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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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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상총은 유비 휘하에서 활동한 촉나라의 장수로, 효정 전투에서 오나라에게 패배하는 상황에서도 피해 없이 부대를 이끌었다. 유선 즉위 후 정정후에 봉해지고, 제갈량의 북벌을 앞두고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아 중도독에 임명되었다. 이후 중앙군 사령관인 중령군으로 승진했으나, 240년 한가군에서 반란을 진압하다 전사했다. 《삼국지》 촉서에는 숙부 향랑의 열전에 함께 실려 있으며,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출사표에 언급되어 궁정 방비를 맡는 인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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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총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청두 무후사에 있는 상총 소상
청두 무후사의 상총 소상
이름상총
로마자 표기Siang Chong
출생생년 미상
사망240년
사망 장소쓰촨성루산현
출신지형주양양군 이성현
작위도정후
주군유비유선
가족 관계상총 (형제)
향랑 (숙부)
상조 (사촌)
관직 정보
관직아문장
중도독
중령군
임관 시기 (아문장)? ~ 223년
임관 시기 (중도독)223년 ~ ?
임관 시기 (중령군)? ~ 240년
주군 (아문장)유비
주군 (중도독)유선
주군 (중령군)유선
승상 (중도독)제갈량
승상 (아문장)제갈량

2. 생애

유비형주(荊州)에 있을 때 그를 섬겼다.[1]

221년, 효정전투(猇亭之戰, 또는 이릉 대전)에 참전하였다. 이때 촉나라가 오나라에게 크게 패하였으나, 상총의 군영만이 피해가 없었다.[2] 그 결과 그는 유비로부터 높은 칭찬을 받았다.

223년, 유비 사후 유선이 촉의 새로운 황제가 되자 상총을 도정후(都亭侯)에 봉하고 황실 경호원 중 중앙 도독(中都督)으로 임명했다.[3]

227년 또는 228년경, 촉한재상 제갈량제갈량의 북벌 중 첫 번째 원정을 시작하려 하자, 유선에게 《출사표》를 써서 조위에 대한 전쟁을 벌이는 이유와 황제에게 통치에 대한 조언을 설명했다. 《출사표》에서 제갈량은 상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4]

"장군 상총은 본성적으로 덕행과 공정한 행동을 좋아하며, 군사 문제에 능통합니다. 과거 그는 시험을 거쳐 시대의 문제에 잘 대처했으며, 선황께서 그를 재능 있다고 칭찬하셨으므로 백성들의 바람에 따라 도독(督)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군사 문제는 먼저 그와 상의해야 군대가 순조롭게 움직여 협력할 수 있으며, 승리의 수확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이후 상총은 중앙군 사령관(中領軍)으로 승진했다.[5]

240년, 한가군(漢嘉郡, 현재의 쓰촨성 루산현)에서 현지 부족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촉군을 이끌다 전사했다.[5]

3. 평가

향총은 유비 시대에 아문장(牙門將)이 되었고, 222년 이릉 전투에서 촉한이 대패했지만, 향총의 진영만은 수비를 완수했다.[1] 223년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고, 중부독(中部督)이 되어 근위병을 지휘했다.[1] 227년 제갈량은 북벌에 앞서 올린 출사표에서 향총을 "선제(유비)께서 유능하다고 칭찬하신 인물"로 묘사하며, "군사(軍事) 관련 일은 모두 그에게 자문하면 반드시 협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추천했다.[1] 이후 중령군(中領軍)으로 승진하였으나, 240년 한가군의 이민족을 토벌하다가 살해되었다.[1]

3. 1. 긍정적 평가

유비가 아문장(牙門將)으로 임명하였다. 222년, 이릉 전투에서 촉한이 대패했을 때, 향총의 진영은 수비를 완수했다.[1]

227년, 제갈량이 북벌에 앞서 올린 출사표에서 향총을 "선제(유비)께서 유능하다고 칭찬하신 인물"로 묘사하며, "군사(軍事) 관련 일은 모두 그에게 자문하면 반드시 협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추천했다.[1]

4.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삼국지연의에서는 상총이 실제로 등장하지는 않으며, 제갈량이 「출사표」에서 상충(向充)으로 표기하여 유비로부터도 높이 평가받아 도독에 추천된 인물이라고 이름만 언급된다.[4]

228년, 제갈량북벌을 떠날 당시 어림군(근위)의 총독이 되어 성도의 방비를 맡았으며,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 제91회에 이름만 언급되며, 정사와 마찬가지로 출사표에서 추천되어 궁정을 지키는 대장이 된다.[4]

5. 친족 관계

유비 시대에 아문장(牙門將)이 되었다. 장무 2년, 이릉 전투에서 촉한군은 대패했지만, 샹총의 진영만은 온전히 수비를 유지했다. 향랑의 열전은 『삼국지』 촉서에 실려 있으며, 샹총의 열전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5. 1. 동명이인

샹충(向充)은 한자가 다른 같은 이름의 동생 샹충(向充)을 두었는데, 동생은 촉에서 군 장교로 복무했다. 동생 샹충은 훈련 사수 대장(射聲校尉)과 황실 비서실의 상서(尚書) 직책을 맡았다.[6]

제갈량이 234년에 사망했을 때, 많은 백성들이 촉 정부에 제갈량을 기념하기 위한 사당을 짓기를 원했지만 정부는 거부했고, 백성들은 개인적으로 사당을 지었다. 당시 중서랑(中書郎) 직책을 맡고 있던 샹충은 이 소식을 듣고, 보병 대장인 습륭(習隆)과 함께 촉 황제 유선에게 글을 올려 면양에 제갈량 사당을 짓도록 조언했다.[7]

240년에서 262년 사이, 촉 장군 강유가 조위에 대항하여 일련의 군사 원정을 이끌었을 때, 샹충은 또 다른 관리인 래충과 함께 강유의 부하로 복무했다.[8]

263년 위나라의 촉 정복 이후, 위 장군 위관은 "성신(Cheng Xin)" 또는 "신뢰 달성(Achieving Faith)"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옥 반지와 도장을 발견했다. 위나라 사람들은 이를 관리들에게 보여주고 논의한 후 국가 관청에 보관했다.[9]

샹충은 이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거에 나는 교주가 전 황제의 이름은 '비(備)'이며 '준비하다'는 뜻이고, 후세 통치자의 이름은 '선(禪)'이며 '주다'는 뜻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즉, 유씨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군대의 지지자는 '엄(Yan)'이라 불리며, 한나라의 마지막 연호는 '연흥(Yánxīng)'으로 '엄이 일어선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길조를 보냈고 이제 국가 관청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하늘의 뜻입니다."[10]

같은 해에 샹충은 위 정부에서 일하게 되었고, 자통군(梓潼郡; 현재의 면양, 사천)의 태수(太守)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사마염이 황제가 되었고, "엄이 일어선다"는 예언을 실현했다.[11]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41
[2] 서적 Sanguozhi vol. 41
[3] 서적 Sanguozhi vol. 41
[4] 서적 Sanguozhi vol. 41
[5] 서적 Sanguozhi vol. 41
[6] 서적 Sanguozhi vol. 41
[7] 서적 Xiangyang Ji vol. 02
[8] 서적 Sanguozhi vol. 42
[9] 서적 Xiangyang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1
[10] 서적 Xiangyang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1
[11] 서적 Xiangyang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1
[12] 서적 Sun Sheng's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1
[13] 서적 三国志 蜀書 先主伝
[14] 서적 三国志 蜀書 諸葛亮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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