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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하사리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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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싱하사리 왕국은 13세기 자바 섬에 존재했던 힌두-불교 왕국으로, '사자의 정수' 또는 '잠자는 사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켄 아록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파라라톤 등의 문헌을 통해 당시의 역사와 설화가 전해진다. 켄 아록은 케디리 왕국의 하인에서 자바 군주가 되었으며, 싱하사리 왕국과 마자파힛 제국의 왕실 계통인 라자사 왕조를 창립했다. 싱하사리는 1275년 크르타나가라 왕 시기에 영토를 확장하여 발리 등을 정복하였으며, 스리위자야의 영향력을 제거하려 했다. 1292년 자야카트왕의 반란으로 크르타나가라가 시해당하며 멸망하였고, 멸망 이후 라덴 위자야는 몽골군을 이용하여 자야카트왕을 제거한 뒤 마자파힛 제국을 건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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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하사리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현지 이름싱하사리
다른 표기ꦱꦶꦔ꧀ꦲꦱꦫꦶ
종교케자웬
힌두교
불교
애니미즘
존속 기간 시작1222년
존속 기간 끝1292년
수도투마펠, 후에 쿠타라자 싱하사리로 불림 (오늘날 말랑 인근)
공용어고대 자와어
산스크리트어
정부 형태군주제
현재 국가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크르타나가라 치세 싱하사리의 강역
크르타나가라 치세 싱하사리의 강역
정치
지도자 칭호마하라자
지도자켄 아록 (1222년 ~ 1227년)
아누사파티 (1227년 ~ 1248년)
판지 토자바 (1248년 ~ 1250년)
위슈누와르다나 (1250년 ~ 1268년)
크르타나가라 (1268년 ~ 1292년)
역사
전신케디리 왕국
후신마자파힛 제국
싱가푸라 왕국

2. 어원

싱하사리 혹은 싱고사리는 파라라톤 등 자와어 문헌에 언급되었다. 전승에 의하면, 켄 아록이 왕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옛 이름 투마펠(Tumapel)을 대체하여 붙인 것이다. 투마펠은 오늘날 말랑과 그 주변에 해당하는 비옥한 고지대에 있었다. 산스크리트어로 '싱하(singha)'는 사자를 의미하며, '사리(sari)'는 고대 자와어로 정수 혹은 잠들다를 의미한다. 즉 싱하사리는 '사자의 정수' 혹은 '잠자는 사자'라는 뜻이다. 비록 사자는 자와의 토종 동물은 아니지만 사자의 상징적 묘사는 인도네시아 문화에서 흔하므로 힌두교-불교 상징의 영향에서 유래한 것이다.

3. 역사

켄 아록(1182–1227/1247)은 싱하사리를 건국하였다. 켄 아록은 투마펠 군주의 하인에서 자바 군주가 되었으며, 싱하사리 왕국과 마자파힛 제국 왕실 계통인 라자사 왕조의 창립자로 여겨진다.[1] 그는 퉁굴 아메퉁을 살해하였고, 후에 퉁굴 아메퉁의 아들 아누사파티에게 보복 살해되었다.[2] 켄 아록의 아들 판지 토자야는 아누사파티를 암살하고 왕위에 올랐지만, 1248년 조카들의 반란으로 쫓겨났다. 랑가 우니와 마히사 참파카는 비슈누바르다나와 나라심하무르티라는 이름으로 공동 통치하였다.[2]

1275년, 크르타나가라는 스리비자야 잔존 세력을 정벌하기 위한 해군 원정을 단행했다.[2] 파말라유 원정과 파발리 원정 등을 통해 싱하사리의 영역을 확장하고, 순다 갈루 왕국, 파항 왕국, 발라카나 왕국, 구룬 왕국 등 주변국에 사절단을 파견하고 참파와 동맹을 맺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원정은 국방력을 소모시켜, 크르타나가라에 대한 암살 음모로 이어졌다.

싱하사리와 마자파힛은 1293년 몽골군을 격퇴하여 몽골군의 침략을 저지한 몇 안 되는 아시아 국가 중 하나였다.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은 싱하사리에 사절단을 보내 복속과 조공을 요구하였으나, 크르타나가라는 이를 거절하고 사신 맹기(孟琪)의 얼굴에 상처를 내는 등 모욕을 주었다.[2] 이에 쿠빌라이 칸은 1292년 1천 척의 전함을 보내 싱하사리를 응징하려 했으나, 케디리 왕국의 반란으로 실패하였다.

1292년, 다하 왕국의 봉신 자야카트왕은 마두라 섬의 아르야 위라라자의 도움을 받아[2] 싱하사리를 공격했다. 케디리 군대는 남북 양쪽에서 싱하사리를 공격했고, 남쪽 군대가 수도 쿠타라자를 함락시키면서 탄트라 의례 중이던 케르타나가라는 살해되고 싱하사리는 멸망했다.

이후 라덴 위자야는 망명과 복수를 통해 마자파힛 제국을 세운다.

3. 1. 건국

켄 아록(1182–1227/1247)은 싱하사리 건국의 시조이다. 그의 이야기는 자바 중부와 동부에서 유명한 민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켄 아록의 전기와 싱하사리 초기 역사 대부분은 파라라톤에 기록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신화적인 측면도 포함되어 있다. 켄 아록은 케디리 왕국에서 켄 엔독이라는 여인과 이름 모르는 아버지(일부 이야기에서는 브라흐마라는 신의 아들로 묘사되어 있음) 사이에서 태어난 고아였다.

켄 아록은 투마펠 군주 퉁굴 아메퉁의 하인에서 자바 군주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싱하사리 왕국과 마자파힛 제국 왕실 계통인 라자사 왕조의 창립자로 여겨지고 있다.[1] 켄 아록은 퉁굴 아메퉁을 살해하였고, 후에 퉁굴 아메퉁의 아들 아누사파티에게 보복 살해되었다.[2] 켄 아록의 아들 판지 토자야는 아누사파티를 암살하였고 왕위에 올랐지만, 1248년 조카들의 반란으로 수 개월만에 쫓겨났다. 조카 랑가 우니와 마히사 참파카는 비슈누바르다나와 나라심하무르티라는 이름으로 공동 통치를 하였다.[2]

3. 2. 확장

1275년, 싱하사리의 제5대 군주 크르타나가라(재위 1268년 ~ 1292년)는 스리비자야 잔존 세력을 정벌하기 위한 해군 원정을 단행했다.[2] 이는 실론 해적의 노략과 1025년 스리위자야 케다를 정복한 촐라 제국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크르타나가라는 파말라유 원정과 파발리 원정 등을 통해 싱하사리의 영역을 확장했다. 또한 순다 갈루 왕국, 파항 왕국, 발라카나 왕국, 구룬 왕국 등 주변국에 사절단을 파견하고 참파와 동맹을 맺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원정은 싱하사리의 국방력을 소모시켰고, 결국 크르타나가라에 대한 암살 음모로 이어지게 되었다.

3. 2. 1. 파말라유 원정

크르타나가라(재위 1268년 ~ 1292년)는 1275년 스리비자야의 잔존 세력을 정벌하기 위한 해군 원정을 단행했다.[2] 이는 실론(Ceylon) 해적의 노략과 1025년 스리위자야 케다(Kedah)를 정복한 촐라 제국의 공격에 대응하고자 한 것이었다. 당시 말라야 왕국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은 잠비(Jambi)였으며, 잠비는 1088년 스리비자야 수도를 함락한 후 다르마스라야 왕국 혹은 믈라유 왕국과 싱가포르의 테마섹 왕국으로 이어졌다.

파말라유 원정은 마헤사 아나브랑(Mahesa Anabrang, 혹은 아드와야 브라흐만Adwaya Brahman) 장군의 지휘 하에 말라야 지역으로 출동하는 정벌 작전이었다. 이들은 잠재적인 몽골과 해적의 침략에 맞서 '해양 실크로드'라 불리는 말라얀 해협을 안정시킨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말라야 왕국들은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크르타나가라는 중국에서 인도로 가는 해로를 통제하는 해양 제국으로서 스리비자야를 능가하고자 하는 바람을 오랫동안 품고 있었다.

싱하사리 왕국부터 마자파힛 제국에 이르는 1275년부터 1292년까지 수행된 파말라유 원정은 자와의 권축 서사인 나가라케르타가마에 기록되어 있다. 1290년 크르타나가라는 자와와 발리로부터 스리위자야의 영향을 제거하였다.

3. 2. 2. 파발리 원정

크르타나가라(재위 1268-1292)는 1284년 발리로 떠나는 호전적인 성격의 정벌인 파발리 원정을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발리가 싱하사리의 영역이 되었다.[2]

3. 2. 3. 기타 원정

크르타나가라(Kertanegara, 혹은 케르타나가라Kertanagara, 재위 1268-1292)는 1275년 스리비자야(Srivijaya)의 잔존 세력을 정벌하기 위한 해군 원정을 단행했다.[2] 이는 실론(Ceylon) 해적의 노략과 1025년 스리위자야 케다(Kedah)를 정복한 촐라 제국(Chola kingdom)의 공격에 대응하고자 한 것이었다. 말라야 왕국( Malaya kingdoms)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잠비(Jambi)는 1088년 스리비자야 수도를 함락하였고, 이후 다르마스라야 왕국(Dharmasraya Kingdom) 혹은 믈라유 왕국(Melayu Kingdom)과 싱가포르의 테마섹 왕국(Temasek Kingdom)으로 이어졌다.

파말라유 원정(Pamalayu expedition)은 마헤사 아나브랑(Mahesa Anabrang, 혹은 아드와야 브라흐만Adwaya Brahman) 장군의 지휘 하에 말라야(Malaya) 지역으로 출동하는 정벌 작전이었다. 이들은 잠재적인 몽골과 해적의 침략에 맞서 '해양 실크로드(Maritime Silk Road)'라고 하는 말라얀 해협(Malayan strait)을 안정시킨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말라야 왕국들은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크르타나가라는 중국에서 인도로 가는 해로를 통제하는 해양 제국으로서 스리비자야를 능가하고자 하는 바람을 오랫동안 품고 있었다.

1275년부터 1292년까지 수행된 파말라유 원정은 싱하사리 왕국부터 마자파힛 제국에 이르는 자와의 권축 서사인 나가라케르타가마(Nagarakertagama)에 연대기로 작성되어 있다. 이로 인해 싱하사리의 영역은 마자파힛의 영역이 되었다. 1284년, 크르타나가라는 발리(Bali)로 떠나는 호전적인 성격의 파발리 원정(Pabali expedition)을 주도하여 발리를 싱하사리의 영역으로 만들었다. 국왕은 또한 순다 갈루 왕국(Sunda-Galuh Kingdom), 파항 왕국(Pahang Kingdom), 보르네오(칼리만탄)의 발라카나 왕국(Balakana Kingdom), 말루쿠의 구룬 왕국(Gurun Kingdom)으로 보병대, 원정대, 사절단을 보냈으며, 참파(Champa) 국왕과도 동맹을 맺었다.

1290년 크르타나가라는 자와와 발리에서 스리위자야의 영향력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원정은 싱하사리의 국방력을 소모시켰고, 이는 훗날 크르타나가라에 대한 암살 음모로 이어졌다.

3. 3. 몽골군과의 대립

싱하사리와 그 후계 왕국인 마자파힛은 1293년 몽골군을 격퇴하여 몽골군의 침략을 저지한 몇 안 되는 아시아 국가 중 하나였다. 말라얀 반도 무역풍의 중심이자, 싱하사리의 부상과 영향력, 경제적 풍요는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의 주목을 끌었다. 게다가 싱하사리는 역내 다른 강국 참파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파간 전투 등을 통해, 자와와 참파는 모두 몽골이 이웃 국가를 침략하고 약탈하는 것에 대해 우려하였다.

쿠빌라이 칸은 사절단을 파견하여 자와의 항복과 조공을 요구하였다. 1280년, 1281년, 1289년 세 차례에 걸쳐 사절단을 보냈으나, 크르타나가라는 모두 거절하였다.[2] 크르타나가라는 원의 사신 맹기(孟琪)의 얼굴에 상처를 내는 등 몽골 사절단을 모욕하였고, 일부 기록에는 크르타나가라가 직접 맹기의 귀를 잘랐다고 전해진다.

이에 분노한 쿠빌라이 칸은 1292년 1천 척의 전함을 보내 응징하려 했고, 이들은 1293년 초 자와 투반 연안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크르타나가라는 케디리 왕국의 반란을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3. 3. 1. 몽골의 침공 시도

싱하사리 시기 아모가파사(Amoghapāśa)의 만달라(mandala)


싱하사리 사원에서 발굴된 반야바라밀다(Prajnaparamita) 불상은 켄 아록의 아내 켄 데데스(Ken Dedes) 왕비의 모습을 본뜬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인도네시아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of Indonesia) 소장.


싱하사리와 후계 왕국인 마자힛은 1293년 몽골군을 격퇴하여 몽골군의 침략을 저지한 몇 안되는 아시아 국가 중 하나였다. 말라얀 반도(Malayan peninsula) 무역풍의 중심이자, 싱하사리의 부상과 영향력과 경제적 풍요는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의 주목을 끌었다. 게다가 싱하사리는 역내 또다른 강국 참파와 동맹이었다. 파간 전투 등을 통하여, 자와와 참파 모두 몽골이 이웃 국가를 침략하고 약탈하는 것을 우려하였다.

이후 쿠빌라이 칸은 사절단을 파견하여 자와의 항복과 조공을 요구하였다. 1280년, 쿠빌라이칸은 크르타나가라에게 첫 사절단을 보내어 싱하사리의 복속과 조공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되었다. 1281년, 쿠빌라이 칸은 다시 사절을 보내어 같은 요구를 제시하였지만 다시 거절되었다. 1289년, 마지막 사절이 파견되어 다시 같은 요구를 제시하였지만 크르타나가라는 또다시 거절하였다.[2] 싱하사리 궁정에서 크르타나가라는 쿠빌라이칸의 사절을 욕보이며, 원의 사신 맹기(孟琪)의 얼굴에 상처를 내었다. 일부 사료는 크르타나가라가 직접 맹기의 귀를 잘랐다고 전한다. 맹기 등은 돌아가 상처를 보여주며 크르타나가라의 회답을 대신하였다.

이에 분노한 쿠빌라이 칸은 1292년 문죄를 위한 전함 정크(junk) 1천척을 보내었고, 1293년 초 자와 투반 연안에 도착하였다.

크르타나가라의 군대는 널리 퍼져 있었고 도처에 배치되어 있었던 가운데, 그는 전대의 케디리 왕국 왕실이 일격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3. 4. 멸망

1292년, 다하 왕국의 봉신 자야카트왕은 마두라 섬의 아르야 위라라자의 도움을 받아[2] 싱하사리를 정벌하려 했다. 케디리 군대는 남북 양쪽에서 싱하사리를 공격했고, 케르타나가라 왕은 사위 라덴 위자야를 북쪽으로 보냈으나, 남쪽 군대가 수도 쿠타라자를 함락시키면서 탄트라 성례 중이던 케르타나가라는 살해되고 싱하사리는 멸망했다.

이후 라덴 위자야는 망명과 복수를 통해 마자파힛 제국을 세우게 된다.

3. 4. 1. 자야카트왕의 반란

마지막 왕 크르타나가라를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보시 사원.


1292년, 다하 왕국 출신의 봉신(vassal)인 부파티(Bupati)[3] 자야카트왕은 싱하사리 정벌 군대를 마련하여 국왕을 시해하려 하였다. 그는 마두라 섬의 수메넵(Sumenep) 출신 부파티 아르야 위라라자의 도움을 받았다.[2]

케디리(겔랑-겔랑) 군대는 남과 북에서 싱하사리를 협공하였다. 케르타나가라는 북부의 침공만을 인지하고 사위 나라르야 상그라마위자야를 북부로 보내어 반란을 진압하고자 하였다. 북부 케디리군은 궁지에 몰렸지만, 남부 케디리군이 싱하사리에 감지되지 않은 채로 침투하여 수도 쿠타라자(Kutaraja)에 이르러 약탈하는데 성공하였다. 탄트라 성례(聖禮) 기간에 자야카트왕은 왕위를 찬탈하고 케르타나가라를 시해하였으며, 이로 인해 싱하사리는 멸망하였다.

케디리의 배반으로 싱하사리 수도가 함락된 소식을 들은 라덴 위자야는 싱하사리를 지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동료 랑갈라웨(Ranggalawe), 소라(Sora), 남비(Nambi)와 함께 같은 부파티(Bupati)이자 남비의 부친이기도 한 마두라의 아르야 위라라자에게 가서 망명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이후 아르야 비라라자는 자야카트왕에게 귀순하였다. 아르야 위라라자의 후원 하에 라덴 위자야는 자야카트왕에게 항복하는 척했으며, 새로운 국왕 자야카트왕의 호의를 얻었다. 자야카트왕은 라덴 위자야에게 아르주나산(Mount Arjuna) 북쪽 타릭숲(Tarik forest)이라는 황무지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곳에서 라덴 위자야는 목귤(木橘, ''Aegle marmelos'') 혹은 마자(Maja)라는 쓴 과일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훗날 세우게 되는 나라 이름을 마자파힛(Majapahit, '쓴 마자'라는 뜻)이라 하였다.

3. 4. 2. 라덴 위자야의 망명과 복수

1292년, 다하 왕국의 봉신 자야카트왕(Jayakatwang)은 마두라 섬의 아르야 위라라자의 도움을 받아[2] 싱하사리를 공격했다. 케디리 군대는 남과 북에서 싱하사리를 협공하였고, 라덴 위자야(Raden Wijaya)는 북쪽 방면을 맡았으나 남쪽 군대가 수도 쿠타라자(Kutaraja)를 함락시키면서 싱하사리는 멸망했다.

라덴 위자야는 마두라의 아르야 위라라자에게 망명했으나, 이후 아르야 비라라자는 자야카트왕에게 귀순하였다. 아르야 위라라자의 후원으로 라덴 위자야는 자야카트왕에게 항복하는 척하여 신임을 얻었고, 타릭숲(Tarik forest)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이곳에서 라덴 위자야는 목귤(木橘, ''Aegle marmelos'') (마자(Maja))라는 쓴 과일을 발견하고, 훗날 세우게 되는 나라 이름을 마자파힛(Majapahit, '쓴 마자'라는 뜻)이라 하였다.

1293년 초, 몽골의 자바 침략 당시 원나라 해군이 자와섬을 공격하려 하자, 라덴 위자야는 몽골군을 이용하여 자야카트왕을 제거하려 했다. 1293년 3월, 라덴 위자야의 군대는 몽골군과 연합하여 칼리마스강(Kali Mas River)에서 자야카트왕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몽골군은 자야카트왕에게 맹공을 가하여 항복을 받아내고 처형하였다.

자야카트왕 제거 이후, 라덴 위자야는 몽골군을 공격하여 1293년 5월 31일 몽골군을 자와섬에서 철군시켰다.[2]

1293년 11월 12일, 라덴 위자야는 케르타자사 자야와르다나(Kertajasa Jayawardhana)라는 칭호와 함께 왕위에 올랐다. 이가 바로 마자파힛 제국의 시조이다.

4. 군주 목록

싱하사리와 마자파힛의 왕실인 라자사 왕조 계보도. 군주는 재위 기간이 적혀 있음.

  • 켄 아록 (1222년~1227년)[2]
  • 아누사파티 (1227년~1248년)[2]
  • 판지 토자야 (1248년)[2]
  • 비슈누바르다나-나라심하무르티 (1248년~1268년)[2]
  • 케르타네가라 (1268년~1292년)[2]

참조

[1] 서적 Southeast Asia: a historical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Bloomsbury Academic 2010-07-25
[2] 서적 The Indianized states of Southeast Asi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Hawaii Press
[3] 문서 영어로 '섭정•통치자(regent)'로 번역되지만 실제로는 지역 군주 정도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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