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다시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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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다시르 2세는 "그의 통치는 진실을 통한다"는 의미의 고대 페르시아어 이름을 가진 사산 제국의 왕이었다. 그는 호르미즈드 2세의 아들이자 샤푸르 2세의 후계자로, 379년에 샤푸르 2세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4년간 재위하며 백성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지 않아 덕망 있는 왕으로 칭송받았다. 아르메니아 문제와 관련하여 로마 제국과의 평화 조약을 맺었으나, 귀족들의 권력 견제 정책으로 인해 폐위되었고, 샤푸르 3세가 그의 뒤를 이었다. 아르다시르 2세는 주화와 타크-에 보스탄의 암각 조각을 통해 자신의 업적을 기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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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다시르 2세 | |
---|---|
기본 정보 | |
![]() | |
칭호 | 샤한샤 (이란과 비이란의 왕중왕) |
왕조 | 사산 왕조 |
종교 | 조로아스터교 |
생애 | |
출생 | 309년/310년 |
사망 | 383년 |
아버지 | 호르미즈드 2세 |
통치 | |
즉위 | 379년 |
폐위 | 383년 |
선임자 | 샤푸르 2세 |
후임자 | 샤푸르 3세 |
아디아베네 왕 (재위) | |
재위 기간 | 344년 – 376년 |
이전 통치자 | 알 수 없음 |
이후 | 칭호 폐지; 아디아베네는 주로 변경됨 |
2. 명칭
'''아르다시르'''는 "그의 통치는 진실을 통한다"는 의미의 고대 페르시아어 ''Ṛtaxšira'' (또는 ''Artaxšaçā''로도 표기)의 중세 페르시아어 형태이다.[1][2] 이 이름의 라틴어 변형은 Artaxerxesla이다.[1] 아케메네스 제국의 세 명의 왕이 같은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아르다시르 2세는 기독교인들에게는 폭군으로 여겨졌지만, 페르시아인들에게는 매우 덕망 있는 왕으로 칭송받았다. 페르시아인들은 그에게 '니후카르(자비로운 자)'라는 별칭을 붙였고, 아랍인들은 '알 제밀(덕망있는 자)'이라는 칭호로 불렀다. ''모지멜-알-테와리크''에 따르면 그는 4년의 재위 기간 동안 세금을 부과하지 않아 백성들의 애정과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1]
3. 생애
아르메니아는 친로마파와 친페르시아파의 대립으로 혼란스러웠는데, 친페르시아파의 마누엘(Manuel)은 로마파에 의해 살해당한 파페스(Pap)의 미망인을 옹립하고 아르메니아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페르시아군의 주둔을 허용하였으나, 어떤 귀족(Meroujan)이 페르시아군이 마누엘을 잡으려고 한다는 허위 보고를 하는 바람에 마누엘은 페르시아군과 교전하여 전사한다.[1]
아르다시르는 마누엘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지만, 마누엘은 이들을 격파하고 지휘관들을 죽였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군대를 보냈으나 모두 패배하여 아르메니아는 7년 동안 평화를 유지하게 되었다.[2]
한편, 더 이상의 분쟁을 원하지 않았던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1세와 아르다시르 2세는 평화 조약을 맺으려 했으나, 실제 조약은 아르다시르 2세가 죽은 후인 384년에 샤푸르 3세와 맺어졌다.
피르다우시의 《샤나메(왕들의 책)》에 따르면, 샤푸르 2세는 한 살 어린 동생인 아르다시르 2세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자신의 어린 아들이 성인이 되면 왕위를 다시 물려받도록 유언했다. 결국 아르다시르 2세는 재위 4년 만에 귀족들에 의해 폐위되고, 샤푸르 2세의 아들 샤푸르 3세가 왕위에 올랐다.[1]
3. 1. 배경
호르미즈드 2세의 아들인 아르다시르는 아버지 호르미즈드 2세가 이란 귀족들에게 사냥 중 살해당하면서 왕위를 잇게 되었다. 호르미즈드 2세의 뒤를 이은 아두르 나르세는 몇 달 만에 귀족들에게 살해당했다.[1] 귀족들은 호르미즈드 2세의 둘째 아들을 눈멀게 하고,[2] 셋째 아들(호르미즈드)은 감금했다(그는 나중에 로마 제국으로 탈출했다). 아르다시르의 이복 동생 샤푸르 2세는 젖먹이였지만, 귀족들은 샤푸르 2세를 왕으로 옹립하여 제국을 통제했고, 샤푸르 2세가 16세가 될 때까지 통치했다.[2]
아르다시르는 사산 제국의 왕이 되기 전인 344년부터 376년까지 아디아베네의 종속 왕이었다. 그는 율리아누스의 페르시아 전쟁에서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가 침략했을 때 샤푸르와 함께 사산 제국을 방어한 것으로 보인다. 아르다시르는 아디아베네의 마지막 왕으로 기록되었으며, 이후 왕국은 사산 왕의 비왕족 대표(사트라프 또는 마르즈반)가 통치하는 지방(''샤르'')으로 변모했다.
379년, 샤푸르 2세는 아르다시르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샤푸르의 아들 샤푸르 3세가 성인이 되면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맹세하게 했다. 이 때문에 일부 아르메니아 작가들은 아르다시르가 샤푸르의 아들이라고 잘못 언급하기도 했다. 사알리비('페르시아의 제왕의 역사')와 피르도우시의 '왕의 서'에 따르면, 샤푸르 2세는 1살 어린 동생을 다음 군주로 지명하고 어린 아들이 성인이 되면 양위하도록 유언했다고 한다.
귀족들의 권세는 샤푸르 2세 시대에 이미 강해졌으며, 아르다시르 2세는 즉위 4년 만에 폐위되어 샤푸르 3세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아르메니아에서는 친 로마파와 친 페르시아파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아르사케스 왕가의 혈통을 잇는 마누엘이 왕 파라의 미망인을 옹립하여 자신이 필두 사령관이 되어 페르시아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러나 마누엘은 허위 보고로 이들을 공격하여 혼란 속에 자신도 죽었다. 완충 지대의 혼란은 양국 모두에게 좋은 상황이 아니었고, 테오도시우스 1세와 아르다시르 사이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아르다시르 2세는 383년에 퇴위했으므로, 실제로는 384년에 샤푸르 3세와 조약이 맺어졌다.
3. 2. 즉위와 통치
아르다시르 2세는 기독교인들에게는 폭군으로 여겨졌지만, 페르시아인들에게는 매우 덕망 있는 왕으로 칭송받았다. 페르시아인들은 그에게 '니후카르(자비로운 자)'라는 별칭을 붙였고, 아랍인들은 '알 제밀(덕망있는 자)'이라는 칭호로 불렀다. ''모지멜-알-테와리크''에 따르면 그는 4년의 재위 기간 동안 세금을 부과하지 않아 백성들의 애정과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1]
피르다우시의 《샤나메(왕들의 책)》에 따르면, 샤푸르 2세는 한 살 어린 동생인 아르다시르 2세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자신의 어린 아들이 성인이 되면 왕위를 다시 물려받도록 유언했다. 결국 아르다시르 2세는 재위 4년 만에 귀족들에 의해 폐위되고, 샤푸르 2세의 아들 샤푸르 3세가 왕위에 올랐다.[1]
아르메니아는 로마 제국과 사산 제국 사이의 끊임없는 전쟁의 원인이었다. 378/9년에 샤푸르 2세는 섭정 마누엘 마미코니안이 그에게 복종한 후 이란의 지배권을 아르메니아에 확립했다. 수레나 장군이 이끄는 10,000명의 이란 군대가 아르메니아로 파견되었다. 수레나는 마르즈반(변경백)의 칭호를 받았는데, 이는 아르메니아가 이제 사산 제국의 속주가 되었음을 의미한다.[1] 그러나 아르다시르 2세의 초기 통치 기간 동안, 메루잔 아르츠루니라는 귀족은 마누엘에게 의도적으로 잘못된 정보를 주어, 이란 주둔지의 사령관이 그를 체포하려 한다고 알렸다. 격분한 마누엘은 아르메니아에 주둔한 만 명의 이란 군인들을 공격하여 살해했다.[1]
아르다시르는 구만드 샤푸흐가 이끄는 군대를 보내 마누엘을 진압하려 했지만, 마누엘은 그 군대를 격파하고 구만드 샤푸흐를 죽였다. 바라즈가 이끄는 또 다른 이란 군대가 아르메니아로 파견되었지만, 전임자와 같은 운명을 맞았다. 세 번째 군대가 아르메니아로 파견되었는데, 이 군대는 므르칸 장군이 이끌었다. 아르메니아의 일부가 이란군에게 점령되었지만, 곧 마누엘과 그의 군대에 의해 패배하고 학살당했다. 이 새로운 승리는 아르메니아에 7년의 평화를 보장했다.[2]
아르다시르는 샤푸르 2세의 권력욕에 굶주린 귀족들의 권위를 제한하는 정책을 계속 추진했기 때문에, 귀족들에 의해 곧 폐위되거나 살해되었다. 그는 샤푸르 3세에 의해 계승되었다.[1]
아르다시르 2세는 굳센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이며, 일부 자료에서는 "자선가"라는 뜻의 ''니후카르''라는 별칭으로 알려져 있다.[1]
사알리비('페르시아의 제왕의 역사')와 피르도우시의 '왕의 서'에 따르면, 샤푸르 2세는 1살 어린 동생을 다음 군주로 지명하고 어린 아들이 성인이 되면 양위하도록 유언했다고 한다. 귀족들의 권세는 샤푸르 2세 시대에 이미 강해졌으며, 아르다시르 2세는 4년 만에 폐위되어 샤푸르 3세에게 양위했다.[1]
아르메니아에서는 친 로마파와 친 페르시아파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아르사케스 왕가의 혈통을 잇는 마누엘이 왕 파라의 미망인을 옹립하여 자신이 필두 사령관이 되어 페르시아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러나 마누엘은 허위 보고로 이들을 공격하여 혼란 속에 자신도 죽었다. 완충 지대의 혼란은 양국 모두에게 좋은 상황이 아니었고, 테오도시우스 1세와 아르다시르 사이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아르다시르 2세는 383년에 퇴위했으므로, 실제로는 384년에 샤푸르 3세와 맺어졌다.[1]
3. 3. 아르메니아 문제와 로마와의 관계
아르메니아는 친로마파와 친페르시아파의 대립으로 혼란스러웠다. 친페르시아파의 마누엘(Manuel)은 로마파에 의해 살해당한 파페스(Pap)의 미망인을 옹립하고, 자신은 아르메니아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페르시아군의 주둔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준비가 이루어지는 동안, 어떤 귀족(Meroujan)이 페르시아군이 마누엘을 잡으려고 한다는 허위 보고를 하여, 놀란 마누엘은 페르시아군과 교전했으며 그 와중에 전사한다.[1]
아르다시르는 구만드 샤푸흐가 이끄는 군대를 보내 마누엘을 진압하려 했지만, 마누엘은 그 군대를 격파하고 구만드 샤푸흐를 죽였다. 바라즈가 이끄는 또 다른 이란 군대가 아르메니아로 파견되었지만, 그의 전임자와 같은 운명을 맞았다. 므르칸 장군이 이끄는 세 번째 군대가 아르메니아로 파견되었으나, 아르메니아의 일부가 이란군에게 점령된 직후 마누엘과 그의 군대에 의해 패배하고 학살당했다. 이 새로운 승리는 아르메니아에 7년의 평화를 보장했다.[2]
한편 더 이상의 분쟁을 원하지 않은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1세와 아르다시르 2세는 평화 조약을 맺는다. 하지만 그 조약은 아르다시르 2세가 죽은 383년에는 맺어지지 않았으며, 샤푸르 3세가 즉위한 384년에 성립된다.
3. 4. 폐위
피르다우시의 《샤나메(왕들의 책)》에 따르면, 샤푸르 2세는 한 살 연하인 아르다시르 2세를 후계로 지명하고, 자신의 어린 아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왕위를 다시 물려받을 수 있도록 유언했다고 한다. 이 유언에 따라 아르다시르 2세는 재위 4년째 되는 해에 귀족들에 의해 폐위되고, 샤푸르 2세의 아들 샤푸르 3세가 왕위에 올랐다.[1]
아르다시르 2세는 샤푸르 2세의 정책을 이어받아 권력욕에 굶주린 귀족들의 권위를 제한하려 했기 때문에, 귀족들에 의해 곧 폐위되거나 살해되었다.[2]
사알리비('페르시아의 제왕의 역사')와 피르도우시의 '왕의 서'에 따르면, 샤푸르 2세는 1살 어린 동생을 다음 군주로 지명하고 어린 아들이 성인이 되면 양위하도록 유언했다고 하며, 실제로 그렇게 왕위가 계승되었다.
샤푸르 2세 시대에 이미 귀족들의 권세는 강해졌으며, 아르다시르 2세는 재위 4년 만에 폐위되어 샤푸르 3세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4. 주화와 암각 부조
아르다시르 2세 치하에서 주조된 주화는 초대 사산 왕인 아르다시르 1세가 착용했던 것과 같은 돔형 왕관을 쓴 모습을 모방했다. 주화 뒷면에는 두 명의 시종이 있는 전통적인 불의 제단이 표시되어 있으며, 경우에 따라 왕의 머리가 불에서 나타나 왕의 크와라("영광")를 상징하기도 한다.[1] 주화에 새겨진 비문은 일반적으로 "아르다시르, 이란인의 왕 중의 왕"이지만, 드물게 "그리고 비(非)이란인의"라는 비문도 포함되어 있다.[2]
아르다시르 2세는 선조들처럼 암각 조각으로 자신을 기념했다. 그러나 조각을 새기는 장소로 파르스(현재의 파르스주) 대신, 미디아(현재의 케르만샤 주)에 있는 타크-에 보스탄에 조각을 새기게 했다. 이 조각은 왕관을 쓴 세 명의 서 있는 인물을 보여준다. 아르다시르 2세는 가운데에 있으며, 두 명의 남성 인물이 그를 보좌하고 있다. 아르다시르 2세에게 왕관을 수여하는 오른쪽 인물은 원래 조로아스터교의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로 여겨졌으나, 현재는 그의 왕관 양식으로 인해 샤푸르 2세로 여겨지며, 샤푸르 2세가 아르다시르 2세를 왕으로 임명했다는 점과 잘 부합한다.
두 왕은 쓰러진 적의 시체 위에 서 있는데, 이는 로마인임이 분명하며, 그의 왕관은 그가 황제임을 나타낸다. 쓰러진 인물은 363년에 이란을 침공하여 사산 제국의 수도 크테시폰 서쪽에서 전사한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맨 왼쪽의 서 있는 인물은 일부 학자들이 조로아스터교의 예언자 조로아스터로 여기지만, 천사 미트라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태양의 열두 줄기가 장식된 왕관을 쓰고 있으며, 높이 든 바르솜을 들고 있어 대관식을 성화하고 있다.
5. 평가
아르다시르 2세는 기독교인들에게는 폭군으로 여겨졌지만, 페르시아인들에게는 매우 덕망 있고 위대한 왕으로 칭송받았다. 페르시아인들은 그에게 'Nihoukar(자비로운 자)'라는 별칭을 붙였으며, 아랍인들은 'Al Djemil(덕망있는 자)'등의 칭호로 불렀다. 또한, ''Modjmel-al-Tewarikh''에 따르면 그는 4년의 재위기간 동안 세금을 부과하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의 애착과 고마움에 보답하였다고 한다.
한편 피르다우시의 《샤나메(왕들의 책)》에 따르면, 샤푸르 2세는 한 살 어린 아르다시르 2세를 후계로 지명하고, 자신의 어린 아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왕위를 다시 물려받을 수 있도록 유언했다고 한다. 결국 아르다시르 2세는 재위 4년째 되는 해에 귀족들에 의해 폐위되고, 샤푸르 2세의 아들 샤푸르 3세가 왕위에 올랐다.
참조
[1]
서적
History of the Armenians
[2]
서적
History of the Armeni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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