으며, 이듬해 혼마루 노중이 되어 노중 수좌가 되었다. 1749년 하리마 히메지 번으로 전봉되어 노중에서 사임했으며, 1770년 아들에게 히메지 신덴 번을 분봉하고, 1772년 번주 재직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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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 | 에도 시대 |
|---|---|
| 출생 | 호에이 7년 5월 12일 (1710년6월 8일) |
| 사망 | 안에이 원년 7월 13일 (1772년8월 11일) |
| 초명 | 나오노스케 (어릴 적 이름) → 다다토모 (처음 이름) → 다다즈미 |
| 별칭 | 형부 (통칭), 로잔, 기잔 (호) |
| 계명 | 고가쿠인덴 다다미네 겐세키 다이코지 |
| 묘소 | 군마현마에바시시 고운정의 류카이인 |
| 관위 | 종5위 하, 아악두, 종4위 하, 시종, 좌근위소장 |
| 막부 | 에도 막부오사카 조다이, 노중 수좌 |
| 주군 | 도쿠가와 요시무네 → 이에시게 → 이에하루 |
| 번 | 고즈케마에바시번 번주 → 하리마히메지번 번주 |
| 씨족 | 가가노카미 사카이 가문 |
| 부모 | 아버지: 사카이 다다키쿠 어머니: 홋타 마사야스의 딸 |
| 양아버지 | 사카이 지카모토 |
| 형제 | 지카모토, 다다타케, 다다즈미, 다다타카, 다다요시 |
| 배우자 | 정실: 고 (사카키바라 마사쿠니의 딸) 계실: 마쓰다이라 지카카타의 딸 |
| 자녀 | 다다요리, 다다토쿠, 다다노부, 다다하루, 다다히로, 다다토모, 다다스케, 호다이인 (이케다 하루마사의 부인), 딸 (이이 나오타카의 부인), 세이코인 (도이 도시사다의 부인), 딸 (사카이 다다카타의 부인), 딸 (혼다 다다타케의 부인), 타키 (마키노 노부시게의 부인), 가루코 (센고쿠 히사미치의 부인) 양자: 다다미, 양녀 (사카이 다다치카의 부인) |
| 가문 | 사카이 가문 가가노카미 파 |
|---|---|
| 가문 당주 대수 | 14대 |
| 가문 당주 임기 시작 | 1731년 |
| 가문 당주 임기 종료 | 1772년 |
| 번 | 마에바시 번 (사카이 가문 가가노카미 파 종가) |
|---|---|
| 번주 대수 | 9대 |
| 번주 임기 시작 | 1731년 |
| 번주 임기 종료 | 1749년 |
| 번 | 히메지 번 (사카이 가문 가가노카미 파 종가) |
|---|---|
| 번주 대수 | 초대 |
| 번주 임기 시작 | 1749년 |
| 번주 임기 종료 | 1772년 |
| 관직 | 오사카 조다이 |
|---|---|
| 관직 임기 시작 | 1740년 |
| 관직 임기 종료 | 174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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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바시번주 -
사카이 다다유키 (1599년)
사카이 다다유키는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 다이묘로 사카이 다다요의 아들이며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이에미쓰를 섬겼고 오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운 후 마에바시 번주가 되었으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
마에바시번주 -
마쓰다이라 나오카쓰
마쓰다이라 나오카쓰는 에도 시대 후기의 다이묘이자 메이지 시대의 화족으로, 막부 말기 정사총재를 역임하며 막정 개혁에 참여했고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에서 활약했다. -
히메지번주 -
이케다 미쓰마사
이케다 미쓰마사는 에도 시대 초기 다이묘로, 히메지 번주, 돗토리 번주를 거쳐 오카야마 번 초대 번주를 지냈으며, 교육 진흥과 간척 사업에 힘썼으나 신불분리 추진과 종교 탄압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
히메지번주 -
마쓰다이라 도모노리
마쓰다이라 도모노리는 에도 시대 다이묘로, 어린 나이에 번주가 되어 잦은 번 이동과 재정난, 농민 봉기 등의 어려움 속에서도 가문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으며, 도네강 홍수로 마에바시 성이 붕괴될 위기에 처하자 가와고에로 번청을 이전하는 결단을 내렸다. -
오사카 조다이 -
마키노 다다키요 (1760년)
마키노 다다키요는 1760년 나가오카 번주 마키노 다다히로의 아들로 태어나 가독을 상속받고 막부의 요직을 역임했으며, 치세 기간 동안 지역 발전에 기여했으나 잦은 자연재해로 인해 어려움을 겪다 1831년에 사망했다. -
오사카 조다이 -
나가이 나오키요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 나가이 나오키요는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섬기고 오사카 전투에 참가하여 여러 번 가증을 거쳐 다카쓰키 번 초대 번주가 되었으며, 막부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아 교토 쇼시다이 대리, 오사카 성대 대리 등을 역임하고 번정에서는 조카마치 정비, 치수 공사 등에 힘썼다.
2. 생애
사카이 다다즈미는 호에이 7년(1710년) 에치젠 쓰루가번 번주 사카이 타다키쿠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즈케 마에바시번 번주였던 친형 사카이 치카모토에게 후사가 없자 그의 양자가 되어 교호 16년(1731년)에 가독을 상속받았다.
겐분 5년(1740년) 오사카 성대에 임명되었으며, 엔쿄 원년(1744년)에는 니시노마루 노중이 되어 쇼군 후계자 도쿠가와 이에시게를 보좌했다. 이듬해 이에시게가 쇼군으로 즉위하자 혼마루 노중으로 승격하여 수좌(首座)의 자리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기존 수좌였던 마쓰다이라 노리무라를 밀어내고 수좌가 되는 등 정치적 배경이 작용했다.
간엔 2년(1749년), 번의 재정난 등 복합적인 이유로 기존 영지인 마에바시에서 하리마국 히메지번으로 전봉되었고, 이와 동시에 노중 직위에서는 물러났다. 히메지로의 이전 과정에서 간엔 대일규라 불리는 영지민 봉기와 연이은 자연재해로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는 사카이 가문의 재정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만년에는 후계자 문제로 고심했다. 적자로 삼았던 아들들이 연이어 요절하면서 서자였던 장남 사카이 타다노리를 후계자로 삼았으나, 그마저도 먼저 세상을 떠나 최종적으로는 손자인 사카이 타다모치가 가독을 잇게 되었다. 메이와 7년(1770년)에는 여덟째 아들 사카이 타다유키에게 1만 석을 분할해 주어 히메지 신덴번을 세우도록 했다.
안에이 원년(1772년) 번주로 재직하던 중에 사망했으며, 손자 사카이 타다모치가 그의 뒤를 이었다.
2.1. 가독 상속과 초기 활동
에치젠 쓰루가번 번주 사카이 타다키쿠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친형이자 고즈케 마에바시번 (후의 하리마 히메지번) 번주인 사카이 치카모토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타다즈미는 양자로 입적되어 교호 16년(1731년)에 가독을 상속받았다.
겐분 5년(1740년) 4월 3일, 오사카 성대에 임명되었다. 엔쿄 원년(1744년) 5월에는 오사카 성대에서 물러나 니시노마루 노중이 되어 당시 쇼군 후계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시게를 보좌하게 되었다. 이듬해 이에시게가 쇼군으로 즉위하자, 타다즈미도 혼마루 노중으로 승진했다.
노중 취임 당시, 기존의 노중 수좌(수석)는 캇테카케 노중인 마쓰다이라 노리무라였다. 그러나 타다즈미가 새로운 수좌가 되면서 노리무라는 차석으로 밀려났다. 이는 명문 사카이 가문의 배경이 중시된 점과 더불어, 노리무라가 쇼군 후계자 문제에서 이에시게를 지지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이에시게의 보복성 인사 조치로 해석된다. 이 일로 노리무라는 결국 노중 직을 사임하고 감봉된 후 다른 지역으로 전봉되었다.
간엔 원년(1748년)에는 히젠국 사가번 번주인 나베시마 노리요리를 은거시키려던 사가번 번주 가문 일족의 모략에 휘말리기도 했다.
간엔 2년(1749년) 1월, 이전 영지였던 하리마국 히메지번으로 전봉되면서 노중 직에서도 물러났다.
2.2. 오사카 성대와 로주 취임
겐분 5년(1740년) 4월 3일, 오사카 성대에 임명되었다.
엔쿄 원년(1744년) 5월, 오사카 성대에서 물러나 니시노마루 로주(西の丸老中)가 되어 쇼군 후계자인 도쿠가와 이에시게를 보좌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엔쿄 2년(1745년) 이에시게가 쇼군으로 취임하자, 다다즈미도 혼마루 로주(本丸老中)로 승격했다. 로주 취임 당시, 기존 로주 서열 1위는 재정 담당 로주였던 마쓰다이라 노리무라였으나, 다다즈미가 새롭게 로주 수좌(首座)가 되면서 노리무라는 차석으로 밀려났다. 이는 명문 사카이 가문 출신인 다다즈미를 중용한 것과 더불어, 쇼군 후계 문제에서 이에시게를 지지하지 않았던 노리무라에 대한 이에시게의 보복성 인사 조치로 해석된다. 이후 노리무라는 로주직에서 사임하고 감봉 처분을 받은 뒤 다른 영지로 전봉되었다.
칸엔 원년(1748년), 히젠국 사가번주 나베시마 노리요리를 은거시키려는 사가번 가문 일족의 모의에 연루되기도 했다.
칸엔 2년(1749년) 1월, 원래 영지였던 하리마국 히메지번으로 전봉되면서 로주직에서 물러났다.
2.3. 히메지 번 전봉과 시련
간연 2년 (1749년), 타다즈미는 마에바시에서 히메지로 전봉되었다.
사카이 가문이 다스리던 마에바시 번은 재정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였다. 이는 사카이 가문이라는 격식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 막부에서 근무하는 데 필요한 지출, 방만한 재정 운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게다가 마에바시 번 영지는 토네가와의 잦은 범람으로 피해가 컸고 토지가 비옥하지 않아 재정 기반 자체가 취약했다. 번의 중심지였던 마에바시 성은 토네가와의 급류를 이용한 견고한 성이었으나, 오히려 그 강물에 성곽이 계속 침식당하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5대 번주 사카이 타다오키 시절인 호에이 3년 (1706년)에는 토네가와 범람으로 성의 혼마루 3층 망루가 붕괴되기도 했다. 타다오키는 은거 후인 호에이 7년 (1710년)에 마에바시를 떠나 긴키 지방의 선진지로 영지를 옮기려 막부에 요청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이후 번 수뇌부 사이에서는 영지 교체를 통해 위기를 벗어나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타다즈미 시대에도 재정난은 여전했다. 가로 혼다 미츠아키와 에도의 용인 이누즈카 마타나이 등은 같은 15만 석이지만 긴키 지방에 위치하여 실제로는 더 풍요롭다고 여겨지던 히메지로의 이봉을 계획했고, 타다즈미도 이를 승인했다.
하지만 또 다른 가로 카와이 사다츠네는 "마에바시 성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공으로부터 '영원히 이 성을 지키라'는 주인(朱印)이 찍힌 문서를 받은 성지"라며 히메지 전봉에 강력히 반대했다. 이 때문에 혼다와 이누즈카 등은 카와이를 배제하고 비밀리에 전봉 공작을 진행했다.
사카이 가문의 기대와는 달리, 당시 히메지 번의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간연 원년(1748년)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히메지 번주였던 마츠다이라 가문은 그해 연공 징수를 강행했다. 이로 인해 영지 백성들의 불만이 커져가던 중, 번주 마츠다이라 아키노리가 11월 16일에 사망하고 11세의 어린 아들이 뒤를 잇게 되었다. 번의 혼란 속에서 이나미군 마토가타 촌의 농민들이 12월 21일에 봉기했다. 이 일규는 "가재도구를 팔아도 연공을 완납할 수 없는 자는 다음 해까지 납부를 유예한다"는 번의 포고로 일단 진정되었다.
그러나 간연 2년(1749년) 1월 15일, 마에바시의 타다즈미와 히메지의 마츠다이라 키하치로(토키노리) 간의 영지 교체 명령이 내려지자, 빚을 청산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 백성들은 1월 22일에 다시 봉기했다. 이 봉기는 번내 각지를 습격하며 큰 피해를 입혔다. (간연 대일규)
일규는 2월에 진압되었지만, 이 혼란으로 사카이 가문의 히메지 이전은 5월 22일로 연기되었다. 번사들의 이주는 더욱 늦어졌고, 설상가상으로 7월 3일에는 태풍이 히메지 영지를 덮쳐 센바가와 제방이 붕괴되었다. 이때 카와이 사다츠네는 독단적으로 피난민들을 히메지 성 안으로 수용하고 비축미를 나누어 주었다. 이 태풍으로 사망자와 실종자가 400명 이상 발생했다. 8월에 또다시 태풍이 덮쳐 논밭은 물론 3,000명 이상의 백성이 추가로 목숨을 잃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전년도의 가뭄에 이어 연이은 재해로 히메지 영지에서는 제대로 된 연공 수입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전봉 비용까지 늘어나면서 사카이 가문의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간연 4년(1751년), 전봉을 반대했던 가로 카와이 사다츠네는 전봉을 주도했던 혼다 미츠아키와 이누즈카 마타나이를 살해하고, 역대 번주들에게 사죄하는 글을 남긴 뒤 자결했다.
2.4. 만년
칸엔 2년(1749년) 1월, 원래 영지였던 하리마국 히메지번으로 다시 옮겨가게 되면서 노중 직위에서 물러났다.
다다즈미는 후계자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장남 사카이 타다노리는 서자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타다노리는 칸엔 원년(1748년) 막부로부터 3000俵(표)의 새로운 봉록을 받아 오미의 하타모토로서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의 고쇼가 되었다. 그러나 적자였던 차남 사카이 타다에가 호레키 5년(1755년) 18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셋째 아들 사카이 타다요시를 적자로 삼아 쇼군 이에시게에게 선보였다. 하지만 타다요시마저 호레키 11년(1761년) 22세로 요절하면서, 결국 같은 해에 장남 타다노리를 다시 적자로 맞이했다. 그러나 불운은 계속되어 타다노리 역시 메이와 4년(1767년)에 세상을 떠났고, 최종적으로는 타다노리의 장남이자 다다즈미의 손자인 사카이 타다모치가 적손(嫡孫)으로서 후계자가 되었다.
아래는 다다즈미의 후계자가 정해지기까지의 과정을 정리한 표이다.
메이와 7년(1770년) 4월 18일, 여덟째 아들 사카이 타다유키가 원복(元服, 성인식)을 치르자, 같은 해 윤 6월 23일에는 1만 석의 영지를 나누어 히메지 신덴번을 세우도록 했다.
안에이 원년(1772년), 다다즈미는 번주로 재직 중에 사망했으며, 가독은 손자 사카이 타다모치가 계승했다.
3. 연보
* 호에이 7년(1710년): 에치젠 쓰루가번 번주 사카이 타다키쿠의 넷째 아들로 출생.
* 교호 16년(1731년): 마에바시번 번주인 형 치카모토의 양자가 되어 가독(家督)을 상속.
* 겐분 5년(1740년) 4월 3일: 오사카 성대에 임명됨.
* 엔쿄 원년(1744년) 5월 1일: 오사카 성대에서 면직됨.
* 엔쿄 원년(1744년) 9월 18일: 니시노마루 로주가 되어 쇼군 후계자 도쿠가와 이에시게의 부속(附属)이 됨.
* 엔쿄 2년(1745년): 도쿠가와 이에시게가 쇼군이 되면서 혼마루(本丸) 로주로 옮겨 수좌(首席)가 됨. 이 과정에서 기존 수좌였던 마쓰다이라 노리무라는 차석으로 밀려나고 이후 사임 및 처벌을 받게 됨.
* 간엔 2년(1749년) 1월 15일: 로주에서 파면되고 유간즈메(伺候席) 처분을 받음. 하리마 히메지로 전봉(転封) 명령을 받음.
* 메이와 7년(1770년) 윤 6월 23일: 여덟째 아들 타다유키에게 1만 석을 분할하여 히메지 신덴번을 세움.
* 안에이 원년(1772년) 7월 13일: 사망. 향년 63세. 손자 타다모치가 뒤를 이음.
4. 관력
교호 16년(1731년)에 가문을 상속받았다.
겐분 5년(1740년) 4월 3일, 오사카 성대에 임명되었다.
엔쿄 원년(1744년) 5월, 오사카 성대에서 물러나 니시노마루 로주가 되어 쇼군 후계자인 도쿠가와 이에시게를 보좌하게 되었다. 이듬해 이에시게가 쇼군으로 즉위하면서 혼마루 로주로 승격하였다. 로주 취임 시, 기존의 로주 수좌였던 마쓰다이라 노리무라를 제치고 다다즈미가 수좌가 되었다. 이는 사카이 가문의 격이 중시된 점과 더불어, 노리무라가 쇼군 후계 문제에서 이에시게를 지지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이에시게의 의중이 반영된 인사 조치로 해석된다. 이후 노리무라는 로주직을 사임하고 감봉 및 전봉 조치되었다.
칸엔 2년(1749년) 1월, 원래 영지였던 하리마국 히메지번으로 전봉되면서 로주직을 사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