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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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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동영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1953년 전라북도 순창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MBC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다가 김대중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했다.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후, 새천년민주당 대변인과 열린우리당 당 대표, 통일부 장관을 역임했다.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으며, 이후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국회에 복귀했다. 국민의당과 민주평화당 대표를 거쳐, 2024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그는 6.25 전쟁 관련 발언, 1997년 안기부 기획 입북 발언, 노인 폄하 발언 등으로 논란이 있었으며, 저서로는 《개나리아저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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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정동영, 국회에서 기념 사진 촬영
2019년 정동영
이름정동영
로마자 표기Jeong Dongyeong
한자 표기鄭東泳
출생일1953년 7월 27일
출생지전라북도 순창군
국적대한민국
종교로마 가톨릭교회(세례명: 다윗)
정동영 서명
학력
대학교서울대학교
대학원웨일스 대학교
경력
직업정치인
전직아나운서
소속 정당더불어민주당
주요 경력MBC 보도국 정치부 기자
MBC 보도국 사회부 기자
MBC 통일부 차장
MBC 보도국 부장
MBC 로스앤젤레스 특파원
MBC 0시 뉴스 앵커
MBC 뉴스데스크 간추린 뉴스 앵커
통일전망대 진행자
MBC 뉴스데스크 주말앵커
새정치국민회의 대변인
새천년민주당 대변인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대한민국 제16대 새천년민주당 대선예비후보
제31대 통일부 장관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장
대한민국 5선(제15·16·18·20·22대) 국회의원
열린우리당 의장
열린우리정책연구원 이사장
열린우리당 중앙위원회 의장
열린우리당 상임고문
대한민국 제17대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
대통합민주신당 최고위원
대통합민주신당 상임고문
통합민주당 상임고문
민주당 상임고문
민주당 수석최고위원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민주당 상임고문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
국민의당 국가대개혁위원회 위원장
민주평화당 당대표 겸 상임고문
민주평화정책연구원 이사장
민주평화정책연구원 이사
민생당 상임고문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겸 당무위원
의정 활동
국회의원제15대 국회의원(전주시 덕진구)
제16대 국회의원(전주시 덕진구)
제18대 국회의원(전주시 덕진구)
제20대 국회의원(전주시 병)
제22대 국회의원(전주시 병)
주요 직책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위원
국회의원 선수5선
주요 직책
통일부 장관제31대 통일부 장관
임기: 2004년 7월 1일 ~ 2006년 2월 9일
대통령: 노무현
열린우리당 의장임기: 2004년 1월 11일 ~ 2004년 5월 17일
임기: 2006년 2월 18일 ~ 2006년 6월 1일
민주평화당 대표임기: 2018년 8월 5일 ~ 2020년 2월 2일
기타 직책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겸 당무위원
웹사이트
공식 웹사이트공식 사이트
관련 웹사이트대한민국헌정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 생애

1953년 7월 27일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에서 태어났다.[11][36] 전주고등학교[36] 졸업 후 재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 입학했으며,[36][36] 대학 시절 반유신독재 투쟁으로 수감[39] 및 강제징집되어 1977년 육군 병장으로 전역했다.[39]

1978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하여[39] 기자, 로스앤젤레스 특파원 등을 지냈고, 1995년부터 1996년까지 주말 MBC 뉴스데스크 앵커를 맡았다.[11] 1996년 1월 MBC를 퇴사했다.[11]

1996년 김대중의 권유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며 정계에 입문,[11] 제15대 총선에서 전주시 덕진구에 출마하여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되었다.[11]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도 같은 지역구에서 재선되었고,[11] 새천년민주당 대변인, 최고위원 등을 역임했다.[11]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하여 두 차례 당 의장을 지냈다.[11]

참여정부 시절인 2004년 통일부 장관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으로 임명되었고,[11] 2005년 6월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면담했다.[11] 2006년에는 독도를 방문하여 '영유권 3원칙'을 발표했다.[11]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으나[11] 본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패배했다.[12] 2008년 제18대 총선(서울특별시 동작구 을)에서 낙선했으나,[13][14] 2009년 전주시 덕진구 재보궐선거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20] 2010년 민주당에 복당하여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고,[21][22] 2012년 제19대 총선(서울특별시 강남구 을)에서는 낙선했다.[23][24]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26] 재보궐선거(서울특별시 관악구 을)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3위에 그쳤다.[27][28] 2016년 국민의당에 합류하여[29] 제20대 총선에서 전주시 병 선거구에 출마하여 4선에 성공했다.[30] 2018년 바른미래당 합당에 반대하며 국민의당을 탈당하고 민주평화당 창당에 참여, 같은 해 8월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2024년 제22대 총선에서는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전주시 병 선거구에 출마했다.[31]

2. 1. 유년 시절 및 학창 시절

1953년 7월 27일[11]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에서[11] 정진철과 이영옥의 4남 4녀 중 장남이자 다섯째로 태어났다.[36] 아버지 정진철은 젊은 시절 순창군 구림면 금융조합 서기(5년)와 구림면장(1년)을 지냈고,[37] 이후 전라북도의회 의원을 역임했다.[11] 정동영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훗날 중학생 시절에 아버지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기도 했다.[38]

전주초등학교, 전주북중학교, 전주고등학교를 졸업한 후,[36] 재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 입학했다.[36][36] 대학 시절에는 박정희 정권의 유신 독재에 반대하는 학생 운동에 참여하다가 수감되었고,[39] 이후 강제징집되어 군 복무를 하였다. 1977년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전역했다.[39]

2. 2. 언론인 시절

1979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문화방송(MBC)에 입사하여 보도국 정치부에서 외무부(당시), 통일원(당시), 국회 담당 기자로 활동했다. MBC 재직 중이던 1988년에는 영국 웨일스 대학교 대학원에서 저널리즘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89년부터 1992년까지는 로스앤젤레스 특파원으로 근무하며 1989년 로마프리에타 지진과 로스앤젤레스 폭동 등을 취재하고 보도했다. 특히 걸프 전쟁 발발 직전인 1991년 1월에는 요르단 수도 암만으로 파견되어 후세인 1세 국왕과의 단독 인터뷰를 성사시키기도 했다. 이후 1995년부터 1996년까지 주말 「MBC 뉴스데스크」 앵커를 맡았다. 1996년 1월 MBC를 퇴사하며 언론인 경력을 마무리했다.

2. 3. 정계 입문

1996년 1월 MBC에서 퇴사한 후, 대학 시절 친구인 이해찬 의원의 권유와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의 영입 제안을 받아 정계에 입문했다.[39][11]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한 그는 같은 해 4월 제15대 총선에서 전주시 덕진구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여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되었고, 이를 통해 15대 국회에 입성하며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40]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 당무위원 겸 대변인, 총재 특별보좌관, 청년위원장 등 주요 당직을 역임했다.[39]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도 다시 한번 전국 최다 득표로 재선에 성공했으며, 같은 해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경선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39] 이후 새천년민주당 대변인을 맡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의 새천년민주당 후보 경선에 도전했으나, 노무현 후보에게 패배했다.[39] 정동영은 경선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고, 노무현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산하 국민참여운동본부에서 추미애와 함께 공동 본부장을 맡아 선거 운동 전반을 지휘하며 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정동영은 기존 동교동계가 주축이 된 새천년민주당의 당 운영 방식에 대해 개혁을 요구하며 당내 개혁파의 선두에 섰다. 당시 천정배, 신기남 의원과 함께 당내 개혁을 주장하며 소위 '천신정'으로 불렸다. 이러한 노선 차이 끝에 2003년 9월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했고, 두 달 뒤인 11월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하며 창당 멤버로 합류했다. 이후 열린우리당에서 두 차례 당 의장을 역임했다.

2. 4. 참여정부 시절

2004년 3월 초, 노무현 대통령이 기자클럽 간담회에서 17대 총선과 관련하여 열린우리당 지지를 기대한다는 발언을 하자,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이를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 위반으로 판단했다. 이에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발의했고, 자유민주연합국민통합21 등도 동참했다. 표결 당일인 3월 12일,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의사당을 점거하며 탄핵을 저지하려 했으나, 박관용 국회의장이 경호권을 발동하여 모두 퇴장시켰다. 당시 정동영은 의장석에서 야당 의원들의 진입을 막으며 대치하다가 경호원과 야당 의원들에 의해 국회 밖으로 끌려나갔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퇴장한 후 진행된 표결에서 탄핵소추안은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가결되었고,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는 정지되어 고건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표결 후 정동영은 열린우리당 의원들과 함께 의사당 안에서 무릎을 꿇고 마이크를 잡고 유권자들에게 사죄문을 읽었다.

그러나 탄핵안 가결은 탄핵을 반대하는 유권자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전국적으로 탄핵 반대 촛불집회가 확산되었다. 이 영향으로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은 급상승하여 한나라당을 제치고 1위를 기록했으며, 개헌저지선 확보까지 가능하다는 예측이 나왔다. 정동영은 비례대표 22번으로 출마하고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선거 운동을 이끌었다.

하지만 4월 1일, 젊은 층의 투표 참여를 독려하며 "어르신들은 투표를 안 하고 집에서 쉬셔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그분들은 앞으로의 미래를 결정할 분들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젊은이들은 앞으로의 미래가 걸려있기 때문에 투표를 꼭 해야 합니다"라고 한 발언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노인 폄하 논란에 휩싸였다.[41] 이 시점부터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은 하락하기 시작했고, 박근혜 대표가 이끄는 한나라당이 탄핵 역풍을 극복하며 지지세를 회복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결국 정동영은 논란을 수습하기 위해 비례대표직을 사퇴했다. 총선 결과, 열린우리당은 152석을 얻어 제1당이 되었고, 정동영은 출구조사 발표 후 눈물을 보였다. 하지만 초반의 폭발적인 지지율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나라당에게 121석을 내주었다.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기각하면서 노 대통령은 직무에 복귀했다. 한 달 후 열린우리당 지도부와의 만찬에서 노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에 수석 당원으로 정식 입당했다. 17대 국회에서 제1당이 된 열린우리당은 행정수도 이전, 사학법 개정 등 참여정부의 주요 정책 관련 법안 처리를 추진했다. 정동영은 원외에서 당 의장을 맡아 당을 이끌다가, 2005년 통일부 장관으로 입각하며 의장직을 사퇴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동영에게 통일부 장관직과 더불어 NSC 상임위원장직을 겸직시켜 참여정부 내 그의 정치적 위상을 높였다. 2005년 6월 17일에는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단독 면담을 갖고 6자회담 재개 및 남북관계 진전 방안을 논의했다. 2005년 12월, 차기 대통령 선거 준비를 위해 통일부 장관직을 사퇴했다.

2006년 1월, 다시 열린우리당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2006년 5월에는 한국과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독도에 상륙하여 "영유권 3원칙"을 발표하며 한국의 영유권을 강조했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31일에 치러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전북을 제외한 모든 광역자치단체에서 패배하자, 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당 의장직을 사퇴했다.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과 함께 2007년 대통령 선거의 여당 유력 후보로 꼽혔다. 지방선거 참패 후 잠시 주춤했으나, 2007년 10월 15일 실시된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43%의 득표율로 최종 후보로 선출되었다. 정동영은 북한과의 관계 강화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으나, 지난 10년간의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남북 협력 이슈의 신선도가 떨어졌고, 노무현 정부 시기 경제 상황에 대한 평가와 맞물려 진보 지지층 일부가 이탈했다. 결국 보수 진영의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에게 지지율에서 크게 뒤처졌고, 12월 19일 대선에서 큰 표 차이로 패배하여 낙선했다.[12]

한편, 2004년 일본 방문 당시 도쿄 우에노의 アメヤ横丁|아메야요코초jpn를 방문하여 주목받기도 했다.[32]

2. 5. 2007년 대통령 선거

2007년 1월, 당시 범여권의 유력 후보로 거론되던 고건 전 총리가 불출마를 선언하면서[42] 열린우리당에서 개편된 대통합민주신당은 경선 국면에 들어섰다. 경선에는 정동영 본인을 비롯해 유시민, 손학규, 한명숙, 이해찬 등이 참여했으나, 유시민은 초반에 사퇴했다. 초기에는 손학규가 유리하다는 평가가 있었지만, 경선 과정에서 이른바 '박스떼기' 논란과 국민통합추진본부의 차량 동원 의혹 등이 불거지면서[43] 판세는 정동영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친노무현 세력은 한명숙이해찬 지지를 선언하며 사퇴하는 등 후보 단일화를 시도했으나, 조직력에서 앞서고 노무현 정부와의 차별화를 내세운 정동영이 2007년 10월 15일, 전체 득표율 43%를 얻어 대통합민주신당의 대통령 후보로 최종 선출되었다.[44][12]

그러나 당시 참여정부와 집권 세력에 대한 국민적 피로감이 상당하여, 사실상의 여당이었던 대통합민주신당의 지지율은 10%대에 머물렀고, 정동영 후보 본인의 지지율 역시 20%에 미치지 못하는 등 매우 저조한 상태였다.[45][46]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이회창 후보에게도 밀려 3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러한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당시 50%에 육박하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당선이 유력시되던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를 겨냥한 네거티브 공세를 펼쳤으나 지지율 반등에는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또한, 다른 범여권 주자였던 이인제, 문국현, 권영길 등과의 후보 단일화 시도도 모두 무산되었다. 정동영은 북한과의 관계 강화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으나,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간 지속된 남북 협력 기조는 당시 유권자들에게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가지 못했고, 노무현 정부 말기의 경제 상황 악화는 진보 성향 유권자들의 이탈을 가속화했다.[12]

선거 막판, 호남 지역과 범여권 지지층을 결집시키며 이회창 후보를 제치고 2위 자리를 되찾았고,[47] 개표 초반에는 한때 이명박 후보를 앞서면서 범여권 내에서 '역전'에 대한 기대감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12월 19일 최종 개표 결과, 26.1%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이명박 후보에게 531만 표라는 큰 표 차이로 패배했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 민주당계 중도 정당 역사상 가장 낮은 대선 득표율이었다.[12]

2. 6. 대선 이후

2007년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큰 차이로 패배한 후[12] 한동안 정치적 자숙 기간을 가졌다. 이듬해인 2008년 제18대 총선에서는 통합민주당의 요청으로 서울특별시 동작구 을 선거구에 출마했으나,[13] 한나라당 정몽준 후보에게 패배하여 낙선했다.[14]

낙선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2009년 4월 29일에 열린 2009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에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선거구 출마 의사를 밝혔다.[15] 당시 소속 정당이었던 민주당은 이를 '전국 정당화에 역행하는 움직임'이라며 공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16] 이에 정동영은 민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으며,[17] 이 과정에서 당내 갈등이 심화되기도 했다.[18][19] 선거 결과, 민주당 후보를 큰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어 국회에 복귀했다.[20][48]

2010년 2월 10일, 민주당 당무위원회는 정동영의 복당을 승인하여 탈당 10개월 만에 민주당으로 돌아왔다.[48] 같은 해 10월 민주당 지도부 선거에 출마하여 2위를 차지하며 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21][22] 2011년 12월 민주통합당이 출범하자 상임고문이 되었다.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는 자신의 지역구인 전주 덕진을 떠나 서울특별시 강남구 을 선거구에 출마했으나,[23]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 후보에게 패배하여 다시 낙선했다.[24] 같은 해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유력 후보 중 한 명으로 거론되었으나, 7월 9일 불출마를 선언했다.[25]

대선 이후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으로 활동하다가, 2015년 1월 11일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하고 시민단체가 주도하는 신당 준비 조직인 '국민모임'에 합류했다.[49][26] 그러나 정의당과의 통합 신당 논의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같은 해 4월 2015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에서 서울특별시 관악구 을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27] 새누리당, 새정치민주연합 후보에 이어 3위를 기록하며 낙선했다.[28]

2016년 2월 18일, 안철수가 창당한 국민의당 합류를 선언했다.[50][29] 같은 해 제20대 총선에서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전라북도 전주시 병 선거구(구 전주 덕진)에 출마하여, 현역 의원이었던 더불어민주당 김성주 후보를 전주권 최다 표차로 누르고 4선에 성공했다.[51][30]

2018년 2월 5일, 안철수 대표가 추진하던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합당에 반대하며 국민의당을 탈당했다. 다음 날인 2월 6일 창당된 민주평화당에 합류했다. 같은 해 8월 5일 열린 민주평화당 전당대회에서 68.57%의 득표율로 유성엽, 최경환 후보 등을 누르고 당 대표에 당선되었다.[52] 대표 당선 후 "정의당보다 더 정의롭게 가겠다"고 선언하며, 한진중공업 사태 관련 '희망버스', 쌍용차 해고자 분향소, 전교조 위원장 단식 농성장 등을 방문하는 등 노동 및 사회 문제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민주평화당이 표방한 중도개혁 노선과 다소 거리가 있다는 당내 비판도 제기되었다.[53]

2. 7. 더불어민주당 복당 및 5선

2009년 4월 29일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재보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민주당 후보를 큰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20] 이는 2008년 제18대 총선에서 서울특별시 동작구 을 선거구에 통합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한나라당 정몽준 후보에게 패배한[13][14] 후의 정치적 재기였다. 앞서 정동영은 미국에서 돌아와 해당 재보궐선거 출마 의사를 밝혔으나[15], 민주당은 공천을 불허했고[16] 이에 정동영은 민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 출마를 강행했다.[17][18][19]

2010년 2월 10일, 민주당 당무위원회는 정동영과 신건의 복당을 승인하여, 탈당 10개월 만에 민주당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 10월 민주당 지도부 선거에 출마하여 2위로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21][22] 2011년 12월 민주당시민통합당이 통합하여 출범한 민주통합당에서는 상임고문을 맡았다.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는 지역구인 전주를 떠나 서울특별시 강남구 을 선거구에 출마했으나[23] 낙선했다.[24] 같은 해 대통령 선거에서는 유력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7월 9일 불출마를 선언했다.[25]

대선 이후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으로 활동하다가 2015년 1월 11일 탈당하고, 시민단체 주도의 야당 신당 준비 조직인 '국민의회' 합류를 선언했다.[26] 같은 해 4월 서울특별시 관악구 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27] 3위에 그쳐 낙선했다.[28]

2016년 2월,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한 안철수가 창당한 국민의당에 합류했다.[29] 같은 해 제20대 총선에서 고향인 전라북도 전주시 병 선거구에 출마하여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 4선 국회의원이 되었다.[30]

2018년 2월, 안철수가 추진한 국민의당과 보수정당인 바른정당의 합당(바른미래당 창당)에 반발하여 국민의당을 탈당하고 민주평화당 창당에 참여했다. 같은 해 8월 5일 민주평화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2024년 제22대 총선에서는 전라북도 전주시 병 선거구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출마하게 되었다.[31]

3. 논란과 비판

정동영은 정치 활동 과정에서 여러 논란과 비판에 직면했다.

새정치국민회의 대변인이었던 1996년에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6.25 전쟁 관련 발언을 탄핵 소추까지 거론하며 강하게 비판하여 여당인 신한국당과 충돌했다. → 자세히 보기

1997년에는 오익제천도교 교령의 월북 사건과 관련하여 안기부의 기획 입북 가능성을 제기했다가 안기부로부터 명예훼손 고발 위협과 소환 조사를 받는 등 압박을 받았다. 이는 김영삼 정부 말기 안기부의 야당 탄압 사례 중 하나로 거론된다. → 자세히 보기 같은 해 말,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 및 석방에 대해서는 "국민 화합의 차원에서 국민들도 이해하고 용서할 것"이라는 논평을 발표했다. → 자세히 보기

열린우리당 의장이었던 2004년에는 대학생 기자단과의 인터뷰 중 "60대 이상 70대는 투표 안 해도 괜찮다"는 취지의 발언이 알려지면서 노인 폄하 논란에 휩싸였다. 이 발언은 세대 간 갈등을 부추긴다는 비판을 받았고, 정동영은 결국 17대 총선 비례대표 후보직을 사퇴했다. → 자세히 보기

18대 총선 낙선 후인 2009년에는 재보궐선거에서 전주시 덕진구 출마를 선언했으나 민주당 지도부가 공천을 배제하자 탈당 후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 과정에서 당 지도부와의 갈등 및 '철새 정치인'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약 10개월 후 민주당에 복당했다. → 자세히 보기

이 외에도 개성공단 방문 신청이 통일부에 의해 불허된 바 있으며(→ 자세히 보기), 2011년 반값등록금 시위 현장에서는 한 여성으로부터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 자세히 보기

3. 1. 6.25 전쟁 관련 발언 논란

1996년 6월 24일,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전방부대 시찰 중 "6.25 당시에 만주를 폭격했으면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고 발언하여 정치권에 큰 논란을 일으켰다.[55] 김영삼 대통령은 심각한 북한 상황과 한국전쟁의 참상을 회고하며 당시 맥아더 장군이 주장했던 만주 폭격이 이루어졌다면 통일이 가능했을 것이라며 철저한 안보 태세를 당부하는 과정에서 해당 발언을 했다.[56]

이에 대해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대변인이었던 정동영은 김영삼 대통령의 발언이 "국가이익을 현저하게 해칠 우려가 있는 발언"이며 "대통령의 직무와 관련해 탄핵소추도 가능한 발언"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55] 그는 또한 이 발언이 국가 안보를 위태롭게 할 수 있고, 당시 우호 관계를 맺고 있던 중국과의 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쳐 간접적으로 외환 위기까지 불러올 수 있는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56] 새정치국민회의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발언에 대한 해명을 공식적으로 요구했다.[56]

반면, 집권당이었던 신한국당의 김철 대변인은 정동영과 국민회의의 비판에 대해 "어느 쪽의 안보를 지키려는 정당인지 의심이 들 정도"라며 "국민회의는 북한에 대해 그렇게 미안하고 조심스러운지 묻고 싶다"고 반박했다.[55] 김철 대변인은 김영삼 대통령의 발언이 전방 부대 방문 중 과거 통일 기회를 아쉬워하며 젊은 세대에게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회상이었다고 옹호했다.[56] 또한, 반세기 전 전쟁 상황을 기준으로 한 발언이 현재의 한중 관계에 영향을 준다는 주장은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56] 신한국당은 당시 맥아더의 주장을 지지했던 국민 여론을 언급하며, 국민회의가 6.25 전쟁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부족하다고 비판했다.[56][57][58]

3. 2. 1997년 안기부 기획 입북 발언

1997년 오익제 천도교 교령의 월북 사건이 발생하자[59], 당시 집권당이던 신한국당은 오익제가 새정치국민회의 상임 고문을 지낸 경력을 문제 삼아 국민회의에 해명을 요구했다. 이에 국민회의 대변인이었던 정동영은 "안기부가 밀파했거나 기획 입북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며 역공세를 펼쳤다.[60]

안기부는 즉각 반박하며 국민회의 당사에 요원을 파견하고, 정동영을 안기부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조사하겠다고 압박했다.[61] 더 나아가 안기부는 정동영을 형사고발하겠다고 위협하며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했다.[62] [63] 안기부가 정동영이 언급한 제보자를 조사하겠다고 나서자[64], 정동영은 자신의 기획 입북 주장이 오해의 소지를 낳았다며 잘못을 인정했다.[65]

그러나 안기부는 잘못을 인정한 정동영에게 8월 27일 안기부 청사 출석을 요구하며 소환장을 보냈다. 이는 과거 군사정권 시절을 연상시키는 야당 탄압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국민회의는 소환에 불응했으나[66], 안기부는 강제 구인 가능성까지 언급하며 압박 수위를 높였다.[67] 안기부가 2차 소환장을 보내며 불응 시 구인하겠다고 재차 위협하자[68], 정동영은 결국 9월 8일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에 응했다. 이 조사에서 그는 기획 입북 주장은 제보자의 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무의식적인 실수였으며 명백히 잘못된 것이라고 진술하고, 안기부 직원들의 명예를 훼손한 점에 대해 사과했다. 그럼에도 안기부는 국민회의 측의 추가적인 사과와 해명이 없을 경우 법적 조치를 계속 진행하겠다고 위협했다.[69]

이 사건은 김영삼 정부 말기, 대선에까지 개입하며 야당 의원을 탄압하는 등 안기부의 횡포가 극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 안기부는 1998년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꾸며 개편되었다.

3. 3. 전두환, 노태우 사면 관련 논평

1997년 12월 22일,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대변인이었던 정동영은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석방에 대해 "국민 화합의 차원에서 국민들도 이해하고 용서할 것으로 본다"는 논평을 발표했다.[70] 다음 날인 12월 23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전두환과 노태우의 진심 어린 반성을 전제로 "국민이 용서와 화합의 차원에서 전노 사면을 이해해주리라 믿는다"는 새정치국민회의의 입장을 다시 한번 밝혔다.[71]

3. 4. 노인 폄하 발언 논란

2004년 3월 26일 대구 그랜드호텔에서 노컷뉴스-국민일보-iTV의 대학생 총선기자단 VJ팀(동영상팀)과 가진 인터뷰에서 정동영은 "(이번 총선에서) 60대 이상 70대는 투표 안해도 괜찮다. 그 분들은 집에서 쉬셔도 된다"고 발언하여 노인 폄하 논란이 일었다.[72]

당시 정동영의 발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미래는 20대, 30대들의 무대라구요. 그런 의미에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면 60대 이상 70대는 투표 안해도 괜찮아요. 꼭 그 분들이 미래를 결정해놓을 필요는 없단 말이에요. 그분들은 어쩌면 이제 무대에서 퇴장하실 분들이니까... 그분들은 집에서 쉬셔도 되고 20대, 30대는 지금 뭔가 결정하면 미래를 결정하는데 자기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잖아요."[73]

이 발언이 알려지자 야권 및 시민 단체 등으로부터 노인 폄하라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대한노인회는 정동영의 정계 은퇴를 요구하며 항의 집회를 열었다. 당시 야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 김재두 부대변인은 "세대 간 갈등을 부추기는 망언을 개탄한다"고 비판했으며, 한나라당 한선교 대변인은 "정 의장 발언은 60~70대를 반대 세력으로 선전하며 20~30대 결집을 유도한 의도적 발언으로 의심된다"고 논평했다.[74][75] 전국노년유권자연맹 전수철 총재 역시 “정 의장의 노인 비하 발언으로 전국 400만 노인들이 분노하고 있다”고 항의했다.

이에 대해 당시 열린우리당 박영선 대변인은 "60, 70대를 거론한 부분은 어린 학생 기자들에게 미래의 주역임을 강조하다 나온 얘기로 답변의 본뜻이 아니었다"며, "정치적 관심이 높은데도 정작 투표는 잘 안 하는 20, 30대에게 투표하도록 독려한 게 진의였다"고 해명했다. 당시 인터뷰를 진행했던 대학생 기자는 "발언이 확대 보도되고 있다"며, "우리의 모든 프로그램 전체(총 8분 내외)를 모두 보지 않은 채 그 부분만을 강조하는 기존의 언론 태도에 더욱 당황스럽다"고 밝히고, "우리는 기존의 매체와는 다른 보도 형태를 보여주고자 시도하였고 우리의 순수한 동기가 조금 왜곡되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하다"는 취재 후기를 남겼다.[76]

그러나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결국 정동영은 비례대표 후보직을 사퇴하여 17대 총선에서 낙선했다.

한편, 한국기자협회노컷뉴스-국민일보-iTV 총선기자단의 '정동영 노인 폄하 발언' 보도 등 총선 관련 기획을 <제17대 총선보도 특별상>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3. 5. 무소속 재보선 출마 논란

2008년 4월 9일 제18대 총선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동작구 을 선거구에 출마[13]했으나, 한나라당 정몽준 후보에게 패배했다[14].

낙선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2009년 3월 19일 같은 해 4월 말에 실시되는 재보궐선거에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선거구에서 출마할 의향을 밝혔다[15]. 이에 대해 당시 민주당 지도부는 "전국 정당화에 역행하는 움직임"이라며 공천 불가 입장을 정했고[16], 4월 6일 공천 배제를 최종 확정했다.[77]

그러나 정동영은 이 결정에 반발하여 “잠시 민주당의 옷을 벗지만 다시 함께할 것”이라며 복당 의사를 밝히고 민주당을 탈당, 무소속 출마를 강행했다[78][79][17]. 이 과정에서 당 지도부의 방침을 따르지 않았다는 비판과 공천 배제 자체에 대한 반발 등 논란이 일었으며[78], 당내에서는 정동영계와 당 지도부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18][19].

4월 29일 재보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정동영은 민주당 후보를 큰 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어 국회에 복귀했다. 같은 날 전주시 완산구 갑 선거구에서도 '무소속 연대'를 내세운 신건 후보가 민주당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20][78].

이듬해인 2010년 2월 10일, 민주당 당무위원회는 정동영과 신건의 복당을 승인했다. 이로써 정동영은 2009년 4월 탈당 이후 약 10개월 만에 민주당으로 복귀했다[22].

3. 6. 개성공단 방북 불허

정동영은 "남북 관계의 숨구멍인 개성공단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야 한다"고 발언했으나, 통일부는 그의 개성공업지구 방문을 불허했다.[80]

3. 7. 폭행 피해

2011년 8월 15일 반값등록금 시위에 참석했던 정동영은 현장에서 50대로 추정되는 한 여자에게 머리카락을 잡혔다. 이 여성은 정동영에게 "김대중 노무현 앞잡이, 빨갱이"라고 말했다.[81]

4. 사상 및 주장

(내용 없음)

4. 1. 대통합민주신당 관련 주장

2007년 5월 20일, 정동영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대통합민주신당을 지역주의로 규정한 것에 반대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게시했다. 이 글에서 그는 대통합민주신당 창당 움직임을 지역주의로의 회귀나 호남과 충청의 연합으로 규정하는 것은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82]

정동영은 호남의 지역주의가 영남의 패권적 지역주의와 동일하게 비판받는 것에 대해, 호남의 그것은 영남의 패권주의와 차별에 반대하는 저항적이며 개혁적이고 파생적인 성격을 띤다고 반박했다. 그는 영남의 지지율을 높여 지역주의를 해소하려는 접근 방식(예: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은 영남 패권주의에 대한 굴복이며, 실제로 성공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지역 패권주의는 싸워야 할 대상이지 화해하거나 손잡을 대상이 아니라고 강조했다.[82]

그는 열린우리당을 포함한 비한나라당 세력이 통합신당을 만들려는 것은 평화와 개혁을 지향하며 수구에 반대하는 여러 세력을 복원하려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이를 지역 연합이나 지역주의 부활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개혁 세력의 결집을 막는 일이라고 덧붙였다.[82]

5. 경력

1979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MBC에 입사하여 보도국 정치부에서 외무부, 통일원, 국회 담당 기자로 활동했다. 1988년 영국 웨일스 대학교 대학원에서 저널리즘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6년 1월 김대중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하여, 같은 해 4월 제15대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전북 전주시 덕진구에 출마하여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되었다.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도 같은 지역구에서 최다 득표로 재선되었다.

6. 가족 관계

wikitext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정진철 (1921년~1971년)일제강점기 전라북도 순창군 면장, 전라북도 도의원 역임
어머니이형옥 (1918년~2005년)
배우자민혜경 (1956년~)
자녀2남


7. 수상 경력

연도수상 내역
1996년기자가 뽑은 올해의 인물
2000년밝은정치시민연합 새천년 밝은 정치인상
2000년백봉 라용균 선생기념사업회 제2회 백봉신사상
2001년한국언론인연합회 올해의 정치인
2018년아시아문화경제진흥대상 정치외교부문
2018년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선정 국정감사 우수의원
2020년2019년도 입법 및 정책개발 우수 국회의원


8. 저서


  • 《개나리아저씨》 (1999년)
  • 《개성역에서 파리행 기차표를》 (2007년)
  • 《중산층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2007년)
  • 《트위터는 막걸리다》 (2010년)[83]
  • 《10년 후 통일》 (2013년)

9. 역대 선거 결과

(정당 득표)비례대표 22번없음선거 전 사퇴2007제17대 대선대통령대한민국대통합민주신당6,174,681표 (26.14%)2위낙선2008제18대 총선국회의원서울 동작구 을통합민주당36,251표 (41.50%)2위낙선20094.29 재보선국회의원전북 전주시 덕진구무소속57,423표 (72.27%)1위당선3선2012제19대 총선국회의원서울 강남구 을민주통합당48,419표 (39.26%)2위낙선20154.29 재보선국회의원서울 관악구 을무소속15,569표 (20.15%)3위낙선2016제20대 총선국회의원전북 전주시 병국민의당61,662표 (47.72%)1위당선4선2020제21대 총선국회의원전북 전주시 병민생당50,022표 (32.04%)2위낙선2024제22대 총선국회의원전북 전주시 병더불어민주당117,407표 (82.08%)1위당선5선[84][8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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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뉴스 기획입북설'吳風(오풍)의 눈'으로 안기부,국민회의에 수사협조요청 안팎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7-08-22
[65] 뉴스 기획 입북, 그런 뜻이 아니고 "물러선 정동영"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7-08-23
[66] 뉴스 국민회의'鄭(정)대변인 출두'거부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7-08-27
[67] 뉴스 국민회의-안기부 갈등 증폭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7-08-30
[68] 뉴스 「吳益濟(오익제)씨 입북」北(북)서 유인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7-08-29
[69] 뉴스 안기부,국민회의의 오익제 기획입북설은 꾸민 말 http://imnews.imbc.c[...] mbc뉴스데스크 1997-09-11
[70] 뉴스 국민회의 정동영 대변인,국민들도 이해·용서할 것 https://imnews.imbc.[...] mbc뉴스데스크 1997-12-22
[71] 뉴스 전노 사면 국민회의 한나라당 반응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97-12-23
[72] 뉴스 ″60∼70대 투표 안해도 된다″ 鄭의장,본보 총선기자단 인터뷰 발언 파문 https://news.naver.c[...] 국민일보 2004-04-01
[73] Youtube 정동영 발언 동영상 https://www.youtube.[...]
[74] 뉴스 정동영 60, 70대 유권자 폄하발언 논란 https://news.naver.c[...] 네이버 뉴스
[75] 뉴스 <한.민 `노인 폄하' 공세계속> https://news.naver.c[...] 네이버 뉴스
[76] 뉴스인용 “정동영 발언, 확대보도 당황스러워” https://news.naver.c[...] 미디어오늘 2004-04-02
[77] 웹사이트 민주당, '정동영 고향공천 배제' 확정 http://www.viewsnnew[...]
[78] 웹사이트 정동영씨 무소속 출마 실망스럽다 http://www.seoul.co.[...]
[79] 웹인용 정동영 배제? 민주, 전주덕진 전략공천키로 http://wwwga.vop.co.[...] 2012-04-03
[80] 뉴스 통일부, 정동영 개성공단방북 불허통보(종합) https://www.yna.co.k[...] 연합뉴스 2010-12-27
[81] 뉴스 정동영, 보수단체 회원에 머리채 잡혀 https://news.joins.c[...] 중앙일보 2011-08-16
[82] 뉴스 정동영 " 盧, 지역주의 인식에 문제 있다" https://news.naver.c[...]
[83] 기타
[84] 뉴스인용 [4·10 총선] ‘5선 당선’ 정동영 전주병 “윤석열 정권 종식·민생경제 혼신” https://www.asiatoda[...] 아시아투데이 2024-04-11
[85] 뉴스인용 [후보 득표현황]-전북(최종) https://www.yna.co.k[...] 연합뉴스 202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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