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넴헤트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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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메넴헤트 3세는 제12왕조의 파라오로, 세누스레트 3세의 아들이며 그의 통치 20년 동안 공동 섭정을 수행했다. 그의 통치 기간은 최소 45년으로 추정되며, 다슈르와 하와라에 피라미드를 건설하고, 파이윰 오아시스의 간척 사업을 완성하여 이집트의 경제적 번영을 이끌었다. 군사 원정보다는 시나이 반도의 광산 개발에 주력했으며, 흑색 피라미드와 하와라 피라미드, 다양한 조각상 등 건축 및 예술 분야에서도 업적을 남겼다. 그의 관료로는 재상 케티, 아메니, 크눔호테프, 재무관 이케르노프레트, 센베프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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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넴헤트 3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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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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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명 | 니마아트레 |
즉위명 (의미) | 레의 마아트에 속한 자 |
본명 | 이멘엠하트 |
본명 (의미) | 아문이 최전선에 있다 |
호루스명 | 아아-바우 |
호루스명 (의미) | 힘이 강대한 자 |
네브티명 | 이티-이와트-타위 |
네브티명 (의미) | 두 땅의 유산을 차지한 자 |
황금 호루스명 | 와흐-앙크 |
황금 호루스명 (의미) | 삶이 지속되는 자 |
통치 기간 | 기원전 19세기 및 18세기 |
선왕 | 세누스레트 3세 |
후왕 | 아메넴하트 4세 |
왕조 | 이집트 제12왕조 |
아버지 | 세누스레트 3세 |
배우자 | 아아트 케네메트네페르헤제트 3세 헤테프티 (?) |
자녀 | 네페룹타 아메넴하트 4세 (아마도) 소베크네페루 (아마도) 하토르호테프 (?) 누브호테프 (?) 시타토르 (?) |
매장지 | 하와라의 피라미드 |
기념물 | 다슈르의 아메넴하트 3세 피라미드 |
비고 | |
재위 기간 (추정) | 기원전 1859년–1813년경 기원전 1844년–1797년경 기원전 1843년–1797년경 기원전 1842년–1797년경 기원전 1842년–1794년경 기원전 1831년–1786년경 기원전 1818년–1773년경 |
통치 기간 (추정) | 40 + x (토리노 왕 목록) |
통치 기간 (확인) | 최소 45년 (증명됨) |
2. 가족 관계
아메넴헤트 3세는 선왕인 세누스레트 3세의 아들이었다. 이 부자 관계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공동 섭정을 통해 추론할 수 있다.[1] 그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2] 그는 메네트, 메레레트, 세네체네베테스, 시타토르 등 여러 명의 누이들을 두었다.[3]
아메넴헤트 3세의 재위 기간은 이집트, 누비아, 시나이 반도 전역의 채석장에 남겨진 비문 등 다양한 동시대 자료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2] 특히 시나이 반도에서의 활동은 재위 2년부터 45년까지 이어졌음이 기록되어 있다.[2] 아메넴헤트 3세는 파이윰 주변에 집중된 건축 사업, 두 개의 피라미드, 그리고 약 80점에 달하는 조각품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2] 린드 수학 파피루스는 아메넴헤트 3세 시대에 처음 작성된 것으로 여겨진다.[2]
아메넴헤트 3세의 치세 동안 군사 원정에 대한 증거는 거의 없다. 통치 9년에 소규모 원정을 기록한 암석 비문이 하나 있는데, 이 비문은 누비아의 쿠마 요새 근처에서 발견되었다.[1] 이 비문에는 군사 원정이 '네켄의 입' 자몬트의 지휘를 받았으며, 그가 소규모 부대와 함께 북쪽으로 갔고, 남쪽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망자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
아메넴헤트 3세는 센우세르트 3세의 뒤를 이은 이집트 중왕국 시대의 왕으로, 그의 치세는 이집트 경제 성장의 최고조에 달했다. 특히 시나이 반도에서의 광산 개발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2]
아메넴헤트 3세는 센우세르트 3세 시대부터 이어진 이집트 중왕국 최전성기의 왕으로, 아멘엠헤트 2세 시대부터 지속된 파이윰 간척 사업을 완성하여 농업 생산과 경제 성장을 크게 발전시켰다.
아메넴헤트 3세와 센우세르트 3세는 조각상의 수로 볼 때 중왕국 시대의 가장 잘 알려진 통치자들이다. 아메넴헤트 3세에게 귀속될 수 있는 조각상은 약 80점 정도 된다. 아메넴헤트 3세의 조각은 이상화된 이미지를 유지하면서도, 더욱 자연스럽고 표현적인 용모를 추구하며 센우세르트 3세의 전통을 이어갔다.[1] 왕의 조각에는 백색 석회암, 흑요석, 옥수, 구리 합금을 포함한 다양한 종류의 돌이 사용되었다.[2] 게다가, 왕은 오래된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새로운 유형의 조각을 도입하고 재해석했다.[3]
아메넴헤트 3세의 아내로는 아트와 케네메트네페르헤젯 3세가 알려져 있으며, 둘 다 그의 다슈르의 피라미드에 묻혔다. 아메넴헤트 4세의 어머니인 헤테프티도 그의 아내였을 가능성이 있다.[2] 그의 딸로는 네페루프타가 확인되었는데, 그녀의 이름이 카르투슈 안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그의 후계자로 길러진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학자 에이단 도슨과 다얀 힐턴은 네페루프타가 원래 아메넴헤트 3세의 하와라에 있는 두 번째 피라미드에 묻혔지만, 일찍 사망한 후 자신의 피라미드로 옮겨졌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이집트학자 볼프람 그라예츠키는 그녀가 하와라에 묻힌 적이 없고, 아마도 아버지보다 오래 살아 다른 곳에 묻혔다고 주장한다.[2] 아들 아메넴헤트 4세와 딸 소베크네페루도 아메넴헤트 3세의 자녀로 여겨지며, 이 둘은 왕으로 재위하였다. 다만, 아메넴헤트 4세가 사실은 그의 손자일 수도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하토르호테프, 누브호테프, 시타토르 등 다른 세 공주의 매장 증거가 다슈르 단지에서 발견되었지만, 이 공주들이 아메넴헤트 3세의 딸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 단지는 제13왕조 전체에 걸쳐 왕족 매장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3. 연대기 및 통치 기간
투트모세 3세의 카르나크 왕 목록에는 아메넴헤트 2세와 아메넴헤트 4세 사이의 두 항목이 비어있지만, 이 기간 동안 세누스레트 2세, 세누스레트 3세, 아메넴헤트 3세가 통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비도스 왕 목록에는 아메넴헤트 3세가 그의 프레노멘인 "니-마아트-레"로 64번째 항목에 기록되어 있다. 사카라 석판에는 아메넴헤트 3세의 프레노멘이 20번째 항목을 차지한다. 토리노 왕 목록은 제12왕조 중기에 공백이 있어 아메넴헤트 3세의 통치 기간은 40 + x 년으로만 보존되어 있다.[2]
아메넴헤트 3세는 마네토의 ''아이귑티아카''에도 언급되어 있다. 아프리카누스와 에우세비우스는 그에게 "Λαχάρης"(Λαχάρης|라카레스/라마레스grc)라는 이름으로 8년의 통치를 부여했다. 싱켈루스는 그에게 "Μάρης"(Μάρης|마레스grc)라는 이름으로 테베의 35번째 왕으로 43년의 통치를 부여했다.[2]
제12왕조 통치자들의 상대적 연대기는 확정된 것으로 여겨진다. 토리노 파피루스는 아메넴헤트 1세와 아메넴헤트 4세 사이에 4줄의 공백이 있어, 4명의 왕의 재위 기간을 부분적으로만 기록하고 있는데, 각각 10 + x, 19, 30 + x, 40 + x 년이다. 아비도스의 세티 1세와 람세스 2세의 왕 목록과 사카라 목록은 각각 아메넴헤트 3세를 그의 전임자인 세누스레트 3세(프레노멘은 ''카-카우-레'')와 후임자인 아메넴헤트 4세(프레노멘은 마아-케루-레)와 함께 나열하고 있다. 이집트학계의 논쟁은 공동 섭정의 존재에 집중되어 왔다.[2]
세누스레트 3세는 통치 20년째에 아들 아메넴헤트 3세를 공동 섭정 지위에 올렸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두 왕의 단독 통치를 주장하기도 한다. 세누스레트 3세와 아메넴헤트 3세는 20년 동안 왕위를 공유했으며, 아메넴헤트 3세가 왕으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아메넴헤트 3세가 세누스레트 3세 19년에서 아메넴헤트 3세 1년으로 통치 연도가 넘어가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재위 기간은 최소 45년으로 증명되었지만, 엘-라훈에서 발견된 '재위 46년, 아케트 1개월, 22일'을 언급하는 파피루스 조각은 아메넴헤트 3세의 통치 시기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 엘레판티네에서 발견된 그릇에는 재위 46년, 페레트 3개월을 기록한 가장 높은 날짜가 있다. 아메넴헤트 3세는 재위 30년에 세드 축제를 기념했다. 그의 통치는 셈나에서 발견된 암석 비문에서 확인되듯이, 후계자 아메넴헤트 4세와의 짧은 공동 섭정(아메넴헤트 4세 재위 1년과 아메넴헤트 3세 재위 44년 또는 46~48년)으로 끝을 맺는다.[2]
세누스레트 3세와 아메넴헤트 3세는 이집트 중왕국의 황금기를 주도했다. 세누스레트 3세는 누비아 부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공격적인 군사 행동을 추구했으며, 세누스레트 1세 통치 이후 이집트의 적이었던 시리아-팔레스타인으로 군사 원정을 보냈다. 또한 마네토와 헤로도토스가 묘사한 전설적인 인물 세소스트리스의 기초를 형성했다. 세누스레트 3세의 행정 및 군사 정책의 결과로 아메넴헤트 3세는 평화롭고 안정된 이집트를 물려받았으며, 그의 지휘 아래 문화적, 경제적 정점에 도달했다.[2]
센우세르트 3세 시대부터 이어진 이집트 중왕국 시대 최전성기의 왕인 아메넴헤트 3세의 치세 동안, 아멘엠헤트 2세 시대부터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파이윰의 간척 사업이 완성되었다. 이로 인해 농업 생산이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이집트의 경제 성장도 최고조에 달했다.[2]
아메넴헤트 3세의 관심은 주로 북쪽 시나이 반도에서의 광산 개발에 쏠렸다. 시나이 반도의 50곳이 넘는 장소에서 치세 동안 새겨진 비문이 발견되었으며, 이는 끊임없이 원정이 반복되었음을 보여준다. 아메넴헤트 3세의 비문은 시나이 반도에서 발견된 것을 포함해 90% 이상이 국외에서 발견되었으며, 이집트 본국에서 출토된 것은 매우 적다.[2]
아메넴헤트 3세는 다슈르와 하와라에 2기의 피라미드를 조영했다. 한 명의 왕이 여러 개의 피라미드를 건설한 것은 이집트 고왕국 시대의 스네프루 왕 이후의 일이었다. 하와라의 피라미드 근처에 건설된 거대한 장제전은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 궁전과 자주 비교되어 "진정한 라비린토스" 등으로 묘사되었다.[3]
아메넴헤트 3세는 중왕국 시대에 번영을 가져온 마지막 왕이었다. 뒤를 이은 아멘엠헤트 4세에 의해 얼마 동안 평화가 유지되었지만, 그가 단기간에 사망하자 이집트의 번영은 급속히 사라지고, 건조물도 문자 자료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3]
4. 군사 활동
통치 33년의 석비가 제3 폭포 남쪽 케르마에서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성벽 건설에 대한 논의가 있지만, 케르마는 당시 이집트의 통제 범위를 벗어났기 때문에 이 석비는 다른 곳에서 기원했을 것이다.[2]
5. 광산 개발 및 무역 원정
아메넴헤트 3세의 재위 기간 동안 이집트와 시나이의 채석장 개발은 절정에 달했다. 특히 청록석과 구리 채굴이 활발했으며, 세라비트 엘-카딤, 와디 마가라, 와디 나스브 등에서 50개 이상의 비문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주변에 거의 영구적인 정착지가 형성될 정도로 광범위했다. 와디 함마마트(편암), 와디 엘 후디(자수정), 투라(석회암), 하트누브(설화 석고), 아스완(적색 화강암)과 누비아 전역(섬록암)의 채석장도 개발되었다.
시나이 반도에서의 활동은 그의 재위 2년부터 45년까지 이어졌다. 재위 2년, 30년, 41~43년에 와디 마가라로의 원정이 있었으며, 하토르 신전은 2년의 원정 기간 동안 장식되었다. 아인 수크나에서 발견된 비문은 멤피스에서 시작하여 홍해를 건너 반도로 건너갔음을 시사한다. 세라비트 엘-카딤으로는 18~20번의 원정이 있었다.
투라에서는 다슈르 또는 하와라에 있는 장제전에 사용할 석회석 채석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었으며(재위 43년), 홍해 연안 라스 가레브 남쪽 50km 떨어진 게벨 자이트 산괴의 석비에는 갈레나 광산에서의 활동이 나타나 있다.(재위 10년 이후)
와디 함마마트로는 재위 2년, 3년, 19년, 20년, 33년에 원정대가 파견되었다. 19년의 세 비문에는 2.6m에 달하는 왕의 좌상 조각상 10개를 제작한 노력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 조각상들은 하와라의 라비린토스에 배치될 예정이었다.
아스완 남동쪽 와디 엘 후디로는 재위 1년, 11년, 20년, 28년에 원정대가 파견되어 자수정을 채집했다. 아스완 근처 와디 아부 아가그로도 재위 13년에 원정대가 파견되었다.
아부 심벨 북서쪽, 나세르 호 서쪽 하부 누비아의 게벨 엘-아스르 채석장은 편마암과 옥수의 산지였다. 이곳에서 발견된 기념물 아홉 개는 아메넴헤트 3세의 통치 기간, 특히 재위 2년과 4년에 해당한다.
메르사 가와시스의 홍해 해안에서 발견된 비석에는 아메넴헤트 3세 치세 동안 최고 재상 센베프에 의해 조직된 푼트 원정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총 2~5회의 원정이 조직되었으며, 그의 재위 23년과 41년에 그곳에서 활동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비석이 발견되었다.
아메넴헤트 3세의 비문은 90% 이상이 이집트 국외에서 발견되었으며, 이는 당시 활발했던 대외 원정의 모습을 보여준다.[2]
6. 건설 사업
그는 남쪽 누비아에 집중했던 부왕과 달리, 북쪽 시나이 반도의 광산 개발에 주력했다.[2] 시나이 반도 50여 곳에서 발견된 비문들은 잦은 원정을 보여준다.[2] 그의 비문 90% 이상이 국외에서 발견되었고, 이집트 본국 출토는 매우 적다.[2]
홍해 연안 라스 가레브 남쪽 50km 지점 게벨 자이트 산괴의 석비는 갈레나 광산 활동을 나타낸다.
편암 채석장 와디 함마마트에도 여러 차례 원정대가 파견되었다 (재위 2년, 3년, 19년, 20년, 33년). 19년의 비문에는 노동자, 군인, 그리고 왕의 2.6m 좌상 10개 제작이 기록되어 있다.
아스완 남동쪽 와디 엘 후디에서는 자수정 채집 원정이 재위 1년, 11년, 20년, 28년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경제적 번영을 바탕으로 아메넴헤트 3세는 다슈르와 하와라에 두 기의 피라미드를 건설했다. 이는 이집트 고왕국 스네프루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와라 피라미드 옆 장제전은 크레타 섬 크노소스 궁전과 비교되며 "진정한 라비린토스"로 묘사되었다.[3]
7. 조각상
아메넴헤트 3세에게는 두 가지 광범위한 얼굴 유형이 할당될 수 있다.
8. 관료
재상 케티는 아메넴헤트 3세 통치 29년경에 재직했으며, 이는 엘-라훈에서 출토된 파피루스에서 증명된다.[1] 이 파피루스는 케티가 작성한 사업 문서로, 아히-세네브와 아히-세네브 안크-렌 형제의 용역에 대한 지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2] 아히-세네브 안크-렌은 아메넴헤트 3세 통치 44년에 '공사 책임자'가 되었다.[3]
아메넴헤트 3세 통치 시대에는 아메니도 재상으로 재직했다. 아메니는 아스완에서 발견된 두 개의 암석 비문에서 확인되며, 여기에는 그의 아내 세호테피브레 네히를 포함한 가족 구성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크눔호테프는 세누스레트 2세 즉위 초부터 아메넴헤트 3세 통치 기간까지 최소 30년 동안 관직을 역임했다. 세누스레트 2세 통치 초기에 그는 실내 장관이었지만, 말년에는 재상과 총지배인의 직함을 모두 가졌다.
재무관 이케르노프레트는 아메넴헤트 3세 통치 초기에 재직했으며, 이는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에 있는 장례 석비에서 입증된다. 이케르노프레트는 중왕국 시대에 가장 잘 알려진 관리 중 한 명이지만, 그의 가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의 장례 석비에는 '하 이집트 왕의 인장 소지자', '왕의 유일한 친구', '재무관' 등 세 가지 직함이 새겨져 있다.
아메넴헤트 3세 시대의 또 다른 재무관은 세누스레탄크인데, 그는 세누스레트 3세의 피라미드 근처 다슈르에서 최근에 발견된 마스타바에서 알려져 있다. 무덤에서 발견된 붉은 화강암 제물 테이블 조각에는 아메넴헤트 3세의 탄생 이름과 즉위 이름이 새겨져 있다.
총지배인 센베프는 메르사에서 발견된 원정 석비와 파피루스 문서에서 알려져 있다. 이 석비에는 아메넴헤트 3세가 민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이미지가 담겨 있다. 왕 뒤에는 '남부 수장 내각 감독관' 넵수가 서 있는데, 이는 노동력의 수장이었음을 의미한다. 석비 아래에는 두 번의 푼트 원정에 대한 기록과 원정 지도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두 원정의 지도자는 넵수와 그의 형제 아메노테프로, 아메노테프는 '재무부 인장 담당 서기관' 직함을 가졌다.
9. 사후
센우세르트 3세의 뒤를 이은 아메넴헤트 3세는 이집트 중왕국 시대의 번영을 이끈 마지막 왕이었다. 그의 아들인 아멘엠헤트 4세가 즉위하여 얼마 동안 평화가 유지되었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사망하자 이집트의 번영은 급속히 쇠퇴하였고, 건축물과 문자 자료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3]
참조
[1]
문서
ベルリン美術館に収蔵されたパピルスにはセンウセレト3世の治世20年目の日付の隣にアメンエムハト3世の治世1年目の日付があり、親子は20年近く共同統治を行っていた可能性がある(単に父王が20年目に作らせた記念碑に単独統治者となって間もない息子が碑文を新たに付け加えただけの可能性もある。)
[2]
서적
[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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