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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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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선쥔루는 1875년 쑤저우에서 태어나 자싱 시 출신으로, 과거 시험에서 진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호세이 대학에서 유학했으며, 1936년 7군자 사건으로 체포되었으나 중일 전쟁 발발 후 석방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초대 최고인민법원 원장,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63년 베이징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고택은 기념관으로, 상하이의 공원은 그의 호를 따서 명명되었다.

2. 생애

30대~40대의 선쥔루


선쥔루는 쑤저우에서 태어났으며, 가계는 자싱 시 출신이다. 과거 시험에서 최고 등급인 진사 학위를 받았으며, 1905년 일본 도쿄호세이 대학에서 속성 과정을 수료했다.

1936년, 선쥔루와 상하이의 다른 지식인 6명은 장제스 정부에 의해 체포되었는데, 이는 7군자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은 국가적 위기를 초래했으며, 이들은 1937년 일본이 침략을 시작한 후에야 석방되었다.[1]

1949년, 선쥔루는 제1차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CPPCC)에 참석하여 초대 최고인민법원 원장과 중앙인민정부 위원에 임명되었고, 이후 1963년까지 CPPCC 전국위원회 부주석을 역임했다.

1954년부터 1963년까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1955년부터 1963년까지 중국 민주 동맹 주석, 그리고 중국 정치 법률 연구 협회() 부주석을 역임했다.

선쥔루가 역임한 주요 직책은 다음과 같다.

직책재임 기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중앙인민정부위원1949년
최고인민법원 원장1949년 ~ 1954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1949년 ~ 1963년
중국민주동맹 중앙 부주석1949년 ~ 1955년
중국민주동맹 중앙 주석1955년 ~ 1963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1954년 ~ 1963년
중국정치법률학회 부회장(상세 기간 불명)


2. 1. 청조 말기

1904년(광서제 30년) 진사에 급제하여 1905년 일본 호세이 대학(法政大學, 법정대학)에 유학하였다. 1907년 청나라로 돌아와 1909년 저장성 자의국 부의장(浙江省 諮議局 副議長, '''저장성 지방의회 부의장''')을 역임했다.[1]

1900년 (광서 26년), 부친이 사망하여 시안으로 가서 숙부 밑에서 문서 계원을 맡았다. 1903년 (광서 29년), 거인이 되었고, 이듬해 진사가 되었다.[1]

1905년 (광서 31년) 9월, 일본 호세이 대학법정 속성 과에서 공부하며 입헌파로서의 자세를 굳혔다. 1907년 (광서 33년)에 귀국하여 저장성 자의국 부의장, 저장 량급 사범 학당 감독 등을 역임하며 입헌 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청조의 무능과 부패를 개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인식하고 혁명파로 전향하였다.[1]

신해혁명 발발 후, 저장성 도독부에서 경찰국장으로 임명되었다. 1912년 (민국 원년) 5월, 중국 동맹회에 가입하고, 8월에는 류야쯔 등과 난서를 창설했다. 이후 저장성 교육사 사장, 참의원 의원을 역임했으며, 위안스카이의 황제 즉위에 반대하였다.

2. 2. 중화민국 시기

1912년 중국동맹회(중국 국민당의 전신)에 가입하였다.

1922년 중화민국 북경정부 참의원 비서장(중화민국 북경정부 '''상원의회 비서실장 겸 사무총장''')을 지냈고, 1926년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 북벌군이 저장성을 함락시키고 임시정부를 세우자, 저장성 임시정부 정무위원 겸 비서장(저장성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비서실장''')이 되었다.

1927년 상해법과대학 교무장(상해법과대학 총장)이 되었고, 4·12 사건(4·12 정변) 이후 통공(通共) 혐의로 한때 구금되었다가 석방 후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33년 중국민권보장동맹에 가입하였다.

1935년 상해문화계 구국회를 조직하고, 1936년 전국 각계 구국연합회를 결성하였다. 같은 해 11월, 칠군자 사건으로 국민당 정부에 체포되어 유명한 '''칠군자(七君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후 풀려나, 1939년 통일건국동지회를 결성하고 1941년 황염배 등과 중국민주정단동맹을 발족하였다.

1944년 중국민주정단동맹이 중국민주동맹으로 개칭되고,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5년 중일전쟁이 끝나고, 중국인민구국회 주석을 맡았다.

1946년 중국민주동맹 대표(민맹 좌파)의 하나로 충칭에서 열린 중국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하였다.

1947년 중국 국민당 정부는 국공내전에 반대하던 중국민주동맹을 해산시켰고, 민주동맹은 1948년 홍콩에서 열린 민주동맹 1기 3중전회에서 중국 공산당과 연립 정부를 설립할 것이라고 성명하였다.[4]

2. 3. 중화인민공화국 시기

선쥔루는 1949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기 전체회의에 참석하여 중앙인민정부위원에 당선되었다.[5] 1949년부터 1954년까지 초대 최고인민법원 원장(대법원장)을 역임하였다.[5] 또한, 1949년부터 1963년까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을 역임했다.

1954년부터 1963년까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국회 부의장)을 역임하였고,[5] 1955년부터 1963년까지 중국 민주 동맹 주석을 역임하였다.[5] 그 외에도 중국정치법률학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다음은 선쥔루가 역임한 주요 직책을 표로 정리한 것이다.

직책재임 기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중앙인민정부위원1949년
최고인민법원 원장1949년 ~ 1954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1949년 ~ 1963년
중국민주동맹 중앙 부주석1949년 ~ 1955년
중국민주동맹 중앙 주석1955년 ~ 1963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1954년 ~ 1963년
중국정치법률학회 부회장(상세 기간 불명)


3. 항일 운동과 칠군자 사건

1931년 만주 사변이 발발하자, 선쥔루는 이에 반발하여 항일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3] 1933년 쑹칭링, 차이위안페이, 루쉰 등이 결성한 중국 민권 보장 동맹에 가입하였다.[3] 1935년 상하이 문화계 구국회(上海文化界 救國会)를 조직하고,[3] 1936년 전국 각계 구국 연합회(全國 各界 救國聯合会)를 결성하였다.[4] 같은 해 11월, 칠군자 사건으로 국민당 정부에 체포되어 쑤저우의 장쑤 고등법원 간수소에 수감되었다.[1][3] 이는 국가적 위기를 초래했으며, 중일 전쟁이 발발한 1937년에 7명의 인사는 석방되었다.[1]

석방 후 선쥔루는 한커우에서 항적 구망 총회를 결성하고 주석이 되었으며, 기관지 '전민 주간'을 창간하였다. 1938년 '전민 주간'은 저우타오펀이 간행하던 '항전 삼일간'과 합병하여 '전민 항전 삼일간'으로 간행되었다. 또한, 저우타오펀, 타오싱즈 등과 함께 국민 참정회 참정원이 되었다.

4. 중국민주동맹 활동과 중화인민공화국 참여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후 석방된 선쥔루는 1939년 통일건국동지회(统一國同志會)를 결성하고, 1941년 황옌페이(黄炎培) 등과 중국민주정단동맹(中國民主政團同盟)을 발족하였다.[1]

1944년 중국민주정단동맹이 중국민주동맹(中國民主同盟)으로 개칭되면서 중앙상무위원(中央常務委員)으로 선출되었다.[1]

1945년 중일전쟁이 끝나자 중국인민구국회 주석(中國人民救國会 主席)을 맡았다.[1]

1946년 중국민주동맹 대표(민맹 좌파)로 충칭에서 열린 중국정치협상회의(中國政治協商會議)에 참가하였다.[1]

1947년 중국 국민당 정부는 국공내전에 반대하던 중국민주동맹을 해산시켰으나, 민주동맹은 1948년 홍콩에서 열린 민주동맹 1기 3중전회에서 중국 공산당과 연립 정부를 설립할 것이라고 성명하였다.[1]

1949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 제1기 전체회의에 참석하여 중앙인민정부위원(中央人民政府委員)에 당선되었다.[1]

1949년부터 1954년까지 '''초대'''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 원장(最高人民法院 院長, '''대법원장''')을 역임하였다.[1]

1949년부터 1963년까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 全國委員會 副主席, 정협 전국위원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임기별 구분은 다음과 같다.

임기직함
1949년 ~ 1954년제1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
1954년 ~ 1959년제2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
1959년 ~ 1963년제3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

[1]

1949년부터 1963년까지 중국민주동맹 중앙 주석 및 부주석을 역임하였다. 임기별 구분은 다음과 같다.

임기직함
1949년 ~ 1955년제1기 중국민주동맹 중앙 부주석
1955년 ~ 1960년제2기 중국민주동맹 중앙 주석
1960년 ~ 1963년제3기 중국민주동맹 중앙 주석

[1]

1954년부터 1963년까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全國人民代表大會 常務委員會 副委員長, '''국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임기별 구분은 다음과 같다.

[5]

중국정치법률학회 부회장(中國政治法律學會 副會長)을 역임하였다.[1]

5. 사망

선쥔루의 유해가 베이징에 안치되어 있다.


선쥔루는 1963년 6월 11일 이른 아침, 오랜 지병으로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6. 유산

선쥔루는 중국 민주혁명과 정치 발전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으며, 그의 정신과 업적은 여러 형태로 기념되고 있다.

저장성 가흥(嘉興)에는 1993년 저장성 문화재 보호 단위로 지정된 선쥔루의 집터가 있고, 선쥔루 기념관(沈鈞儒 記念館)이 건립되어 있다.[1] 형산공원(衡山公園)은 선쥔루의 호 형산(衡山)을 따서 이름 지어졌다.

6. 1. 선쥔루 고택과 기념관

저장성(浙江省) 가흥(嘉興)에 1993년 저장성 문화재 보호 단위로 지정된 선쥔루의 집터가 있으며, 이곳에는 선쥔루 기념관(沈鈞儒 記念館)이 건립되어 있다.

6. 2. 형산공원과 선쥔루 동상

형산공원(衡山公園)은 선쥔루의 호 형산(衡山)을 따서 이름 지어진 공원이다.[1]

참조

[1] 논문 Demythologizing Politicized Myths: A New Interpretation of the Seven Gentlemen Incident 2013
[2] 서적 最新支那要人伝
[3] 문서
[4] 문서 상해법학원 원장(上海法学院 院長)
[5] 웹사이트 베이징관광국 http://visitbeij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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