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람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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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흐람 4세는 388년부터 399년까지 사산 제국의 13대 샤였다. 그는 샤푸르 3세의 아들로, 아버지의 통치 기간 동안 키르만 지역의 총독을 지냈다. 바흐람 4세는 395년 훈족의 침입을 격퇴하고 아르메니아 문제에 개입했다. 그는 사냥 중 화살에 맞아 사망했으며, 암살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바흐람 4세는 주화에 베레트라그나를 상징하는 날개 달린 관을 사용했고, 그의 통치 시기에는 주조소 서명의 사용이 정례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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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람 4세 | |
---|---|
기본 정보 | |
칭호 | 샤한샤 (이, 비 이란의 왕) |
![]() | |
통치 | 388년–399년 |
전임 | 샤푸르 3세 |
계승자 | 야즈데게르드 1세 |
자녀 | 호스로 |
왕가 | 사산 왕조 |
아버지 | 샤푸르 3세 |
종교 | 조로아스터교 |
언어별 이름 | |
생애 | |
재위 기간 | 383년–388년 (왕자) |
통치 지역 | 키르만샤 |
사건 | |
분쟁 | 호스로 4세 폐위 |
기타 | 브람샤푸흐 즉위 |
전쟁 | 침공 |
2. 이름
그의 신명 "바흐람"은 중세 페르시아어 Warahrānpal (Wahrāmpal으로도 표기)의 새 페르시아어 형태이며, 이는 고대 이란어 Vṛθragnaira에서 파생되었다.[1] 아베스타어에 해당하는 이름은 베레트라그나였으며, 고대 이란 승리의 신의 이름이었고, 파르티아어 버전은 Warθagnxpr이었다.[1] 이 이름은 아르메니아어로 Vahagn/Vrāmhy,[1] 그리스어로 Baranesel,[2] 조지아어로는 ''바람''(Baram), 라틴어로는 ''바라라네스''(Vararanes)로 기록되어 있다.
바흐람 4세는 아버지 샤푸르 3세가 귀족들에게 암살당한 후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케르만 총독 시절의 공적을 인정받아 왕위에 올랐지만, 통치 기간 동안 가혹한 정책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3. 생애
이 시기 사산 왕조는 훈족의 침입에 시달렸는데, 395년 훈족은 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 양쪽을 공격했다. 바흐람 4세는 훈족을 격퇴하고 로마인 포로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등 인도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훈족의 침입은 사산 제국의 방어 체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바흐람 4세는 아르메니아 문제에 개입하여 호스로 4세를 폐위하고 그의 동생 브람샤푸를 왕위에 앉혔다. 이는 아킬리세네 조약으로 아르메니아 왕국이 분할된 상황에서 사산 왕조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결국 바흐람 4세는 399년 자신을 호위하던 병사들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죽음은 귀족들의 권력 다툼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1]
3. 1. 초기 생애와 케르만 총독 시절
바흐람 4세는 샤푸르 3세의 아들로, 아버지의 통치 기간 동안 케르만 남동부 지방의 총독이었다.[1] 중세 역사가 알타바리는 바흐람 4세를 샤푸르 2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지만, 함자 알이스파하니를 비롯한 여러 역사가들은 샤푸르 3세의 아들이라고 기록했으며, 후자가 더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바흐람 4세는 케르만 총독 시절, 시라간 도시를 건설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도시는 조폐 도시로서 중요한 경제적 역할을 했으며, 그가 통치한 지역은 중요한 농업 지역이었다. 중세 지리학자 야쿠트에 따르면, 바흐람 4세는 베흐-아르다시르 도시에도 건물을 지었다.
다른 많은 케르만 총독처럼, 바흐람 4세는 Kirmanshah|케르만의 왕pal이라는 칭호를 가졌는데, 이는 그가 나중에 이란 서부에 건설한 도시의 이름으로 사용될 것이다.
388년, 바흐람 4세는 이란 귀족들에게 살해된 아버지 샤푸르 3세를 계승하여 사산 왕조의 샤가 되었다.
3. 2. 즉위와 통치
바흐람 4세는 샤푸르 3세의 뒤를 이어 사산 왕조의 샤로 즉위했다. 즉위 전 키르만 지역을 통치하며 시스탄 방어에 기여했고, Shiragan을 건설했다.[1] 또한 케르만샤를 건설했는데, 이는 현재 이란 케르만샤 주의 주도이다.[1]
바흐람 4세 치세 동안, 사산 왕조는 훈족의 침입에 시달렸다. 395년 훈족은 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 양쪽을 공격했고, 사산 왕조는 반격하여 훈족을 격퇴하고 로마인 포로들에게 식량을 제공했다.[1] 이는 사산 제국의 방어 체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2]
바흐람 4세는 아르메니아 문제에 관여하여 호스로 4세를 폐위하고 그의 동생 브람샤푸를 왕위에 앉혔다.[1]
가혹한 통치로 인해 바흐람 4세는 399년 호위병들에게 암살당했다.[1] 그의 죽음은 귀족들의 권력 다툼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2]
3. 2. 1. 아르메니아 문제
바흐람 4세는 아르메니아 문제에 간섭하여 호스로 4세를 폐위시키고 그의 동생인 브람샤푸를 왕위에 앉혔다.[1] 호스로 4세는 로마 제국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테오도시우스 1세는 384년에 맺은 평화 조약을 이유로 거절하였다.[1]
샤푸르 3세 치세에 사산 왕조와 로마 제국은 아킬리세네 조약을 맺어 아르메니아 왕국을 분할하였다.[2] 이 조약으로 아르메니아의 대부분이 사산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조약 체결 시기는 387년으로 추정된다. 로마는 아르샤크 3세 사후 아르사케스 왕조를 폐지하고 비잔틴 아르메니아를 설치했다. 반면, 사산 제국령 아르메니아(페르사르메니아)에서는 아르사케스 왕조가 존속하여 호스로 4세가 통치했다. 바흐람 4세는 호스로 4세가 사하크를 카톨리코스(총대주교)로 임명한 것을 문제삼아 그를 폐위시켰다.
3. 2. 2. 훈족의 침입과 방어
이 시대의 사산 왕조는 로마 제국과 마찬가지로 훈족과 같은 유목민들의 침입에 시달렸지만,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케르만 지방에는 아르다시르 1세가 동부 시스탄으로부터의 방어 거점으로 쌓은 요새가 있었다. 바흐람 4세는 이곳에서 유목민들을 격퇴하였고, 그 공으로 샤로 추천되었다고 짐작된다. 그러나 바흐람 4세는 군주에 적합한 인물은 아니었으며, 쉽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395년, 훈족은 로마 제국의 소페네, 서아르메니아,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카파도키아 속주를 침략했다. 그들은 갈라티아까지 진출하여 많은 포로를 잡았다. 그 후 그들은 이란 영토를 침략하여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주변의 많은 시골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곧 반격이 가해져 훈족 군대가 패배하고 그들의 전리품을 되찾았다. 바흐람 4세는 로마 포로들이 베-아르다시르와 크테시폰에 머물도록 허락했으며, 그들에게 빵, 포도주, 기름을 포함한 식량을 제공했다.[1] 대부분의 포로들은 나중에 자신들의 땅으로 돌려보내졌다. 이러한 훈족의 침략은 사산 제국에게 천연 방어 시설이 부족한 이란 지역을 더 잘 보호해야 한다는 신호가 되었다.[2]
3. 2. 3. 죽음
바흐람 4세는 자신의 의무를 완전히 무시하여 가혹한 사람이라고 평가받았다. 그리하여 399년에 자신을 호위하던 병사들에게 화살을 맞고 암살당했다.[1]
4. 평가
아랍 자료에서 바흐람 4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대체로 호의적으로 묘사된다.[1] 타바리는 "그는 백성을 칭찬할 만한 방식으로 다스렸고 그의 통치에 대해 칭찬을 받았다"고 전한다.[2] 9세기 학자 이븐 쿠타이바는 "그의 정의 추구와 훌륭한 통치"에 대해 언급한다. 함자 알-이스파하니는 그를 "자존심이 강하지만 가혹한 통치자이며 백성을 돌보지 않았다"고 부른다. 하지만 12세기 역사가 이븐 알-발키는 그를 "마잘림을 결코 열지 않은 자기 도취적인 왕"이라고 칭한다.
5. 주화
바흐람 4세는 주화에서 베레트라그나를 상징하는 날개가 달린 관을 쓰고 묘사된다. 날개는 조로아스터교의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의 상징인 성벽 관에 부착되어 있다.[1] 바흐람 4세는 자신의 왕관에 두 가지 종교적 요소를 결합한 최초의 사산 왕조 군주였다. 이후 이러한 왕관은 사산 왕조에서 흔한 특징이 되었다.[1][2] 또한 그의 치세 동안 주조소 서명의 사용이 정례화되었다. 주조소 서명의 정례화로 인해 주화의 기원을 더 쉽게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바흐람 4세 치하에서 동부 지방인 아바르샤르는 사산 왕조 역사상 가장 많은 비율(19%)의 주화를 생산했다. 이 지역에서 많은 주화가 생산된 것은 그곳에 주둔한 많은 군대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지출을 충족시키기 위함이었다.
샤푸르 2세, 아르다시르 2세, 샤푸르 3세와 마찬가지로 바흐람 4세 역시 인도의 신드 지역에서 특이한 금화를 주조했는데, 이는 사산 왕조의 힌드 지방과 일치했을 수 있다. 바흐람 4세 치하에서 후제스탄의 군데샤푸르와 수사 도시에 주조소가 설립되었다. 또한 아르다비르다간의 북서부 지방에도 훈족의 침입에 대비해 카스피 해 관문 건설을 지원하기 위한 주조소가 설립되었다.
6. 인장
바흐람 4세가 케르만샤(Kermanshah) 통치 시절에 사용했던 인장이 남아있다. 중세 페르시아어로 쓰여진 이 인장의 비문은 "마즈다를 숭배하는 주 샤푸르의 아들 와흐란 케르만 샤, 이란과 비이란의 왕 중의 왕, 그는 귀족의 후손이다."라고 적혀있다.[1]
바흐람 4세가 샤한샤(Shahanshah)로 통치했을 때 제작된 또 다른 인장도 발견되었다. 현재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인장은 그의 특징적인 왕관을 쓴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창을 들고 있으며, 정체불명의 쓰러진 적의 시체 위에 서 있다.[1][2] 이 쓰러진 적은 363년에 사산 왕조에 대항하여 전투에서 사망한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를 묘사한 아르다시르 2세의 암벽 부조에 묘사된 인물과 동일하다.[2] 바흐람 4세의 인물은 율리아누스일 수도 있으며, 바흐람 4세가 전자의 패배에 참여하여 자신의 정통성과 능력을 강조하기 위해 추가했을 가능성이 있다.[2]
참조
[1]
서적
青木 2020
[2]
서적
青木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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