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푸르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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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샤푸르 3세는 사산 제국의 11대 샤(재위: 383년 ~ 388년)이다. 그는 샤푸르 2세의 아들이며, 아르다시르 2세가 살해된 후 왕위에 올랐다. 그의 치세 동안 로마 제국과의 관계에서 아르메니아 분할 조약을 통해 아르메니아를 분할했다. 또한 종교적 관용 정책을 펼쳤으며, 타크 보스탄에 부조를 남겼다. 샤푸르 3세는 388년에 천막 깔개에 깔려 암살당했으며, 사산 왕조 주화의 행정 프로그램에 변화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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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푸르 2세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10번째 샤한샤로, 태어나기 전 왕으로 선포되어 즉위하여 중앙 집권화를 이룩하고 로마 제국과의 전쟁 및 영토 확장을 통해 아르메니아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했다.
샤푸르 3세 | |
---|---|
기본 정보 | |
![]() | |
칭호 | 이란과 비이란의 샤한샤 |
왕조 | 사산 왕조 |
종교 | 조로아스터교 |
통치 | |
즉위 | 383년 |
퇴위 | 388년 |
이전 통치자 | 아르다시르 2세 |
이후 통치자 | 바흐람 4세 |
개인 정보 | |
아버지 | 샤푸르 2세 |
배우자 | 야즈단-프리 샤푸르 |
자녀 | 야즈데게르드 1세 바흐람 4세 |
사망 | 388년 |
언어별 이름 |
2. 어원
"샤푸르"는 사산 제국에서 인기 있는 이름으로, 사산 왕조의 세 명의 군주와 사산 시대 및 그 이후 시대의 다른 주요 인사들이 사용했다. 고대 이란어 "*xšayaθiya.puθra"(“왕의 아들”)에서 파생되었으며, 처음에는 칭호였으나 적어도 서기 2세기 후반에는 고유 명사가 되었다. 일부 아랍-페르시아 자료에서 아르사케스 왕의 목록에 등장하지만, 이는 시대착오이다. 샤푸르는 다른 언어로 다음과 같이 음역된다. Sapur|사푸르grc, Sabour|사부르grc 및 Sapuris|사푸리스grc; 라틴어 ''Sapores'' 및 ''Sapor''; 아랍어 ''Sābur'' 및 ''Šābur''; 신 페르시아어 ''Šāpur'', ''Šāhpur'', ''Šahfur''.
샤푸르 3세는 샤푸르 2세의 아들이었다. 379년, 샤푸르 2세는 아들이 성년이 되면 퇴위한다는 조건으로 이복형제인 아르다시르 2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1] 이로 인해 일부 아르메니아 작가들은 아르다시르 2세가 샤푸르 2세의 아들이라고 잘못 주장하기도 했다.[1] 아르다시르 2세의 치세는 383년까지 이어졌는데, 그는 이란 귀족들에게 살해되거나 폐위되었다. 그 이유는 권력에 굶주린 귀족들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샤푸르 2세의 정책을 그가 계속했기 때문이다.[1] 샤푸르 3세가 그 뒤를 이었는데, 알 타바리(923년 사망)의 역사에 포함된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샤푸르 2세의 후손에게 왕관이 주어졌기 때문에 신하들에게 호평을 받았다.[2] 샤푸르 3세는 즉위 연설에서 궁정에서 기만, 탐욕 또는 독선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3] 그러나 귀족들에게 이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 사이의 계속된 갈등의 원인이었던 아르메니아 문제 외에도, 샤푸르 3세는 동쪽의 알촌 훈족과 충돌한 것으로 보인다. 주화학 연구에 따르면 388년 이전에 알촌 훈족이 샤푸르 3세로부터 카불을 빼앗았다. 그들은 샤푸르 3세가 발행한 것과 동일한 주화를 복제했으며, 박트리아어 비문 "αλχοννο"(알카노)를 추가하여 사산 제국 영토 점령을 나타냈다.[1] 카불은 360년대부터 주화 제조 중심지였기 때문에 이 도시의 상실은 큰 타격이었다.[1]
3. 배경 및 즉위
4. 치세
샤푸르 3세는 5년 동안 통치한 후 388년에 사망했다. 그는 궁정 중 한 곳에 세운 큰 천막의 밧줄을 어떤 귀족들이 잘라내 천막이 그 위에 떨어지면서 사망했다.[1] 그의 뒤를 아들 바흐람 4세가 이었다.[1] 그의 또 다른 아들 야즈데게르드 1세는 나중에 399년에 바흐람 4세를 계승했다.[1]
4. 1. 아르메니아 분할
로마 제국과 아르메니아의 내분에 깊게 개입한 사산 왕조는 훈족을 중심으로 구성된 유목민들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불필요한 분쟁을 최소화하고자, 아르메니아를 분할하여 나누어 가질 것을 합의하였다. 384년에 평화조약을 맺고 아르메니아를 좁은 서부와 넓은 동부로 나누어 봉토로 삼았으며, 이후 36년 동안 일시적인 평화가 찾아왔다.[1]
아르메니아는 로마 제국과 사산 제국 사이의 끊임없는 전쟁의 근원이었다. 378/9년에 샤푸르 2세는 섭정 마누엘 마미코니안이 그에게 복종한 후 아르메니아에 대한 이란의 패권을 달성했다. 수레나 장군이 이끄는 10,000명의 이란 군대가 아르메니아로 파견되었고, 수레나는 마르즈반(변경백)이라는 칭호를 받아 아르메니아가 사산 제국의 지방이 되었음을 나타냈다. 그러나 아르다시르 2세 치하에서 마누엘은 반란을 일으켜 380년대 초 이란인과 로마인 모두에 맞서 독립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385/386년에 죽기 직전에 그는 아르메니아를 로마의 보호 아래 두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죽자 많은 아르메니아 나하라르(귀족)들이 아르사케스 왕 아르샤크 3세에 반란을 일으키고 샤푸르 3세에게 다른 왕을 요구했다. 샤푸르 3세는 호스로브 4세를 왕으로 즉위시키고 누이 주르반두크트를 결혼시켰으며, 침략군을 아르메니아로 파견하여 그 나라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아르샤크 3세는 아킬리세네 서부 지역으로 물러나 로마의 증원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란과 로마는 전쟁 대신 외교를 통해 합의에 도달하기로 했다. 협정이 아르메니아 분할을 위해 체결되었고, 북쪽으로는 테오도시오폴리스, 남쪽으로는 아미다를 지나는 경계선이 그어져 아르메니아의 대부분은 사산 제국의 손에 남게 되었다. 여기에는 아르사케스 왕조의 두 수도인 아르타사타와 드빈이 포함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로마인들은 이베리아 전체에 대한 이란의 패권을 완전히 인정했다. 이 조약이 정확히 언제 체결되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387년에 체결되었다고 믿는 반면, 일부는 384년 또는 389년, 390년에 체결되었다고 주장한다. 양측은 코카서스 방어를 위해 협력해야 했으며, 로마인들은 이란인들에게 불규칙적인 간격으로 약 약 226.80kg의 금을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로마인들은 이 지불을 정치적 할당으로 본 반면, 이란인들은 이를 조공으로 보았다.
샤푸르 3세는 이란 아르메니아의 정치적, 경제적 힘을 더욱 줄이기 위해 여러 지방을 빼앗았다. 아르차흐, 우티크, 샤카셴, 가르드만 및 콜트는 코카서스 알바니아(아르사케스 왕조의 방계가 통치)에 주어졌고, 구가르크(미흐라니드가 통치)는 이베리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아르자네네(비닥쉬가 통치), 파이타카란, 코르자이크(코르두에네) 및 파르스카하이크는 이란에 합병되었다. 아르샤크 3세는 곧 사망했고, 로마인들은 아르사케스 왕조의 지부를 폐지하고 서아르메니아 지방을 만들었다. 그 결과 그를 따랐던 많은 나하라르들이 이후 이란인들에게 다시 합류했다. 이란 아르메니아의 아르사케스 왕조는 428년 바흐람 5세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다. 샤푸르 3세의 기독교인에 대한 종교적 관용은 역사가 엘리셰와 에페소스의 요한에 의해 보고된다. 전자에 따르면 샤푸르 3세는 아르메니아인들에게 호화로운 선물을 주고 그들의 교회를 왕실 과세에서 면제했다.
4. 2. 동방의 알촌 훈족과의 충돌
로마 제국과 사산 제국 사이의 끊임없는 전쟁의 원인이었던 아르메니아는 385/386년 마누엘 마미코니안이 죽기 직전 로마의 보호 아래 놓였다.[1] 그러나 마누엘이 죽자 많은 아르메니아 나하라르(귀족)들이 아르사케스 왕 아르샤크 3세()에 반란을 일으켰고, 샤푸르 3세에게 다른 왕을 요구했다. 이에 샤푸르 3세는 호스로브 4세를 왕으로 즉위시키고 누이 주르반두크트와 결혼시켰다.[1]
이란과 로마는 전쟁 대신 외교를 통해 합의했고, 아르메니아 분할 협정이 체결되었다.[1] 테오도시오폴리스를 북쪽 경계로, 아미다를 남쪽 경계로 하여 아르메니아 대부분이 사산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1] 여기에는 아르사케스 왕조의 두 수도인 아르타사타와 드빈이 포함되었다.[1] 로마는 이 조약을 통해 이베리아 전체에 대한 이란의 패권을 완전히 인정했다.[1] 조약 체결 시기는 불확실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387년에 체결되었다고 본다.[1]
샤푸르 3세는 이란 아르메니아의 정치적, 경제적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여러 지방을 분할했다.[1] 아르차흐, 우티크, 샤카셴, 가르드만, 콜트는 코카서스 알바니아(아르사케스 왕조 방계)에, 구가르크(미흐라니드)는 이베리아에 주어졌고, 아르자네네(비닥쉬), 파이타카란, 코르자이크(코르두에네), 파르스카하이크는 이란에 합병되었다.[1] 아르샤크 3세는 곧 사망했고, 로마는 아르사케스 왕조 지부를 폐지하고 서아르메니아 지방을 만들었다.[1]
아르메니아 분쟁 외에도 샤푸르 3세는 동쪽의 알촌 훈족과 충돌한 것으로 보인다. 알촌 훈족은 388년 이전에 샤푸르 3세로부터 카불을 빼앗았으며, 샤푸르 3세가 발행한 것과 동일한 주조를 복제한 동전을 발행했다. 유일한 차이점은 박트리아어 비문 "αλχοννο"(알카노)가 추가되어 사산 제국 영토 점령을 나타냈다는 것이다.[1] 카불은 360년대부터 동전 제조 중심지였기 때문에, 이 도시의 상실은 큰 타격이었다.[1]
4. 3. 종교 정책
샤푸르 3세는 기독교인에 대해 종교적으로 관용적인 정책을 펼쳤다고 알려져 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샤푸르 3세는 아르메니아인들에게 값비싼 선물을 주고, 그들의 교회가 왕실 세금을 내지 않도록 하였다.[1]
5. 조각상
샤푸르 3세는 케르만샤 근방의 타크 보스탄에 독특한 조각상을 남겼다. 아치 형태의 지붕 아래에 두 개의 비슷해 보이는 조각이 서로 흘겨보는 형태이다. 조각상에 새겨진 팔라비어는 이것이 각각 샤푸르 2세와 3세라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오른편엔 '샤푸르, 호르미즈드, 나르세스'라고 써 있으며, 왼편엔 '샤푸르, 샤푸르, 호르미즈드'라고 기록되어있다. 그리하여 오른편의 것은 샤푸르 2세의 정립상이며, 왼편은 샤푸르 3세의 상인 것으로 추측한다. 하지만 전체의 모습으로부터 본다면, 뒤편의 아치까지도 포함해야 하며 이것은 하나의 왕위를 상징하기도 한다. 어쨋든, 이러한 조각상은 사산 왕조 역사상 매우 드문 것으로 샤푸르 3세의 각별한 효심을 나타내기도 한다.
샤푸르 3세는 현재의 케르만샤 인근 타크-에 보스탄 유적지에 위치한 암각 부조의 제작을 명령했다. 그 디자인은 이완 형태였다. 두 명의 사산 왕이 묘사되어 있으며, 왼쪽의 왕은 샤푸르 3세, 오른쪽의 왕은 샤푸르 2세임을 비문으로 식별할 수 있다. 오른쪽의 왕은 샤푸르 2세의 왕관을 쓰고 있지만, 왼쪽의 왕은 샤푸르 3세의 왕관을 제대로 재현하고 있다. 다른 사산 부조와 달리, 샤푸르 3세 시대에 만들어진 부조는 암벽 표면에 조각된 것이 아니라 원통형 볼트 영역의 뒤쪽에 조각되었다. 이 스타일은 7세기에 사산 왕 호스로 2세(Khosrow II|코스로 2세영어)에 의해 모방되고 확대되었다.
6. 죽음
샤푸르 3세는 재위 5년째인 388년에 천막 깔개에 눌려 암살당했다고 전해진다.[3] 이 설이 진실이라면, 샤푸르 3세는 신하들에 의해 암살당한 사산 왕조 최초의 군주가 된다. 이후 호스로 1세까지의 군주들은 귀족들의 힘을 어떻게 누를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려하게 된다.
7. 주화
샤푸르 3세와 바흐람 4세 치하에서 사산 왕조 주화의 행정 프로그램이 실질적으로 변경되었다. 더 많은 주화가 주조되었으며, 행정 구역은 종종 여러 유형의 주조소를 위한 주형을 제작했다. 샤푸르 3세는 왕관과 ''코림보스''를 착용하지 않고, 단지 왕관 장식만 착용한 동전을 주조한 몇 안 되는 사산 왕조의 왕 중 한 명이었다. 이는 왕관 장식이 사산 왕조 왕의 가장 중요한 머리 장식임을 보여준다.[1] 그의 동전에는 "마즈다를 숭배하는 신성한 샤푸르, 이란인과 비이란인의 왕 중의 왕, 그의 형상/광채는 신으로부터"라는 뜻의 ''Mazdēsn bay Šābuhr šāhān šāh Ērān ud Anērān kēčihr az yazdān''라는 전형적인 칭호가 사용되었다.[2][3]
8. 기타 유물
샤푸르 3세는 케르만샤 근방의 타크 보스탄에 독특한 조각상을 남겼다. 아치 형태의 지붕 아래에 두 개의 비슷해 보이는 조각이 서로를 흘겨보는 형태이다. 조각상에 새겨진 팔라비어 기록에 따르면, 오른편에는 '샤푸르, 호르미즈드, 나르세스'라고 쓰여 있고, 왼편에는 '샤푸르, 샤푸르, 호르미즈드'라고 쓰여 있다. 따라서 오른편은 샤푸르 2세, 왼편은 샤푸르 3세의 상으로 추정된다. 전체 모습으로 보면 뒤편의 아치까지 포함해야 하며, 이는 하나의 왕위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러한 조각상은 사산 왕조 역사상 매우 드문 것으로, 샤푸르 3세의 효심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8. 1. 클리모바 접시
클리모바 보물의 일부인 "클리모바 접시"는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소장된 은제 용기이다. 이 접시에는 표범을 죽이는 왕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왕의 왕관은 샤푸르 3세의 왕관과 매우 유사하며 왕관 꼭대기에는 전통적인 ''코림보스''(korymbos, 둥근 천)가 있다.[1] 왕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된 야즈데게르드 1세의 접시와 같은 드레스를 입고 있다.[2] 접시 뒷면에는 7~8세기경의 소그드어 비문이 새겨져 있다.[1]
하퍼(Harper)와 마이어스(Meyers)는 1981년 저서 ''사산조 시대의 은제 용기: 왕가의 이미지''에서 이 왕이 샤푸르 3세를 나타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지만,[3] ''옥스퍼드 후기 고대 사전(The Oxford Dictionary of Late Antiquity)''(2018)에서는 그가 샤푸르 3세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8. 2. 오닉스 인장
야즈단-프리야 샤푸르는 샤푸르 3세의 아내 중 한 명으로, 뛰어난 품질의 오닉스 인장에 그녀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 인장에는 그녀가 숫양의 뿔을 착용한 모습이 묘사되어 있으며, 현재 프랑스 메달 진열관에 소장되어 있다.[2]참조
[1]
서적
History of the Armenians, Book 6, Chapter 1
[2]
웹사이트
Intaille
http://medaillesetan[...]
[3]
출처
2010-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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