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나이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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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쇼나이번은 도쿠가와 사천왕 중 한 명인 사카이 다다쓰구의 후손인 사카이 가문이 1622년 13만 8천 석으로 쇼나이에 입봉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4만 석으로 영지를 확장했으며, 쇼나이 평야의 쌀과 사카타의 수입으로 번성했다. 5대 번주 사카이 다다요리의 과도한 지출로 재정이 악화되었으나, 혼마 미쓰오카의 개혁과 농업 개혁을 통해 재정을 회복했다. 1840년에는 영지 교체 위기를 겪었으나 백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보신 전쟁에서 신정부군에 대항했으나 패배하여 1871년 폐지되었다. 사카이 가문은 이후 백작가를 설립하여 존속했으며, 현재까지 후손들이 가문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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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다이번은 1601년 다테 마사무네가 센다이 성으로 거점을 옮기면서 성립된 에도 시대의 번으로, 농업을 기반으로 경제를 운영하며 보신 전쟁에서 패배하여 폐지되었다. - 데시오국의 번 - 구보타번 (데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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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나이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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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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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쇼나이 번 |
다른 이름 | 쓰루오카 번 |
유형 | 번 |
국가 | 도쿠가와 막부 아래 |
정치 체제 | 다이묘 |
수도 | 쓰루가오카 성 |
현재 위치 | 야마가타현 일부 |
역사 | |
시작 | 1622년 |
종료 | 1871년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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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적 배경
에도 시대 데와국 쇼나이 지방(현 야마가타현 해안부)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번이다. 번주 가문은 도쿠가와 사천왕 중 한 명인 사카이 다다쓰구를 시조로 하는 사카이 가문으로, 후다이 다이묘의 명문에 속했다.
1622년(겐나 8년), 이 지역을 다스리던 모가미 씨가 영지를 몰수당하자, 시나노국 마쓰시로번주였던 사카이 다다카쓰가 13만 8천 석의 영주로 쇼나이에 들어오면서 쇼나이번이 성립되었다. 이후 영지 조정과 가문 내 분쟁 수습 과정을 거치며 번의 기틀을 다졌다.
쇼나이번은 비옥한 쇼나이 평야의 쌀 생산과 사카타 항을 통한 기타마에부네 무역을 기반으로 초기에는 재정이 풍족했으나, 5대 번주 사카이 다다요리 대에 막부 정치 참여와 닛코 동조궁 수리 비용 부담 등으로 재정이 악화되었다. 7대 번주 다다아리 때에는 빚이 20만 량을 넘어서자, 사카타의 대지주 혼마 미쓰오카에게 재정 재건을 위임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이후 농촌 개혁 등을 통해 재정은 점차 호전되었고, 덴메이 대기근이나 덴포 대기근 시기에도 다른 번에 비해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1805년에는 번교인 치도칸을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도 힘썼다.
1840년(덴포 11년), 막부의 삼방 영지 교체( 三方領知替え일본어 ) 계획으로 번이 위기를 맞았으나, 번 백성들의 강력한 반발과 직소로 계획이 철회되었다. 이는 영주와 백성 간의 강한 유대를 보여주는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막말 시기에는 에도 경비 등의 공으로 영지가 16만 7천 석까지 증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1868년 1월, 에도의 사쓰마 번 저택 습격 사건에 가담하여 보신 전쟁 발발의 구실을 제공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아이즈번과 함께 오우에쓰 열번동맹의 중심 세력으로 신정부군에 맞서 싸웠다. 혼마 가문의 재정 지원과 최신 무기 도입으로 선전했으나, 주변 번들의 항복으로 결국 1868년 9월 항복했다.
전쟁 후 영지 몰수, 감봉, 전봉 등의 처분을 받았으나, 번사들과 상인, 지주들이 30만 량을 헌납하고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도움으로 1870년 쇼나이로 복귀할 수 있었다. 같은 해 번의 이름이 오이즈미 번( 大泉藩일본어 )으로 바뀌었고, 1871년 폐번치현으로 오이즈미 현이 되었다가 이후 야마가타현에 편입되었다. 사카이 가문은 1884년 화족 백작위를 받았다.
2. 1. 초기
번주 가문인 사카이 가문은 도쿠가와 사천왕 중 한 명인 사카이 다다쓰구의 적통으로, 후다이 다이묘의 명문에 해당한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지금의 야마가타현 일대를 지배하던 모가미 씨가 가문 내 분쟁(모가미 소동)으로 인해 겐나 8년(1622년) 결국 영지를 몰수당하자, 옛 영지가 네 곳으로 나뉘었다. 이때 시나노 마쓰시로번주였던 사카이 다다카쓰는 3만 8천 석을 추가로 받아 총 13만 8천 석의 영주로서 쇼나이에 들어오면서 쇼나이번이 시작되었다. 번의 영지는 다가와군, 아쿠미군, 무라야마군의 3개 군으로 이루어졌다.겐나 9년(1623년)에 실시된 검지 결과, 실제 수확량이 장부상보다 5만 3천 석 이상 많을 것으로 예상되어 막부에 20만 석에 준하는 대우를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간에이 9년(1632년), 막부로부터 히고국 구마모토번에서 영지를 몰수당한 가토 다다히로를 맡아달라는 지시를 받았다. 다다카쓰는 이를 받아들이는 대신, 다다히로에게 영지 내 마루오카성 1만 석을 그가 살아있는 동안 제공하기로 했다. 그 대가로 막부는 다다카쓰의 동생 사카이 나오쓰구가 다스리던 옛 아테라자와번 영지 1만 2천 석을 다다카쓰에게 주어, 쇼나이번의 공식적인 영지 규모는 14만 석이 되었다. 이후 쇼나이번은 옛 모가미 가문 영지에 세워진 네 번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검지를 통해 밝혀진 추가 5만 3천 석은 고스란히 농민들의 연공 부담 증가로 이어졌다. 특히 유사군(遊佐郷)에서는 기존 5,700석 정도였던 연공이 1만 석으로 늘어나자 농민들이 크게 반발하여, 44가구 400여 명이 영지를 떠나 인근 지역으로 도망가는 소동이 벌어졌다. 간에이 11년(1634년)에는 유사군의 다이칸이었던 다카하시 다로자에몬이 직접 막부에 이러한 가혹한 실정을 상소하기에 이르렀다. 다로자에몬은 금지된 직소를 했다는 죄로 투옥되었으나, 막부에서 조사를 위해 관리가 파견된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급히 석방되었다. 그는 동생과 함께 에도로 가서 막부 관료들에게 직접 호소하여 번의 문제를 알렸다.
한편, 번 내부에서는 번주 다다카쓰의 동생 사카이 다다시게가 가문을 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다다시게는 본래 하타모토로서 데와국 무라야마군 시라이와에 8천 석 영지를 가졌으나, 가혹한 통치로 잇키가 일어나 영지를 몰수당하고 형 다다카쓰에게 의탁하는 신세였다. 앙심을 품은 다다시게는 자신의 아들 다다히로를 다다카쓰의 딸과 혼인시킨 뒤, 다다카쓰의 적자인 사카이 다다마사를 몰아내고 다다히로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쇼호 3년(1645년), 다다시게는 다다마사의 후견인이던 필두 가로 고리키 기헤를 추방하고 그 일파를 숙청했다. 그러나 다다마사를 폐적시키기 직전 다다카쓰가 병으로 사망하면서, 유언대로 다다마사가 2대 번주 자리를 잇게 되었다(사카이 나가토노카미 일건).
번주가 된 다다마사는 숙부 다다시게에게 2만 냥을 주어 관계를 끊고 가문의 혼란을 수습했다. 동시에 가문의 안정을 위해 둘째 동생 다다쓰네에게 마쓰야마 2만 석을, 여섯째 동생 다다토키에게 오야마 1만 석 영지를 나누어 주어 분쟁의 소지를 없앴다.
2. 2. 중기
도쿠가와 사천왕 중 한 명인 사카이 다다쓰구를 시조로 하는 후다이 다이묘 사카이 가문은 겐나 8년(1622년), 모가미 씨가 영지를 몰수당한 후 분할된 영지 중 하나인 쇼나이에 13만 8천 석의 영주로 봉해지면서 쇼나이 번을 열었다. 당시 번주는 마쓰시로번주였던 사카이 다다카쓰였다. 간에이 9년(1632년), 막부로부터 넘겨받은 옛 구마모토번주 가토 다다히로에게 마루오카 1만 석을 주는 대신, 사카이 나오쓰구의 아테라자와 번 1만 2천 석을 편입하여 총 14만 석의 영지를 확보하고, 옛 모가미 영지에 위치한 네 번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초대 번주 다다카쓰 사후, 그의 동생 사카이 다다시게가 자신의 아들 다다히로( 忠広일본어 )를 번주로 세우려 다다카쓰의 아들 사카이 다다마사를 폐적시키려 시도했으나, 다다카쓰의 유언에 따라 다다마사가 2대 번주로 취임했다. 다다마사는 다다시게와 2만 냥으로 의절하고, 동생들에게 각각 마쓰야마 2만 석(다다쓰네), 오야마 1만 석(다다토키)을 나누어 주며 가문의 분란을 정리했다.
쇼나이 번은 쇼나이 평야의 풍부한 쌀 생산과 기타마에부네의 기항지로 번성한 사카타 항의 수입 덕분에 초기에는 재정이 유복하여 실제 수입이 30만 석 이상이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5대 번주 사카이 다다요리가 가가번의 마에다 가문과 혼인하고 로주로서 막부 정치에 참여하며, 닛코 동조궁 수리 비용까지 부담하게 되면서 막대한 지출로 인해 적자 재정으로 돌아섰다. 7대 번주 다다아리(다다토쿠) 대에는 빚이 20만 냥을 넘어서게 되었다.
이에 번은 사카타의 대지주 혼마 시로사부로 미쓰오카( 本間四郎三郎光丘일본어 )에게 재정 재건을 맡겼다. 혼마는 번의 지출을 줄이고 채무 변제 계획을 세워 실행했으며, 기근에 대비한 비축미를 마련하는 등 개혁을 추진했다. 비록 덴메이 대기근으로 인해 개혁이 잠시 어려움을 겪었으나, 후루카와 고쇼켄은 그의 저서 『동유잡기』에서 당시 도호쿠 지방의 다른 번들과 달리 쇼나이 번 영내 백성들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기록하며 번의 선정을 높이 평가했다.[4]
이후 간세이 7년(1795년), 로주 다케우치 하치로에몬을 중심으로 농촌 개혁이 다시 추진되었다. 농민들의 부채를 탕감하고, 부유한 농민에게는 곤궁한 이들을 돕기 위한 쌀을 납부하게 하여 기근 구제 자금으로 활용했으며, 버려진 공유지를 경작하도록 장려하는 등 다양한 정책이 성공을 거두었다. 이를 통해 농촌이 재건되고 세수입이 안정되어 번 재정은 점차 호전되었다. 덴포 대기근 시기에도 다른 지역에서 쌀을 사들이고 배급제를 실시하는 등 적극적인 대처로 도호쿠 지방의 다른 번들에 비해 기근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이러한 기근 대처 경험은 훗날 삼자 영지 교체 시도 시 백성들의 행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설도 있다.
분카 2년(1805년), 7대 번주 다다토쿠는 번교인 치도칸을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도 힘썼으며, 번교 운영에는 다자이 슌다이의 가르침을 받은 시라이 야타유가 임명되었다.
덴포 11년(1840년), 8대 번주 사카이 다다카타 대에 쇼나이 번은 큰 위기를 맞았다. 당시 가와고에번주 마쓰다이라 나리쓰네는 거듭된 영지 이동과 수해로 막대한 빚을 지고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쇼나이 번의 호전된 재정 상태(실제 수입 20만 석 이상)를 알고, 쇼나이로 영지를 옮길 계획을 세웠다. 나리쓰네는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아들 기고로(훗날의 마쓰다이라 나리사다)를 양자로 들이고, 그 대가로 당시 大御所|오고쇼일본어였던 이에나리에게 쇼나이로의 전봉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나리쓰네는 쇼나이로, 다다카타는 에치고 나가오카로, 나가오카 번주 마키노 다다마사는 가와고에로 이동하는 三方領知替え|산포 료치카에일본어 (삼자 영지 교체) 명령이 내려졌다.
이 결정에 대해 덴포 12년(1841년) 1월, 쇼나이 번의 백성 수천 명이 에도로 가서 영지 교체 명령 철회를 직접 호소하는 전대미문의 사건( 天保義民事件|덴포 기민지켄일본어 , 덴포 의민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행동은 본래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으나, 백성들이 영주를 지키기 위해 나선 이례적인 행동은 오히려 막부 관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결국 그해 7월, 도쿠가와 이에나리와 마쓰다이라 나리사다가 연이어 사망하면서 영지 교체 명령은 철회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의 여파로 쇼나이 번은 인바 늪 준설 공사에 동원되는 징벌적 조치를 받게 되었다.
2. 3. 삼방 영지 교체(三方領知替え) 위기
덴포 11년(1840년), 8대 번주 사카이 다다카타 대에 쇼나이 번은 큰 위기를 맞이했다. 당시 무사시국 가와고에번의 번주였던 마쓰다이라 나리쓰네는 거듭된 영지 이동(전봉転封|덴포일본어)으로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고, 수해 등으로 영지 내 사정이 어려워 재정적으로 큰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때 쇼나이 번의 재정이 호전되어 실제 수입이 20만 석 이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 나리쓰네는 쇼나이 번으로 옮겨갈 계획을 세웠다.나리쓰네는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21번째 아들 기고로(훗날의 마쓰다이라 나리사다)를 양자로 맞이하고, 그 대가로 당시 오고쇼(大御所)였던 이에나리에게 쇼나이 번으로의 전봉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나리쓰네는 가와고에에서 쇼나이로, 쇼나이 번주 사카이 다다카타는 에치고국 에치고 나가오카 번으로, 나가오카 번주 마키노 다다마사는 가와고에로 이동하는 이른바 삼방 영지 교체(三方領知替え|산포료치카에일본어) 계획이 수립되었다.
이 계획이 알려지자, 덴포 12년(1841년) 1월 20일, 쇼나이 번의 백성들은 에도로 올라가 막부에 영지 교체를 취소해 달라고 직소(直訴)했다. 이러한 백성들의 행동은 당시로서는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중죄였으나, 영주의 잘못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주를 지키려는 전례 없는 행동이었기에 막부 관리들로부터도 높이 평가받았다.
결국 그해 7월, 도쿠가와 이에나리와 그의 아들이자 나리쓰네의 양자였던 마쓰다이라 나리사다가 연이어 사망하면서 영지 교체 명령은 철회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쇼나이 번은 막부로부터 인바 늪 준설 공사 참여라는 징벌적 성격의 오테쓰다이후신御手伝普請|오테쓰다이후신일본어을 명령받게 되었다.
2. 4. 막말(幕末)과 보신 전쟁(戊辰戦争)
덴포 11년(1840년), 8대 번주 사카이 다다카타 시절, 막부는 쇼나이 번을 에치고 나가오카 번으로 옮기고, 대신 가와고에번주 마쓰다이라 나리쓰네를 쇼나이로 보내려는 삼자 영지 교체 계획을 세웠다. 이는 쇼나이 번의 부유함을 노린 나리쓰네가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아들을 양자로 들이고 청탁한 결과였다. 이에 쇼나이 번의 백성들은 1841년 에도로 가서 영지 교체 취소를 직소(直訴)하였고, 영주를 지키려는 백성들의 행동은 이례적으로 평가받았다. 결국 1841년 7월, 이에나리와 그의 아들이 사망하면서 영지 교체 명령은 철회되었으나, 쇼나이 번은 처벌로서 인바 늪 준설 공사에 동원되었다.막말 시기 쇼나이 번은 에도의 방어와 경비 임무를 맡았다. 겐지 원년(1864년) 에도 시가지 경호의 공으로 17만 석 격이 되었고, 게이오 원년(1865년)에는 옛 영지였던 무라야마군 야치 지방 등을 중심으로 2만 7천 석이 추가되어, 영지 규모는 16만 7071석이 넘게 되었다.[6]
게이오 3년 12월(1868년 1월), 쇼나이 번은 가미노야마번 등과 함께 에도 사쓰마한 저택에 대한 습격을 명령받아 실행했다. 이는 보신 전쟁 발발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메이지 정부군이 도쿠가와 쇼군가를 무력으로 토벌하고 쇼나이 번을 공격하는 구실이 되었다.
1868년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1867년 마쓰다이라 곤주로를 중심으로 한 파벌이 공무합체파를 탄압하고 체포, 투옥을 통해 번의 여론을 통일시킨 뒤, 아이즈번과 함께 오우에쓰 열번동맹의 중심 세력 중 하나가 되었다. 다만, 오우에쓰 열번동맹은 아이즈 번과 쇼나이 번의 사죄와 탄원을 목적으로 결성되었기에, 정확히는 두 번은 동맹에 가입하지 않았고 대신 아이즈-쇼나이 동맹을 체결했다. 쇼나이 번은 당시 일본 제일의 지주로 불리며 번의 재정을 후원하던 상인 혼마 가문의 막대한 헌금을 바탕으로 상인 Edward and Henry Schnell|스넬 형제eng로부터 스나이더 소총 등 최신식 병기를 구입했다.
쇼나이 번 군대는 메이지 정부 측에 가담한 신조번과 구보타 번 영내로 침공했다. 기요카와구치에서는 침입하는 메이지 정부군을 격퇴하고 신조를 함락시켰다. 이후 내륙과 연안에서 아키타번으로 침공한 쇼나이 군은 중로의 가로 사카이 겐바가 이끄는 2번 대대를 중심으로 연전연승하며 메이지 정부군을 압도했다. 내륙에서는 요코테성을 함락시킨 후 더욱 북상하여 구보타 성에 접근했다. 그러나 신정부 측이 아키타 전선에 암스트롱포나 스펜서 소총 등 최신 병기로 무장한 사가번(정확히는 사가 번 내 무사 나베시마 가문)의 병력을 원군으로 투입하면서 전선은 옛 번 경계 부근까지 밀려나 교착 상태가 되었다.
전쟁 중 쇼나이 번은 아이즈 번과 함께 당시 프로이센 왕국의 주일 대리 공사 막스 폰 브란트를 통해 에조치(홋카이도) 영지 할양을 제안하고, 그 대가로 병기·자금 원조나 군사 개입을 얻으려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7][8] 그러나 열번동맹의 맹주 중 하나인 요네자와번이 항복하고, 아이즈 번마저 항복하면서 쇼나이 번을 제외한 모든 번이 항복했다. 결국 메이지 원년9월 26일(1868년11월 10일), 쇼나이 번도 항복했지만, 마지막까지 자력으로 신정부군의 영내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메이지 원년 12월, 영지가 몰수되었다. 11대 번주 사카이 다다아쓰는 징계 처분을 받았지만, 동생 사카이 다다미치가 12만 석으로 감봉된 후 무쓰국 아이즈 번으로 이봉되었고, 이듬해 메이지 2년(1869년) 6월에는 이와키 다이라 번으로 다시 전봉 명령을 받았다. 이에 혼마 가문을 중심으로 번사, 상인, 지주 등이 메이지 정부에 30만 량(당초 70만 량이었으나 마련하지 못해 감액이 인정됨)을 헌납하여, 메이지 3년(1870년) 사카이 가문은 쇼나이 번으로 복귀했다. 함께 열번동맹의 맹주였던 아이즈 번이 해체와 유배 처분을 받은 것과 달리, 쇼나이 번은 비교적 가벼운 처분으로 끝났다. 여기에는 메이지 정부군 내 사쓰마번 출신 사이고 다카모리의 의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인연으로 메이지 3년 11월, 옛 쇼나이 번주 사카이 다다아쓰가 옛 번사 78명과 함께 가고시마에 들어갔고, 이후에도 옛 가로 스가 미네히데 등이 가고시마를 방문하여 사이고 다카모리(사이고 난슈옹)를 직접 만나는 기회를 얻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난슈옹의 유훈을 정리한 『사이고 난슈옹 유훈』(西郷南洲翁遺訓일본어)이 옛 쇼나이 번사들에 의해 메이지 초기에 정리되었다. 현재도 난슈옹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재단법인 쇼나이 난슈회에서 난슈 신사(南洲神社일본어)를 운영하고 있다.
메이지 2년 9월 29일, 번명은 오이즈미 번(大泉藩일본어)으로 개칭되었다. 같은 해 히다카국 아부타군을 영지로 삼았다. 메이지 4년(1871년) 폐번치현에 의해 오이즈미 현이 되었다. 이후 사카타현이나 쓰루오카현으로 개명을 거쳐, 1876년8월 21일에 야마가타현에 편입되었다. 사카이 가문은 메이지 17년(1884년)에 백작이 되어 화족에 올랐다.
쇼나이 번 출신의 저명한 인물로는 영내 기요카와 촌 출신의 지사 기요카와 하치로가 있다.
3. 역대 번주
쇼나이번은 보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사카이씨가 통치했다. 번주 가문인 사카이씨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이자 도쿠가와 사천왕 중 한 명인 사카이 다다쓰구의 직계 후손이며, 사카이씨 좌위문위가(左衛門尉家)로서 후다이 다이묘의 명문 가문이다.
# | 이름 | 재임 기간 | 칭호 | 궁중 직책 | 석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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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사카이 다다카쓰 酒井忠勝일본어 | 1622년 ~ 1647년 | 궁내대보(宮内大輔) | 종사위하(従四位下) | 13만 8천석 → 14만석 |
2 | 사카이 다다마사 酒井忠当일본어 | 1647년 ~ 1660년 | 셋쓰노카미(摂津守) | 종사위하(従四位下) | 14만석 |
3 | 사카이 다다요시 酒井忠義일본어 | 1660년 ~ 1681년 | 좌위문위(左衛門尉) | 종사위하(従四位下) | 14만석 |
4 | 사카이 다다자네 酒井忠真일본어 | 1682년 ~ 1731년 | 좌위문위(左衛門尉) | 종사위하(従四位下) | 14만석 |
5 | 사카이 다다요리 酒井忠寄일본어 | 1731년 ~ 1766년 | 좌위문위(左衛門尉); 시종(侍従) | 종사위하(従四位下) | 14만석 |
6 | 사카이 다다아쓰 酒井忠温일본어 | 1766년 ~ 1767년 | 좌위문위(左衛門尉) | 종사위하(従四位下) | 14만석 |
7 | 사카이 다다아리 酒井忠徳일본어 | 1767년 ~ 1805년 | 좌위문위(左衛門尉) | 종사위하(従四位下) | 14만석 |
8 | 사카이 다다카타 酒井忠器일본어 | 1805년 ~ 1842년 | 좌위문위(左衛門尉); 좌근위소장(左近衛少将) | 종사위하(従四位下) | 14만석 |
9 | 사카이 다다아키 酒井忠発일본어 | 1842년 ~ 1861년 | 좌위문위(左衛門尉); 시종(侍従) | 종사위하(従四位下) | 14만석 |
10 | 사카이 다다토모 酒井忠寛일본어 | 1861년 ~ 1862년 | 좌위문위(左衛門尉) | 종사위하(従四位下) | 14만석 |
11 | 사카이 다다즈미 酒井忠篤일본어 | 1862년 ~ 1868년 | 좌위문위(左衛門尉) | 종사위하(従四位下) | 14만석 → 16만 7천석 |
12 | 사카이 다다미치 酒井忠宝일본어 | 1868년 ~ 1871년 | - | 종오위(従五位) | 16만 7천석 → 12만석 |
=== 사카이 백작가 (1886년 ~ 1947년) ===
# 사카이 다다즈미
# 사카이 다다토시 忠純일본어
# 사카이 다다요시
=== 쇼나이 사카이가 (1947년 ~ 현재) ===
# 사카이 다다아키 (1947년 ~ 2004년)
# 사카이 다다히사 (2004년 ~ 현재)
# 사카이 다다준
- 현 당주인 18대 사카이 다다히사는 치도 박물관의 이사 및 관장 등을 역임했다. 2016년 8월, 일본미술도검보존협회 회장으로 취임했다.[20]
- 다다히사의 장남 사카이 다다준은 독협대학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쇼나이 지방의 물산을 취급하는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4. 주요 인물
사카이 오쿠노스케가(酒井奥之介家), 사카이 요시노스케가(酒井吉之允家), 그리고 마쓰다이라 신자부로가(松平甚三郎家)는 모두 번주(藩主)의 일족으로, 양경가(両敬家)라 불리며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21] 번정(藩政) 중기까지는 번주의 참모 역할을 하였으나, 관직에는 취임하지 않았다.[22]
- 사카이 오쿠노스케가 (酒井奥之介家일본어)
- 사카이 다다나오 酒井忠直일본어 = 사카이 나오타카 直隆일본어 - 사카이 나오미치 直通일본어 = 사카이 다다야스 直豫일본어 = 사카이 나오야스 直恭일본어 - 사카이 나오토요 直豊일본어 = 사카이 나오히로 直寛일본어 - 사카이 나오카타 直方일본어
- 사카이 요시노스케가 (酒井吉之允家일본어)
- 사카이 료지 酒井了次일본어 - 다다타카 忠崇일본어 - 사카이 시게미쓰 重盈일본어 - 사카이 시게나가 重栄일본어 = 사카이 시게타카 重喬일본어 = 사카이 시게요리 重頼일본어 - 사카이 료치 了知일본어 - 사카이 료안 了安일본어 - 사카이 우쿄 了繁일본어 = 사카이 료메이 了明일본어 - 사카이 료코 了恒일본어 - 사카이 료빈 了敏일본어 = 사카이 아키요시 調良일본어
- 마쓰다이라 신자부로가 (松平甚三郎家일본어) ※후쿠가마 마쓰다이라가
- 마쓰다이라 히사쓰네 松平久恒일본어 (사카이 다다쓰구의 넷째 아들, 후쿠가마 마쓰다이라가・마쓰다이라 지카토시의 양자) - 히사마사 久昌일본어 - 히사카쓰 久勝일본어 = 히사치카 久親일본어 = 히로치카 廣親일본어 = 지카하루 親治일본어 = 히사타카 久敬일본어 = 히사타케 久武일본어 = 히사타카 久敬일본어(재임) = 히사히로 久寛일본어 - 히사시게 久重일본어 - 히사히로 久大일본어 - 히사아쓰 久厚일본어
- 마쓰다이라 무에몬가 (松平武右衛門家일본어)
- 마쓰다이라 히사토요 松平久豊일본어 = 히사히로 久寛일본어 = 히사아키 久映일본어 - 히사나가 久長일본어 = 히사나카 久中일본어 - 부헤이 武平일본어(久徴) - 히사시게 久茂일본어 = 히사요시 久義일본어 = 히사아키 久彰일본어 = 마쓰다이라 보쿠도 久継일본어
- 마쓰다이라 세닌가 (松平清允家일본어)
- 마쓰다이라 데루치카 松平輝親일본어 = 기치카 城親일본어 = 노부치카 信親일본어 = 고레치카 惟親일본어 - 도모치카 知親일본어 - 게이신 敬親일본어
- 마쓰다이라 곤에몬가 (松平権右衛門家일본어) ※나가사와 마쓰다이라가
- 이시하라 헤이에몬가 (石原平右衛門家일본어)
- 이시하라 미치히데 石原道秀일본어 - 사이젠 西善일본어(가와치) - 시게아키 重秋일본어 - 시게노리 重則일본어 = 시게사다 重貞일본어(중노쿠 嫡손) - 시게토시 重寿일본어 = 마사노부 윤정일본어(중주 동생) - 시게토키 重時일본어 - 시게미쓰 重光일본어 - 시게요시 重美일본어
- 다케우치 하치로에몬가 (竹内八郎右衛門家일본어)
- 미즈노 쿠라노스케가 (水野内蔵助家일본어)
- 미즈노 시게쓰구 水野重次일본어 - 시게히사 重久일본어 - 미즈노 시게하루 重治일본어 - 시게마사 重誠일본어 - 시게타카 重孝일본어 = 시게유키 重幸일본어 - 시게나가 重栄일본어 - 시게아키 重明일본어 - 시게타미 重民일본어 - 시게타케 重剛일본어
- 가토 에이후가 (加藤永孚家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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