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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키바라 다다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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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카키바라 다다쓰구는 오스카 다다마사의 장남이자, 도쿠가와 사천왕 중 한 명인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손자이다. 그는 3세에 오스카 가문을 상속받아 도토미국 요코스카 번을 다스렸으며, 10세에는 사카키바라 가문을 상속받아 다테바야시 번을 영지로 받았다. 이후 시라카와 번, 히메지 번을 거쳐 1663년에는 막부의 오타이로에 임명되었다. 가코가와에 댐을 건설하는 등 영지 경영에 힘썼으며, 와카와 백인일수를 즐기는 등 문화 활동에도 참여했다. 1665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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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키바라 다다쓰구
기본 정보
씨명오스가 씨 → 사카키바라 씨
이름사카키바라 다다쓰구 / 오스가 다다쓰구
시대에도 시대 전기
출생게이초 10년 (1605년)
사망간분 5년 3월 29일 (1665년5월 14일)
개명구니마루 (유아명, 구니치요라고도 함), 오스가 다다쓰구 → 사카키바라 다다쓰구
이명고로자에몬, 마쓰다이라 다다쓰구
시호해당 없음
계명조코인 덴요초잔
묘소효고현히메지시마쓰야마 즈이간지
관위종5위하・시키부다이스케, 종4위하・지종
막부에도 막부다이세이산요
주군도쿠가와 이에야스, 히데타다, 이에미쓰, 이에쓰나
도토미요코스카번 번주 → 고즈케다테바야시번 번주 → 무쓰시라카와번 번주 → 하리마히메지번 번주
씨족오스가 씨 → 사카키바라 씨
부모아버지: 오스가 다다마사, 어머니: 쇼시쓰인 (마쓰다이라 야스모토의 딸)
형제해당 없음
배우자정실: 도쿠히메 (구로다 나가마사의 차녀)
계실: 규쇼인 (데라자와 히로타카의 딸)
자녀고헤이타 (장남, 요절), 만, 마사후사
관직 경력
요코스카번 번주 (오스가가)대수: 2대
임기: 1607년 ~ 1615년
전임자: 오스가 다다마사
후임자: 마쓰다이라 시게카쓰
다테바야시번 번주 (사카키바라가)대수: 3대
임기: 1615년 ~ 1643년
전임자: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후임자: 마쓰다이라 노리나가
시라카와번 번주 (사카키바라가)대수: 해당 없음
임기: 1643년 ~ 1649년
전임자: 니와 미쓰시게
후임자: 혼다 다다요시
히메지번 번주 (사카키바라가)대수: 1대
임기: 1649년 ~ 1665년
전임자: 마쓰다이라 나오노리
후임자: 사카키바라 마사후사

2. 생애

오오스카 타다마사의 장남이자 도쿠가와 사천왕 중 한 명인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손자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카였기에, 다다쓰구는 1대에 한하여 종신 마츠다이라 성 사용을 허락받았다.[1] 3세 때 아버지의 뒤를 이어 토토미국 요코스카번주가 되었으나, 10세 때 숙부 사카키바라 야스카츠의 후사 문제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에 따라 사카키바라 가문을 상속받아 고즈케국 다테바야시번 10만 석의 번주가 되었다.[4][5] 이 과정에서 기존에 상속했던 오오스카 가문은 단절되었다.

다다쓰구는 이후 여러 지역으로 영지를 옮겼다. 1643년에는 무쓰국 시라카와번 14만 석으로, 1649년에는 하리마국 히메지번 15만 석으로 전봉하였다. 1648년에는 오쿠다이라 다다마사와 함께 어린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후견인 역할을 맡았으며, 같은 해 시모쓰케국 기쓰레가와번주 기쓰레가와 아키우지의 후견인으로도 지명되었다.[9] 히메지 번주 시절에는 가코가와강 치수 공사를 시행하고 신덴 개발을 추진했으며, 와카백인일수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1663년에는 호시나 마사유키의 추천으로 이이 나오타카 사후 공석이던 오타이로(대정참여)에 임명되어 막부 정치에 참여했다. 1665년 향년 61세로 사망하였다.

2. 1. 어린 시절과 가문 상속

오오스카 타다마사의 장남이자, 도쿠가와 사천왕 중 한 명인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손자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카였기 때문에, 타다쓰구는 1대에 한하여 종신 마츠다이라 성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받았다.[1]

1607년 (게이초 12년), 아버지 오오스카 타다마사가 사망하자 3세의 나이로 조모의 친가인 오오스카 가문을 상속받아, 도토미 요코스카번에서 6만 석의 영지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배려로 안도 나오츠구가 후견인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1615년 (겐나 원년), 삼촌이자 사카키바라 가문의 당주였던 사카키바라 야스카츠에게 후사를 이을 자식이 없어 가문이 단절될 위기에 처했다.[4] 도쿠가와 사천왕 중 하나인 사카키바라 가문의 혈통이 끊어지는 것을 우려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에 따라, 타다쓰구는 10세의 나이로 고즈케 다테바야시의 사카키바라 가문을 상속받아 10만 석을 영유하게 되었다. 일설에는 타다쓰구 본인이 사카키바라 가문을 상속하기를 희망했다고도 전해진다. 이 상속으로 인해 다이묘로서의 오오스카 씨는 절가되었다.[5]

오오스카 씨의 옛 영지는 사카키바라 가문에 흡수되지 않고 막부에 반납되었다. 가신단 역시 해고되었으나, 일부 가신은 기존 봉록에서 3할이 가산된 채 사카키바라 씨의 가신으로 편입되었다.[6][7][8] 또한, 타다쓰구를 사카키바라 가문의 후계자로 옹립하는 데 공을 세운 사카키바라 가문의 가로 3명은 에도 막부로부터 오츠케가로에 해당하는 "오츠케닌"으로 임명되어 각각 1천 석을 받았다. 이 지행은 사카키바라 가문에서 받는 것과는 별개로 자손에게 대대로 계승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훗날 막말 시기에 막부가 하타모토·고케닌의 지행에서 군역금을 징수하려 할 때, 이 오츠케닌들의 신분을 둘러싸고 막부의 간조쇼와 당시 에치고국 다카다 번주였던 사카키바라 가문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6]

2. 2. 여러 번주를 거치다

오오스카 타다마사의 장남이자 도쿠가와 사천왕 중 한 명인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손자이다. 어머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카였기 때문에, 다다쓰구 1대에 한하여 마쓰다이라 성을 사용하는 것이 허락되었다.[1]

아버지 오오스카 타다마사가 사망하자 3세의 나이로 조모의 친정인 오오스카 가문을 상속받아, 도토미국 요코스카번에서 6만 석의 영지를 다스리게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배려로 안도 나오쓰구가 후견인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숙부이자 사카키바라 가문의 당주였던 사카키바라 야스카쓰에게 후사를 이을 자식이 없어 가문이 단절될 위기에 처하자[4], 도쿠가와 사천왕의 혈통이 끊어지는 것을 염려한 이에야스의 명에 따라 10세 때 사카키바라 가문을 상속받아 고즈케국 다테바야시번 10만 석의 번주가 되었다. 일설에는 다다쓰구 본인이 사카키바라 가문 상속을 희망했다고도 전해진다. 이로 인해 다이묘로서의 오오스카 가문은 단절되었다.[5]

오오스카 가문의 영지는 사카키바라 가문에 흡수되지 않고 막부에 반납되었다. 오오스카 가문의 가신단도 해체되었으나, 일부 가신은 기존 봉록의 3할이 가산된 채 사카키바라 가문의 가신으로 편입되었다.[6][7][8] 또한, 다다쓰구를 사카키바라 가문의 후계자로 옹립하는 데 공을 세운 사카키바라 가문의 가로 3명은 에도 막부로부터 오쓰케가로에 준하는 '오쓰케닌(御附人)'으로 임명되어 각각 1천 석을 하사받았다. 이 지행은 사카키바라 가문에서 받는 봉록과는 별개로 자손에게 세습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막말 시기, 막부가 하타모토·고케닌의 지행에서 군역금을 징수하려 할 때 이들의 신분을 둘러싸고 막부의 간조쇼와 사카키바라 가문(당시 에치고국 다카다번)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6]

쇼호 4년 12월 12일(1648년 1월 6일)에는 오쿠다이라 다다마사와 함께 어린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후견인 역할을 맡았다. 이후 무쓰국 시라카와번 14만 석으로 영지가 증가하며 전봉되었고, 다시 하리마국 히메지번 15만 석으로 전봉하였다. 간분 3년(1663년)에는 호시나 마사유키의 추천으로, 이이 나오타카 사망 후 공석이었던 막부의 다이로직(대정참여)에 임명되었다.

만지 2년(1659년)에는 현재의 가코가와시 히가시칸키초에서 요네다초에 걸쳐 흐르는 가코가와 우안에 '마스다 제방(増田堤)'을 축조하여, 이전까지 두 갈래로 나뉘어 흐르던 마스다(升田)와 센토(船頭) 사이의 강 흐름을 하나로 합치는 유로 변경 공사를 시행했다.

히메지 번주 시절에는 신덴 개발을 지휘하는 한편, 와카백인일수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사카키바라 다다쓰구의 법호를 기록한 법명축


연도내용
1605년 (게이초 10년)출생
1607년 (게이초 12년)도토미국 요코스카번 오오스카 가문 상속
1615년 (겐나 원년)고즈케국 다테바야시번 사카키바라 가문 10만 석 상속
1643년 (간에이 20년)무쓰국 시라카와번으로 전봉 (7월)
1648년 (게이안 원년)시모쓰케국 기쓰레가와번 번주 기쓰레가와 아키우지의 후견인으로 임명됨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명)[9]
1649년 (게이안 2년)하리마국 히메지번으로 전봉 (6월 9일)
1663년 (간분 3년)다이로 임명
1665년 (간분 5년)사망 (향년 61세)


2. 3. 오타이로 취임과 사망

쇼호 4년 12월 12일 (1648년 1월 6일), 오쿠다이라 마사요시와 함께 어린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후견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후 무쓰 시라카와 14만 석으로 전봉되었고, 다시 하리마 히메지 15만 석으로 구니가에를 하였다(1649년 6월 9일).

히메지 번주 시절에는 만지 2년(1659년), 현재의 가코가와시 히가시칸키초에서 요네다초에 걸쳐있는 가코가와 우안에 "마스다 댐"이라는 제방을 구축하여 강의 흐름을 하나로 만드는 유로 변경 공사를 실시했다. 또한 신전 개발을 지휘하는 한편, 와카, 백인일수를 즐겼다.

간분 3년(1663년), 호시나 마사유키의 추천을 받아 이이 나오타카 사망 후 공석이던 막부의 오타이로직(대정참여)에 취임하였다.

1665년 (간분 5년)에 사망했으며, 향년 61세였다.

3. 관위

4. 가계

구분인물비고
부모오스카 타다마사아버지
쇼시츠인어머니 (마츠다이라 야스모토의 딸)
정실, 계실도쿠히메정실 (구로다 나가마사의 차녀)
큐쇼인계실 (테라자와 히로타카의 딸)
자녀사카키바라 코헤이타장남
사카키바라 마사후사차남 (생모는 큐쇼인)


참조

[1] 서적 日本近世武家政権論 近代文芸社 2000
[2] 간행물 靜岡縣史料 4輯 靜岡縣 1938
[3] 문서 忠次
[4] 문서
[5] 문서
[6] 서적 譜代大名の創出と幕藩体制 吉川弘文館 2015
[7] 문서
[8] 문서
[9] 문서
[10]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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