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훈
1. 개요
신사훈은 신재효의 현손으로, 1911년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난 신학자이다. 그는 고창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아오야마가쿠엔 대학 신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미국 드루 대학교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귀국 후 감리교신학대학교 학장과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를 역임하며, 15개 언어를 구사하는 등 뛰어난 학문적 역량을 보였다. 그는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기독교 신념에 따라 원칙적인 삶을 살았으며, 서울대학교 교수 정년을 앞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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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신사훈, 申四勳 |
|---|---|
| 접미어 | 박사 |
| 당교회 | 서울대학교, 새싹교회 |
| 노회 |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
| 직책 | 서울대학교 교수 |
| 목회 | 평양신학교 목사 안수 |
| 출생 이름 | 신사훈 |
| 출생일 | 1915년 12월 16일 |
| 출생지 |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선천군 |
| 사망일 | 1998년 09월 22일 |
| 사망 장소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
| 종교 | 대한예수교장로회|장로교 |
| 거주지 | 서울 명륜동 |
| 부모 | 신송환, 박성년 |
| 배우자 | 조노순 |
| 가족 | 신 광희, 신세희 |
| 학력 | 드루 대학교 철학박사 |
| 주요 작품 | 희랍어 문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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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편집자 -
박종현 (편집자)
박종현은 고단샤에서 여러 잡지의 만화 편집자를 역임하며 인기 작품들을 담당했으나, 아내 살해 혐의로 체포되어 법정 공방을 이어가고 있는 일본인이다. -
대한민국의 편집자 -
안명준
안명준은 독립운동가 안봉순의 손자이자 평택대학교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로, 칼빈 신학에 근거한 성경 해석학 연구와 다양한 학회 활동을 통해 한국교회와 해석학 분야에 기여했다. -
대한민국의 장로교도 -
원희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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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장로교도 -
이낙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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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출생 -
윤석중
윤석중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아동문학가로서, 아동문학 운동을 이끌고 수많은 동요와 동시집을 발표하며 한국 아동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
1911년 출생 -
로널드 레이건
미국의 배우 출신으로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거쳐 제40대 대통령을 지낸 로널드 레이건은 레이거노믹스 정책으로 미국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소련과의 긴장 완화로 냉전 종식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재정 적자 증가와 소득 불평등 심화, 이란-콘트라 사건 등 논란도 있었다.
2. 생애
신사훈은 신재효의 현손으로 1911년 6월 17일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고창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 아오야마가쿠엔 신학과에 수석 입학할 정도로 뛰어난 수재였다. 성경 원전을 읽기 위해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독학으로 익혔으며, 1937년 미국 드루 대학교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희랍어 상', '팔레스타인 연구상', '신학학술상' 등을 받았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뉴욕 대학교와 스탠퍼드 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며, 15개 언어 독해가 가능하여 "박사 중에 진짜 박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귀국 후 감리교신학대 학장(1946~47)과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1947~76)를 지냈다. 미 군정과 5·16 군사정부의 영입 제안을 거절하고 신학자와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서울대 기독 학생들에게 국산품 애용 등 신생활 운동을 주창하며 인간 내적 개조를 촉구했고, ‘통일론’ 연구 등을 통해 공산주의를 배척했다. 특히, "타국 공산주의는 자국 위주인데, 우리는 사대사상과 외세를 이용하는 악질로 김일성이 그러하다"고 비판했다.
비성서적인 것과 타협하지 않는 원칙주의자였으며, 박태선과 문선명을 비판했다. 함석헌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측과는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한 입장 차이로 불화를 겪었다.
서울대학교 교수 정년퇴임 후 "그리스도의 종"으로 충성스럽게 살다 죽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밝혔다.
2.1. 유년 시절 및 학업
신사훈은 1911년 6월 17일 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449번지에서 아버지 신송환과 어머니 박성년 사이의 5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신재효의 현손으로, 고창읍성 앞 신재효 고택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 새어머니의 인도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으며, 고창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에는 영어 교사가 권해준 영어 성경을 읽고 감명을 받아 경성에서 신약성경을 구해 읽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다. 졸업할 때까지 성경을 25번 통독했으며, 교회에서 기도로 밤을 새우는 일이 잦아 '신사무엘'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고창 읍성은 그가 자주 찾던 산기도 장소였다.
신사훈은 학업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언어와 수학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항상 우등과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이러한 학업적 성취를 바탕으로 일본 도쿄 아오야마가쿠엔 신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대학에서는 성경 원전을 읽기 위해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독학으로 익혔다.
1937년, 신사훈은 미국으로 건너가 드루 대학교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드루 대학교에서는 '희랍어 상', '팔레스타인 연구상', '신학학술상' 등을 수상하며 뛰어난 학문적 역량을 인정받았다. 그는 15개 언어를 해독할 수 있었으며, "박사 중에 진짜 박사"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의 학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연도 | 내용 |
|---|---|
| 1931년 | 일본 도쿄 아오야마가쿠엔 신학부 예과 수석 입학 |
| 1937년 | 일본 도쿄 아오야마가쿠엔 신학부 본과 수석 졸업 |
| 1940년 | 미국 드루 신학교 수석 졸업(summa cum laude), 희랍어상, 학술상, 팔레스타인 연구상 수상 |
| 1942년-1945년 |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와 뉴욕 유니온 신학교 연구 |
| 1945년 5월 28일 | 미국 드루 신학교 대학원 철학 박사(Ph.D.) |
2.2. 귀국 후 활동
신사훈은 귀국 후 감리교신학대 학장(1946~47)을 거쳐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1947~76)로 봉직했다. 미 군정과 5·16 군사정부가 영입을 제안했으나 "내가 그런 시시한 것을 왜 해"라며 거절하고, 신학자·목회자의 길을 걷고자 했다.
서울대 기독 학생들에게 국산품 애용 등 신생활운동을 주창하며 인간의 내적 개조를 촉구했고, ‘통일론’ 연구 등을 통해 공산주의를 배척했다. 그는 "타국 공산주의는 자국 위주인데, 우리는 사대사상과 외세를 이용하는 악질로 김일성이 그러하다"고 비판했다. 저서로는 ‘공산주의 비판, 예수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의의’ 등이 있다.
주요 경력은 다음과 같다.
2.3. 신학적 입장 및 갈등
신사훈은 비성서적인 것과 타협하지 않는 원칙주의자였다. 박태선과 문선명은 타협 대상이 아니었다. 에큐메니컬 운동을 하던 함석헌(1901~89·기독교사상가)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측과는 불화를 겪었다. 이는 결이 다른 지식인의 신앙적 신념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다. 우군 없는 외로운 싸움에서 돈키호테처럼 비치기도 했다.
2.4. 말년 및 평가
신사훈은 서울대학교 교수 정년을 앞두고 기자들에게 은퇴 후 "그리스도의 종"으로 충성스럽게 살다 죽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밝혔다. 아들 신세희 전 중앙대학교 교수는 "아버지는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이 의로운 삶을 사신 분으로 오직 복음에 목숨 건 분이었다"라고 평가했다.
3. 학력
* 1931년 일본 도쿄 청산학원(靑山學院) 신학부 예과 수석 입학
* 1937년 일본 도쿄 청산학원(靑山學院) 신학부 본과 수석 졸업
* 1940년 미국 드루(Drew) 신학교 수석 졸업(summa cum laude), 희랍어상(’40, Drew), 학술상(’41), 팔레스타인 연구상(’42) 수상
* 1942-45 미국 프린스턴(Princeton) 신학교와 뉴욕 유니온 신학교 연구
* 1945년 5월 28일 미국 드루(Drew) 신학교 대학원 철학 박사(Ph.D.) 학위 취득
4. 경력
신사훈일본어은 1934년부터 1937년까지 동경 조선 Y.M.C.A. 이사를 역임했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 뉴욕 대학교와 스탠퍼드 대학교 교수로 재직했으며, 같은 기간 재미 기독 학생회 총무를 맡았다. 1945년부터 1946년까지는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귀국 후 1946년부터 1947년까지 감리교 신학대학교 부장을 역임했고, 1947년부터 1976년까지 30년간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주임교수로 재직했다. 1955년부터 1959년까지 고등고시 위원을 지냈으며, 1976년에는 국민훈장을 수상했다. 1977년부터 1998년까지 통일교 대책 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고, 1980년부터 1998년까지 기독교 교단 상임 고문을 지냈다.
5. 목회 경력
신사훈한국어은 1946년부터 1950년까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동숭동 소재) 학생 교회의 담임목사로 활동했다. 1950년부터 1952년까지 청파 교회, 1952년부터 1955년까지 보수 교회의 당회장을 역임했다. 1955년부터 1998년까지 새싹 교회 당회장을 맡았다.
1977년부터 1998년까지 대한예수교장로회(총합) 총회장, 총회 신학교 학장, 대학원 원장, 한국 성경 신학 원어 연구회(B.T.L.) 회장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