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모야마 사다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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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모야마 사다노리는 일본의 철도 관료이자 일본국유철도 초대 총재였다. 효고현 출신으로 도쿄 제국대학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철도성에 입사하여 삿포로 철도국 등에서 근무했으며, 1930년대에는 도쿄 철도국에서 "운수계 창세의 인물"로 불리며 세력 확장에 기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철도조사부, 기획원 등에서 활동하며 해외 철도 조사를 수행했고, 종전 후 나고야, 도쿄 철도국장을 거쳐 1949년 일본국유철도 총재에 취임했다. 같은 해 대규모 해고를 단행하려던 중 실종되었고, 며칠 뒤 변사체로 발견되면서 '시모야마 사건'으로 불리는 미스터리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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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모야마 사다노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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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명 | 시모야마 |
| 이름 | 사다노리 |
| 출생일 | 1901년 7월 23일 |
| 출생지 | 효고현 고베시 |
| 실종일 | 1949년 7월 5일 |
| 사망일 | 1949년 7월 6일? |
| 사망지 | 불명 |
| 유해 발견 장소 | 도쿄도 아다치구 |
| 사인 | 불명 |
| 국적 | 일본 |
| 묘지 | 다마 영원 |
| 직업 정보 | |
| 직업 | 일본국유철도 역원 |
| 직책 | 초대 일본국유철도 총재 |
| 임기 시작 | 1949년 |
| 후임 | 가가야마 노리오 |
| 학력 정보 | |
| 출신 학교 | 도쿄 제국대학 공학부 졸업 |
| 가족 정보 | |
| 배우자 | 있음 |
| 자녀 | 4명 |
| 부모 | 시모야마 히데고로 (아버지) |
2. 생애
효고현 출신으로, 사법관인 아버지를 따라 학교를 자주 옮겨 다니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학교를 옮길 때마다 도시의 주요 역 이름을 외워 사람들에게 주목받았다.
1925년 도쿄 제국대학 기계공학부를 졸업하고 철도성에 들어가 신칸센 프로젝트 책임자였던 시마 히데오와 협력하여 운수 부서와 기술 부서를 잇는 역할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나고야 철도국장, 도쿄 철도국장을 역임했다. 1948년 4월 운수 차관에 취임하고, 1949년 6월 1일 일본국유철도 초대 총재로 취임했다.
총재 취임 직후, 시모야마는 행정기관 직원 정원법에 따라 약 10만 명의 직원을 해고하기로 결정하고, 1949년 7월 4일 노동조합에 3만 700명의 해고를 통지한다. 그러나 다음 날인 7월 5일 미쓰코시 니혼바시 본점에 간 이후 행방불명되었고, 7월 6일 도쿄도 아다치구 조반선과 도부 철도 이세사키 선 교차점 부근(기타센주역)에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시모야마 사건)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시모야마 사다노리는 1901년 7월 23일 효고현 고베시에서 사법관인 아버지 시모야마 에이고로의 아들로 태어났다.[1] 아버지의 잦은 전근으로 인해 어린 시절 여러 지역에서 학교를 다녔다.[1] 학교를 옮길 때마다 해당 지역의 주요 역 이름을 암기하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1] 시즈오카현립 시즈오카 고등학교,[1][2][3] 미에현립 쓰 고등학교, 제3고등학교 (구제)를 졸업했다.[1]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왓카나이시부터 가고시마현까지의 역 이름을 모두 외워 '철도'라는 별명을 얻었다.[4] 흡연자였다.1925년 도쿄 제국대학 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5]
2. 2. 철도 관료 경력
1925년 도쿄 제국대학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철도성에 들어갔다. 삿포로 철도국에서 근무를 시작했고, 12월에는 1년간 자원병으로 전신 제1연대에 입대하여 이듬해 만기 제대했다.[1] 1927년 6월에는 철도 제1연대에 징집되었다가 10월에 공병 상사로 징집 해제되어 홋카이도로 돌아와 하코다테 기관구 주임이 되었다.[1] 1928년 오타루 축항 기관구 주임, 1929년 공병 소위로 구시로 운수사무소 운전과 주임을 역임했다.[1]1930년 도쿄 철도국으로 옮겨 미토 기관구 주임, 지바 운수사무소 운전과 주임을 거쳐 1932년부터 신바시 운수사무소 운전 주임이 되었다.[1] 이때 "운수계 창세의 인물"이라고 불리며 철도성 내에서 운수 부서의 세력 확대에 기여했다.[5]
1934년 나고야 철도국에서 운전과 및 기관차과 과장을 역임했고, 1935년 도쿄 철도국으로 복귀하여 운전과 열차과 과장을 맡았다.[1] 1936년 2월, 해외 연구 명령을 받고 유럽, 남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북아메리카를 시찰했다.[1] 1937년 12월에 귀국하여 운수국 운전과로 돌아왔다.[1]
1939년 6월부터 철도조사부 제3과, 기획원 겸임, 참모본부의 세 가지 일을 맡았는데, 주로 참모본부에서 활동했다.[1] 1940년 4월 만주, 중국, 조선을 시찰했고, 8월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시찰하며 철도 관련 조사를 수행했다.[6]
1941년 1월부터 약 두 달간 태국에 체류하며 철도 조사를 실시했다.[7][8] 귀국 후 4월, 도쿄와 싱가포르를 철도로 연결하는 구상을 발표했다.[9][10] 같은 해 7월에는 기획원 제7부 제1과장으로서 '과학 동원 계획'을 담당하고 기술 통제와 기술원 설치에 착수했다.[11] 1942년 1월 제7부가 기술원으로 이관되면서 제1부 제1과장이 되었다.[11]
시모야마가 제안한 도쿄-싱가포르 철도는 '대동아 종관 철도'로서 '대동아 건설 심의회'(1942년 2월 13일 각의 결정에 따라 설치) 제8부회에서 공식적으로 조사 논의되었다.[12][13][14] 기술원 참의관으로서 이 논의에 관여했다.[16]
이후 기술원 제4부장, 철도총국 업무국장 보좌(1945년 1월)를 역임했다.[1]
2. 3. 일본국유철도 총재 취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년 나고야 철도국장, 1946년 도쿄 철도국장을 역임했다. 1948년 4월 운수차관에 취임했다.[1] 1949년 6월 1일 일본국유철도(국철)가 발족하면서 초대 총재로 취임했다.[1] 초대 총재 후보로는 참의원 의원이자 긴키 닛폰 철도 사장이었던 무라카미 기이치, 한큐 전철 사장 고바야시 이치조 등이 거론되었으나, 내부에서 기용되었다.[1]2. 4. 시모야마 사건
1949년 7월 1일, 시모야마 사다노리 총재는 행정기관 직원 정원법에 따라 약 10만 명의 직원 해고를 결정했다.[17] 7월 4일에는 노동조합에 1차 정리 해고 대상 3만 700명의 명단을 통보했다.[17]7월 5일, 시모야마는 미쓰코시 니혼바시 본점에 들른 후 행방불명되었다.[17] 7월 6일 새벽, 도쿄도 아다치구의 조반선과 도부 철도 이세사키 선 교차점 부근(기타센주역)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17] 시모야마의 죽음은 '시모야마 사건'으로 불리며, 현재까지도 자살과 타살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그의 사망 이후 부총재 가가야마 유키오가 총재 대행을 맡았고, 같은 해 9월 24일 정식 총재로 취임했다.[17]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진보 진영에서는 시모야마 사건을 일본 우익 세력의 테러 가능성과 연관지어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당시 일본 사회의 혼란스러운 상황과 국철 노조와의 갈등, 그리고 일본 우익 세력의 발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3. 가족
아버지는 지방법원장을 역임한 시모야마 에이고로이다. 형 시모야마 히데타다는 은행원이었고, 남동생 시모야마 쓰네오는 도쿄시 공무원이었다. 부인과의 사이에 4남을 두었다.
| 이름 | 직업 |
|---|---|
| 시모야마 사다히코 | 국철 직원, 애드 미디어 센터 사장 |
| 시모야마 슌지 | 전력개발, 일본원자력발전 임원 |
| 시모야마 겐조 | 미쓰비시 전기 임원 |
| 시모야마 히로야 | 도쿄해상일동화재해상보험 임원 |
4. 평가 및 영향
시모야마 사다노리는 일본 철도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일제강점기부터 전후까지 철도 기술 발전과 운영에 기여했으며, 특히 신칸센 구상의 초기 단계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일본 현대사의 큰 미스터리로 남아 있으며,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존재한다.
한국의 관점에서는 시모야마 사다노리가 일제강점기 한국, 만주, 동남아시아 등에서 철도 건설 및 운영에 관여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의 활동은 일본 제국의 침략 정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이는 한국 근현대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 고바야시 케이주 - NHK 토요 드라마 전후 사실록 시리즈 《공백의 900분 - 국철 총재 괴사 사건 - (전·후편)》(1980년)
참조
[1]
서적
静岡高校野球部 誇り高き文武両道 Since1896
高校野球名門校シリーズ
[2]
서적
静中静高野球部史
1959 #쇼와 39년 = 1959년
[3]
문서
静岡中学34回同期
[4]
서적
島秀雄の世界旅行
技術評論社
2009
[5]
서적
鉄道人を語る
鉄道人事新聞社
[6]
서적
下山総裁の追憶
下山定則氏記念事業会
[7]
서적
陸戦史集第2 第二次世界大戦史マレー作戦
原書房
[8]
학술지
南方鉄道事情
日本交通公社
1941-08
[9]
학술지
泰國雑感
交通研究所
[10]
학술지
欧亜縦貫鉄道大座談会
交通研究所
[11]
학술지
日本技術協会
1942-09
[12]
학술지
東京、昭南島鉄道の必要性
交通研究所
[13]
서적
国鉄血戦譜
教学館
[14]
서적
大東亜交通論
高山書院
[15]
서적
15年戦争極秘資料集 第7集 大東亜縦貫鉄道関係書類
不二書房
[16]
기타
2.乙2号 昭和17年6月8日 大東亜建設審議会の構成並に諮間事項 技術院第4部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7]
웹사이트
下山事件の現場(東京・足立)「黒い霧」今も晴れず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8-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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