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야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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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야번은 1698년 호리 나오사다가 에치고, 미시마, 가모하라 3군 내에서 1만 석을 영유하며 시야에 거주하면서 시작된 일본의 번이다. 호리 가문은 대대로 에도에 거주하며 정치를 하였으며, 8대 번주 호리 아키토모 시대에 재정난으로 백성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매기다가 덴메이 의민 사건을 겪었다. 이후 번정 개혁을 시도했으나, 번주 암살 미수 사건과 보신 전쟁의 격전지라는 혼란을 겪었다. 1871년 폐번치현으로 폐지되었고, 마지막 번주 호리 유키요시는 오쿠다로 성을 바꾸었다.

시야번
기본 정보
native_name: 椎谷藩
일반 명칭시이야 번
국가
상태도쿠가와 막부 시대의 일본
정부 형태다이묘
수도시이야 진야
좌표coord|37|28|33.57|N|138|37|11.26|E|display=inline, title|type:landmark_region:JP_scale:10000
오늘날니가타현의 일부
시대에도 시대
시작1698년
종료1871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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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사건event_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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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번의 역사

겐나 2년(1616년) 7월, 호리 나오마사의 넷째 아들 호리 나오유키는 오사카 전투에서의 군공을 인정받아 에치고국 누타리군(누타리 군/沼垂郡일본어)에 5,500석을 하사받아, 시야(시야/椎谷일본어)에 진야를 설치했다. 나오유키의 뒤를 이은 호리 나오카게 시대, 간토 지방에 1만 석을 하사받아 다이묘가 되었다. (가즈사 가리야 번, 가즈사 야와타 번 참조). 겐로쿠 11년(1698년), 제4대 당주 호리 나오히로가 에치고의 누타리, 미시마(미시마/三島일본어), 가모하라(가모하라/蒲原일본어) 3군 내에서 1만 석을 영유하며 시야에 거주한 것이 정식 시야번의 시작이다. 역대 번주는 에도 정부였다.

시야 번에서는 제8대 번주인 호리 아키토모 무렵 재정이 압박되었다. 이 때문에 영민에게 가혹한 어용금이나 미곡 선납금 등을 명했다. 그러나 아키토모는 병약하여 분가인 호리 나오모토가 실제 정무를 대행했다. 나오모토는 덴메이 대기근이 일어난 것에 따른 쌀값 폭등을 배경으로 창미(구라마이/蔵米일본어)를 경쟁 입찰에 부쳤다. 이에 격분한 백성들이 소동을 일으켜 덴메이 의민 사건으로 발전했다. 이 사건은 수년간 농민의 직소와 번의 탄압이 반복되어 마침내 막부의 재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막부는 5번에 걸친 평정 결과, 간세이 4년(1792년)에 번주인 아키토모의 은거와 후계자로서 미카와니시오 번주인 마쓰다이라 노리스케의 일곱째 아들인 호리 나오키를 옹립할 것, 영지 5,000석의 절반을 교체하는 처분이 내려졌다. 이때, 시나노국 다카이군(다카이 군/高井郡일본어) 로쿠카와 촌(로쿠카와 촌/六川村일본어)에 로쿠카와 진야가 설치되었다.

그 후, 번 내에서는 번정 개혁 등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가에이 4년(1851년), 가로인 사이토 야오시로에 의한 번주 호리 유키토시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나는 등, 번정은 항상 불안정했다. 메이지 원년(1868년)의 보신 전쟁에서, 시야는 호쿠에쓰 전쟁에서의 격전의 무대가 되어, 전화로 인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듬해, 번주 호리 유키요시는 판적 봉환에 의해 시야 번 지사가 되어 화족에 열했다. 그리고 메이지 4년(1871년)의 폐번치현에 의해 시야 번은 폐지되어, 시야 현이 설치되었다. 번주가는 메이지 17년(1884년)의 화족령으로 자작에 서임되었다.

2.1. 번의 성립과 초기

겐나 2년(1616년) 7월, 호리 나오마사의 넷째 아들 호리 나오유키는 오사카 전투에서 군공을 세워 에치고노쿠니 누타리 군(沼垂郡일본어)의 5,500석 영지를 받아, 시야(椎谷일본어)에 진야를 설치하였다. 나오유키의 뒤를 이은 호리 나오카게 때, 간토의 땅 1만 석을 더 받아 다이묘가 되었다. 겐로쿠 11년(1698년) 가문의 4대 당주 호리 나오사다가 에치고의 누타리, 미시마(三島일본어), 간바라(蒲原일본어) 3개 군 안의 1만 석 영지를 다스리면서, 시야에 거주하였던 것이 정식적인 시야 번의 시작이다. 역대 번주들은 에도에 정부(定府)하는 것이 상례였다.

8대 번주 호리 아키토모 시대에는 재정이 궁핍해져 영지 백성들에게 엄혹한 세금을 징수하였다. 덴메이 대기근으로 쌀 가격이 폭등하자, 호리 나오모토는 구라마이(蔵米일본어)를 경쟁입찰에 내걸었고, 이에 격분한 농민들이 덴메이 의민 사건을 일으켰다. 막부는 간세이 4년(1792년)에 번주 아키토모를 은거시키고 미카와노쿠니 니시오 번주 마쓰다이라 노리스케의 일곱 번째 아들(호리 나오노리)을 후계자로 옹립하고, 영지의 절반인 5천 석을 타지와 교체하라는 처분을 내렸다. 이때 시나노노쿠니 다카이 군(高井郡일본어) 로쿠카와 촌(六川村일본어)에 로쿠카와 진야가 설치되었다.

이후 번 통치 개혁이 시행되었으나, 가에이 4년(1851년)에는 가로 사이토 야오시로에 의한 번주 호리 유키토시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나는 등, 번 통치는 불안정했다. 메이지 원년(1868년) 보신 전쟁에서 시야 번은 미토번사쓰마번, 조슈번에 의한 격전의 무대가 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보신 전쟁 동안에는 호쿠에츠 전투의 전장이 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번주 호리 유키요시는 판적봉환에 의해 시야 번지사가 되었고, 메이지 4년(1871년) 폐번치현에 의해 시야 번은 폐지되고 시야 현이 설치되었다. 이후 시야현은 니가타현에 병합되었다.

2.2. 재정난과 덴메이 의민 사건

겐로쿠 11년(1698년), 호리 나오사다가 에치고의 누타리, 미시마(三島일본어), 간바라(蒲原일본어) 3개 군 안의 1만 석 영지를 다스리면서 시야(椎谷일본어)에 거주하면서 시야 번이 시작되었다. 역대 번주들은 에도에 정부(定府)하는 것이 상례였다.

8대 번주 호리 아키토모 때 재정이 궁핍해져 영지 백성들에게 엄혹한 세금을 징수하였다. 아키토모는 병약하여, 분가인 호리 나오모토가 실제 정무를 대행했는데, 덴메이 대기근으로 쌀 가격이 오르자 구라마이(蔵米일본어)를 경쟁입찰에 내걸었다. 이에 격분한 농민들이 소동을 일으켜 덴메이 의민 사건으로 발전하였다. 이 사건은 수년간 농민의 직소와 번의 탄압이 반복되다가 결국 막부의 판정을 받게 되었다. 간세이 4년(1792년), 막부는 번주 아키토모를 은거시키고 미카와노쿠니 니시오 번주 마쓰다이라 노리스케의 일곱 번째 아들(호리 나오노리)을 후계자로 옹립하고, 전체 영지의 절반인 5천 석을 타지와 교체하라는 처분을 내렸다. 이때 시나노노쿠니 다카이 군(高井郡일본어) 로쿠카와 촌(六川村일본어)에 로쿠카와 진야가 설치되었다.

이후 번 통치 개혁이 시행되었으나, 가에이 4년(1851년) 가로 사이토 야오시로의 번주 호리 유키토시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나는 등, 번 통치는 불안정했다.

2.3. 번 통치의 불안정과 메이지 유신

겐나 2년(1616년) 7월, 호리 나오마사의 넷째 아들 호리 나오유키는 오사카 전투에서 군공을 세워 에치고노쿠니 누타리 군(沼垂郡일본어)의 5,500석 영지를 받고 시야(椎谷일본어)에 진야를 설치하였다. 호리 나오카게 때 간토의 땅 1만 석을 더 받아 다이묘가 되었다. 겐로쿠 11년(1698년) 가문의 4대 당주 호리 나오사다가 에치고의 누타리, 미시마(三島일본어), 간바라(蒲原일본어) 3개 군 안의 1만 석 영지를 다스리면서 시야에 거주한 것이 시야 번의 시작이다. 역대 번주들은 에도에 정부(定府)하는 것이 상례였다.

8대 번주 호리 아키토모 때 재정이 궁핍해져 영지 백성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징수하였다. 덴메이 대기근으로 쌀 가격이 폭등하자, 구라마이(蔵米일본어)를 경쟁입찰에 부쳐 덴메이 의민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막부의 판정으로 이어져, 간세이 4년(1792년) 아키토모는 은거하고 미카와노쿠니 니시오 번주 마쓰다이라 노리스케의 아들(호리 나오노리)을 후계자로 삼고, 영지 절반을 교체하라는 처분이 내려졌다.

이후 번 통치 개혁이 시행되었으나, 가에이 4년(1851년) 가로 사이토 야오시로의 번주 호리 유키토시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나는 등 번 통치는 불안정했다. 메이지 원년(1868년) 보신 전쟁에서 시야 번은 미토번사쓰마번, 조슈번의 격전지가 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이듬해 번주 호리 유키요시는 판적봉환으로 시야 번지사가 되었고, 메이지 4년(1871년) 폐번치현으로 시야 번은 폐지되고 시야 현이 설치되었다.

2.4. 폐번치현과 그 이후

겐나 2년(1616년) 7월, 호리 나오마사의 넷째 아들 호리 나오유키는 오사카 전투에서 군공을 세워 에치고노쿠니 누타리 군(沼垂郡일본어)의 5,500석 영지를 받아, 시야(椎谷일본어)에 진야를 설치하였다. 나오유키의 뒤를 이은 호리 나오카게 때, 간토의 땅 1만 석을 더 받아 다이묘가 되었다. 겐로쿠 11년(1698년) 가문의 4대 당주 호리 나오사다가 에치고의 누타리, 미시마(三島일본어), 간바라(蒲原일본어) 3개 군 안의 1만 석 영지를 다스리면서, 시야에 거주하였던 것이 정식적인 시야 번의 시작이다. 역대 번주들은 에도에 정부(定府)하는 것이 상례였다.

시야 번의 8대 번주 호리 아키토모 때가 되자 재정이 궁핍해졌다. 이 때문에 영지의 백성들에게 엄혹한 세금들을 징수하였다. 그렇지만 아키토모는 병약하여, 분가인 호리 나오모토가 실제 정무를 대행했다. 나오모토는 덴메이 대기근이 일어남에 따른 쌀 가격의 앙등을 배경으로, 구라마이(蔵米일본어)를 경쟁입찰에 내걸었다. 이에 격분한 농민들이 소동을 일으켜, 덴메이 의민 사건으로 발전하였다. 이 사건은 수년간에 걸쳐 농민의 직소와 번의 탄압이 반복되고, 결국에는 막부의 판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막부는 5차례에 걸친 평정의 결과, 간세이 4년(1792년)에 번주 아키토모는 은거하고 미카와노쿠니 니시오 번주 마쓰다이라 노리스케의 일곱 번째 아들(호리 나오노리)을 후계자로 옹립할 것, 그리고 전체 영지의 절반인 5천 석을 타지와 교체하라는 처분이 내려졌다. 이때 시나노노쿠니 다카이 군(高井郡일본어) 로쿠카와 촌(六川村일본어)에 로쿠카와 진야가 설치되었다.

그 후 번내에서는 번 통치 개혁도 시행되었다. 하지만 가에이 4년(1851년), 가로인 사이토 야오시로에 의한 번주 호리 유키토시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나는 등, 번 통치는 늘 불안정한 상태였다. 메이지 원년(1868년) 보신 전쟁에서 시야 번은 미토번사쓰마번, 조슈번에 의한 격전의 무대가 되었고, 전쟁으로 인한 심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듬해, 번주 호리 유키요시는 판적봉환에 의해 시야 번지사가 되었다. 그리고 메이지 4년(1871년) 폐번치현에 의해 시야 번은 폐지되었고, 시야 현이 설치되었다. 이후 시야 현은 새로 창설된 니가타현에 병합되었다.

3. 역대 번주

1698년부터 1871년까지 호리 나오사다(재위 1698년 ~ 1711년)를 시작으로 호리 유키요시(재위 1862년 ~ 1871년)까지 후다이 다이묘로서 1만 석을 다스렸다. 호리 가문의 역대 번주들은 시키부노쇼, 히다노카미, 도토미노카미 등 다양한 관직을 역임하며 종5위하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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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98년 ~ 1711년||시키부노쇼|| 종5위하 ||10,000 ||
|-
||2||호리 나오나카(堀直央일본어) ||1711년 ~ 1720년|| 히다노카미|| 종5위하 ||10,000 ||
|-
||3||호리 나오쓰네(堀直恒일본어) ||1720년 ~ 1730년|| 도토미노카미 || 종5위하 ||1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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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리 나오히사(堀直旧일본어) ||1730년 ~ 1748년||이즈모노카미|| 종5위하 ||1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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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리 나오요시(堀直喜일본어) ||1748년 ~ 1751년|| 히다노카미|| 종5위하 ||1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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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리 나오아키(堀直著일본어) ||1751년 ~ 1768년||다이젠노스케 || 종5위하 ||10,000 ||
|-
||7||호리 나오노부(堀直宣일본어) ||1768년 ~ 1781년||비젠노카미 || 종5위하 ||10,000 ||
|-
||8||호리 아키토모(堀著朝일본어) ||1781년 ~ 1792년||시키부노쇼 || 종5위하 ||10,000 ||
|-
||9||호리 나오노리(堀直起일본어) ||1792년 ~ 1807년||오미노카미 || 종5위하 ||10,000 ||
|-
||10||호리 나오하루(堀直温일본어) ||1808년 ~ 1812년||지쿠고노카미 || 종5위하 ||10,000 ||
|-
||11||호리 나오치카(堀直哉일본어) ||1812년 ~ 1830년||오미노카미 || 종5위하 ||10,000 ||
|-
||12||호리 유키토시(堀之敏일본어) ||1830년 ~ 1862년||이즈모노카미 || 종5위하 ||10,000 ||
|-
||13||호리 유키요시(堀之美일본어) ||1862년 ~ 1871년||우쿄노스케 || 종5위하 ||10,000 ||
|}

마지막 번주인 호리 유키요시는 유신 이후 선조의 성인 오쿠다(奥田)로 복성하였다.

3.1. 호리 가문 (후다이 다이묘, 1만 석)

1698년부터 1871년까지 호리 나오사다(재위 1698년 ~ 1711년)를 시작으로 호리 유키요시(재위 1862년 ~ 1871년)까지 후다이 다이묘로서 1만 석을 다스렸다. 호리 가문의 역대 번주들은 시키부노쇼, 히다노카미, 도토미노카미 등 다양한 관직을 역임하며 종5위하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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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재임 기간 || 통칭 || 조정 관위 || 고쿠다카||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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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 씨 (후다이)
1호리 나오사다({{llang|ja|堀直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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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리 나오나카(堀直央일본어) ||1711년 ~ 1720년|| 히다노카미|| 종5위하 ||1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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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리 아키토모(堀著朝일본어) ||1781년 ~ 1792년||시키부노쇼 || 종5위하 ||1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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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번주인 호리 유키요시는 유신 이후 선조의 성인 오쿠다(奥田)로 복성하였다.

4. 막부 말기의 영지

시야 번은 한 시스템의 대부분의 영지와 마찬가지로 여러 개의 불연속적인 영토로 구성되었다. 영지는 정기적인 지적도 조사와 예상되는 농업 수확량을 기준으로 계산된 고쿠다카를 제공하도록 할당되었다.

* 에치고국
니가타현 카리와군의 21개 촌
* 시나노국
나가노현 미노치군의 2개 촌
** 나가노현 타카이군의 7개 촌

|이름 || 재임 기간 || 통칭 || 조정 관위 || 고쿠다카||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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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 씨 (후다이)
1호리 나오사다({{llang|ja|堀直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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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명칭시이야 번
국가
상태도쿠가와 막부 시대의 일본
정부 형태다이묘
수도시이야 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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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니가타현의 일부
시대에도 시대
시작1698년
종료187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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