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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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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경원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에 태어나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고아원 생활을 거쳤다. 이후 농촌 계몽 운동과 가톨릭 농민회 활동을 하며 사회 운동가로 활동했다. 1970년대에는 함평 고구마 투쟁과 안동 씨감자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지목되어 고문을 받기도 했다. 1988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같은 해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한 사실이 알려져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의원직을 상실했다. 1998년 가석방된 후 사회 정의 연구 및 통일 운동 관련 활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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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서경원
원어명徐敬元
로마자 표기Seo Gyeong-won
출생일1937년 7월 28일
출생지전라북도 순창군
국적대한민국
직업농민운동가, 민주화 운동가
경력
경력제13대 국회의원
기타

2. 생애

서경원은 일제강점기성경을 읽으며 유년 시절을 보냈고,[2] 해방 후 한국 전쟁으로 고아원 '동광원'에서 성장했다.[2] 20대 초반 곡성군에서 농촌 계몽 운동을 했고,[2] 함석헌 강연에 영향을 받았다.[2] 군 복무 후 가톨릭농민회와 인연을 맺으며 농민 운동에 투신했다.[2]

함평 고구마 투쟁, 안동 씨감자 사건 등에 참여하며 '빨갱이'로 몰리는 등 고초를 겪었고,[2]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지목되어 고문을 당하고 투옥되기도 했다.[2]

1980년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농민 대표, 6월 항쟁 공동대표[2] 등으로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고, 1987년 한겨레신문 창립에 참여했다.[2] 1988년 김대중이 총재로 있던 평민당 소속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88년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 김일성 주석과 회담했으나,[2] 1989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10년 형을 선고받고 의원직을 상실했다.[2] 국가안전기획부 조사 과정에서 고문을 받았다고 폭로했다.[2]

1998년 가석방 후 사회정의연구소 소장 등으로 활동했고,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한 중학생 압사 사건 관련 시위 중 미군에게 폭행당했다.[2]

2. 1. 유년기와 고아원 생활 (1937년 ~ 1958년)

서경원은 초등학교를 조금 다니다 만 것이 아니라, 학교 문턱에도 가 본 적이 없는 "무학(無學)"이었다. 동무들이 책보를 끼고 다니는 것이 부러워 울며 졸라보기도 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일본놈들 밑에서 공부하는 것은 안 좋다'며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일제가 최후의 발악을 하던 1940년대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들 가족은 산 속에서 생활하였다.[2] 산짐승을 벗 삼아 생활하던 어린 서경원에게 읽고 접할 수 있는 것은 성경책뿐이었다.[2]

1945년 8월, 호기심 때문에 일본 사람에게 몰래 신문을 얻어다 보던 서경원은 '해방'이란 말을 들었지만 무슨 뜻인지 몰랐다. 아버지에게 말했더니 단걸음에 내려갔다 온 아버지는 덩실 춤을 추며 “일본놈들이 물러갔다”고 소리쳤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부모와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살았던 때도 있었지만,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부모와 헤어져 고아원인 '동광원'으로 보내졌다.[2]

동광원은 이세종과 제자 이현필이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세웠던 고아원이자 순결, 청빈, 순명, 금욕을 원칙으로 세운 수도원이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공동체 생활을 하며 가정생활은 멀리하고, 노동을 통해 자급자족하면서 버려진 이들을 보듬어 함께 살았다. 서경원의 아버지도 이들의 영향을 받아 수도원 생활을 하였다.[2]

한국 전쟁이 터지자 동광원에는 전쟁고아들이 모여들었다. 서경원은 이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고, 노동을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들 공동체는 전후 복구 시기에 경기도 능곡 YMCA 농장에서 농사를 짓기도 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하루는 수확이 끝난 쌀을 달구지에 싣고, 아스팔트가 없어 덜그럭 대는 길을 따라 능곡에서 수색을 지나 종로 YMCA까지 갔다. 서울 YMCA 총무였던 현동완은 ‘그냥 가져가서 아이들 먹여라’고 밀어내고 달구지를 끌던 어른은 ‘안 된다. 받아라’ 하고 되내밀고...... 어른들끼리 ‘아름다운’ 실랑이를 벌인 탓에 함께 간 아이들은 덜덜 떨며 YMCA 천막에서 밤을 지샜다.'고 한다.[2]

2. 2. 농촌 계몽 운동과 가톨릭 귀의 (1958년 ~ 1972년)

공동체 생활이 답답했던 서경원은 이십대 초반이던 1958년 어머니와 함께 수도원에서 나와 곡성군에서 농촌 청년계몽운동을 벌였다. 40여 명 남짓한 동네 청년들을 모아 ‘공부를 해야지, 농사만 하면 무시 받는다’고 설파하며 야학을 꾸렸다. 4H(두뇌 Head, 마음 Heart, 손 Hand, 건강 Health) 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청년회에서 공동으로 농사도 짓고 삯으로 회비를 모아 야학 건물도 지었다. 또 ‘심청전’ 영화가 유행할 때 영화 필름을 구해 한 집에 반 되씩 쌀을 걷어서 포장을 치고 영화를 틀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영화를 보며 즐거워하기도 했다.[2]

곡성 청년회의 이름은 '향진회'라 지었는데 '농촌이 전진한다'는 진취적인 뜻이다. 서경원은 전라남도 광주에서 열린 함석헌의 강연회에 참석했다가, 함석헌 강연회를 주최하던 주최측이 고려대 '향진회'라는 모임인 것을 보고 영감을 얻어 모임의 이름을 향진회라 이름붙였다고 한다.[2]

서경원은 당시 농촌의 4H 청소년 운동에도 가담하였다. 그러나 후에 서경원은 당시 참여했던 4H운동에 대해 ‘미국의 앞잡이 노릇을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자신의 통치를 받는 나라들에 4H 출신의 미국 고문단을 보냈는데, 결국 이를 통해 제3세계 통치를 위한 ‘미국물 들이기’ 즉 사상적, 문화적 침략을 앞세웠다는 것이다.

그는 농촌 야학의 선생으로도 농민들을 계몽하였다. 그러나 1962년 스물넷에 영장을 받고 군대에 징집되어 입대, 제대 후 다시 광주로 돌아와 보자 야학 건물은 팔려서 주막집이 되어 있었다. 제대 후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의 교육을 수료했다. 이우재, 김낙중 등이 중심이 되어 지도되던 고려대 노연은 노동자, 농민들을 모아 교육을 진행했고, 이는 1974년 크리스천 아카데미 교육으로 이어지면서 70년대 노동운동, 농민운동에 가담하였다.

4박 5일의 교육을 받은 후 서경원은 말 그대로 눈이 뜨였다 한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이제까지는 농사를 지으면서 생산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는데, 정작 중요한 것은 제값 받고 파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또 교육 기간 동안 가톨릭농민회와 인연을 맺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농민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2] 1976년 함평고구마 투쟁의 인연으로 서경원은 천주교 영세를 받고 천주교에 귀의하였다. 1972년 가톨릭 농민회(가농)가 출범하자 가담하였다.

2. 3. 가톨릭농민회(가농) 활동과 투옥 (1972년 ~ 1988년)

가톨릭농민회에서 활동하던 서경원은 1976년 함평 고구마 투쟁, 1979년 안동 씨감자 사건 등에 참여하며 농민 운동을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당국의 감시와 협박을 받았으며, '빨갱이'로 몰리는 등 고초를 겪었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던 그는 '무슨 꿍꿍이로 가농 활동을 하느냐'는 음해를 받기도 했으며, 천주교 성직자들의 권유로 천주교에 귀의하여 세례를 받았다.[2]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할 당시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어 있던 그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지목되어 또다시 고문을 당하고 내란선동죄로 구속되었다가 그해 겨울 출소했다.[2]

2. 3. 1. 함평 고구마 투쟁

그는 가톨릭농민회 활동 외에 직접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1974년부터 '쌀 생산비 조사'를 시작했는데, 당시 농민들은 생산비와 손익을 정확히 계산하지 못하고 있었다. 쌀 생산비 조사는 역사상 처음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희생을 통해 경제 개발을 일으키는 박정희 정권 때문에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2]

1976년 "함평 고구마 투쟁"이 시작됐다. 그 해 전남도 농협은 생고구마를 건고구마 수준인 1317KRW에 전량 수매하겠다고 약속했다. 함평해남, 무안과 함께 고구마 주산지였는데, 그 해 풍년이 들었다. 그러나 농협은 수확이 끝난 11월이 되도록 40%에 못 미치는 수량만 수매했고, 농가에서는 썩어가는 고구마가 쌓여갔다. 결국 농민들은 포대 당 400KRW의 헐값에 고구마를 팔아야 했다. 가톨릭농민회는 함평 고구마피해보상대책위원회를 꾸려 9개 마을 160 농가의 총 피해액인 309만을 보상하라는 투쟁을 시작했다. 함평군 전체 피해액은 1.4억이었다.[2]

처음에는 17명이 모여 싸움을 시작했지만, 해를 넘기고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전남지역 전체의 투쟁으로 번져갔다.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는 1977년 4월 광주 계림동 성당에서 기도회를 개최하고, 600여 명 회원들이 농협 전남지부장 면담을 요구하며 거리 행진을 벌였다. 이들은 서울, 대전, 부산 등 대도시를 다니며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경원은 당국의 감시를 받으며 '빨갱이'로 몰리는 등 큰 고초를 겪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조심하라'는 협박을 받기도 했다.[2]

2. 3. 2. 안동 씨감자 사건

1979년 안동 씨감자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정부가 썩은 씨앗을 나누어줘 감자 농사를 망친 안동 농민들이 피해보상을 요구하자, 이에 앞장선 가톨릭농민회 회원 오원춘을 당국이 보름 남짓 납치, 감금한 사건이었다. 오원춘이 가톨릭 안동교구에서 언론에 양심선언을 하자 사복경찰은 교구청까지 난입해 신부와 가톨릭농민회 지도부를 강제 연행했다. 이 일로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된 상태에서 10월 26일 박정희의 사망 소식을 접하였다.[1]

2. 3. 3. 5.18 민주화운동 연루와 고문

서경원은 함평에서 머물고 있던 중 신군부에 의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지목되어 1980년 6월 8일 경찰에 납치되었다. 그는 함평 경찰서에 37일간 구금됐다가, 광주 보안대로 이첩된 후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무관했던 그는 영문도 모르고 잡혀가 고문을 당한 후 ‘내란선동죄’로 구속됐다가 그해 겨울 만신창이가 되어 출소했다.[2]

당시 그는 단기간 고문 후유증을 앓았는데, 그의 회고에 따르면 '아직 젊을 때라 병원에 가면 돈이 많이 든다며 혼자서 몸을 추스르고 농사일을 했던 서경원. 한참 지난 훗날에야 고문 후유증이 얼마나 심각한 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고 한다.[2]

2. 4. 국회의원 당선과 방북, 그리고 투옥 (1988년 ~ 1998년)

1981년 3월부터 서경원은 가톨릭농민회 전국회장직을 맡아 농민운동을 이끌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이 거세지면서 19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에 농민 대표로 참여했고, 1987년 6월 항쟁 공동대표[2]로 선출되었다. 또한 천주교사도직협의회 중앙상임위원, 민주통일 민중운동연합 공동대표, 고문 및 용공조작 방지대책위원회 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했고, 박종철이 사망하자 고 박종철열사 추도대회 공동대표에 선임되었다.

1987년 한겨레신문 창립에 참여하여 한겨레신문창간발기인 공동대표에 선임되었다. 이후 평화민주당에 민주화 투쟁을 이끌던 재야인사들과 학생 운동권 출신들이 집단 입당하면서, 서경원 역시 제도 정치권에 진출하게 되었다. 198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총재로 있던 평민당 소속으로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노태우 정권은 6·29 선언을 발표했으나, 1988년 총선에서 '여소야대' 구도가 형성되면서 권력 기반이 약해졌다. 5.18 진상조사 청문회가 이어졌고, 1989년 1월에는 민주화 세력이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을 건설하였다.[2] 이러한 상황에서 서경원의 방북과 투옥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였다.

2. 4. 1.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만남

1988년 7월, 서경원은 평화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비밀리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2] 1984년 세계농민회에 참석했다가 독일 민주인사들을 만났고, 성낙영 목사를 통해 방북 의사를 타진했다. 국회의원으로서 정치활동만으로는 농민 해방에 한계가 있다고 느껴 분단 문제 해결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방북 전부터 김일성 주석과의 면담을 요청하여 허가를 받았고, 체코슬로바키아를 경유해 방북하여 김 주석과 40분간 통일문제를 논의했다.[2]

서경원은 당시 김일성 주석과의 만남을 회고하며, 반공교육에서 묘사된 모습과는 달리 소탈하고 자신을 존중하는 태도에 놀랐다고 밝혔다. 김 주석은 야당 국회의원인 서경원을 맞이하기 위해 먼저 나와 있었고, 옷차림도 소탈했으며, 경어를 사용하며 편하게 대하라고 말했다. 또한, 가방 검사도 없이 회담장에 입장하게 하여 처음에는 가짜 김일성이라고 의심할 정도였다고 한다.[2]

40분간의 회담에서 서경원은 88 서울올림픽 참가, 경평축구대항전 복원, 휴전선 비방 방송 중단, 농산물 및 가축 종자 교류, 김수환 추기경의 평양 전교 허용, 유엔 감시 하 상호 군축, 권력 승계 중단 등을 제안했다.

김 주석은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특히 김수환 추기경의 방북 요청에 대해서는 언제든 환영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다만, 올림픽 참가 문제는 남측과의 회담 결렬을 언급했다. 서경원은 김일성 주석이 민간 교류에 앞서 불가침 조약 체결을 우선시한 반면, 자신은 민간 교류를 통한 인식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이 부분에서 견해차를 보였다고 회고했다.[2]

1988년 7월 19일부터 21일까지 2박 3일간의 평양 방문은 10개월 동안 비밀에 부쳐졌으나, 1989년 6월 29일 서경원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면서 알려졌다. 늦봄 문익환 목사 방북 직후였고, 야당 국회의원 신분이었기에 사건의 파장은 컸다.[2]

2. 4. 2. 안기부 조사와 고문 폭로

1989년 6월 29일, 서경원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1988년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한 사건 때문이었다. 늦봄 문익환 목사의 방북 직후였고, 현직 야당 국회의원 신분이었기에 사건의 파장은 컸다.[2]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서경원 의원의 방북 사건을 '간첩 활동'으로 발표했다. 서경원이 북한에서 공작금 5만 달러를 받았고,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에게 대북 친서를 전달했으며, 공작금 중 1만 달러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평민당과 가농 주요 인물들을 불고지죄로 연행하고, 서경원이 방북 사실을 고백했던 김수환 추기경, 함세웅 신부에 대해서도 불고지죄 적용 여부를 검토했다.[2] 이 사건으로 서경원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의원직을 상실했다.[2]

서경원은 연행 25일 만에 이루어진 첫 변호인 접견에서 간첩 활동 혐의를 부인하고, 조사 과정에서 고문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특히 정형근 국장에게 직접 고문을 받았다고 폭로했다.[2] 안기부 조사 과정에서 김일성의 손금을 그려온 것을 공개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1]

출소 후 언론 인터뷰에서 서경원은 정형근이 '북한에 세 번 갔다 온 것 안다', '방북 전에 김대중이 시킨 것을 밝히라'고 요구하며 심한 폭행을 가했다고 밝혔다. 평민당 배후설에 대해서는 "나는 갈 때나 올 때 당과 일절 연계 없이 갔다"고 부인했고, 5만 달러에 대해서는 "내가 통일 사업한다고 요구했다. 그 부분은 내가 모두 진술했다. 안기부 측은 이를 공작금으로 발표해버렸다"고 말했다.[2]

김대중의 정치자금 수수 관련자로도 지목되어 조사받은 서경원은, 김대중 총재 1만 달러 수수설에 대해 "사나흘 동안 나를 죽일 정도로 몰아치는 바람에 검찰조사에서 내가 일단 1만 달러를 주었다는 요구대로 자백을 했다. 그랬다가 재판에서 이를 전면 부인했다"고 말하며, "주려면 5만 달러 다 주지, 치사하게 1만 달러만 주겠냐"고 일축했다.[2]

구속 이듬해에 영국, 네덜란드, 스위스, 스웨덴, 미국, 일본, 프랑스 등과 국제사면위원회,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독일 대통령 등이 서경원 의원 석방 결의안을 채택하기도 했다.

2. 5. 석방 이후 활동 (1998년 ~ 현재)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 그에 대한 석방 여론이 나왔으나 묵살되었다. 그는 징역 10년형을 언도받고 수감 9년만인 1998년 가석방되었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한 중학생 압사 사건 당시 대규모 집회를 마치고 시위대가 지하철로 이동하다가,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과 미군 병사 존 머피 이병 등 3명 사이에 실랑이가 붙자 이를 말리다가 미군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2]

이후에도 사회정의연구소 소장, 범민족운동단체협의회 수석부총재, 민족화해자주통일협의회 고문 등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3. 정치 활동

서경원은 1981년 3월부터 가농 전국회장직을 맡아 농민운동을 이끌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이 거세지면서 농민 대표로 19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에 참여했고, 1987년 6월 항쟁 공동대표[2]로 선출되었다. 그 밖에 천주교사도직협의회 중앙상임위원, 민주통일 민중운동연합 공동대표, 고문 및 용공조작 방지대책위원회 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했고,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자 고 박종철 열사 추도대회 공동대표에 선출되었다.

1988년 7월, 서경원은 비밀리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2]

3. 1.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서경원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다 1987년 한겨레신문 창립에 참여, 한겨레신문창간발기인 공동대표를 맡았다. 이후 민주화 투쟁을 이끌던 재야인사, 학생 운동권 출신과 함께 평화민주당에 입당하여 제도 정치권에 진출하였다. 198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총재로 있던 평민당 소속으로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2]

4.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수득표율(%)순위당락비고
대한민국 제13대 국회의원 선거국회의원13대평화민주당64,220표74.791위당선초선
대한민국 제16대 국회의원 선거국회의원16대무소속768표0.948위낙선낙선


참조

[1] 웹인용 서경원이 그린 김일성 손금 사진:경향신문 기자 촬영본 http://db.kdemocracy[...] 2010-10-09
[2] 뉴스 내가 본 김일성 주석은 반공교육과 달랐다, 서경원 http://www.vop.co.kr[...] 민중의 소리 2007-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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