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출병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시베리아 출병은 제1차 세계 대전 말기, 연합국이 러시아의 공산 정권 수립을 막기 위해 시베리아에 파병한 사건이다. 일본은 영일 동맹에 따라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했으며, 영토 확장, 러일 전쟁 이후의 이권 확보, 공산주의 확산 방지 등 복합적인 이유로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광대한 시베리아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게릴라전에 시달렸으며, 민간인 학살 등으로 민심을 잃었다. 결국 붉은 군대의 승리로 백군 정권이 붕괴되면서 일본군은 철수했고, 이 출병은 일본 국내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쳐 육군과 정부 간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시베리아 출병으로 일본은 약 5,000명의 사상자와 막대한 비용을 치렀으며, 국제 사회에서 영토적 야심에 대한 의심을 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개입 - 간섭주의
간섭주의는 외세의 정권 교체를 포함하는 국제 정치 현상으로, 그 효과에 대해서는 내전 가능성 증가, 평화 유지 기여, 지역 불안정 심화 등 상반된 연구 결과가 존재한다. - 개입 - 인도주의적 개입
인도주의적 개입은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에 대해 국제사회가 개입하는 것을 의미하며, 무력 사용 금지 원칙과 내정 불간섭 원칙 사이의 갈등, 그리고 보호책임 원칙과 같은 다양한 논의를 거쳐 왔으나 식민주의적 성격, 강대국의 목표 추구 등의 이유로 비판받기도 한다. - 연합군의 러시아 내전 개입 - 북양정부
북양정부는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의 초기 정부로, 위안스카이 사후 군벌 간 권력 다툼으로 혼란해졌으나 장제스의 북벌과 장쉐량의 투항으로 소멸되었다. - 연합군의 러시아 내전 개입 - 앤드루 커닝엄
앤드루 브라운 커닝엄은 영국의 해군 제독으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하며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중 지중해 함대 사령관으로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해군 원수로 진급 후 제1해군경 겸 해군참모총장으로서 영국 해군을 이끌었다. - 1920년 분쟁 - 연합군의 러시아 내전 개입
연합군의 러시아 내전 개입은 1918년부터 1920년까지, 그리고 일부 지역에서는 1922년까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러시아 혁명으로 혼란에 빠진 러시아에 연합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한 사건으로, 볼셰비키의 지배를 강화하고 연합국과 소련 간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 1920년 분쟁 - 카프 폭동
카프 폭동은 1920년 독일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에 불만을 품은 우익 군부와 민족주의 세력이 볼프강 카프를 내세워 일으킨 쿠데타 시도였으나, 노동자 총파업과 군부 내 분열로 실패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불안정을 심화시켰다.
시베리아 출병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시베리아 출병 | |
개요 | |
분쟁 | 시베리아 출병 |
전체 | 러시아 내전 |
장소 | 연해주, 이르쿠츠크, 바이칼호 |
![]() | |
결과 | 소련군 승리 |
결과 상세 | 극동 공화국 수립 프리아무례 임시정부 붕괴 국내 여론 악화로 인한 일본의 철수Harries 1925년까지 일본이 사할린섬 전체 장악 |
날짜 | 1918년 1월 12일~1922년 6월 24일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백군 프리아무례 임시정부 |
교전국 2 | The destruction of Nikolayevks-on-Amur: An episode in the Russian civil war in the Far East] |
지휘관 | |
지휘관 1 | 다이쇼 천황 하라 다카시 우치다 고사이 다카하시 고레키요 다나카 기이치 야마나시 한조 유히 미쓰에 오타니 기쿠조 그리고리 세묘노프 미하일 디테리흐스 아나톨리 페펠랴예프 알렉산드르 콜차크 |
지휘관 2 | 레온 트로츠키 이오아킴 바체티스 세르게이 카메네프 알렉산드르 크라스노시요코프 보리스 슈마츠키 페트르 니키포로프 니콜라이 마트베예프 표트르 코보제프 |
병력 | |
병력 1 | 70,000명 |
병력 2 | 600,000명 |
일본 시베리아 개입 | |
주요 정보 | |
일부 | 러시아 내전 |
![]() | |
날짜 | 1918년 1월 12일 — 1922년 6월 24일 () |
장소 | 옛 러시아 제국 |
원인 | 볼셰비키 혁명,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
결과 | 일본군의 군사적 승리 |
영토 변화 | 일본은 내부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 점령지의 대부분에서 철수함 Harries 일본은 1925년까지 사할린 북부를 점령함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
교전국 2 | 백군 |
지휘관 | |
지휘관 1 | 레온 트로츠키 유쿰스 바체티스 세르게이 카메네프 A. 크라스노시초코프}} |
지휘관 2 | 유이 미쓰에 오타니 기쿠조 그리고리 세묘노프 |
병력 | |
병력 1 | 600,000명 (최대) |
병력 2 | 70,000명 (총) |
사상자 | |
사상자 1 | 7,791 (1922년만) |
사상자 상세 1 | 전사 또는 실종 698명 질병으로 사망 2,189명 부상 1,421명 질병 및 동상 3,482명 |
사상자 2 | 3,116 (총) |
사상자 상세 2 | 사망 1,399명 질병으로 사망 1,717명 |
2.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말,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볼셰비키가 집권한 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통해 독일 제국과 단독으로 강화 조약을 맺으려 했다. 이에 미국, 영국 등 연합국은 이를 막기 위해 러시아에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영일 동맹에 따라 연합군의 일원이었던 일본 제국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시베리아에 군대를 보내 붉은 군대와 싸우게 되었다. 당시 서부 전선에 병력이 묶여 있던 다른 연합국들과 달리 일본은 비교적 대규모 병력을 파병할 여유가 있었다.[1]
다른 연합국들이 일본에 시베리아 파병을 요구했을 때, 일본 내부에서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자는 의견과 소극적으로 참여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대체로 파병에 찬성하는 분위기였다.[1]
역사학자 레오나드 험프리즈(Leonard Humphreys)는 당시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참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당시의 일본은 영토 획득의 야심, 러일전쟁 후에 획득하지 못했던 이권의 탈취, 지정학적 이유뿐만 아니라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이유도 있었다. 즉 천황제와 양립할 수 없는 공산주의가 일본에 파급되는 것을 저지할 필요가 있었다."[1]
1914년 8월 23일, 일본 제국은 영일 동맹의 영향을 받아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협상국의 일원이 되었다. 일본 제국 해군은 연합국의 전쟁 수행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으나, 일본 제국 육군은 독일에 더욱 동정적이었고, 칭다오 점령 외에는 전투 참여 시도에 저항하였다. 차르 니콜라이 2세의 퇴위와 러시아에 볼셰비키 정부 수립은 독일과의 별도 평화와 동부 전선의 붕괴로 이어졌다. 반군주제적 볼셰비키 혁명이 동쪽으로 확산되는 것을 일본 정부는 매우 우려하였다. 일본해에 면한 블라디보스토크는 군수품이 대량으로 비축되어 있고 대규모 외국 상인 사회가 있는 주요 항구였다.[1]
2. 1. 일본의 참전 배경과 동기
제1차 세계 대전 말기, 러시아의 공산정권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통해 독일 제국과 단독 강화를 맺으려 하자, 연합국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러시아에 파병했다. 영일 동맹에 따라 연합군의 일원이었던 일본 제국은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시베리아에 파병, 붉은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당시 일본은 서부 전선에 묶여 있던 다른 연합국에 비해 대규모 병력을 파병할 수 있었다.[1]일본 정계는 시베리아 파병에 대해 대체로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역사학자 레오나드 험프리즈(Leonard Humphreys)는 당시 일본의 참전 동기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1914년 8월, 일본은 영일 동맹을 근거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협상국의 일원이 되었다. 일본 제국 해군은 연합국의 전쟁 수행에 기여했지만, 일본 제국 육군은 독일에 동정적이었고 칭다오 점령 외의 전투 참여에는 소극적이었다. 니콜라이 2세의 퇴위와 러시아 볼셰비키 정부 수립은 독일과의 별도 평화 및 동부 전선 붕괴로 이어졌다. 일본 정부는 반군주제적 볼셰비키 혁명의 동쪽 확산을 우려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군수품이 대량 비축된 주요 항구였기 때문에 일본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했다.[1]
1917년 프랑스는 일본에 러시아 개입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나 1918년 2월, 일본제국육군참모본부와 육군성은 시베리아를 분리하여 독립적인 완충국을 건설할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시베리아 계획 위원회"를 설립했다. 육군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아무르 강을 따라 하바롭스크까지, 그리고 중동철도를 경유하여 바이칼 호에서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차단하는 두 방향의 공격을 제안했으나, 당시 총리 하라 다카시의 민정부는 이를 거부했다.[1]
1917년 말, 일본 정부는 영국이 일본과 상의 없이 미국에 블라디보스토크 공동 개입을 제안한 것에 놀랐다. 1917년 12월, 영국은 일본군 포함에 동의했지만, 세부 사항을 정리하기 전에 영국 해군의 HMS 서퍽(HMS Suffolk)을 블라디보스토크로 파병했다. 총리 테라우치 마사타케는 일본제국해군에게 블라디보스토크에 먼저 도착하라고 명령했다. 가토 칸지 제독은 이와미와 아사히 전함을 이끌고 1918년 1월 12일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HMS 서퍽보다 이틀 앞섰다. 1917년 12월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했던 미국 해군의 USS 브루클린(USS Brooklyn)은 3월 1일에 복귀했다.[1]

연합군 군함의 무력 시위는 당초 지역 반볼셰비키 세력의 사기를 높이고 치안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는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 무장 폭도들이 일본인 소유 상점을 약탈하고 주인을 살해하자, 일본 정부는 해병대 상륙을 허가했고, 해병대는 도시 전체를 점령했다. 영국도 해병대 100명을 상륙시켜 영사관을 보호했지만, 미국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1]
1918년 7월, 윌슨 대통령은 일본 정부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구출과 블라디보스토크의 전시 물자 확보를 위해 2만 5천 명의 국제 연합군의 일원으로 7천 명의 병력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일본 의회의 열띤 논쟁 끝에 테라우치 총리 내각은 국제 연합군의 일원이 아닌 일본의 지휘하에 1만 2천 명의 병력을 파병하는 데 동의했다.[1]
정치적 결정 이후, 일본제국육군은 참모총장 유이 미쓰에의 지휘하에 원정 계획을 수립했다. 일본은 최종적으로 대장 오타니 기쿠조 지휘하에 7만 명의 병력을 배치했는데, 이는 다른 연합국들의 예상보다 훨씬 많은 수였다. 연합군은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에서만 작전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일본군은 몇 달 만에 바이칼 호와 부랴트까지 진출했다. 1920년까지 미쓰비시, 미쓰이 등의 자이바츠는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 치타에 사무소를 열고 5만 명이 넘는 민간인을 이주시켰다. 국제 연합군 철수 후에도 일본군은 잔류했다. 그러나 정치적 반대로 인해 육군은 자원이 풍부한 이 지역을 합병할 수 없었다. 일본은 알렉산드르 콜차크 제독과 같은 백군 지도자를 지원했고, 아타만 세묘노프 정권도 지원했지만, 그의 불안정한 정부는 1922년에 붕괴되었다. 1922년 3월과 4월,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 대규모 볼셰비키 공세를 격퇴했다. 1922년 6월 24일, 일본은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점령한 북부 사할린 섬을 제외한 모든 러시아 영토에서 일방적으로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마지막 일본군은 1922년 10월 25일에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났다. 1925년 1월 20일, 소일 기본 조약이 베이징에서 체결되었고, 일본은 1925년 5월 15일까지 사할린 북부에서 병력을 철수하기로 약속했다.[1]
3.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
일본 제국 육군은 당초 블라디보스토크에 한정하여 주둔하겠다는 연합국과의 약속을 무시하고, 사할린, 연해주, 만주 철도 등을 침공하여 점령했다. 또한 바이칼호 동쪽을 넘어 이르쿠츠크까지 점령지를 확대했다. 일본군은 다른 연합국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했으며, 최대 7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시베리아에 주둔시켰다. 다른 연합국이 철수한 이후에도 일본군은 계속 주둔하면서 점령지에 괴뢰국가를 건설하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일본의 행보는 러시아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프랑스와 같은 다른 연합국들 사이에서도 일본의 영토적 야욕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2][3]
1917년 말, 일본 정부는 영국이 영일 동맹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상의 없이 미국에 블라디보스토크 공동 개입을 제안한 것에 놀랐다. 총리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일본 제국 해군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먼저 도착하라고 명령했고, 이에 따라 가토 칸지 제독이 지휘하는 전함 '이와미'와 '아사히'가 블라디보스토크로 급파되었다. '이와미'는 1918년 1월 12일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여 영국 해군의 HMS '서퍽'보다 불과 이틀 앞섰다.
3. 1. 일본군의 군사 작전
일본군은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으나, 광대한 시베리아를 통제하기는 불가능했다. 따라서 교통의 요지만을 점령하는데 급급했고, 그 빈 공간에는 붉은 군대와 이에 동조하는 파르티잔이 매복해 있다가 게릴라 전법으로 공격했다.[1] 일본군은 단독 혹은 백군과 협동으로 이들을 진압했고, 자군이 당한 데 대한 보복으로 민간인을 학살하고 게릴라전의 배후 마을을 불태웠다.[1] 이러한 잔혹 행위는 오히려 일본군이나 반혁명 세력에 대한 지지만을 더욱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1]1918년 7월, 윌슨 대통령은 일본 정부에 미국 원정군을 포함한 2만 5천 명의 국제 연합군의 일원으로 7천 명의 병력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2] 일본 의회에서 열띤 논쟁 끝에 데라우치 총리 내각은 국제 연합군의 일원이 아니라 일본의 지휘하에 1만 2천 명의 병력을 파병하는 데 동의했다.[2]
일본제국육군은 참모총장 유이 미쓰에의 지휘하에 원정에 대한 광범위한 계획을 수립했다.[2] 일본은 대장 오타니 기쿠조의 지휘하에 7만 명의 병력을 배치했는데, 이는 다른 연합국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수였다.[3] 연합군은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에서만 작전을 수행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몇 달 만에 일본군은 바이칼 호와 부랴트까지 서쪽으로 진출했다.[3]
일본은 알렉산드르 콜차크 제독과 같은 백군 지도자를 지원했고, 아타만 세묘노프 정권도 지원했지만, 그의 불안정한 정부는 1922년에 붕괴되었다.[3] 1922년 3월과 4월,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 대규모 볼셰비키 공세를 격퇴했다.[3] 1922년 6월 24일, 일본은 1920년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점령한 북부 사할린 섬을 제외하고는 모든 러시아 영토에서 일방적으로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4. 일본군의 철수
일본군은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으나, 광대한 시베리아를 통제하기는 불가능했다. 교통의 요지만을 점령하는 데 급급하여 그 빈 공간에는 붉은 군대와 이에 동조하는 파르티잔이 매복해 있다가 게릴라 전법으로 공격했다. 일본군은 단독 혹은 백군과 협동으로 이들을 진압했고, 자군이 당한 데 대한 보복으로 민간인을 학살하고 게릴라전의 배후 마을을 불태웠으나, 이는 오히려 일본군이나 반혁명 세력에 대한 지지만을 더욱더 떨어뜨렸다. 그리하여 점점 민심은 공산당 정부 쪽으로 향했고, 1922년 반혁명 세력이 시베리아에서 수립한 알렉산드르 콜차크 정부가 붉은 군대의 공세로 붕괴하자 일본군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1]
국제 연합군이 철수한 후에도 일본군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반대 때문에 육군은 자원이 풍부한 이 지역을 합병할 수 없었다. 일본은 1920년 패배하고 체포될 때까지 알렉산드르 콜차크 제독과 같은 백군 지도자를 계속 지원했고, 계획된 완충국을 통제할 의도였던 아타만 세묘노프 정권도 지원했지만, 그의 불안정한 정부는 1922년에 붕괴되었다. 1922년 3월과 4월,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 대규모 볼셰비키 공세를 격퇴했다. 1922년 6월 24일, 일본은 1920년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점령한 북부 사할린 섬을 제외하고는 모든 러시아 영토에서 일방적으로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2] 마지막 일본군은 1922년 10월 25일에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났다.[3] 1925년 1월 20일, 소일 기본 조약이 베이징에서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일본은 1925년 5월 15일까지 사할린 북부에서 병력을 철수하기로 약속했다.
5. 시베리아 출병의 결과 및 영향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은 복잡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시베리아에 축적된 군수품을 보호하고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구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반감, 러시아에 대한 역사적 손실 회복 의지, 완충 국가 건설 또는 영토 획득을 통해 일본에 유리하게 "북방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도 작용했다.[1] 여러 백군 지도자들을 지원했지만, 적군이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소비에트 연방과의 외교적 입지가 불리해졌다. 또한, 이 출병으로 일본 국내 정치는 전시 일치가 붕괴되고 육군과 정부 간, 육군 내부에서 격렬한 논쟁과 파벌 다툼이 벌어졌다.[2]
5. 1. 일본 국내 정치에 미친 영향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은 국내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출병으로 인해 전시 일치가 붕괴되고, 육군과 정부 간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으며, 육군 내부에서도 파벌 다툼이 다시 시작되었다.[1] 일본 국회는 육군이 파병 규모를 과장하고 비밀 자금을 횡령했으며, 로만 폰 운게른-슈텐베르크와 같은 인물들을 지원했다는 점을 맹렬하게 비난했고, 그의 잔혹 행위에 대한 소문이 언론에 보도되었다.[2]시베리아 원정으로 일본군은 전투 또는 질병으로 약 5,000명이 사망했고, 발생한 비용은 9억엔을 초과했다.
5. 2. 국제 관계에 미친 영향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은 여러가지 복잡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시베리아에 축적된 군수 물자를 보호하고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구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반감, 러시아에 대한 역사적 손실 회복 의지, 완충 국가를 건설하거나 영토를 직접 획득하여 일본에 유리하게 "북방 문제"를 해결할 기회라는 인식 또한 작용했다.[1] 여러 백군 지도자들을 지원한 결과, 적군이 러시아 내전에서 결국 승리한 후 소비에트 연방 정부와의 외교적 입지가 불리해졌다. 또한, 이 출병으로 일본의 전시 일치가 산산조각 나면서 육군과 정부가 격렬한 논쟁에 휘말리고 육군 내부에서 파벌 다툼이 재개되었다.[2]시베리아 출병은 일본 국회에서 맹렬하게 비난을 받았는데, 육군이 파병 규모를 과장하고, 비밀 자금을 횡령하고, 중장 로만 폰 운게른-슈텐베르크와 같은 인물들을 지원했다는 비난과 그의 잔혹 행위에 대한 소문이 언론에 보도되었다.[3]
시베리아 원정으로 인한 일본군 사상자는 전투 또는 질병으로 약 5,000명이 사망했고, 발생한 비용은 9억엔을 초과했다.
5. 3. 인적, 물적 피해
일본군은 전투 또는 질병으로 약 5,000명이 사망했고, 9억엔이 넘는 막대한 재정적 손실을 입었다.참조
[1]
웹사이트
The March of the Japanese Army at Vladivostok City
https://www.wdl.org/[...]
[2]
웹사이트
Soviet Armed Forces Losses in Wars, Combat Operations Military Conflicts
http://documents.the[...]
Moscow Military Publishing House
2015-06-21
[3]
간행물
The destruction of Nikolayevks-on-Amur: An episode in the Russian civil war in the Far East
http://journals.camb[...]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6-03-0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