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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메지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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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메지번은 무로마치 시대 하리마국의 일부였으며, 센고쿠 시대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배를 거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케다 테루마사에게 하사하면서 번으로 성립되었다. 이후 이케다 가문, 혼다 가문,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 사카키바라 가문 등을 거쳐 사카이 가문이 메이지 유신까지 통치했다. 막부 말기에는 사카이 타다츠구가 다이로가 되었으나,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따르면서 관군의 토벌 대상이 되었고, 폐번치현으로 히메지 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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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메지번 - [전쟁]에 관한 문서
위치 정보
기본 정보
이름히메지 번
로마자 표기Himeji-han
유형
존속 기간1600년 ~ 1871년
시대에도 시대
위치하리마국
현재 소속 국가일본
현재 소속 현효고현
번청히메지성
히메지 번의 군함기
통치
정치 체제다이묘
역사
시작1600년
종료1871년
이전하리마국
이후히메지현
통계
다이묘 가문
1600년 ~ 1613년이케다 씨
1613년 ~ 1615년혼다 씨
1615년 ~ 1617년사카키바라 씨
1617년 ~ 1619년고리키 씨
1619년 ~ 1639년마쓰다이라 (오쿠다이라) 씨
1639년 ~ 1648년마쓰다이라 (도다) 씨
1649년 ~ 1871년사카이 우타노카미 가문
기타 정보
참고 문헌[1]
[2]
[3]

2. 번의 역사

무로마치 시대 히메지 주변은 하리마국의 슈고인 아카마쓰 씨족의 영토였다. 센고쿠 시대에 아카마쓰 씨족은 약화되었고,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 장군 도요토미 히데요시(하시바 히데요시) 군대에 패배했다. 초기 히메지성은 구로다 요시타카가 히데요시에게 항복했다. 히데요시는 기노시타 이에사다에게 25,000고쿠의 영지를 주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0년에 기노시타를 빗추국으로 이전시키고, 이케다 테루마사에게 히메지를 주었다. 이케다 테루마사는 미카와국 요시다 번 영주였으며 150,000고쿠를 소유했지만, 히메지로 이전하면서 520,000고쿠로 지위가 크게 상승했다. 이케다 가문은 히메지성을 재건했다. 1617년 이케다 씨족은 돗토리번으로 이전되었다. 긴키 지방과 서일본을 연결하는 산요도를 통제하는 전략적 요충지를 미성년자에게 맡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케다 씨족의 영토는 여러 후다이 다이묘에게 분할되었다. 150,000고쿠의 히메지성은 혼다 타다마사에게 주어졌다. 1639년 혼다 씨족은 야마토 고리야마 번으로 이전되었고, 이후 여러 후다이 또는 신판 다이묘가 통치했다. 오쿠다이라, 에치젠-마쓰다이라, 사카키바라 가문이 통치하다가 1749년 사카이 씨족에게 할당되었다.

사카이 타다즈미는 마에바시 번 다이묘였으며 로주로 활동했다. 마에바시는 홍수가 빈번했고, 사카이 씨족의 재정은 악화되었다. 그는 마에바시에서 히메지로 이전을 확보했는데, 히메지는 동일한 고쿠다카를 가졌지만 더 생산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뭄과 태풍으로 피해가 발생했고, 이전 비용으로 세금 인상 루머가 돌아 히메지번 간엔 잇키라는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사카이 씨족은 이 위기를 극복하고 메이지 시대 말까지 히메지를 통치했다.

바쿠마츠 시대에 히메지번은 막부를 지지했다. 사카이 타다토시는 로주였으며 보신 전쟁 시작 시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함께 오사카성에 있었다. 도바-후시미 전투 동안 그는 쇼군과 에도로 도망쳤고, 메이지 정부는 히메지를 "천황의 적"으로 선포했다. 가신들은 히메지성을 황실군에 항복시켰고, 이후 사카이 가문은 고즈케국 이세사키 번 분가와 함께 살았다.

1871년 폐번치현으로 히메지번은 히메지현이 되었고, 시카마현을 거쳐 효고현에 통합되었다. 사카이 가문은 1884년 화족 작위 제도로 백작이 되었다.

히메지번이 있던 시카마 지방은 고대부터 농경이 발달해 풍족했지만, 히메지성 유지와 막부 정치 참여로 재정이 어려웠다. 1749년 번주 교체 시 히메지번 간엔 잇키가 일어났다. 잇키 이후 사카이 가문 아래에서 영민들은 안정을 찾았지만, 번 재정은 여전히 어려웠다. 19세기 초 빚은 에 달했다.

1808년 가로 카와이 미치오미(슨오)가 재정 개혁에 착수했다. 검약령으로 지출을 억제하고, 의창(고녕창)을 설치해 농민을 구제했다. 신전 개발, 시카마항 정비로 쌀 생산과 유통을 강화했다. 목면 전매제로 이익을 얻어 빚을 갚았다. 번교 고코도 외에 닌쥬잔코를 설립, 한학, 국학, 의학을 가르쳐 인재 양성에 힘썼다.

2. 1. 전사(前史)

현재의 히메지시는 원래 하리마 슈고다이묘 아카마츠씨의 지역이었지만, 센고쿠 시대에는 아카마츠씨 종가가 쇠퇴하여 아카마츠씨 지류의 코데라씨 세력하에 들어갔으며, 히메지성은 코데라씨의 중신 쿠로다씨가 거성으로 사용하였다.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이 츄고쿠로 뻗어, 그 중신 하시바 히데요시가 하리마에 진출하자, 쿠로다 요시타카(칸베에)는 히데요시에게 거성 히메지성을 양도하고, 오다가의 츄고쿠 제패의 근거지가 되었다.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후계자가 되어 오사카성으로 옮긴 후에도 쿠로다가에게 반환되지 않고, 히데요시의 정실 키타노만도코로(네네)의 친오빠 키노시타 이에사다가 2만 5천 석의 영지를 받아 히메지 성주가 되었다.

2. 2. 이케다 가문(池田家) 시기 (1600년~1617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리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기노시타 가문을 빗추 아시모리번으로 옮기고, 자신의 사위이자 무장이었던 이케다 데루마사에게 하리마 일국 52만 석을 주어 히메지번을 세웠다. 데루마사는 이전 미카와 요시다 번의 15만 석 영주였으나, 히메지로 옮기면서 3.5배 이상 영지가 늘어났다. 이는 그의 후처가 이에야스가 총애하는 딸 도쿠히메(호조 우지나오의 미망인)였기 때문이다. 데루마사의 장남 도시타카는 전처 소생이었지만, 도쿠히메가 낳은 차남 다다쓰구비젠 오카야마 28만 석, 삼남 다다오는 아와지 일국 6만 석을 받았다. 데루마사의 동생 나가요시인바 돗토리 6만 석을 받아, 이케다 가문은 도쿠가와 가문의 준 일문으로서 기나이 서쪽에 총 100만 석에 가까운 영지를 소유하게 되었다.[1]

이케다 가문은 하리마 52만 석의 20%를 검지하는 등 가혹한 정치를 펼쳤고, 국력을 총동원하여 히메지성을 축성했다. 히메지성 외에도 미키성 (이기 다다쓰구), 아카시성(이케다 도시마사), 다카사고 성 (나카무라 마사카츠), 다쓰노성(아라오 나리후사), 히라후쿠 성(이케다 요시유키), 아코성(이케다 나가마사)을 지성으로 배치했다.[1]

1613년 데루마사가 사망하고 장남 도시타카가 히메지번을 계승했다. 도시타카는 차남 다다쓰구가 요절한 후 오카야마 번을 계승한 삼남 다다오에게 하리마 서부 13만 석을 물려주어 39만 석이 되었다. 1617년 도시타카마저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 미쓰마사가 어렸기 때문에 요충지인 히메지를 맡길 수 없다는 이유로 돗토리번 32만 석으로 전봉되었다.[1]

2. 3. 혼다 가문(本多家) 시기 (1617년~1639년)

도쿠가와 사천왕 중 한 명인 혼다 타다카츠의 아들 타다마사가 15만 석으로 히메지에 입봉하였다. 또한, 타다마사의 조카 마사카츠가 5만 석으로 타츠노번에 들어갔고, 타다마사의 적자이자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 센히메(도요토미 히데요리의 미망인)와 결혼한 타다토키가 아버지와는 별도로 하리마 국내 10만 석을 영지로 받아, 요충지인 하리마는 후다이 명문 혼다가의 총 30만 석으로 굳어졌다.

그 후, 혼다 타다토키는 아버지보다 먼저 병으로 사망하였으므로, 타다토키의 동생이자 하리마국 타츠노 번주였던 마사토모가 히메지 15만 석을 계승했고, 나머지 10만 석은 타다마사의 셋째 아들 타다요시가 4만 석, 타다마사의 외손자 오가사와라 나가츠구가 6만 석을 나누어 가졌다.

1639년, 마사토모의 뒤를 이은 마사카츠는 야마토 코오리야마 15만 석으로 전봉되었다.

혼다 가문(本多家) 시기(1617년~1639년)의 역대 번주는 다음과 같다. 모두 후다이 다이묘에 속했다.

대수이름비고
1혼다 타다마사
2혼다 마사토모
3혼다 마사카츠


2. 4.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奥平松平家) 시기 (1639년~1648년)

1639년 혼다 씨 가문이 야마토 고리야마 번으로 옮겨간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외손자인 마쓰다이라 타다아키가 군산에서 히메지 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1644년 타다아키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이 어렸기 때문에 1648년에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은 데와 야마가타로 전봉되었다.[1] 이후 15만 석으로 후다이·신판 명문 가문이 히메지를 통치했다. 하리마 지역이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어린 군주가 나오면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일이 반복되었다.[1]

이후 야마가타에서 유키 마쓰다이라 가문이 들어왔지만, 마쓰다이라 나오노리가 어렸기 때문에 에치고 무라카미로 전봉되었다.[1] 무쓰 시라카와에서 사카키바라 가문이 들어왔지만, 사카키바라 마사토모가 어렸기 때문에 에치고 무라카미로 전봉되었다.[1] 에치고 무라카미에서 다시 유키 마쓰다이라 가문(마쓰다이라 나오노리)이 들어왔으나, 나오노리가 죄를 지어 분고 히타로 전봉되었다.[1] 무쓰 후쿠시마에서 다시 혼다 가문이 들어왔지만, 혼다 타다타카가 어렸기 때문에 에치고 무라카미로 전봉되었고,[1] 에치고 무라카미에서 다시 사카키바라 가문이 들어왔다.[1]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친번 18만 석)의 역대 번주는 다음과 같다.[1]

대수이름
1마쓰다이라 타다아키
2마쓰다이라 타다히로


2. 5.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越前松平家) 시기 (1648년~1649년, 1667년~1682년, 1741년~1749년)

1648년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이 데와 야마가타로 전봉된 후, 15만 석으로 후다이·신판의 명문 가문이 히메지를 다스렸다. 하리마가 요충지였기 때문에 어린 군주가 나오면 전출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과 교체되어 야마가타에서 유키 마쓰다이라 가문이 들어왔지만, 마쓰다이라 나오노리가 어렸기 때문에 에치고 무라카미로 전봉되었다.

1741년 사카키바라 가문을 대신하여 다시 입봉한 유키 마쓰다이라 가문도 8년 후 마쓰다이라 아사노리의 어린 나이를 이유로 고즈케 마에바시로 전봉되었다.

히메지 번주를 지낸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越前松平家)은 다음과 같다.

대수이름재임 기간비고
-마쓰다이라 타다아키1648년 이전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외손자
-마쓰다이라 타다히로1648년 이전마쓰다이라 타다아키의 아들
1나오모토1648년 ~ 1649년야마가타에서 전봉, 에치고 무라카미로 전봉
2나오노리1667년 ~ 1682년에치고 무라카미에서 전봉, 분고 히타로 전봉
1아키노리1741년 ~ 1749년에치고 무라카미에서 전봉, 고즈케 마에바시로 전봉
2토모노리1749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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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6. 사카키바라 가문(榊原家) 시기 (1649년~1667년, 1704년~1741년)

1648년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이 데와 야마가타로 전봉된 후, 15만 석으로 후다이·신판 명문 가문이 히메지를 다스렸다. 하리마가 요충지였기 때문에 어린 군주가 나오면 전출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과 교체되어 야마가타에서 유키 마쓰다이라 가문이 들어왔지만, (마쓰다이라 나오노리가 어렸기 때문에) 에치고 무라카미로 전봉되었다. 무쓰 시라카와에서 사카키바라 가문이 들어왔으나 (사카키바라 마사토모가 어렸기 때문에) 에치고 무라카미로 전봉되었다. 교대로 에치고 무라카미에서 다시 유키 마쓰다이라 가문 (성인된 마쓰다이라 나오노리)이 들어왔으나 (나오노리가 죄를 받아 징벌로) 분고 히타로 전봉되었다. 무쓰 후쿠시마에서 다시 혼다 가문이 들어왔으나 (혼다 타다타카가 어렸기 때문에) 에치고 무라카미로 전봉되었고, 교대로 에치고 무라카미에서 다시 사카키바라 가문이 들어왔다.[1]

1704년에 다시 히메지 번주가 된 사카키바라 가문은 혼다 타다카쓰와 함께 도쿠가와 사천왕으로 불리는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를 시조로 하는 후다이 명문 가문이었다. 이 가문은 3대에 걸쳐 30년 이상 히메지번 15만 석을 다스렸다.[1] 그러나 제8대 당주 마사미네는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검약령을 무시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했으며, 요시와라 유곽오이란을 첩으로 삼는 등 유흥을 즐겨 막부의 분노를 샀다.[1] 결국 마사미네는 은거하게 되었고, 사카키바라 가문은 히메지에서 에치고 다카다 15만 석으로 징벌적 전봉되었다. 이는 후계자인 사카키바라 마사즈미가 어렸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었다.[1]

1741년 사카키바라 가문을 대신하여 다시 입봉한 유키 마쓰다이라 가문도, 8년 후에는 마쓰다이라 아사노리의 어린 나이를 이유로 고즈케 마에바시로 전봉되었다.[1]

쇼샤산 엔교지에 있는 사카키바라 가문 묘소


사카키바라 가문(1649년~1667년)

대수이름
1타다츠구
2마사후사
3마사미치



사카키바라 가문(1704년~1741년)

대수이름
1마사쿠니
2마사스케
3마사미네
4마사즈미


2. 7. 혼다 가문(本多家) 재봉 시기 (1682년~1704년)

本多家|혼다 가문일본어 재봉 시기 (1682년~1704년)

1682년 혼다 가문이 다시 히메지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으나, 혼다 타다타카가 어렸기 때문에 무쓰 후쿠시마에서 에치고 무라카미로 전봉되었다. 그 후 사카키바라 가문이 다시 입봉하였다.[1]

1704년에 다시 히메지 번에 봉해진 사카키바라 가문은 혼다 타다카쓰와 함께 도쿠가와 사천왕으로 불리는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를 시조로 하는 후다이 가문으로, 3대에 걸쳐 30년 이상 히메지 번 15만 석을 다스렸다. 그러나 제8대 당주 사카키바라 마사미네는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검약령을 무시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했으며, 요시와라 유곽오이란을 다이묘가 직접 첩으로 삼는 등 유흥을 즐겨 막부의 분노를 샀다. 마사미네는 은거한 뒤, 사카키바라 가문은 에치고 다카다 15만 석으로 징벌적 전봉되었다. 그러나 이는 은거에 따라 상속한 후계자인 사카키바라 마사즈미가 어렸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다.[1]

1741년에 사카키바라 가문을 대신하여 다시 입봉한 유키 마쓰다이라 가문도, 그 8년 후에는 마쓰다이라 아사노리의 어린 나이를 이유로 고즈케 마에바시로 전봉되었다.[1]

혼다 가문 통치자(1682년 ~ 1704년, 후다이, 15만 석):[1]

이름
혼다 타다쿠니
혼다 타다타카


2. 8. 사카이 가문(酒井家) 시기 (1749년~1871년)

무로마치 시대 동안 히메지 주변 지역은 하리마 국의 슈고인 아카마쓰 씨족의 광대한 영토의 일부였다. 그러나 센고쿠 시대에 접어들면서, 크게 약화된 아카마쓰 씨족은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 장군 하시바 히데요시의 군대에 의해 패배했고, 초기 히메지성은 구로다 요시타카에 의해 항복했다.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은 후, 그는 25,000 고쿠의 영지를 가지고 그의 아들 기노시타 이에사다에게 성을 할당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0년에 기노시타를 빗추 국으로 이전시키고 히메지를 자신의 장군이자 사위인 이케다 테루마사에게 할당했다. 이케다 테루마사는 이전에는 미카와 국의 요시다 번 영주였으며 150,000 고쿠의 고쿠다카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히메지로의 이전은 그의 지위를 520,000 고쿠로 세 배 이상 증가시켰다. 또한 그의 아들 이케다 타다츠구는 280,000 고쿠의 오카야마 번을, 그의 셋째 아들 이케다 타다오는 아와지 국의 60,000 고쿠의 이쿠니 번을 받았으며, 그의 형제 이케다 나가요시는 60,000 고쿠의 돗토리 번을 받았다. 이로써 이케다 씨족은 총 100만 고쿠 이상의 고쿠다카를 소유하게 되었고, 히메지성을 재건하기 위한 대규모 재건 사업에 자금을 지원했다. 그는 장남인 이케다 토시타카가 계승했는데, 그의 어머니는 이케다 테루마사의 첫 번째 부인이었으며, 따라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직계 후손이 아니었다. 토시타카는 1617년에 젊은 나이에 사망했고, 토시타카의 아들 미츠마사가 아직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도쿠가와 막부는 이케다 씨족을 돗토리 번으로 이전시켰다. 긴키 지방과 서일본을 연결하는 산요도 고속도로를 통제하는 이러한 전략적 요충지를 미성년자에게 맡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케다 씨족의 광대한 영토는 여러 후다이 다이묘에게 분할되었다. 150,000 고쿠의 히메지성은 혼다 타다마사에게 할당되었다. 그의 아들 혼다 타다토키 (센히메의 남편)는 아버지와 별도로 100,000 고쿠를 받았고, 50,000 고쿠의 타츠노 번은 그의 조카 혼다 마사카츠를 위해 만들어졌다. 1639년에 혼다 씨족은 야마토 고리야마 번으로 이전되었고, 그 다음 세기 동안 영지는 여러 후다이 또는 신판 다이묘가 통치했다: 오쿠다이라, 에치젠-마츠다이라, 사카키바라가 통치하다가, 1749년에 영지는 사카이 씨족에게 할당되었다.

결성 마쓰다이라 가문이 영지를 옮긴 후, 대신 노중 수석 사카이 타다유키가 마에바시에서 입봉했다. 히메지 번의 사카이 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중신인 사카이 마사치카·시게타다를 시조로 하여 다이로사카이 타다요·사카이 타다키요를 배출한 사카이 가가쿠토 가문의 종가이다. 노중을 맡고 있던 타다유키의 마에바시 영지는 거성이 침식될 정도의 대규모 수해가 다발하는 난소였고, 더불어 사카이 가문의 격식을 유지하는 비용, 막부에서의 업무에 소요되는 비용, 방만한 재정 운용 등으로 인해 사카이 가문은 재정이 파탄났기 때문에, 타다유키는 "같은 석고이면서 수입이 좋다"고 들었던 히메지로의 영지 이전을 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다. 실제로는 히메지 영지에서는 전 해에 대가뭄이 일어나, 그 위에 가혹한 세금과 영지 이전의 소문이 겹쳐, 간엔의 백성 반란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백성 반란이 일어났지만 사카이 가문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럼에도 영지 이전은 실현되었지만, 그 해 여름에 히메지 영내를 2차례의 태풍이 덮쳐 수해가 발생하여 엄청난 손해를 입었고, 영지 이전 비용까지 더해져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어쨌든 사카이 가문 이후, 히메지 번은 빈번한 영지 이전이 없어지고, 겨우 번주 가문이 안정되었다. 역대 히메지 번주는 마에바시 시대와 마찬가지로 종종 노중, 다이로를 맡아 막정에 중책을 수행했다.

사카이 타다즈미는 마에바시 번의 다이묘였으며 막부 행정에서 로주로 활동했다. 마에바시는 빈번한 홍수의 영향을 받았고, 사카이 씨족의 재정은 성 유지 비용과 로주 직책에 따른 비용, 그리고 사카이 사다즈미의 과도한 지출로 인해 붕괴되었다. 그는 자신의 영향력을 사용하여 마에바시에서 히메지로의 이전을 확보했는데, 히메지는 동일한 고쿠다카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훨씬 더 생산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년도에 가뭄이 발생했고, 이전이 있던 여름에 두 개의 태풍으로 홍수와 열 피해가 발생했다. 이전 비용을 지불하기 위한 세금 인상 루머는 대규모 농민 반란을 초래했다. 사카이 씨족은 이 위기를 극복하고 메이지 시대 말까지 히메지를 통치했다.

막말에는 번주 사카이 타다츠구가 1865년에 다이로가 되어, 가와이 소겐 등 존왕파의 제압에 힘썼지만, 1867년에 은거했다. 동생이자 다음 번주가 된 사카이 타다아쓰는 노중이 되지만,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도쿠가와 쇼군가의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수행하여 오사카 퇴거에도 동행했기 때문에, 무진 전쟁에서는 히메지 번은 조적의 명을 받아 관군의 토벌 대상이 되었다. 재국의 가신은 1월 17일에 무혈 개성하여 히메지성이 오카야마 번에 점령되지만, 3월 7일이 되자 번주 타다아쓰의 관위 박탈과 입경 금지가 명령되어, 아이즈 번 등과 마찬가지로 요시노부의 공범자로 간주되었다. 요시노부가 에도성을 무혈 개성하여 항복 의사를 표명하자, 에도 번저에 있던 타다츠구·타다아쓰도 이에 따라 신정부군에 항복했다. 그런데 5월 5일이 되어, 타다츠구는 에도의 대총독부에 대해, 사카이 가는 도쿠가와 가문의 신하이며 천황가의 신하로서 주가와 나란히 하는 것을 거부하고 소령 몰수를 원하는, 라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히메지 번은 5월 20일에 타다아쓰가 은거하고 분가 가미노이세사키 번 사카이 가문에서 맞이한 사카이 타다쿠니에게 번주의 지위를 양도하고, 군자금으로 을 신정부에 헌상함으로써 번 존속을 허락받지만, 사쿠보파로서 입장이 명확해진 타다츠구에 대한 대응이 절실해졌다. 그러나 타다쿠니와 중신들의 설득에 타다츠구는 응하지 않고, 은거 중인 타다아쓰도 타다츠구에 동조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7월 23일, 신정부는 가로 다카스 하야토·중신 가와이 헤이잔 등에게, 타다츠구·타다아쓰의 언동의 배경에는 그들의 측근인 사쿠보파의 영향이 있다고 하여, 그들의 처단을 촉구했다. 이 때문에, 다카스 등은 사쿠보파의 숙청에 나서, 자해 4명·영뢰 7명 등 다수의 가신이 처분되었다. 그리고 9월 14일에 타다츠구가 친동생인 사카이 타다히로(전 기하타, 타다아쓰에게는 형에 해당)에게 맡겨졌고, 타다아쓰도 시즈오카 번으로 신병이 옮겨진 후, 1868년 9월 28일에 사면되어 마찬가지로 타다히로에게 맡겨졌다. 이러한 사정에서인지, 1867년 11월에 가와이 헤이잔의 진언으로 여러 번에 앞서 판적 봉환의 건언서를 제출한다.

바쿠마츠 시대에 이 영지는 막부를 주요 지지했다. 사카이 타다토시는 로주였으며 보신 전쟁이 시작될 때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수행원으로 오사카 성에 있었다. 도바-후시미 전투 동안 그는 쇼군과 함께 오사카에서 배를 타고 에도로 도망쳤고, 메이지 정부는 히메지를 "천황의 적"으로 선포했다. 그의 가신들은 싸움 없이 히메지성을 황실군에 항복시켰고, 몇 달 후 에도가 황실군에 의해 함락된 후, 그는 직책에서 물러나 고즈케 국의 이세사키 번을 통치하는 씨족의 분가와 함께 살았다.

1871년에 폐번치현으로 히메지 번은 히메지 현이 되었고, 시카마 현을 통해 효고 현에 통합되었다. 사카이 가문은 1884년에 화족의 작위 제도로 백작이 되었다.

폐번치현이 실시되자 히메지 번은 히메지현이 되어, 시카마 지방의 여러 현과 합병하여 시카마현이 되지만, 1876년에 시카마현은 폐지되어 효고현에 합병되었다. 화족에 오른 번주 가문은 1887년백작을 받았고, 가가쿠토 가문 종가에서 각각 분가했던 타다츠구와 타다아쓰에게도 1889년남작이 수여되었다.

'''보따이(譜代) '''

대수이름비고
1충공(忠恭)
2충이(忠以)
3충도(忠道)
4충실(忠実)
5충학(忠学)
6충보(忠宝)
7충현(忠顕)
8충적(忠績)
9충준(忠惇)
10충방(忠邦)


2. 9.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1871년 폐번치현으로 히메지 번은 히메지 현이 되었고, 이후 시카마 현을 거쳐 효고현에 통합되었다. 1884년 화족 작위 제도에 따라 사카이 가문은 백작이 되었다.

3. 역대 번주

#이름재임 기간가문비고
1이케다 데루마사(池田輝政일본어)1600년 ~ 1613년이케다 가문 (도자마 다이묘)52만 석
2이케다 도시타카(池田利隆일본어)1613년 ~ 1616년이케다 가문 (도자마 다이묘)52만 석
3이케다 미쓰마사(池田光政일본어)1616년 ~ 1617년이케다 가문 (도자마 다이묘)52만 석
4혼다 다다마사(本多忠政일본어)1617년 ~ 1631년혼다 가문 (후다이 다이묘)15만 석
5혼다 마사토모(本多政朝일본어)1631년 ~ 1638년혼다 가문 (후다이 다이묘)15만 석
6혼다 마사카쓰(本多政勝일본어)1638년 ~ 1639년혼다 가문 (후다이 다이묘)15만 석
7마쓰다이라 다다아키라(松平忠明일본어)1639년 ~ 1644년오쿠다이라-마쓰다이라 가문 (후다이 다이묘)18만 석
8마쓰다이라 다다히로(松平忠弘일본어)1644년 ~ 1648년오쿠다이라-마쓰다이라 가문 (후다이 다이묘)18만 석
9마쓰다이라 나오모토(松平直基일본어)1648년에치젠-마쓰다이라 가문 (신판 다이묘)15만 석
10마쓰다이라 나오노리(松平直矩일본어)1648년 ~ 1649년에치젠-마쓰다이라 가문 (신판 다이묘)15만 석
11사카키바라 다다쓰구(榊原忠次일본어)1649년 ~ 1665년사카키바라 가문 (후다이 다이묘)15만 석
12사카키바라 마사후사(榊原政房일본어)1665년 ~ 1667년사카키바라 가문 (후다이 다이묘)15만 석
13사카키바라 마사미치(榊原政倫일본어)1667년사카키바라 가문 (후다이 다이묘)15만 석
14마쓰다이라 나오노리(松平直矩일본어)1667년 ~ 1682년에치젠-마쓰다이라 가문 (신판 다이묘)15만 석
15혼다 다다쿠니(本多忠国일본어)1682년 ~ 1704년혼다 가문 (후다이 다이묘)15만 석
16혼다 다다타카(本多忠孝일본어)1704년혼다 가문 (후다이 다이묘)15만 석
17사카키바라 마사쿠니(榊原政邦일본어)1704년 ~ 1726년사카키바라 가문 (후다이 다이묘)15만 석
18사카키바라 마사스케(榊原政祐일본어)1726년 ~ 1732년사카키바라 가문 (후다이 다이묘)15만 석
19사카키바라 마사미네(榊原政岑일본어)1732년 ~ 1741년사카키바라 가문 (후다이 다이묘)15만 석
20사카키바라 마사즈미(榊原政純일본어)1741년사카키바라 가문 (후다이 다이묘)15만 석
21마쓰다이라 아키노리(松平明矩일본어)1741년 ~ 1748년에치젠-마쓰다이라 가문 (신판 다이묘)15만 석
22마쓰다이라 도모노리(松平朝矩일본어)1748년 ~ 1749년에치젠-마쓰다이라 가문 (신판 다이묘)15만 석
23사카이 다다즈미(酒井忠恭일본어)1749년 ~ 1772년사카이 가문 (후다이 다이묘)15만 석
24사카이 다다자네(酒井忠以일본어)1772년 ~ 1790년사카이 가문 (후다이 다이묘)15만 석
25사카이 다다미치(酒井忠道일본어)1790년 ~ 1814년사카이 가문 (후다이 다이묘)15만 석
26사카이 다다미쓰(酒井忠実일본어)1814년 ~ 1835년사카이 가문 (후다이 다이묘)15만 석
27사카이 다다노리(酒井忠学일본어)1835년 ~ 1844년사카이 가문 (후다이 다이묘)15만 석
28사카이 다다토미(酒井忠宝일본어)1844년 ~ 1854년사카이 가문 (후다이 다이묘)15만 석
29사카이 다다테루(酒井忠顕일본어)1853년 ~ 1860년사카이 가문 (후다이 다이묘)15만 석
30사카이 다다시게(酒井忠績일본어)1860년 ~ 1867년사카이 가문 (후다이 다이묘)15만 석
31사카이 다다토시(酒井忠惇일본어)1867년 ~ 1868년사카이 가문 (후다이 다이묘)15만 석
32사카이 다다쿠니(酒井忠邦일본어)1868년 ~ 1871년사카이 가문 (후다이 다이묘)15만 석


4. 주요 가신

가와이 무네아리(河合宗清)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고, 에이로쿠(永禄) 4년에 사카이 마사치카(酒井正親)에게 요리키(与力)로서 소속된 이후로 대대로 사카이가(酒井家)의 가로(家老)를 맡았다.


  • 가와이가(河合家)

:* 가와이 소자이(河合惣左衛門) - 진시로(甚四郎) - 소노리(惣則) - 가와이 소지(河合惣次) - 소가(惣家) - 소슈(惣英) - 가메치요(亀千代) = 소히로(惣広, 소슈의 동생) = 아키츠네(在親, 소히로의 동생) - 사다쓰네(定恒) - 무네미(宗美) - 미치오미(道臣) = 료칸(良完) (헤이잔(平山), 마쓰시타 다카카즈(松下隆和)의 차남) = 요시오미(義臣) (미치오미의 장남)

4. 1. 사카이 가문(酒井家)

대수이름비고
1사카이 다다요시(酒井忠義)
2사카이 다다모치(酒井忠以)
3사카이 다다미치(酒井忠道)
4사카이 다다자네(酒井忠実)
5사카이 다다노리(酒井忠学)
6사카이 다다토미(酒井忠宝)
7사카이 다다아키(酒井忠顕)
8사카이 다다스미(酒井忠績)
9사카이 다다아쓰(酒井忠惇)
10사카이 다다쿠니(酒井忠邦)


  • 가와이가(河合家)


가와이 무네아리(河合宗清)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고, 에이로쿠(永禄) 4년에 사카이 마사치카(酒井正親)에게 요리키(与力)로서 소속된 이후로 대대로 사카이가(酒井家)의 가로(家老)를 맡았다.

  • 가와이 무네아리(河合宗清) - 진시로(甚四郎) - 무네노리(宗則) - 가와이 무네쓰구(河合宗次) - 무네이에(宗家) - 무네히데(宗英) - 가메치요(亀千代)=무네히로(宗広, 무네히데의 동생) = 아리치카(在親, 무네히로의 동생) - 사다쓰네(定恒) - 무네미(宗美) - 히로오미(博臣) = 사토카타(郷賢, 헤이잔(平山), 마쓰시타 다카와(松下隆和)의 차남) = 요시오미(義臣, 히로오미의 장남)

5. 막부 말기의 영지

대부분의 한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히메지번은 주기적인 지적도 조사와 예상 농업 생산량을 기반으로 할당된 고쿠다카를 제공하도록 계산된 여러 개의 단절된 영토로 구성되었다.[4][5]

하리마국
가코군 - 95개 마을
인나미군 - 111개 마을
가토군 - 22개 마을
가사이군 - 9개 마을
진토군 - 64개 마을
진사이군 - 39개 마을
시키토군 - 70개 마을
시키사이군 - 69개 마을
잇토군 - 1개 마을 (이에시마 제도)
잇사이군 - 1개 마을 (무로쓰)


참조

[1] 서적 江戸三百藩大全 全藩藩主変遷表付 Kosaido Publishing 2015
[2] 서적 藩と城下町の事典—国別 Tokyodo Printing 2004
[3] 서적 Historical and Geographic Dictionary of Japan Tuttle (reprint) 1972
[4] 서적 The Bakufu in Japanese History https://books.google[...]
[5] 서적 Warlords, Artists, & Commoners: Japan in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6] 서적 日本旗章史図鑑 えにし書房 2019-07-31
[7] 서적 戊辰戦争と「朝敵」藩-敗者の維新史- 八木書店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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