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가루 쓰구미치
1. 개요
쓰가루 쓰구미치는 쓰가루 씨족의 분가 출신으로, 구로이시 번주 쓰가루 쓰구야스의 양자가 되어 이름을 개명했다. 그는 보신 전쟁에서 관군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고, 메이지 유신 이후 구로이시의 제국 지사를 역임했다. 1884년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 만년에는 와카 시인으로 활동했으며, 사후 종3위의 조정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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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위 | 자작 |
|---|---|
| 본명 | 쓰가루 쓰구미치 (津軽承叙) |
| 다른 이름 | 본지로 (本次郎) 아사즈미 (朝澄) |
| 관위 | 시키부쇼유 (式部少輔) |
| 전임 직책 | 무쓰국 구로이시번 번주 |
|---|---|
| 칭호 및 훈장 | 정3위 |
| 배우자 | 지요코 (이케다 나카미치의 4녀) |
| 자녀 | 루이키치 남자 쓰루 에이코 |
| 귀족원 의원 | 귀족원 의원 |
|---|---|
| 임명일 | 1890년 2월 |
| 퇴임일 | 1897년 7월 10일 |
| 직책 | 구로이시번 지사 |
|---|---|
| 임명일 | 1869년 9월 18일 |
| 퇴임일 | 1871년 8월 |
| 원수 | 메이지 천황 |
| 원수 직책 | 천황 |
| 직책 | |
|---|---|
| 군주 |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 도쿠가와 이에사다 도쿠가와 이에모치 도쿠가와 요시노부 |
| 임기 시작 | 1851년 |
| 임기 종료 | 1868년 |
| 전임자 | 쓰가루 쓰구야스 |
| 후임자 | 폐지 |
| 출생일 | 1840년9월 24일 |
|---|---|
| 사망일 | 1903년12월 7일 |
| 아버지 | 쓰가루 유키토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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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이시번주 -
쓰가루 쓰구야스
쓰가루 쓰구야스는 구로이시 번의 2대 번주이며, 형의 뒤를 이어 번주가 되어 농업 생산성 향상과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노력하다 3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구로이시번주 -
쓰가루 지카타리
쓰가루 지카타리는 에도 시대 후기의 다이묘로, 구로다 나오타카의 아들로 태어나 쓰가루 노리아키의 양자가 되었으며, 구로이시 번의 번주로서 1만 석 영지를 다스리다 은퇴 후 사망했다. -
1903년 사망 -
오자키 고요
오자키 고요는 메이지 시대 일본의 소설가로, 겐유샤 창립과 '이인비구니색참회' 등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사실주의적 묘사와 의고전주의적 경향을 특징으로 하는 작품 활동으로 고다 로한과 함께 '홍로시대'를 구축하고 이즈미 교카 등의 문하생을 배출했다. -
1903년 사망 -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는 센트럴 파크 등을 설계한 미국의 조경 건축가이며, 저널리스트, 사회 운동가로 활동하며 미국 조경 건축의 아버지로 불린다. -
지번사 -
부번현 삼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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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번사 -
판적봉환
판적봉환은 1868년부터 1871년까지 일본에서 시행된 제도로, 봉건적 막번 체제를 개혁하고 중앙집권화를 강화하기 위해 각 번의 토지와 백성을 천황에게 반환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2. 생애
쓰가루 쓰구미치는 바쿠마츠 시대라는 격동기에 다이묘가 되었다. 보신 전쟁에서는 처음 삿초 동맹에 가담했다가 오우에쓰 열번 동맹으로, 다시 천황 측으로 노선을 바꾸며 노헤지 전투와 하코다테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구로이시 번 지사를 역임하다 폐번치현으로 아오모리현에 영지가 흡수되자 도쿄로 이주했다. 화족령 시행으로 자작(시샤쿠) 작위를 받았고, 귀족원 의원으로도 활동했다. 만년에는 와카 시인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사후에는 종3위의 칭호를 받았다.
2.1. 가계와 출생
쓰가루 씨족의 분가 출신인 쓰가루 유키토모의 아들로, 덴포 11년(1840년) 8월 29일 히로사키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혼지로, 초명은 아사즈미(ともずみ)였다. 가에이 4년(1851년) 구로이시 번 3대 번주 쓰가루 쓰구야스의 양자가 되었다. 같은 해 쓰구야스가 사망하면서, 히로사키 번주 쓰가루 노부츠구(쓰구야스의 양부이자 구로이시 번 2대 번주)로부터 편휘를 받아 노부유키로 개명했다.
안세이 5년(1858년)에 종5위 하·시키부 소호에 서임되었다.
2.2. 구로이시 번주 취임
쓰가루 쓰구미치는 쓰가루 씨족의 분가 출신인 쓰가루 유키토모의 아들로, 1851년 쓰구야스의 사망으로 남성 후손이 없었기에 구로이시의 3대 다이묘 쓰가루 쓰구야스에게 양자로 입적되었다. 그는 당시 이름을 쓰가루 도모즈미에서 쓰가루 쓰구미치로 개명했다.
무쓰 구로이시 번 3대 번주 쓰가루 노부야스의 양자가 되었다. 가에이 4년(1851년)에 노부야스가 사망했기 때문에 그 뒤를 이었다.
2.3. 보신 전쟁
게이오 4년(1868년), 쓰가루 쓰구미치는 쓰가루 노부아키와 함께 관군에 참가하여 하코다테 정벌에서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메이지 2년(1869년)에 상전금 1,000냥을 받았다.
쓰구미치는 바쿠마츠 시대라는 격동기에 다이묘가 되었다. 이 시기 쓰가루 씨족은 처음에는 삿초 동맹의 친천황 세력에 가담하여 인근 쇼나이 번을 공격했다. 그러나 곧 노선을 변경하여 잠시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담했다. 하지만 몇 달 후 동맹에서 탈퇴하여 다시 천황 편에 섰고, 보신 전쟁 동안 노헤지 전투와 하코다테 전투 등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2.4.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치현으로 쓰구미치는 1869년부터 1871년까지 구로이시의 제국 지사로 임명되었으며, 이때 영토는 새로운 아오모리현에 흡수되었다. 그는 도쿄로 이주했으며, 1884년 화족 작위 제도가 제정되면서 자작(시샤쿠)의 작위를 받았다. 1890년에는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만년에는 와카 시로 유명했다. 그는 사후에 종3위의 조정 칭호를 받았다. 그의 묘는 도쿄 다이토구의 야나카 묘지에 있다.
1869년 판적봉환으로 지번사가 됨과 동시에 화족에 포함되었고, 1871년 폐번치현으로 면관될 때까지 번 지사를 역임했다. 판적봉환 때 정해진 가록은 현미 802석이었다. 1876년 금록공채 증서 발행 조례에 따라 가록과 교환하여 지급된 금록공채의 액수는 17254.268JPY이었다.
1884년 7월 8일, 화족령 시행으로 자작에 임명되었다. 1890년 7월 10일 귀족원이 개설되면서 귀족원 의원(자작 의원)이 되어 1897년 7월 10일까지 재직했다. 1903년 12월 7일, 64세로 사망했다. 뒤는 장남인 루이키치가 이었다. 묘소는 도쿄도다이토구 우에노의 야나카 묘지에 있다. 와카에 재능이 뛰어나, 「일본영걸백수」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3. 가족 관계
| 구분 | 관계 | 이름 |
|---|---|---|
| 아버지 | 친아버지 | 쓰가루 노부토모 |
| 어머니 | 친어머니 | 호코인 (다카쿠라 모리요시의 딸) |
| 양아버지 | 쓰가루 쓰구야스 | |
| 배우자 | 이케다 치요코 (이케다 나카노리의 넷째 딸) | |
| 장남 | 쓰가루 루이타치 | |
| 차녀 | 쓰가루 오토즈루 (오가사와라 나가이쿠의 정실, 후에 이혼) | |
| 넷째 딸 | 쓰가루 에이코 (가토 야스나리의 정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