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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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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문익환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해방 후에는 신학자, 목사, 민주화 운동가, 통일 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1918년 중국 지린성 룽징에서 태어나 평양신학교, 일본 신학교, 한신대학교,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이후 연세대학교와 한신대학교에서 구약성경을 강의하며, 구약성서 번역 사업에 참여했다. 1970년대부터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여 여러 차례 투옥되었으며, 1980년대에는 통일 운동에 헌신했다. 1989년 북한을 방문한 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었고, 1990년대 초 범민련 활동과 관련하여 갈등을 겪다 1994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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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문익환
한글 이름문익환
한자 이름文益煥
로마자 표기Mun Ik-hwan
출생일1918년 6월 1일
출생지중화민국 지린성 룽징시 밍둥촌(明東村)
사망일1994년 1월 18일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국적대한민국
직업개신교 목사
사회운동가
시인
종교한국기독교장로회
활동 기간1947년 ~ 1994년
필명만춘
배우자박용길
문재린
김신묵
자녀문호근(장남)
문영금(딸)
문의근(차남)
문성근(3남)
형제자매문동환(동생)
문영환(동생)
문은희(여동생)
문익환과 친구들 (뒷줄 가운데가 문익환, 맨 우측이 윤동주)
주요 활동
소속前 전국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
前 평화민주당 상임고문
학력
학력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신학석사
업적
업적남북 통일 운동에 헌신

2. 학력 및 초기 생애

문익환은 1918년 만주국 간도 지역(현 중화인민공화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에서 목사 문재린과 어머니 신신묵 사이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한국 독립 운동의 중심지였던 간도에서 성장했다. 명동초등학교와 은진중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의 숭실중학교와 간도의 용정광명학교에 진학하였다.[3] 소년 시절을 윤동주 등과 함께 보냈다. 1945년 8월 간도에서 해방을 맞이하기 전까지 일본 동부신학교에 유학하였다.[3]

이후 1947년 한국신학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한국 전쟁에서는 미국군 통역장교를 역임했다. 1954년 프린스턴 신학교 대학원을 수료했다.[3] 1970년대까지 장로교회 목사로 일하면서, 한신대학교연세대학교에서 신학 교수를 역임하며 히브리 문학과 시편 연구에 종사했고, 1968년부터 구약 성서 번역에 참여했다.

2. 1. 학력

2. 2. 초기 생애

1918년 중화민국 지린성 룽징시 명동촌(현재의 중국 옌볜 조선족 자치주 룡정시 지산진)에서 문재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룽징에서 소학교를 다녔으며 윤동주, 장준하와 절친한 동무였다.[6][7] 아버지 문재린평양신학교근본주의적이니, 일본신학교에서 공부하라는 권유[8]1938년 도쿄의 일본 신학교에 입학했다.

일본신학교 입학 당시 문익환은 신학적인 갈등을 겪었다. 당시 일본신학교에서는 성서비평학이 활발했는데, 축자영감설을 믿고 있던 문익환에게 성서를 학문적으로 비평하여 해석하려는 성서비평학은 받아들이기 힘든 학문이었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경청하지 못하면 학문을 할 자격이 없다"라는 교수의 충고로 문익환은 성서비평학을 학문으로 존중하게 되었다.[8]

1947년에 한국신학대학교(현재 한신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였다. 1954년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구약성서신학 전공으로 신학석사학위를 받았다. 한국 전쟁에서는 미국군 통역장교를 역임했다.

3. 신학 활동 및 번역 사업

한국신학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서 구약성서학을 강의하였으며, 구약성서를 민중의 입장에서 해석한 《히브리민중사》(삼민사)를 쓰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개신교와 천주교의 공동번역성서 번역사업에 개신교 대표로 참여하였다. 문익환 목사가 공동번역 성서 번역에 참여한 이유는 당시 개역한글판의 단어와 문체가 한자를 모르는 독자들이 읽기에는 너무 어렵다는 데 있었다.[9] 그래서 문익환은 공동번역성서 번역에 동참하여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현대어 성서를 만들고자 하였다.[10] 8년 동안 한국의 개신교와 천주교가 공동으로 진행한 구약 성서 번역 작업의 주요 책임자로 일했다.[3]

4. 민주화 운동

문익환은 친구 장준하의 의문사를 계기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군부 독재 정권에 저항하며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1980년대 중반, 문익환은 재야 민주 세력을 결집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1985년). 1986년 서울대학교에서 연설 도중 이동수 학생의 분신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1987년 형집행 정지로 석방되었다.[12] 석방 다음 날, 이한열 열사의 영결식에 참석하여 민주화 열사들의 이름을 불렀는데, 마지막에는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의 이름이 불렸다.

1988년 노태우 정권이 “7·7 선언”을 통해 남북 교류를 제안하자, 이듬해 문익환은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회담하고 공동성명을 발표했으나, 귀국 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4. 1. 유신 시절

친구이자 사회운동가인 장준하의 의문사를 계기로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다. 1970년대~1980년대 국민들을 군대의 힘으로 억압하는 군부독재정권에 유신헌법의 비민주성을 비판(1978년)하는 등 여러 차례 저항하여 수차례 투옥되었다.[3]

1978년 윤보선은 일본에 체류 중인 정경모를 통해 국민연합 일본지부를 세우려 할 때, 문익환은 '아직도 그의 사상을 믿을 수 없다'라며 반대했다. 스승 김재준 목사가 정경모를 강력히 추천했을 때도 문익환은 그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11] 그의 강력한 반대로 국민연합 일본지부 결성은 무산되었다.

정경모일본으로 건너간 후 한민통의 신문 편집장을 했는데, 문익환은 그가 조총련 신문 편집장을 하고 있다고 오해했던 까닭에 이를 극렬 반대했던 것이다.[11] 후에 문익환이 '도쿄에서 만난 그리운 아우 정경모'를 사상적으로 의심하지 않고 다시 흉금을 터놓은 관계로 돌아설 수 있었던 것은 정경모의 저서 《찢겨진 산하》 때문이었다.[11] 79년 10월 유신 정권 붕괴 이후 문익환은 한동안 강경투쟁 노선에서는 한발 물러서 있었다.

4. 2. 1980년대 민주화 운동

문익환 목사는 1970년대부터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 인권 운동, 남북 통일 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1976년 민주구국선언을 기초하여 김대중 등과 함께 투옥되었고,[3] 1978년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을 비민주적이라고 비판하여 다시 투옥되었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피고가 되어 수감되었으며, 1986년에는 서울대학교 학생 운동권을 사주하고 5월 인천에서의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다시 투옥되었다.[4]

1984년에는 민주통일국민회의(후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에 취임하였다.

5. 통일 운동

1970년대부터 군사독재정권에 대항하여 민주화 운동, 인권 운동과 함께 남북 통일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1984년 민주통일국민회의(후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에 취임했고,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 1991년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5. 1. 군사독재정권 붕괴 이후

군사독재 정권이 붕괴되자 문익환 목사는 다시 통일운동을 개시하였다.

5. 2. 방북과 투옥

1988년 노태우 정부가 "7·7 선언"을 통해 남북 동포 간의 상호 교류 및 해외 동포의 자유로운 남북 왕래를 제안하자, 문익환 목사는 이듬해 북한을 방문하여 평양에서 김일성과 회담하고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귀국 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5] 당시 남한 법률은 사전 승인 없이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5] 1993년 봄, 문 목사는 1989년 북한 방문 및 통일 가능성에 대한 지도자들과의 논의 혐의로 5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조기 출소했다.[5]

5. 3. 범민련 재편 노력과 사망

1990년대 초부터 문익환 목사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 사이에 범민련 운영을 둘러싼 갈등이 커졌다. 문 목사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맞는 통일운동을 추구했으나,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이적단체로 지정된 범민련은 남측본부 결성 준비 과정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의 대남공작 도구로 이용된다는 논란이 있었다.[18][19] 문 목사는 이러한 한계와 대북 종속성을 극복하기 위해 범민련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대한민국 정부와도 협력할 수 있는 새로운 독자 통일운동 조직인 '민족회의'를 구상했다.[18][19]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북한은 백인준 범민련 북측본부 의장 명의로 '문 목사가 안기부의 사주를 받아 범민련을 해체하려 한다'는 내용의 팩스를 보냈다. 이 팩스 내용이 남측의 친북 통일운동 진영에 유출되면서 문 목사는 '안기부의 프락치'로 몰리며 비난받았다. 문 목사와 함께 방북했던 황석영 작가, 당시 문 목사의 비서 역할을 하던 하태경 의원 등은 이로 인해 문 목사가 사망 전날인 1994년 1월 17일 점심 식사 자리에서 모 인사와 언쟁을 벌이다가 음식물이 기도로 넘어가 실신했다고 증언했다.[20][21] 결국 문 목사는 이날 오후부터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다음 날인 1월 18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20][21] 문 목사의 차남인 문성근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인터뷰에서 "남북관계 개선이나 통일방향에 대한 방법론에 이견이 있었던 건 사실"이라고 인정했지만, 문 목사의 사망 경위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맞고 부분적으로 틀리다"라고 말했다.[22]

6. 문학 활동

1972년 《월간문학》에 〈추억의 커피잔〉, 〈미켈란젤로의 고독〉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하였으며, 〈히브리서 11장 1절〉, 〈십계명〉 등이 그의 작품이다.[17] 그는 《구약성서》의 히브리 정신에 바탕을 두고 한국적인 정신과 감성을 융화하여 얻어지는 가락과 언어를 발굴, 투명하고 섬세한 시 세계를 구축하였다.[17] 시집으로 《새삼스런 하루》가 있다.[17]

저서로는 『꿈이 찾아오는 새벽』(1984), 『옥중일기』(1991), 시집 『꿈을 기도하는 마음』(1978), 『문익환 전집』(1999) 등이 있다.

7. 기타

1992년 미국 친우 봉사회(AFSC)는 문익환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26] 미국 퀘이커 봉사 위원회(AFSC)는 1947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이래로, 노벨 평화상 후보 추천 규정에 따라 해마다 후보를 추천해오고 있다.[27]

7. 1. [[정일권]]과의 비교

문익환은 광명중학교 동문인 정일권과 같은 날 사망하여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윤동주도 광명중학교 동문이다. 문익환과 정일권은 같은 중학교를 다녔으나 서로 다른 삶을 살았고, 같은 날 사망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25]

정일권은 1940년대 만주국군과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며 친일 행위를 하였고,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친일파이다.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를 돕고, 외무부장관을 거쳐 국무총리가 되어 권력을 누렸으며, 국회의장까지 역임했다. 정인숙 살해 사건의 배후로 비난받기도 했으나, 정계에 복귀했다. 정일권은 2등에 만족한 처세의 달인이라는 비판도 받았다.[25]

반면 문익환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해방 후 성서학자로 활동하며 공동번역성서 번역에 참여했다. 장준하 의문사 후에는 '늦봄'이라는 호를 짓고 반독재 투쟁에 나섰다. 박정희 정권 하에서 반독재, 반유신 투쟁을 하고, 전두환 정권 하에서는 민주화 운동을 하며 11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일권과 문익환이 함께 세상을 떠나자 언론은 이들의 죽음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문익환의 영결식은 한신대에서 시작해 대학로, 동대문에 이르기까지 수십만 명의 시민이 참여한 노제로 치러진 반면, 정일권의 영결식은 정치인들만 참석하여 대조를 이루었다.

7. 2. [[노벨 평화상]] 후보 추천

1992년 미국 친우 봉사회가 문익환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26] AFSC1947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이래로, 노벨 평화상 후보 추천 규정에 따라 해마다 후보를 추천해오고 있다.[27]

8. 가족 관계

관계이름
아버지문재린
어머니김신묵
동생문동환
아내박용길
아들문호근
문영금
아들문의근
아들문성근


참조

[1] 웹사이트 씨네21 http://www.cine21.co[...] 2017-01-29
[2] 뉴스 Moon Ik Hwan Dies; Dictators' Foe Was 76 https://query.nytime[...] 1994-01-20
[3] 웹사이트 http://100.empas.com[...] Empas / EncyKorea
[4] 서적 The Koreans: Contemporary Politics and Society 1996
[5] 뉴스 Moon Ik Hwan Dies; Dictators' Foe Was 76 The New York Times 1994-01-20
[6] 뉴스인용 떠돌이 목자의 노래 - ‘민족운동의 요람’서 운명을 타고나다 http://www.hani.co.k[...] 한겨레 2008-08-12
[7] 웹사이트 문익환 목사의 아들 배우 문성근씨도 무릎 팍 도사에 출연하여 아버지가 윤동주 시인과 친구였다고 증언하였다.
[8] 서적인용 통일 할아버지 문익환 (사계절아동문고 28) 사계절
[9] 웹사이트 대한성서공회 개역한글판 역대하 2장 http://www.bskorea.o[...]
[10] 웹사이트 대한성서공회 공동번역 역대기하 2장 http://www.bskorea.o[...]
[11] 서적 문익환 평전:역사인물찾기 15 실천문학사 2004
[12] 학위논문 문익환의 통일론과 통일운동에 대한 연구 2012-06-04
[13] 간행물 빛과 소금 두란노 2004-07
[14] 뉴스 북한,조국통일상에 임양ㆍ운동권 학생도 한국일보 1990-08-17
[15] 웹인용 한신대 고 문익환 목사 시비 제막식 국민일보 2007년 6월 18일자 http://www.kukinews.[...] 2007-08-13
[16] 웹인용 《26년》연재 사이트 http://cartoon.media[...] 2008-03-02
[17] 기타
[18] 뉴스인용 [이슈인물] 국가인권위 상임위원 내정 논란 전향한 김일성주의자 홍진표 https://news.naver.c[...] 신동아 2012-06-18
[19] 뉴스인용 "문익환, 북한이 프락치로 몰아 화병으로 죽었다"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12-06-18
[20] 뉴스인용 황석영 "문익환 목사도 '안기부 앞잡이'라 공격당해" http://www.viewsnnew[...] 뷰스앤뉴스 2012-06-18
[21] 뉴스인용 “안기부 프락치로 몬 북한에 분개… 문 목사 죽음 한 원인”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2020-08-30
[22] 뉴스인용 안철수 교수, 민주당 원샷 경선에 참여해야 - 민주통합당 문성근 상임고문 http://www.imbc.com/[...] MBC 2012-06-19
[23] 서적 윤보선회고록:외로운 선택의 나날들 동아일보사 1991
[24] 서적 윤보선회고록:외로운 선택의 나날들 동아일보사 1991
[25] 뉴스 동아일보 1994-01-19
[26] 뉴스 노벨평화賞(상)후보 文益煥(문익환)목사추천 http://newslibrary.n[...] 1992-02-01
[27] 뉴스 인터뷰 노벨平和賞(평화상)후보에 추천된 咸錫憲(함석헌)옹 "힘이 正義(정의)가 아니라 正義(정의)가 힘" http://newslibrary.n[...] 1985-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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