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경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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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변경백은 프랑크 왕국에서 시작되어 신성 로마 제국 등 여러 국가에서 사용된 작위로, 국경 지역을 방어하는 군사적 역할을 수행했다. 변경백은 백작보다 높은 지위를 가지며, 필요에 따라 타국을 침략할 수도 있어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변경백은 세습 작위로 전환되었고, 브란덴부르크와 오스트리아 변경백령은 각각 프로이센 왕국과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기원이 되었다. 현대에는 변경백 칭호는 주로 명목상의 칭호로 사용되며, 유럽 여러 언어에서 후작과 유사한 의미로 번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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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경백 - 하인리히 (프랑코니아)
9세기 후반 동프랑크 왕국에서 프랑코니아 공작, 오스트라시아 공작, 프랑크족 변경백을 지낸 하인리히는 포포니드 가문 출신으로 바이킹 침략에 맞서 싸웠으며 886년 전투 중 사망, 그의 딸 하투이는 독일 왕 하인리히 1세를 낳았다. - 독일의 귀족 작위 - 방백
방백은 고대 중국에서 제후의 장을 지칭하거나 신성 로마 제국에서 공작에 준하는 작위를 가진 귀족을 의미한다. - 독일의 귀족 작위 - 훈사
훈사는 독일어 "고귀한"에서 유래한 작위로, 봉건제 사회에서 작은 영지를 소유한 가신을 지칭했으나, 근세에는 국가에 공헌한 이들에게 수여되는 작위로 변화했으며, 오스트리아에서는 귀족제 폐지 후 작위로서의 의미를 잃었지만 독일에서는 이름의 일부로 남고 비공식적 예우 칭호로 쓰이며, '훈'은 가르침을 뜻하는 글자로 학문적 의미도 가진다. - 독일 봉건제 - 방백
방백은 고대 중국에서 제후의 장을 지칭하거나 신성 로마 제국에서 공작에 준하는 작위를 가진 귀족을 의미한다. - 독일 봉건제 - 아드보카투스
아드보카투스는 다른 사람을 위해 말하도록 요청받은 사람을 지칭하는 라틴어에서 유래된 단어로, 교회나 수도원의 권리를 수호하거나 세속 재판에서 교회를 대변하고 군대를 지휘하는 등의 역할을 했으며, 중세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가 임명한 관료를 지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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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변경백(邊境伯)은 카롤링거 왕조 시기 국경 지역에 설치된 군사 지휘관 및 지방 장관의 칭호였다. 주로 카롤링거 왕조와 신성 로마 제국의 동부 국경 지대에 존재했으나, 스페인이나 브르타뉴 등 다른 지역에도 존재했다. 스페인 변경백령은 재정복 운동을 통해 스페인 왕국 성립에 기여했다.[1] 변경백은 외침 방어뿐 아니라 필요시 타국 침략도 허용되어 영토 확장이 가능했고, 이는 다른 백작들보다 강력한 권력을 누리는 요인이었다.
"변경백"(marchio|links=nola)은 독일 귀족 작위 Markgrafde에서 유래했다. Markde는 국경 지대, Grafde는 백작을 의미한다. 이민족과 접경했기에 다른 지방 장관보다 넓은 영역과 큰 권한이 부여되었고, 일반 백작(Graf)보다 높은 지위였다.
독일에서는 오스트리아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세력을 확대하여 유력 영방군주로 성장했다. 오스트리아 변경백령은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전신이 되었고,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은 선제후가 된 후 프로이센 공국과 동군 연합하여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되었다.
진시황 통일 이후 중국은 절대 왕정 기반 관료제로 전국을 통치했으나, 중앙 장악력이 약해지면 지방 호족들이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해 독립 세력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당나라 말기 절도사가 그 예시로, 중세 변경백과 유사한 권한을 누렸다. 절도사 세력 성장은 안사의 난 같은 혼란을 야기했다.
2. 1. 중세 시대 변경백의 권한과 역할
변경백(독일어: Markgraf)은 원래 카롤링거 왕조의 행진(국경 지방)에서 군정 장관 역할을 했다.[2] 왕이나 황제의 국경 영토는 국가 안보에 중요했기 때문에, 왕국이나 제국의 행진에 토지를 가진 봉신 (백작 등)은 변경백으로 임명되어 국경 수비의 책임을 맡았다.국경 지방은 군사적 침략에 더 많이 노출되었기 때문에 변경백에게는 다른 영주들보다 더 큰 군사력과 (정치적, 군사적) 자율성이 주어졌다. 변경백의 권한은 종종 지방 자체보다 더 넓은 영토로 확장되었는데, 이는 왕의 전쟁 이후 국경이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변경백은 침략을 막는 데 필요한 더 큰 무력과 요새를 유지하여 국왕에 비해 정치적 힘과 독립성이 강해졌다. 또한, 변경백은 추가 영토를 정복하여 왕의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고, 때로는 개인 영토로 유지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확장하여 봉신들에게 충성심을 대가로 토지와 자원을 주기도 했다. 그 결과 부와 권력으로 인해 사실상 독립적인 공국을 설립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변경백은 카롤링거 제국과 후계 신성 로마 제국의 동쪽 국경을 따라 나타났다. 브르타뉴 변경과 무슬림 국경의 Marca Hispanicala(카탈루냐 포함)는 예외적인 사례이다. 스페인 변경은 이베리아 반도의 초기 단계에서 중요했다. 피레네 산맥에 기반을 둔 변경백들은 무슬림 의 혼란을 이용하여 영토를 남쪽으로 확장하여, 15세기에 통일 스페인이 될 기독교 왕국을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중세 후기에 영토 국경이 안정되면서 변경백의 군사적 중요성은 줄어들었지만, 변경백 직책을 맡았던 가문들은 점차 변경백령을 세습 봉토로 전환하여 공작령과 이름만 다를 뿐이었다. 공작, 란트그라프, 팔츠백작 및 Fürstende(통치 제후)처럼, 이 변경백들은 제국 직속하에 사실상 독립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신성 로마 황제의 명목상 종주권 아래 있는 국가였다.
신성 로마 황제 카를 4세의 1356년 금인칙서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을 제국의 선제후로 인정했다. 제국 의회 내 최고 "대학"의 일원으로서, 다른 강력한 제후 및 고위 성직자들과 함께 황제를 선출할 권한을 주요 특권으로 가졌다. 마르크 브란덴부르크de는 호엔촐레른 가문의 이후 프로이센 왕국의 핵이 되었으며, 1871년 독일 황제로 즉위하는 발판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변경백령의 통치자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 왕좌에 대한 사실상 독점을 획득했다. 그들은 동유럽과 부르고뉴 공국을 상속받았다. 오스트리아는 원래 라틴어로 Marchia Orientalisla, 즉 "동쪽 국경 지대"라고 불렸으며, (원래 대략 현재의 하) 오스트리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최동단, 마자르족과 슬라브족의 땅으로 확장되었다. 남동부의 또 다른 행진인 슈타이어마르크는 오늘날에도 독일어로 Steiermarkde로 나타난다.
브란덴부르크와 마이센의 변경백은 결국 각각 프로이센과 작센의 왕이 되었다.
2. 2. 신성 로마 제국
신성 로마 제국의 변경백령 중 주목할 만한 곳으로 브란덴부르크(이후 프로이센 왕국의 기원이 됨)와 오스트마르크(“동부 국경”이라는 뜻, 이후 오스트리아가 됨)가 있다. 모라바는 합스부르크령이 되자 모라바 변경백국이 되어, 오스트리아의 군주가 모라비아 변경백을 겸임하거나 봉신을 두어 모라비아를 다스렸다.[1] 1356년 황금 문서를 통해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선제후의 위치에 오른 것은 변경백의 지위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보여주는 예시이다.[1] 이후 변경백령들은 군사적 중요성을 상실하게 되면서, 주로 공국의 형태로 군주제 국가로 발전했으며,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군주제가 종말을 맞을 무렵에는 변경백이라는 칭호 자체가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1]중세 후기에 영토 국경이 안정되면서 변경백령(행진)은 주요 군사적 중요성을 잃기 시작했지만, 변경백 직책을 맡았던 가문들은 점차 변경백령을 세습 봉토로 전환하여 공작령과 이름만 다를 뿐이었다.[2] 공작, 란트그라프, 팔츠백작 및 Fürstde(통치 제후)의 부상과 유사한 진화 과정을 거쳐 이러한 변경백들은 제국 직속하에 실질적으로 독립적인 통치자가 되었다.[2] 신성 로마 황제의 명목상의 종주권 아래 있는 국가가 된 것이다.
신성 로마 황제 카를 4세의 1356년 금인칙서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을 제국의 선제후로 인정했다.[2] 선제후는 제국 의회 내 최고 "대학"의 멤버십을 부여했으며, 이는 죽음이나 퇴위로 인해 제국 왕좌에 공석이 생길 때마다 다른 강력한 제후 및 고위 성직자들과 함께 비세습 황제를 선출할 권한을 주요 특권으로 하는 권한이었다.[2] 마르크 브란덴부르크de는 호엔촐레른 가문의 이후 프로이센 왕국의 핵이 되었으며, 1871년 독일 황제로 즉위하는 발판이 되었다.[2]
또 다른 변경백령은 오스트리아 변경백령으로, 중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중 하나로 발전했다.[2] 그 통치자인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 왕좌에 대한 사실상의 독점을 획득하기 위해 일어섰다.[2] 그들은 또한 주로 동유럽과 부르고뉴 공국을 상속받았다. 오스트리아는 원래 라틴어로 Marchia Orientalisla, 즉 "동쪽 국경 지대"라고 불렸으며, (원래 대략 현재의 하) 오스트리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최동단, 마자르족과 슬라브족의 땅으로 확장되었다(19세기 이후 Marchia Orientalisla는 일부 게르만어 사용 지역에서 Ostmarkde로 번역되었지만, 중세 문서에서는 구어 이름인 Ostarrîchigoh만이 증명되었다).[2] 남동부의 또 다른 행진인 슈타이어마르크는 오늘날에도 독일어로 Steiermarkde로 나타난다.[2]
오스트리아, 브란덴부르크의 두 변경백이 일찍부터 대공, 선제후로 승격한 외에, 유력 영방 바덴 변경백도 1806년에는 바덴 대공국으로 승격하여, 명목상의 칭호가 되어 있던 모라비아 변경백 등을 제외하고는 19세기 이후의 독일권에서 변경백 칭호를 띠는 영방은 소멸했다.[5][6]
2. 3. 유럽 외 지역
중국은 진시황 통일 이후 절대 왕정에 기반한 관료제로 전국을 통치했다. 그러나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질 때 지방 호족들이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여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당나라 말기 절도사가 그 예시인데, 이들은 자신의 부임지에서 막강한 권한을 누렸으며, 이는 중세 시대 변경백의 권한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1] 절도사 세력의 성장은 안사의 난과 같은 정치적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2]3. 주요 변경백령
-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 마이센 변경백
- 바덴 변경백
- 안스바흐 변경백
- 바이로이트 변경백
- 브란덴부르크-퀴스트린 변경백
- 브란덴부르크-슈베트 변경백
- 오스트리아 변경백
- 케른텐 변경백
- 모라바 변경백
- 라우지츠 변경백
- 슈타이어마르크 변경백
- 오스트마르크 (작센)
- 노르트마르크
- 마르크백 (March는 "변경"을 의미)
- 토리노 변경백
4. 다른 국가의 유사 제도
변경백은 프랑크 왕국의 국경 군사 지구(마르크(Mark): 변방 지구, 변경백령)에 설치된 국토 방위 지휘관·지방 장관의 칭호에서 시작되었다. 이민족과 접하고 있었기에 다른 지방 장관보다 광대한 영역과 큰 권한이 부여되었으며, 일반 지방 장관인 백(Graf, count)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직책으로 여겨졌다.
카롤링거 왕조의 변경주(mark)에서 기원했으며, 주로 신성로마제국의 동부 국경지대에 존재했으나, 스페인이나 브르타뉴등의 타 지역에도 존재했다. 변경백은 외침으로부터 국가와 봉토를 보호할 의무 뿐 아니라 필요시에는 타국을 침략하는 것도 허용되었기 때문에, 영토 확장이 가능했고, 이는 변경백이 다른 백작들보다 막강한 권력을 누리는 요인이 되었다.
중세 후기에 영토 국경이 안정되면서 변경백의 군사적 중요성은 감소했지만, 변경백 직책을 맡았던 가문들은 점차 변경백령을 세습 봉토로 전환하여 공작령과 이름만 다를 뿐이었다.
프랑크 왕국 이후 시대에는 잉글랜드의 켈트 지역(스코틀랜드나 웨일스)과의 국경, 프랑스 왕국의 무슬림과 접하는 스페인(스페인 변경령), 독일의 헝가리 왕국(마자르족)과 접하는 오스트리아, 슬라브족과 접하는 브란덴부르크 등에 배치되었다.
시대가 흐르면서 변경백 칭호를 가진 자는 Fürst[5]와 거의 동격, 때로는 헤르초크(Herzog)[6]에 필적하는 세습 봉건 제후로 전환되어 제후의 작위 칭호의 일종이 되었다.
여러 국가에서 이와 유사한 제도를 운영했으며, 영어로는 때때로 "margrave"로 번역되기도 한다. 다음은 다른 국가의 유사 제도들이다.
- 중국 : 진시황의 통일 이후 중국은 절대 왕정에 근거한 관료제로 전국을 통치했으나, 때때로 중앙의 장악력이 미치지 않는 경우 지방 호족들은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해 독립적인 세력에 가깝게 성장하기도 했다.
- 당나라 말기의 절도사들은 자신의 부임지에 대한 막강한 권한을 누리게 되었으며, 이는 중세시대의 변경백이 가지던 권한과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다. 절도사 세력의 성장은 안사의 난과 같은 정치적 혼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 사산 제국 : (는 국경을 의미하고 은 영주를 의미) 또는 은 왕이 신뢰하고 제국의 먼 곳에 토지, 마을, 도시를 소유한 관료나 장군에게 부여된 지위였다. 그들은 지위와 세금을 징수할 특권을 받는 대가로 외국 침입으로부터 제국을 방어할 책임이 있었다.
- 비잔틴 제국 : 산악 국경 지역에 또는 "클레이수라키"라고 불리는 요새화된 여러 개의 관문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칼리파국과의 동부 국경을 따라 가 각각 관리하며 내륙으로의 접근을 통제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 시대의 "총독"은 통제된 영토의 가장자리에 있는 지역의 군사 사령관이자 황제 총독이었으며, (세습적인) 귀족 영주가 아니었다.
- 아나톨리아 베이릭 시대와 오스만 제국의 발칸 반도 정복 기간 동안 사용된 터키 칭호이자 지위인 uç beyitr ("국경 영주")도 종종 "변경 백작"으로 번역된다.
- 잉글랜드 왕국 : 켈트족 국경(웨일스 변경, 스코틀랜드 변경)에서 변경 백작은 잉글랜드 왕의 봉신이었으며, 왕국을 방어하고 확장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한 영주의 직할령은 "변경"이라고 불렸다. 변경 백작은 정복왕 윌리엄이 세운 잉글랜드 봉건제의 일반적인 구조에서 눈에 띄는 예외였다.[2]
- 스웨덴 왕국 : 후기 중세 시대의 핀란드 비보르크 성의 지휘관, 봉신(비보르크 봉토 참조)은 당시 스웨덴 왕국의 방어선으로 노브고로드와의 국경에서 실제로 "변경 백작" 역할을 했다.
5. 현대적 계승
변경백이라는 칭호는 더 이상 군사적 직책이 아닌 신성 로마 제국 귀족의 계급으로 발전했다. 이는 백작|그라프de(Graf)보다 높았으며, 방백, 팔츠백작, 게퓌르슈테터 그라프|게퓌르슈테터 그라프de(Gefürsteter Graf)와 같은 연합된 칭호와 동등했지만, 공작|헤르초크de(Herzog)보다 낮았고, 공식적으로는 공|퓌르스트de(Fürst)보다도 낮았다.[2]
오스트리아 남부와 이탈리아 북부의 몇몇 귀족들은 종주권을 황제로부터 받았으며, 그로부터 변경백 칭호를 받았는데, 이는 이탈리아어로 일반적으로 후작(marchese)으로 번역되었다.[2] 만토바 후작, 몬페라토 후작, 살루초 후작, 포스디노보 후작과 같이 사실상 군주로 통치했던 이들은 현대 유럽에서 변경백과 관련된 왕조적 관할권에 더 가까운 권한을 행사했으며, 일부 비지배 귀족(예: 부르가우, 팔라비치니, 피아티)들은 변경백 칭호를 유지했지만, "후작"의 비주권적 지위를 유지했다.
19세기 무렵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의 군주들은 모두 "더 높은" 칭호를 채택했고, 남은 변경백 국가는 하나도 없었다. 독일 황제, 작센 국왕, 바덴 대공과 같은 군주들의 공식 칭호의 일부로 남아 있었지만, 어떤 군주 가문의 구성원들의 주요 칭호로서는 점차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바덴 대공 카를 프리드리히의 두 번째 귀천상혼 부인인 루이제 카롤리네 게어 폰 가이어스베르크의 자녀들은 1796년부터 법적으로 어머니의 칭호인 ''제국 백작 폰 호흐베르크''를 공유했으며, 1817년 공개적으로 귀천상혼이 해소될 때까지 변경백 칭호로 공식적으로 승격되지 않았다.[3] 그러나 그들의 아버지는 1806년 대공 관을 물려받은 후 자신의 궁정인 카를스루에에서 자신의 귀천상혼 자녀들이 이 칭호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했으며, 동시에 첫 번째 결혼의 왕위 계승 자녀들에게 공작 칭호를 부여했다.[3] 그러나 1817년부터 두 결혼에서 태어난 그의 남성 후손들은 국제적으로 공작 칭호를 사용할 자격을 인정받았으며, 이후 모든 자손들이 이를 사용했다.
''바덴 변경백'' 칭호는 1928년 마지막 재위 대공인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한 이후 칭호상의 칭호로 체링겐 가문의 수장이 사용해 왔다.[3] 마찬가지로, ''마이센 변경백''은 1932년 망명 중 사망한 마지막 군주인 작센 국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3세 이후 작센 왕국 계승자가 칭호상의 칭호로 사용하고 있다.[4]
1914년, 독일 제국 해군은 이 칭호의 이름을 딴 드레드노트급 전함 ''SMS 마르크그라프''를 진수했다. 이 전함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며, 전쟁 후 스카파 플로우에서 억류 및 자침되었다.
6. 번역
µαρκήσιοςel ()
辺境伯妃일본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