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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레스비히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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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슐레스비히 공국은 덴마크와 독일 사이의 역사적 지역으로, 명칭 분쟁과 영토 분할을 겪었다. 19세기에는 슐레스비히와 덴마크 남부 지역을 의미하는 쇠네르윌란트 명칭을 두고 갈등이 있었으며, 1864년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이후 프로이센에 병합되었다. 1920년 주민투표를 통해 북슐레스비히는 덴마크에, 중앙 슐레스비히는 독일에 귀속되었고, 이후 슐레스비히는 덴마크와 독일의 협력 지역으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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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레스비히 공국
지도
기본 정보
공식 명칭 (덴마크어)헤르투그돔메트 슬레스비
공식 명칭 (독일어)헤르조그툼 슐레스비히
일반 명칭슐레스비히
정부 형태봉건 공국, 군주제
지위덴마크 왕관의 봉토 (1544년에서 1713/20년 사이 일부)
건국 시기1058년
멸망 시기1866년
이전 국가북해 제국
계승 국가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수도슐레스비히, 플렌스부르크, 코펜하겐
공용어덴마크어
독일어
저지 독일어
북프리지아어
종교가톨릭교
루터교
메노나이트교 (16세기부터)
유대교
통화슐레스비히-홀슈타인 스페치스탈러
덴마크 릭스달러
페니히
공작올라프 1세 (1058–1095)
마지막 공작크리스티안 9세 (1863–66)
현재 국가덴마크
독일
국기
18세기 국기
1685년부터 1849년까지 사용된 덴마크 국기
문장
슐레스비히 문장
역사적 명칭
덴마크어헤르투그돔메트 슬레스비
독일어헤르조그툼 슐레스비히
저지 독일어하르토그돔 슬레스비히
북프리지아어헤르토크둠 슬라스비크
덴마크어 (또 다른 명칭)쇤데르윌란

2. 명칭과 명칭 분쟁

1895년 프로이센 당국에 의해 라는 용어가 금지되었다. 사진은 덴마크의 다네비르케(Dannevirke) 앞의 뢰어(Föhr)섬과 알스(Als)섬의 의상을 입은 두 소녀를 보여준다.


1918년 덴마크의 남유틀란트 지도


19세기에는 슐레스비히 공국의 명칭을 두고 덴마크와 독일 사이에 분쟁이 있었다. 원래 이 공국은 '남유틀란트'(Sønderjyllandda)로 불렸으나, 14세기 후반부터 슐레스비히 도시의 이름을 따서 '슐레스비히'(Schleswigde 또는 Slesvigda)로 불리기 시작했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남유틀란트'라는 용어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슐레스비히'라는 이름은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1830년경, 일부 덴마크인들은 홀슈타인과의 연관성 이전의 역사와 유틀란트와의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남유틀란트'라는 옛 용어를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용어의 부활은 덴마크 민족주의적 함의를 지니며, 독일의 영유권 주장에 반대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1830년대 덴마크 지도 제작자 올센(Olsen)의 "올센 지도"는 이 용어를 사용하여 독일 거주민들의 항의를 받았다.

올라 레만(Orla Lehmann)과 같은 덴마크 민족주의자들은 '슐레스비히'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특히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이라는 결합된 용어는 독일 민족주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독일 민족주의는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이 단일하고 불가분의 실체라는 1460년 리베 조약의 주장을 내세웠다. 홀슈타인은 독일 연방의 일부였고, 독일인으로만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두 지역 모두 독일에 속해야 하며 덴마크와의 관계는 약화되거나 단절되어야 함을 의미했다.

1864년 독일의 정복 이후, 대부분의 덴마크인들은 '슐레스비히' 사용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남유틀란트'라는 용어가 덴마크 인구 사이에서 점점 더 우세해졌다. 1866년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은 프로이센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로 합병되었다.

명칭 분쟁은 1920년 주민투표와 분할로 해결되었는데, 각 진영은 자신이 소유한 영토에 선호하는 이름을 적용했다. 1920년 주민투표 이후 북슐레스비히는 공식적으로 남유틀란트 지역(de sønderjyske landsdeleda)으로 명명되었고, 남슐레스비히는 1946년 독일 연방주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이 되었다.

3. 역사

슐레스비히 지역은 초기 중세 시대부터 덴마크와 남쪽의 신성 로마 제국 사이의 완충 지대이자, 북해발트해 사이의 물자 이동 및 러시아를 통한 무역로를 라인강대서양 연안의 무역로와 연결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10]

바이킹 시대 초기, 헤데뷔(Hedeby)는 스칸디나비아 최대 교역 중심지였으며, 다네비르케 방벽이 위치했다. 737년경 다네비르케 방벽의 대규모 증축은 덴마크 통일 국가 출현을 시사한다.[10] 8세기부터 10세기까지 슐레스비히 지방은 덴마크의 역사적 지역 일부를 구성했다.

덴마크 영토 남쪽 경계는 아이다 강 또는 다네비르케였으나, 분쟁이 잦았다. 811년 하일리겐 조약으로 아이다 강이 경계로 확인되었으나,[11] 10세기 동안 동프랑크 왕국(신성 로마 제국)과 덴마크는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934년 하인리히 1세가 헤데뷔를 점령했고, 974년 오토 2세가 다네비르케에서 반격, 983년 스벤 1세가 독일 요새를 파괴했다.

1027년 콘라트 2세와 크누트 대왕은 아이다 강을 양국 국경으로 설정했다.[12]

3. 1. 초기 역사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방의 고대 민족 분포. 빨강은 덴마크인, 파랑은 작센인, 노랑은 프리지아인. 갈색은 슬라브인, 회색은 무주 또는 인구 희박 지역


고대 로마의 자료에 따르면, 유트족의 고향은 아이다 강 북쪽에, 앵글족의 고향은 그 강 남쪽에 위치했으며, 이들은 작센족과 이웃했다. 초기 중세 시대에 이 지역에는 다음 세 집단이 거주했다.

  • 덴마크인(동화된 유트족 포함)[10], 다네비르케와 에케른푀르데 만 북쪽에 거주
  • 북프리지아인, 북프리지아 대부분, 북프리지아 제도를 포함하여 거주
  • 작센족(게르만화된 바그리아인과 벤드인 포함), 덴마크인과 프리지아인 남쪽 지역에 거주


14세기 동안 슈반센의 주민들은 덴마크어와 함께 저지독일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지만,[2] 14세기부터 점점 독일화되어 가는 도시 주민들을 제외하고는 민족 언어적 경계는 1800년경까지 놀라울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초기 바이킹 시대 동안 스칸디나비아 최대의 무역 중심지인 헤데비는 이 지역에 위치했으며, 다네비르케로 알려진 상호 연동된 방어 시설도 이곳에 위치해 있다. 그 건설, 특히 737년경의 대대적인 확장은 통일된 덴마크 국가의 출현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3] 초기 중세 시대 말엽에 슐레스비히는 바이킹의 확장 이후 8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 여러 작은 족장국에서 통일된 덴마크의 일부를 형성한 역사적인 덴마크 영토의 일부가 되었다.

아이다 강 지역과 다네비르케에서 덴마크의 남쪽 경계는 지속적인 분쟁의 원인이었다. 하일리겐 조약은 811년 덴마크 왕 헤밍과 샤를마뉴 사이에 체결되었으며, 그 경계는 아이다 강으로 설정되었다.[11] 10세기 동안 동프랑크 왕국과 덴마크 사이에 여러 차례 전쟁이 있었다. 1027년, 콘라트 2세와 카누트 대왕은 다시 아이다 강에서 상호 경계를 설정했다.[12]

3. 2. 슐레스비히 공국 성립

12세기 덴마크 왕족인 크누드 라바르가 슐레스비히 백작으로 임명되면서 슐레스비히 공국이 시작되었다.[13] 1115년 덴마크 왕 니일스는 자신의 조카이자 에리크 1세의 아들인 크누드 라바르를 남유틀란트 백작으로 임명했다. 크누드는 곧 스스로를 공작이라 칭했다.[13]

1230년대, 발데마르 2세는 자신의 차남인 아벨에게 슐레스비히 공국(남유틀란트)을 분령(아파나주)으로 주었다. 아벨은 형으로부터 왕위를 빼앗고 공국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1252년 아벨이 전사한 후 덴마크 왕위는 아벨의 동생 계통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아벨의 자손들은 덴마크 왕위를 노리며 덴마크 국왕과 슐레스비히 공작은 이후 수 세기 동안 분쟁 상태에 있었다.

아벨의 왕비는 홀슈타인 백작의 딸 메히틸트 폰 홀슈타인이었다. 아벨의 계통은 15세기에 걸쳐 슐레스비히의 남쪽 이웃인 독일인의 홀슈타인 공국(홀슈타인 백작령)과 봉토와 혼인을 통해 연결되었다. 홀슈타인신성 로마 제국의 봉토였고, 슐레스비히는 덴마크 국왕의 봉토였다. 이 두 나라의 다른 종속 관계는 19세기에 민족 로망티시즘과 국민 국가의 이념이 사람들의 공감을 얻게 되면서, 독일과 덴마크가 이 지역을 놓고 다투게 된 주요 원인이 되었다.

1460년, 슐레스비히 공작위는 올덴부르크 가문의 크리스티안 1세의 손에 들어갔다. 이후 슐레스비히 공작위는 칼마르 동맹에 의해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국왕(1523년 스웨덴은 탈퇴)을 계승하게 된 올덴부르크 가문이 소유했지만, 덴마크는 선거 군주제를 채택했기 때문에, 세습 군주제를 채택한 노르웨이 국왕으로서 슐레스비히 공국을 상속했다. 1544년, 크리스티안 3세는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양 공국을 올덴부르크 가문과 그 분가인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의 공동 통치로 했다.

종교 개혁에 따라, 라틴어로 행해지던 교회 예배를 위한 언어는 주민들이 말하는 언어로 바뀌었다. 슐레스비히 교구는 분할되었고, 하데르슬레우에 자치 교구가 설립되었다. 리베 교구는 현대의 국경선 북쪽 5km에 있었다. 슐레스비히 교구에서는 교회 예배와 교육에 독일어가 사용되었고, 리베 교구에서는 덴마크어가 사용되었다. 공국을 분할하는 문화적 경계선이 그어졌는데, 이것은 현대의 국경과 가까운 곳을 지나고 있다.

17세기,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전쟁(덴마크가 패배)은 이 지역에 경제적 황폐를 가져왔다. 그러나 귀족들은 새로운 농업 시스템의 도입으로 부흥에 나섰다. 1600년부터 1800년에 걸쳐, 영지 경영이 크게 성장했다. 영지는 봉건 소작농민이 일을 맡는 대규모 소유였고, 그들은 고품질의 유제품 생산에 특화되었다. 봉건 영주제는 기술의 현대화와 결합되었고, 18세기 후반에는 점차 폐지되었다. 1805년 모든 농노제가 폐지되었고, 토지 제도 개혁에 의해 과거의 농민이 자신의 농장을 소유하게 되었다.[14]

3. 3. 근세

종교 개혁 이후, 슐레스비히 교구는 분할되었고 하덜슬레우에 자치 교구(대집사의 관구)가 설립되었다. 서해안의 리베 교구는 현대 국경선 북쪽 5km에 위치했다. 슐레스비히 교구에서는 교회 예배와 교육에 독일어가 사용되었고, 리베 교구에서는 덴마크어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공국을 분할하는 문화적 경계선을 형성했으며, 이는 현대 국경선과 유사하다.

17세기, 덴마크스웨덴 간의 전쟁(덴마크 패배)으로 슐레스비히 지역은 경제적으로 황폐화되었다.[14] 그러나 귀족들은 새로운 농업 시스템을 도입하여 부흥을 꾀했다. 1600년부터 1800년까지 동부 독일의 호밀 생산지대와 마찬가지로 영지 경영이 크게 성장했다. 영지는 봉건 소작농민이 일하는 대규모 소유였으며, 고품질 유제품 생산에 특화되었다. 봉건 영주제는 기술 현대화와 결합되었고, 노역과 임금 노동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18세기 후반, 봉건 제도는 왕령(1765년)과 귀족 영지에서 점차 폐지되었다. 1805년에는 모든 농노제가 폐지되었고, 토지 제도 개혁으로 과거 농민들이 자신의 농장을 소유하게 되었다.[14]

3. 4. 19세기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

19세기에는 민족주의가 대두하면서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가 발생했다. 1830년경부터 많은 사람들이 독일 또는 덴마크 국적에 따라 정치적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덴마크 국민자유당은 "아이더 강까지의 덴마크"라는 구호를 내걸고 슐레스비히 공국을 덴마크 왕국에 편입시키려 했다.

1864년 이전 슐레스비히의 행정 구역


1848년 덴마크에서 국민자유당이 집권하고 슐레스비히를 덴마크에 병합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의 독일계 주민들이 봉기했다. 이는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1848~1851)으로 이어졌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인들은 독일 연방의 지원을 받았으나, 다른 강대국의 압력으로 프로이센 군은 후퇴해야 했다. 1852년 런던 의정서에서 강대국들은 덴마크 국왕이 공국의 공작 지위는 유지하되, 공국의 지위는 덴마크 본토와 구별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1863년 덴마크는 슐레스비히와 덴마크를 위한 새로운 공동 헌법(11월 헌법)을 만들어 슐레스비히를 통합하려 했다. 이에 독일 연방은 회원국인 홀슈타인에 군대를 파병했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1864년 2월 연방의 의지와는 반대로 슐레스비히로 군대를 파병하여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이 발발했다. 덴마크는 패배하여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넘겨주어야 했다. 가스타인 협약에 따라 슐레스비히는 프로이센이, 홀슈타인은 오스트리아가 관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두 독일 강대국 사이의 긴장은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이어졌다. 프라하 조약 이후, 승리한 프로이센은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을 모두 합병하여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를 만들었다. 북슐레스비히를 덴마크에 할양하는 조항이 있었으나, 187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 조항을 철회했다.[8][15]

19세기 남슐레스비히의 언어 분포. 붉은색은 덴마크어, 파란색은 독일어, 노란색은 북프리지아어의 분포를 나타낸다. 중앙부의 색이 겹쳐진 지역은 언어가 혼재되어 있다.


1800년경부터 1840년경까지, 슐레스비히와 플렌스부르크 사이의 안겔른 반도에 거주하던 덴마크어 사용 인구는 저지 독일어로 언어를 바꾸기 시작했고, 같은 시기에 많은 북프리지아인들도 저지 독일어로 언어를 바꾸었다. 이러한 언어 변화는 트룬더 북쪽과 플렌스부르크 남쪽의 독일어와 덴마크어 사용자 사이에 새로운 사실상의 경계선을 만들었다.

3. 5. 20세기 이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이 지역의 귀속을 결정하기 위한 주민투표가 규정되었다.[9] 1920년에 두 차례의 주민투표가 실시되어 슐레스비히는 분할되었다. 북슐레스비히는 75%의 득표율로 덴마크에 합류하기로 결정했고, 중앙 슐레스비히는 80%의 득표율로 독일의 일부로 남기로 결정했다. 남슐레스비히에서는 결과가 명확하여 주민투표가 실시되지 않았다. 남슐레스비히라는 이름은 현재 독일령 슐레스비히 전체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이 결정으로 새로운 국경 양쪽에 상당한 소수 민족이 남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남슐레스비히의 상당수 독일인들이 국적을 변경하여 덴마크인임을 선언했다. 이러한 변화는 여러 요인에 의해 발생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독일의 패배와 프로이센 동부 지방 출신의 많은 난민 유입이었다. 이들의 문화와 외모는 대부분 19세기에 국적을 변경한 덴마크 가문의 후손인 현지 독일인들과 달랐다.

인구 통계의 변화로 이 지역에 일시적으로 덴마크인 다수가 형성되었고, 남슐레스비히의 덴마크 인구와 크누트 크리스텐센 총리를 포함한 일부 덴마크 정치인들로부터 새로운 주민투표 요구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덴마크 의회의 다수는 "새로운 덴마크인들"의 국적 변경이 진정한 것이 아니라고 우려하여 남슐레스비히에서의 주민투표를 지지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는 사실로 드러났고, 1948년부터 덴마크 인구는 다시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50년대 초에는 전쟁 전 수준보다 네 배나 높은 수준으로 안정되었다.

1955년 코펜하겐-본 선언에서 서독(이후 독일 전체)과 덴마크는 서로의 소수 민족 인구의 권리를 보장하기로 약속했다. 오늘날 양측은 국경을 초월한 유로지역: 선더위랜드-슐레스비히 지역으로 협력하고 있다. 덴마크와 독일은 모두 솅겐 지역의 일부이므로 국경에서 정기적인 통제는 없다.

참조

[1] 웹사이트 Schleswig-Holstein Historical Flags (Germany) https://www.fotw.inf[...] 2024-02-25
[2] 서적 Reise durch einen Theil von Sachsen und Dänemark Altona 1813
[3] 서적 Politikens bog om Danmarks oldtid Politikens Forlag 2002
[4] 뉴스 Viking Find Reported The New York Times 1931-05-17
[5] 백과사전 Eider http://susi.e-techni[...] Meyers Konversationslexikon 1885-1890
[6] 서적 Danmarkshistoriens hvornår skete det Politiken 1966
[7] 논문 Innovative Feudalism. The development of dairy farming and Koppelwirtschaft on manors in Schleswig-Holstein in the seventeenth and eighteenth centuries 2010
[8] 백과사전 Schleswig Encyclopaedia Britannica 1922
[9] 백과사전 Schleswig (duchy) Collier's Encyclopedia
[10] 서적 Politikens bog om Danmarks oldtid Politikens Forlag 2002
[11] 논문 リーメス境界線 「ダーネヴィアケ」 とその意味 1973
[12] 백과사전 Eider http://susi.e-techni[...] Meyers Konversationslexikon 1885-1890
[13] 서적 Danmarkshistoriens hvornår skete det Politiken 1966
[14] 논문 Innovative Feudalism. The development of dairy farming and Koppelwirtschaft on manors in Schleswig-Holstein in the seventeenth and eighteenth centuries 2010
[15] 백과사전 Schleswig Encyclopaedia Britannica 1922
[16] 백과사전 Schleswig (duchy) Collier's Encyclo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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