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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어 네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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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투어 네베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훈장을 받았으며,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경찰로 근무하다가 나치당에 입당하여 게슈타포와 보안 경찰에서 요직을 맡았다. 그는 국가형사경찰청장으로 재직하며 유대인 학살에 관여했고, 아인자츠그루펜 B 사령관으로서 동부 전선에서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 또한, 인터폴 회장을 역임하고, 7·20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네베는 기회주의적 성향으로 자신의 출세를 위해 나치 정권에 협력했으며, 대량 학살에 적극 가담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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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어 네베 - [인물]에 관한 문서
개요
1942년의 네베
1942년의 네베
본명아르투어 네베
출생1894년 11월 13일
출생지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사망1945년 3월 21일
사망지나치 독일 베를린 플뢰첸제 감옥
사망 원인교수형
국적독일
범죄 정보
유죄 판결해당 사항 없음
형벌사형
희생자 수45,000명 이상
범행 장소벨라루스 및 독일
범행 동기나치즘
범행 시작 년도1941년
범행 종료 년도1944년
군 경력
소속독일 제국
나치 독일
군종독일 제국 육군
슈츠슈타펠
복무 기간1914년–1918년
1931년–1944년
최종 계급SS-집단지도자
주요 지휘국가형사경찰청
B 특수작전집단
국제형사경찰기구
참전제1차 세계 대전
주요 전투제2차 세계 대전
훈장철십자 훈장 1급
전쟁 공로 십자장 1급 및 2급 (검 포함)
경력
친위대 입대1931년
국제형사경찰기구 총재1942년 – 1943년
전임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후임에른스트 칼텐브루너

2.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초등학교 교사의 아들로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시 제17공병대대에 자원 입대하여 복무했으며, 가스 공격으로 두 차례 부상을 입고 1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1920년 바이에른주 경찰에 입직하여 1924년에는 형사 경찰 부국장이 되었다.

1931년 6월 1일 나치당에 입당했으며, 이후 형사 경찰 정보를 나치 측에 제공했다. 1933년 4월 1일 쿠르트 달뤼게의 초청으로 베를린 경찰로 옮겼고, 같은 해 10월 게슈타포 장관 루돌프 디엘스의 초청으로 게슈타포에 합류했다. 네베는 장검의 밤 사건을 계기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와 친분을 쌓고 친위대(SS)에 입대했다.

1936년 형사 경찰(크리포)이 하이드리히가 지휘하는 보안 경찰(SiPo) 본부 산하로 편입되면서 네베는 크리포 국장으로 임명되었다. 1939년 보안 경찰이 나치당 조직인 SD와 통합되어 국가보안본부(RSHA)가 창설되자, 크리포는 국가보안본부 제5국이 되었고 네베가 국장직을 맡았다. 1939년11월 8일 뷔르거브로이켈러에서 발생한 아돌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수사를 지휘했다[1]

네베는 1939년 또는 1940년경부터 반히틀러 노선으로 돌아섰으며, 직무상 얻은 정보를 반히틀러 세력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그는 루트비히 베크 육군 대장과 한스 오스터 육군 대령 등 군 내부의 반히틀러파와 접촉하며 저항 운동에 관여했다.

2. 1. 경찰 경력

1894년 베를린에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 자원 입대하여 복무했다. 1920년 베를린 형사 경찰(Kripo)에 입대하여 경찰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1923년 경찰 감찰관, 1924년 경찰 위원으로 승진했다.

네베는 보수적인 민족주의자였으며, 1930년대 독일의 우경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1931년 7월 나치당(당원 번호 574,307)과 SS(SS 번호 280,152)에 가입했다. 그는 베를린 형사 경찰 내에서 나치당 연락 담당자 역할을 했으며, 쿠르트 달뤼게가 이끄는 초기 베를린 SS 그룹과 연계했다. 1932년 초에는 다른 나치 성향 형사들과 함께 베를린 경찰 내 국가사회주의(NS) 공무원 협회를 결성했다. 1933년에는 당시 베를린 경찰 본부 소속이었던 한스 베른트 기제비우스를 알게 되었다. 기제비우스는 전후 네베의 나치 시절 활동에 대해 그를 변호하는 듯한 설명을 남겼다. 1935년 네베는 프로이센 형사 경찰의 수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41년 11월 9일에는 SS-''집단지도자''(Gruppenführer) 및 경찰 ''중장''(Generalleutnant) 계급을 받았다.

왼쪽부터: 프란츠 요제프 후버, 네베, 하인리히 힘러,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그리고 하인리히 뮐러, 1939년 11월 뮌헨.


1936년 7월, 프로이센 형사 경찰은 독일 중앙 형사 수사 부서인 ''국가형사경찰청''(RKPA)으로 개편되었다. 이 조직은 비밀 국가 경찰인 ''게슈타포''와 함께 ''보안 경찰''(SiPo)로 통합되었으며,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총지휘를 맡았다. 네베는 RKPA의 수장으로서 하이드리히에게 보고하는 위치에 있었다. 형사 경찰이 하이드리히의 통제 하에 들어가면서 나치 경찰 국가 체제는 더욱 강화되었고, 보안국(SD), 게슈타포, 크리포 출신 인력들이 독일 경찰 및 보안 기관의 지도부 자리를 중복해서 차지하게 되었다.

1939년 9월 27일, 하인리히 힘러국가보안본부(RSHA) 창설을 명령했다. 이 새로운 거대 조직은 정보국, 보안국, 비밀 국가 경찰, 형사 경찰을 모두 포함했다. 형사 경찰(크리포)은 RSHA 제5국(Amt V)으로 편입되었고 네베가 국장직을 유지했다. 크리포의 공식 임무는 "범죄 근절"이었으나, 실제로는 임의 체포 및 구금 권한을 남용하며 게슈타포처럼 활동했다. 소위 보호 구금을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반사회적 인물"로 간주된 사람들을 대규모로 단속하는 데 앞장섰다.

1939년, 네베는 형사 경찰청 위원이었던 슈투트가르트 출신의 크리스티안 비르트를 T4 작전에 파견하여 장애인에 대한 비자발적 안락사 프로그램 실행에 관여했다. 같은 해, 크리포 수장으로서 신티와 로마인 집단에 대한 작전 논의에도 참여했다. 네베는 베를린의 "집시"들을 유대인 및 동부 지역의 다른 사람들을 위해 계획된 수용소로 보내는 방안을 제안했다. 1939년 10월에는 아돌프 아이히만에게 니스코 계획에 따라 신티와 로마인들을 점령된 폴란드로 이송하도록 명령했다. 1939년 11월 8일 뷔르거브로이켈러에서 발생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에는 게오르크 엘저를 직접 심문하고 그가 단독 범인이라고 결론 내렸다.[1]

1942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암살된 후, 네베는 국제형사경찰위원회(ICPC) 총재직을 잠시 맡았다가 1943년 새로 국가보안본부 수장이 된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에게 인계했다.

네베는 1939년 또는 1940년경부터 반히틀러 세력과 접촉하기 시작했으며, 직무상 얻게 되는 정보를 반나치 저항 세력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루트비히 베크 육군 대장, 한스 오스터 육군 대령 등 군부 내 반히틀러파와 연락하며 음모에 가담했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발생 직후에는 사건 수사를 지휘하며 표면적으로는 관련 없는 척했으나, 볼프-하인리히 폰 헬도르프 베를린 경찰청장이 체포되면서 네베의 가담 사실도 드러났다.[4] 그는 도주했으나 1945년 1월 16일 게슈타포에 체포되었다.[1] 1945년 3월 2일 민족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3월 21일 처형되었다.

2. 2. 국가형사경찰청장



1936년 7월, 프로이센 형사 경찰은 독일의 중앙 형사 수사 부서인 ''국가형사경찰청''(Reichskriminalpolizeiamt, RKPA)이 되었다. 이 부서는 비밀 국가 경찰인 ''게하임 슈타츠폴리차이''(Geheime Staatspolizei, 게슈타포)와 함께 ''지허하이트폴리차이''(Sicherheitspolizei, SiPo)로 통합되었으며,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전체 지휘를 맡았다. 네베는 RKPA의 수장으로 임명되어 하이드리히에게 보고했다. 크리포가 하이드리히의 통제를 받게 되면서 나치 경찰 국가의 기반이 더욱 굳건해졌다. 또한 독일의 경찰 및 보안 부대에서 SD, 게슈타포 및 크리포 출신 인력들이 지도자 자리를 "중복"하여 차지하게 되었다.

1939년 9월 27일, 힘러국가보안본부 (''Reichssicherheitshauptamt'', RSHA)를 창설하라고 명령했다. 이 새로운 조직은 정보국, 보안국, 비밀 국가 경찰 및 형사 경찰을 포괄했다. RSHA는 크리포를 포함한 여러 주요 부서로 나뉘었으며, 크리포는 RSHA의 V부서가 되었다. 네베가 받아들인 크리포의 명시된 임무는 "범죄 근절"이었으나, 실제로는 임의 체포 및 구금 권한을 이용하여 게슈타포처럼 행동했다. 여기에는 소위 보호 구금의 광범위한 사용과 "반사회적 인물"의 대규모 단속이 포함되었다.

1939년, 네베는 형사 경찰청의 위원이었던 슈투트가르트 출신의 크리스티안 비르트를 T4 작전에 파견했는데, 이는 장애인에 대한 비자발적 안락사 (살인)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또한 같은 해, 크리포의 수장으로서 그는 신티와 로마인에 대한 작전 논의에 참여했다. 네베는 베를린의 "집시"들을 유대인 및 동부 지역의 다른 사람들을 위한 계획된 수용소로 보내는 방안을 포함시키기를 원했다. 1939년 10월, 그는 아돌프 아이히만에게 "니스코 계획"에 따라 신티와 로마인을 유대인과 함께 점령된 폴란드로 이송하도록 명령했다. 1939년 11월 8일 뷔르거브로이켈러에서 발생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네베는 게오르크 엘저를 심문하여 그가 단독 범행이라는 결론을 내렸다.[1]

3.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국가보안본부(RSHA)가 창설되면서 네베가 이끌던 형사경찰(크리포)은 제5국으로 편입되었고, 그는 국장직을 유지했다. 같은 해 11월 8일 뷔르거브로이켈러에서 발생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수사를 지휘했다[1]

1941년 6월,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 작전인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자, 네베는 아인자츠그루펜 B부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중앙 집단군을 따라 벨라루스에서 모스크바 방면으로 진군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부대는 유대인파르티잔으로 간주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는 홀로코스트 및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네베가 지휘하는 동안 B부대는 4만 5천 명 이상의 처형을 보고했다[2]

1942년 독일 본국으로 돌아와 국가보안본부 제5국장직에 복귀했으며, 같은 해 6월 국가보안본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암살되자 그의 후임으로 잠시 인터폴 총재직을 맡았다가 1943년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에게 인계했다.

한편, 네베는 1939년 또는 1940년경부터 반히틀러 노선으로 기울어 정보를 유출했으며[3], 루트비히 베크 육군 대장, 한스 오스터 육군 대령 등 군부의 반히틀러 세력과 접촉하며 모반을 준비했다. 1944년 7월 20일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가담했으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사건 직후 수사를 지휘하며 연루 사실을 숨기려 했지만, 공모자 볼프-하인리히 폰 헬도르프가 체포되면서 그의 가담 사실도 드러났다[4]。 네베는 도주했으나 1945년 1월 16일 게슈타포에 체포되었다[1]1945년 3월 2일 인민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3월 21일 플뢰첸제 감옥에서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피아노선을 이용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1]

3. 1. ''아인자츠그루펜 B''

1941년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 작전인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 이전에 폴란드에서 활동했던 이동 학살 부대는 개편되어 다시 한번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아르투어 네베는 침공이 진행됨에 따라 집단군 중앙 후방 지역에서 활동한 SS 학살 부대인 ''Einsatzgruppen B''의 지휘관으로 자원했다. 이 부대의 임무는 국방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유대인과 공산주의자, "집시", "아시아인", 장애인, 정신병원 환자 등 나치 정권이 "부적격자"로 간주한 이들을 학살하는 것이었다. 또한 ''Einsatzgruppe''은 군대가 처형을 위해 넘겨준 인질과 전쟁 포로도 총살했다.[2]

네베가 지휘하는 동안 ''아인자츠그루펜 B''는 벨라루스에서 모스크바 전선으로 진군하며 홀로코스트의 일환인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 이 부대가 보고한 처형자 수만 4만 5천 명이 넘는다.[2] 네베는 학살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가스 밴과 같은 새로운 살해 방법을 고안하는 데 관여했으며, 모길레프 회의 등에 참석하여 국방군과의 협력을 통해 학살 작전을 조율하고 폭력을 심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1941년 11월, 네베는 베를린으로 돌아가 국가보안본부 제5국(형사경찰) 국장직에 복귀했다.

3. 1. 1. 대량 학살 작전

1941년 7월 5일경, 네베는 민스크 인근에 ''Einsatzgruppe B'' 본부를 설치하고 두 달 동안 머물렀다. 학살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7월 13일 작전 상황 보고서에서 네베는 민스크에서 유대인 1,050명이 살해되었으며, 빌뉴스에서도 매일 500명의 유대인이 총살당하는 등 유대인 청산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보고했다. 같은 보고서에서 네베는 "첫 며칠 동안 그로도와 리다에서 유대인 96명만 처형되었다. 나는 이 활동을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언급하며, 총격이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수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보고서에는 그의 ''Einsatzgruppe''가 민스크에서 유대인이 아닌 민간인도 살해하고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7월 23일 보고서에서 네베는 자신의 작전 지역에 "압도적인 수의 유대인"이 존재하여 "유대인 문제의 해결"이 "비실용적"이라고 언급했다. 이는 너무 적은 인원으로 너무 많은 유대인을 살해해야 하는 상황을 의미했다. 1941년 8월부터는 학살 대상에 유대인 여성과 어린이까지 포함되었고, 네베는 확대된 살해 작전을 수행하기에 ''Einsatzgruppe''의 자원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1941년 8월, 히믈러는 민스크를 방문한 후 총살 외에 다른 학살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는 하이드리히에게 SS 대원들의 정신 건강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데 따른 것이었다. 히믈러는 네베에게 살인자들이 겪는 정신적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더 "편리한" 살해 방법을 고안하라고 지시했다. 독일 내 "안락사" 프로그램에서 사용되던 일산화 탄소 가스를 이용한 살해가 고려되었으나, 이동식 학살 작전에는 부적합하다고 여겨졌다.

네베는 대안으로 폭발물과 자동차 배기가스를 이용한 살해 실험을 결정했다. 그는 RKPA 형사 기술 연구소 소속 SS 화학자 알베르트 비드만에게 250kg의 폭발물과 배기 호스를 가지고 민스크로 오도록 명령했다. 첫 실험은 민스크 인근 벙커에서 24명의 소련 정신과 환자를 대상으로 폭발물을 사용하여 이루어졌다. 비드만의 전후 증언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벙커 중 하나에 폭발물을 싣고 24명의 정신과 환자를 집어넣었다. 네베는 폭파 신호를 보냈지만, 폭발로 인해 환자들이 죽지 않았다. 그들 중 몇몇은 피를 뒤집어쓰고 크게 비명을 지르며 벙커에서 나왔다. 그러자 더 많은 폭발물이 투입되었고, 부상당한 환자들은 벙커로 다시 밀려 들어갔으며, 두 번째 폭발로 마침내 일이 마무리되었다. 벙커는 조용해졌고, 시신의 일부가 근처 나무에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틀 후, 네베와 비드만은 모길레프에서 5명의 정신과 환자를 밀폐된 방에 넣고 자동차 배기가스를 주입하는 실험을 했다. 처음에는 승용차 배기가스로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트럭을 추가하자 15분 안에 환자들이 사망했다. 네베와 비드만은 폭발물 사용은 비실용적이며, 차량 배기가스를 이용한 가스 살해가 더 "희망적"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 실험들을 바탕으로 네베는 차량 내부에 밀폐된 공간을 만들고 배기가스를 주입하여 사람들을 살해하는 방식, 즉 가스 밴 개발을 구상했다. 그는 크리포 기술 연구소 전문가와 기술적 측면을 논의한 후 하이드리히에게 제안했고, 이는 승인되었다.

국방군의 공격적인 후방 보안 정책과 "보안 위협"을 명분으로 한 대량 학살 정책은 군과 보안 조직 간의 긴밀한 협력을 필요로 했다. 네베는 ''Einsatzgruppe B'' 지휘관으로서 1941년 9월 말 모길레프에서 열린 3일간의 현장 회의에 참석했다. 육군 집단 중앙 후방 지역 사령관 막스 폰 쉔켄도르프 장군이 주최한 이 회의는 국방군 후방 부대 지휘관들을 위한 "경험 교환" 자리였다. 회의에는 네베 외에도 상급 SS 및 경찰 지도자 에리히 폰 뎀 바흐-젤레프스키, 경찰 연대 중앙 지휘관 막스 몬투아, SS 기병 여단 지휘관 헤르만 페겔라인, 제1SS 기병 연대 지휘관 구스타프 롬바르트 등이 연설자로 참여했다. 네베는 "유격대"와 "약탈자"에 맞선 공동 투쟁에서 SD의 역할, 그리고 "유대인 문제"와 저항 운동 탄압의 연관성에 대해 강연했다. 회의 내용은 국방군 병력과 후방 지역 질서 경찰대대에 배포되었고, 이후 1941년 마지막 3개월 동안 유대인 및 기타 민간인에 대한 잔혹 행위가 급증했다.

네베의 지휘 하에 ''Einsatzgruppe B''는 지역 주민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해 공개 교수형을 자행했다. 1941년 10월 9일자 네베의 보고서에 따르면, 데미도프 인근에서 게릴라 활동 혐의로 15세에서 55세 사이의 모든 남성 주민을 심문하여 17명을 "게릴라" 및 "공산주의자"로 지목했다. 이 중 5명은 400명의 지역 주민 앞에서 교수형에 처해졌고, 나머지는 총살되었다. 1941년 11월 14일까지 ''Einsatzgruppe B''는 총 45,467명의 살해를 보고했으며, 이후 네베는 베를린으로 돌아가 크리포 국장직에 복귀했다.

3. 1. 2. 새로운 살해 방법

1941년 8월, 히믈러는 민스크를 방문한 후 대량 학살 대신 대체 살해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는 하이드리히에게 SS 대원들의 정신 건강에 대한 우려를 표하며, 살인자들에게 끔찍한 임무를 덜어줄 수 있는 더 "편리한" 살해 방법을 고안하도록 네베에게 지시했다. T4 작전의 일환으로 독일에서 이미 사용되던 일산화 탄소 가스를 이용한 살해가 고려되었으나, 소련 점령 지역에서의 이동 살해 작전에는 너무 번거롭다고 여겨졌다.

네베는 먼저 민스크 근처에서 폭발물을 사용하고, 다음으로 모길레프에서 자동차 배기가스를 사용하여 소련 정신과 환자를 살해하는 실험을 하기로 결정했다. 가스 사용 아이디어는 네베가 과거 술에 취해 차고에서 잠들었다가 배기가스로 인한 일산화 탄소 중독으로 죽을 뻔했던 경험에서 부분적으로 영감을 받았다. 실험을 위해 그는 RKPA 형사 기술 연구소 소속 SS 화학자 알베르트 비드만에게 250kg의 폭발물과 배기 호스를 가지고 민스크로 오라고 명령했다. 다음 날, 비드만, 네베, 그리고 폭발물 전문가는 민스크 지역의 준비된 벙커에서 첫 번째 실험을 수행했다. 비드만의 전후 재판 증언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 벙커 중 하나에 폭발물을 싣고 24명의 정신과 환자를 집어넣었다. 네베는 폭파 신호를 보냈지만, 폭발로 인해 환자들이 죽지 않았다. 그들 중 몇몇은 피를 뒤집어쓰고 크게 비명을 지르며 벙커에서 나왔다. 그러자 더 많은 폭발물이 투입되었고, 부상당한 환자들은 벙커로 다시 밀려 들어갔으며, 두 번째 폭발로 마침내 일이 마무리되었다. 벙커는 조용해졌고, 시신의 일부가 근처 나무에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틀 후, 네베와 비드만은 모길레프에서 또 다른 살해 실험을 진행했다. 5명의 정신과 환자를 외부로 파이프가 연결된 밀폐된 방에 넣고, 처음에는 승용차 배기가스를 주입했으나 실패하자 트럭을 추가했다. 환자들은 15분 안에 사망했다. 네베와 비드만은 폭발물을 이용한 살해는 비실용적이며, 차량을 쉽게 구할 수 있고 필요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가스 살해가 더 효과적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 실험적 살해 이후, 네베는 차량의 배기가스를 밀폐된 객실로 보내 희생자들을 살해하는 방식의 차량 개조를 고안했다. 차량의 배기가스에서 나오는 일산화탄소는 희생자들이 서 있는 밀폐된 공간으로 보내질 것이었다. 그는 Kripo 기술 연구소 전문가와 이 아이디어의 기술적 측면을 논의한 후, 이 제안을 하이드리히에게 보고했고, 하이드리히는 이를 승인했다.

3. 1. 3. 모길레프 회의와 폭력의 심화

1941년 6월 아인자츠그루펜이 조직될 때, 아르투어 네베는 아인자츠그루펜 B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중앙 집단군을 따라 벨라루스에서 모스크바 방면으로 진군했다.[2] 이 과정에서 네베의 부대는 유대인파르티잔으로 간주된 사람들을 대량 학살하는 홀로코스트 및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1941년 9월 말, 네베는 모길레프에서 열린 3일간의 현장 회의에 아인자츠그루펜 B 지휘관으로 참여했다. 이 회의는 막스 폰 쉔켄도르프 장군이 주최했으며, 국방군 후방 부대 지휘관들을 위한 "경험 교환"을 목적으로 했다. 회의에서 네베는 "게릴라"와 "약탈자"에 맞선 공동 투쟁에서 SD의 역할, 그리고 점령지 저항 운동 탄압과 "유대인 문제"의 연관성에 대해 강연했다. 회의 후에는 국방군 병력과 후방 지역 질서경찰 대대에 회의 내용 요약본이 배포되었다.

네베의 지휘 아래 아인자츠그루펜 B는 공개 교수형을 집행하는 등 잔혹 행위를 자행했다. 1941년 11월 14일까지 아인자츠그루펜 B는 45,467명의 살해를 보고했으며[2], 이후 네베는 베를린으로 복귀했다.

3. 2. 인터폴 회장과 Stalag Luft III 살인 사건

1941년 아인자츠그루펜 B부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동부 전선에서 유대인 및 유격대원으로 간주된 사람들을 대량 학살하는 데 관여했다. 네베가 지휘하는 동안 B부대는 4만 5천 명 이상의 처형을 보고했다[2]。 1942년 독일 본국의 국가보안본부(RSHA)로 복귀했으며, 같은 해 6월 국가보안본부 장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암살되자 그의 후임으로 국제형사경찰위원회(ICPC, 현 인터폴) 총재직을 맡았다. 이 직책은 1943년 신임 국가보안본부 장관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에게 인계되었다.

3. 3.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네베는 아돌프 히틀러 암살을 시도한 7·20 사건에 연루되었다. 그는 12명의 경찰 팀을 이끌고 힘mler을 암살할 예정이었지만, 행동 개시 신호가 그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암살 시도가 실패한 후, 네베는 도주하여 은신했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직후, 네베는 사건 수사를 지휘하며 겉으로는 관련 없는 척 위장했다. 그러나 볼프-하인리히 폰 헬도르프 베를린 경시총감이 체포되면서 네베의 가담 사실도 드러났다.[4] 네베는 유서를 남기고 머리카락을 염색하는 등 도주를 시도했지만, 전 애인의 배신으로 1945년 1월 16일 게슈타포에 체포되었다.[1]

1945년 3월 2일 인민법정에 회부되어 롤란트 프라이슬러 재판관에게 사형을 선고받았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그는 1945년 3월 21일 베를린의 플뢰첸제 감옥에서 처형되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이 음모 가담자들을 "소처럼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했으며, 히틀러 본인의 희망에 따라 네베는 쇠고리 갈고리에 피아노선으로 목이 매달려 처형되었다.[1]

4. 평가

역사가들은 7월 20일 음모에 가담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르투어 네베와 그의 동기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로버트 겔라틀리는 네베의 견해가 매우 인종차별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이었다고 평가했다.[1][2] 마틴 키친은 네베를 SS를 미래의 경찰력으로 보고 출세를 노린 기회주의자이자, "끊임없이 학살을 감행할 기회를 잡는 정력적이고 열정적인 대량 살인자"로 묘사했다. 다만 키친은 네베가 그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베를린으로 돌아갔다고 덧붙였다.

역사학자 로널드 헤드랜드는 아인자츠그루펜이 제출한 보고서를 분석하며, 이 문서들이 지도부의 세계관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헤드랜드는 보고서들이 "아인자츠그루펜 지도자들이 그들의 절멸 임무에 헌신했음을 증언한다"고 썼으며, 그들의 이데올로기와 인종차별주의는 희생자에 대한 끊임없는 비하와 "유대인, 공산주의자, 집시 및 기타 '열등한' 요소에 대한 항상 존재하는 인종적 개념"에서 명백히 드러난다고 보았다. 헤드랜드는 네베가 야심 찬 인물이었으며,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환심을 사기 위해 경력상의 이유로 아인자츠그루펜 부대 지휘에 자원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가 계획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어떤 불안감을 가졌을지는 몰라도, 이는 네베가 자신의 부대를 지휘한 5개월 동안 약 5만 명의 살인을 감독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제럴드 레이트링거는 네베가 아인자츠그루펜에 합류한 이유를 1934년부터 게슈타포 요원들이 영향력을 얻고 하이드리히에게 인수된 형사 경찰 부서에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욕망 때문으로 보았다. 레이트링거는 "만약 네베가 실제로 1944년까지 그의 직책을 유지했다면, 그것은 그가 러시아에서 보낸 5개월 때문이었다"고 적으며, 20일 폭탄 음모 당시 네베를 독일 군사 저항의 "매우 의심스러운 멤버"라고 평가했다. 알렉스 J. 케이는 네베를 프란츠 할더, 게오르그 토마스와 함께 "대량 살인을 계획하고 (어떤 경우에는) 실행하고 히틀러에 대한 음모에 연루된" 인물로 분류하며, 이들의 역할, 성격, 동기에 대한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전후, 20일 음모의 가담자들이 작성한 일부 변증론적 설명에서는 네베를 전문 경찰관이자 독일 저항 운동의 헌신적인 일원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한스 베른트 기제비우스는 1947년 저서에서 네베의 아인자츠그루펜 B 지휘를 "전선에서의 짧은 지휘"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1960년대 네베의 역할이 드러나자 기제비우스는 말을 바꾸어, 네베가 그 자리를 꺼렸지만 반나치 지도자인 한스 오스터와 루드비히 베크가 하이드리히 조직 내 핵심 역할을 유지하기를 원해 설득했다고 주장했다. 기제비우스는 또한 네베가 보고 시 희생자 수를 부풀리기 위해 숫자에 0을 추가했다고 주장했다. 스웨덴 경찰관 해리 쇠데르만은 1956년 저서에서 네베와 로마인 박해를 담당한 RSHA의 카를 진델을 "전문적인 경찰관... 매우 온건한 나치"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여러 역사가에 의해 반박된다. 크리스티안 게를라흐는 네베를 "악명 높은 대량 살인자"라고 부르며, 헤닝 폰 트레슈코프와 그의 부관 파비안 폰 슐라브렌도르프가 히틀러에 반대하는 군사 반대파의 일원이었음을 논하며 다음과 같이 적었다. "슐라브렌도르프는 자신과 트레슈코프가 'SS 지도자의 가면 아래 헌신적인 반나치주의자가 숨어 있다... 히틀러의 살인적인 명령을 방해하기 위한 구실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많은 러시아인의 생명을 구하는 데 성공했다. 러시아인들은 종종 우리에게 감사를 표했다.' [....] 슐라브렌도르프에 따르면 트레슈코프는 네베를 직접 군부대[음모자]로 데려왔다. 네베가 베를린으로 돌아온 1941년 11월까지 아인자츠그루페 B에 의해 살해된 45,467명의 희생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게를라흐는 네베가 아인자츠그루페 B 보고서를 위조했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며, 슐라브렌도르프의 주장을 폭탄 음모자들의 회고록과 당시 중앙군 집단 최고 사령부 내 반대파에 대한 지배적인 평가에 비추어 설명한다. "특히 유대인 학살과 관련하여 'SS'가 비밀리에 살해하고, 불완전한 보고서를 제출하거나 아예 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음으로써 장교들을 속였다고 한다. 참모 장교들이 항의하면 SS는 그들을 위협했다." 게를라흐는 결론짓는다: "물론 터무니없는 소리다."

역사가 웨이트먼 웨이드 비온 역시 "일부에서는 [네베]가 자신이 살해했다고 보고한 유대인의 수를 의도적으로 부풀렸다고 주장하지만, 모든 증거는 그가 나치 집단 학살에서 자신의 역할을 기꺼이 수행했으며, 이후 정권에 대한 불만은 임박한 나치 패배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지만, 홀로코스트에 대한 반대는 아니었음을 시사한다"고 평가했다. 네베의 전 동료였던 크리포의 베른하르트 베네르는 "네베는 연합군이 자신의 범죄에 대해 처벌할 것을 걱정했다"는 점이 저항에 참여한 유일한 이유였다고 증언했다.

최근 연구에서는 네베가 확신에 찬 반유대주의자였으며,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고 자신이 전범으로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반나치파와 접촉한 기회주의자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전후 그를 저항 운동가로 묘사하려는 시도는 사실과 거리가 멀며, 그의 행적은 권력에 대한 맹종과 기회주의가 어떤 비극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여겨진다.

참조

[1] 문서 クノップ(2008年)
[2] 문서 クノップ(2008年)
[3] 문서 ベルトルト(1985年)
[4] 문서 ベルトルト(1985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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