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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데오 6세 디 사보이아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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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메데오 6세는 1334년에 태어나 1383년에 사망한 사보이아 백작이다. 1343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9세의 나이에 백국을 상속받았으며, 어린 시절 육체적, 정신적 교육을 받았다. 그는 제네바 백작, 도피네와의 분쟁에서 승리하며 영토를 확장했고, 십자군에 참여하여 오스만 제국에 대항했다. 또한, 그는 제노바 공화국과 베네치아 공화국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는 등 외교적 역할을 수행했다. 생애 말년에는 교황군으로 이탈리아에서 싸웠으며, 공공 기계 시계 설치, 빈민 구제 제도 마련 등 업적을 남겼다. 1355년 본 드 부르봉과 결혼하여 아메데오 7세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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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데오 6세 디 사보이아 백작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아메데오 6세, 콩트 베르데의 모습. 안드레아 디 보나이우토 다 피렌체의 프레스코화, 스페인 예배당의 세부 묘사: 활동적이고 승리하는 교회와 도미니크 수도회의 알레고리 (1365년경)
아메데오 6세, 콩트 베르데. 안드레아 디 보나이우토 다 피렌체의 프레스코화, 스페인 예배당의 세부 묘사: 활동적이고 승리하는 교회와 도미니크 수도회의 알레고리 (1365년경)
칭호사보이아 백작
별칭녹색 백작 (Il Conte Verde)
재위 기간1343년–1383년
이전 통치자아이모네
다음 통치자아메데오 7세
가문사보이아
아버지아이모네
어머니욜란다 디 몬페라토
배우자본 드 부르봉
자녀아메데오 7세
출생과 사망
출생일1334년 1월 4일
출생 장소샹베리, 사보이아 백국, 신성 로마 제국
사망일1383년 3월 1일
사망 장소카스트로피냐노, 나폴리 왕국

2. 어린 시절

1343년 아메데오 6세는 아버지 아이모네가 사망하면서 사보이아 백국을 상속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9세에 불과했기에,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친척인 제네바의 아메데오 3세와 보의 루이지 2세가 공동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이들은 섭정으로서 권력을 제한하는 문서에 동의했는데, 어느 한쪽도 상대방 없이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없었으며, 두 사람의 결정은 백국의 모든 베일리프들을 대표하는 귀족 상주 평의회의 검토를 받아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메데오의 숙부 에두아르의 후손인 조반나 디 사보이아가 살리카 법전에 의해 권리가 부정당되었음에도 백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녀는 다음 해에 사망했지만, 그녀의 유언은 필리프 도를레앙 공작에게 전해졌다. 1345년 아메데오 6세는 조반나가 아이모네와 맺었던 것과 유사한 합의를 협상하여, 매년 5000 리브르를 양도받는 조건으로 필리프의 주장을 철회시켰다.[1]



아메데오는 육체적, 정신적 교육을 받았다. 그는 전투와 승마를 즐겼으며, 군사학 논고와 같은 고전 작품과 군주 통치론 등 현대 서적을 공부했다.[2] 또한 종교적 헌신을 보여주었는데, 사제들이 매일 아침 어디에서든지 그를 위해 미사를 올릴 수 있는 권리와 이동식 제단 설치를 요청했다. 그는 건강을 위해 더 자주 단식하겠다는 서원을 했으며,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이 서원을 면제해 줄 것을 요청했고, 교황은 가난한 이들에게 일주일마다 12명에게 음식을 대접해 주는 조건으로 동의했다.[3]

2. 1. 초기 통치와 분쟁

나폴리의 조반니 1세 여왕이 즉위하자, 이탈리아 북부의 여러 세력들은 그녀의 경험 부족을 틈타 영토를 점령하려 했다. 몬페라토 후작 조반니 2세가 첫 공격을 이끌었고, 아메데오의 친척이자 봉신인 자코모 디 사보이아아카이아는 여왕을 지지했다. 1345년, 여왕의 첫 군대가 패배한 후 공격자들은 자코모가 통치하는 영토로 이동했다. 1347년, 자코모는 아메데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아메데오는 군대를 파견했다. 이 군대는 그해 7월까지 공격자들을 몰아냈으며, 아메데오는 전쟁 막바지에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조반나 여왕은 사보이아 가문의 오랜 적이었던 비엔누아의 윔베르 2세와 살루초 후작 톰마소 2세의 도움을 받아 앙주 가문의 영토를 정복했다. 교황 클레멘스 6세는 1348년 휴전 협상을 중재하여 전쟁을 끝내려 했으나, 어느 쪽도 만족하지 못했다.

2. 2. 흑사병과 유대인 박해

1348년부터 1351년까지 흑사병사보이아를 휩쓸어 일부 마을의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다.[1] 농민들은 유대인들이 우물과 샘에 독을 탔다고 믿고 그들을 박해했으며, 이로 인해 많은 유대인들이 목숨을 잃었다.[1] 일부 성주들이 유대인들을 보호하려 했으나, 샹베리에서는 폭도들이 성을 부수고 들어와 유대인들을 살해했다.[1]

백작의 관리들은 유대인들에게 독살 혐의를 씌워 11명을 처형하고, 나머지 유대인들에게는 6년 동안 매달 160플로린의 벌금을 부과했다.[1]

2. 3. 비스콘티 가문과의 동맹

1349년, 아메데오는 아메데오 3세 디 지네르바, 자코모 디 사보이아아카이아, 밀라노를 다스리던 비스콘티 가문과 상호 방위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는 갈레아초 2세 비스콘티와 아메데오의 여동생 비안카 디 사보이아의 결혼 조항이 들어 있었다. 1350년에 결혼이 이루어졌고, 이를 기념하여 아메데오는 흑조 기사단을 창설했다.

3. 사보이아 백작

1350년, 시옹의 주교 귀샤르 타벨과 사보이아의 동맹들은 사보이아의 국경인 발레 지역 귀족들의 권리 획득을 시도했다. 1351년 8월 공격에 대한 반응으로 농민 반란이 일어났고, 교황 클레멘스 6세는 반란자들을 파문했으며, 아메데오는 30명의 기사들을 보냈다. 그러자 8천 명의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 개의 성을 점령했고, 이에 100명의 기사들이 파견되어 반란군을 밀어붙였다. 1352년 3월, 아메데오는 아메데오 디 지네브라와 자코모 델 몬페라토를 포함한 군대를 소집하여 4월에 계곡을 휩쓸었다. 반역자들은 신속하게 굴복했고, 아메데오는 그의 숙부 에도아르도가 상실한 시옹 지역에 대한 권위를 회복해냈다.

16세기 아메데오 6세의 초상화, 작가 미상

3. 1. 제네바와의 분쟁 재점화

1352년 여름, 제네바의 우고와 도피네 귀족들은 사보이아와 오랜 불화를 다시 일으켰다.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6세는 사보이아와 도피네 사이의 조약과 관련하여 제네바의 아메데오 3세를 모욕했고, 이에 아메데오 3세는 의회를 떠났다. 그를 대신해 보 영주 루이지 2세를 대신하여 기욤 드 라 보메가 의원이 되었다.

1352년 6월 6일, 아메데오 6세는 분쟁에서 상호 원조를 위해 알브레히트 2세와 동맹을 맺었다. 아메데오 6세는 이탈리아 영지에서 군대를 모았고, 알프스 산맥을 넘자 발레와 시옹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아메데오 6세는 군대를 돌려 11월 3일에 반란군을 진압했다. 4일 아침, 자문관 기욤이 아메데오 6세를 기사로 임명했다. 그 후, 시옹 성벽 일부를 파괴하고 군대를 시켜 도시를 약탈하게 했으며, 시민들에게 막대한 벌금을 부과했다.

3. 2. 녹색 백작

아메데오 6세는 19세 생일을 기념하여 투구에 녹색 깃털을 달고, 갑옷 위에 녹색 비단 겉옷을 걸쳤으며, 말에는 녹색 캐패리전을 씌워 토너먼트에 출전하였다. 이로 인해 '녹색 백작'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5] 그는 녹색 옷을 입은 11명의 기사들을 이끌고 입장했는데, 각 기사들 앞에는 녹색 옷을 입은 여인들이 녹색 끈으로 기사의 말을 이끌고 있었다.[6] 이때부터 녹색은 그가 옷과 궁정에서 가장 좋아하는 색이 되었다.[7]

3. 3. 도피네와의 전쟁

1352년 여름, 제네바 백작 아메데오 3세의 숙부이자 도피네의 귀족이었던 위그 드 제네브는 사보이아와의 오랜 대립을 다시 일으켰다. 아메데오 6세는 사보이아와 도피네 사이에 맺어진 조약과 관련하여 제네바 백작 아메데오 3세를 모욕했고, 아메데 3세는 평의회를 떠나 보 영주 루이지 2세를 대신하여 평의원이 된 기욤 드 라 봄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1352년 1월 6일, 아메데오는 분쟁에서의 상호 원조를 위해 오스트리아 공작알브레히트 2세와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아메데오는 이탈리아 영지에서 전쟁을 위해 병력을 모았다.[1]

1353년 봄, 아메데오는 도피네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준비했다. 프랑스 왕 장 2세는 백년 전쟁을 계속하는 데 있어 대 잉글랜드 전에서 가스코뉴에서 양군을 사용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7월에 개입하여 휴전이 되었다. 그러나 위그 드 제네브는 곧 이 휴전을 깨뜨렸다. 그래서 아메데오는 10월 26일부터 11월 11일까지 젝스에서 위그의 군대를 포위했고, 아메데오는 적을 격파하고 도시를 불태웠다. 교황 인노첸시오 6세와 장 2세가 휴전을 논의하기 위해 사절을 보냈지만, 아메데오와 위그는 1354년 4월까지 싸움을 계속했고, 이 싸움은 아메데오가 레아브레 인근에서 위그의 군대를 격파하면서 종결되었다.[2]

3. 4. 영토 확장 및 외교적 성과

1355년 파리 조약에서 아메데오 6세는 포시니와 젝스 백작령에 대한 주권을 인정받았다. 또한 제네부아 백작의 종주권을 획득했는데, 이 모든 작위는 사보이아 백작과 비에누아의 도팽 사이에서 오랫동안 분쟁의 대상이었다.[1] 그 대가로 론 강과 기에르 강 사이의 도피네 영토를 교환했다.[1] 살루초 후작에게 공물을 바치도록 강요하여 통치를 알프스 산맥의 이탈리아 측으로 확장했다.[1]

아메데오 6세는 전략적, 상업적으로 중요한 마달레나 고개 (프랑스와 이탈리아 국경에 있는 콜 드 라르젱티에르)를 60000에퀴에 구입했다.[2] 이 고개는 리옹과 이탈리아를 연결했으며, 피에몬테와 바르셀로네트 계곡 사이를 쉽게 이동할 수 있게 했다.[2]

이러한 영토 확장과 외교적 성과로 인해 아메데오 6세는 이탈리아 북부 정치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제노바 공화국베네치아 공화국에게해의 테네도스 섬 소유권을 두고 오랫동안 분쟁을 벌였는데,[3] 결국 이 섬을 사보이아 백작에게 위탁하기로 합의했다.[4]

4. 십자군

1366년 아메데오는 그의 사촌인 요한네스 5세 팔라이올로고스를 돕기 위해 오스만 제국의 무라드 1세를 상대로 소규모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아메데오는 레스보스의 영주 프란체스코 1세 가틸루시오와 헝가리의 군주 러요시 1세와 힘을 합쳐 갈리폴리에서 튀르크를 몰아냈다. 하지만 이 승리는 잠시뿐이었고, 1년 만에 무라드 1세에게 갈리폴리를 다시 빼앗겼다.[1]

그 당시 요한네스 5세는 불가리아인들에게 감금된 상태였다. 아메데오는 불가리아 쪽으로 군대를 돌려 메셈브리아, 소조폴 등의 흑해 항구들을 점령했다. 그는 그 후 바르나를 포위했고 불가리아 황제 이반 알렉산더르에게 요한네스 5세를 풀어주지 않으면 더 큰 패배를 겪게 할 것이라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이반 알렉산더르는 요한네스 5세를 풀어주었고, 아메데오는 성탄절 이전에 요한네스 5세와 함께 메셈브리아에 도착해 겨울을 보냈다.[1]

불가리아에 대한 아메데오 6세의 원정(1366년 - 1367년)

5. 생애 말년

1372년부터 1373년까지 아메데오 6세는 엥게랑 7세 드 쿠시와 함께 교황군 소속으로 이탈리아에서 비스콘티 가문에 맞서 싸웠다.[5][6]

1377년, 그는 최초의 공공 기계식 시계를 설치하도록 명령했고, 이를 유지할 관리인을 임명했다.[7] 그는 중세 후기 세계에서 최초로 국가가 지원하는 빈민 구호 제도를 만들었다.

1381년 토리노에서 제노바 공화국베네치아 공화국 사이를 중재하여 키오자 전쟁과 베네치아-제노바 전쟁을 종식시키는 평화 조약을 후원했다. 이후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의 설득으로 앙주 공작 루이 1세의 나폴리 원정에 동참했다. 1382년 아메데오 6세는 루이 1세와 함께 풀리아와 아브루치를 성공적으로 정복했다. 그러나 1383년 캄포바소에서 사망했다.

6. 혼인과 자녀

아메데오 6세는 어린 시절부터 왕가의 신부와 결혼시키기 위한 협상이 진행되었다. 1338년에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의 3살짜리 딸 마르케타 루쳄부르스카와 약혼했었다. 1340년부터 1344년까지 그는 프랑스의 군주 필리프 6세의 조카 잔 드 부르봉과 약혼했다. 이 결혼은 5만 플로린 지참금으로 이뤄졌을 것이였다.[1] 1347년에 그는 그 약혼을 파기하고, 대신 오베르뉴 백작 필리프 드 부르고뉴와 잔 1세 도베르뉴의 딸 잔과 약혼했다. 이로 인해 아메데오는 그녀의 남동생인 필리프 1세 드 부르고뉴의 상속자가 될 뻔했으나,[2] 3살 짜리 후계자인 그녀는 사보이아 궁정에 데려와 키워졌다. 1351년 여름 아메데오는 잉글랜드의 군주 에드워드 3세에게 서신을 보내, 그의 딸 이사벨라와 혼인하고 싶다는 의견을 표했다. 이것에 대해 아메데오 디 지네르바가 항의를 표했다. 잔은 1355년 4월 18일까지 푸아시의 수녀원에 보내져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까지 궁정에 남아 있었다.[3]

1355년 파리에서 아메데오는 샤를 5세의 처제인 본 드 부르봉과 혼인했다.[4] 그들은 세 명의 자녀를 가졌다.


  • 1358년에 태어나 일주일 만에 사망한 딸[5]
  • 아메데오 (1360년 3월[5] - 1391년 11월 1일) : 장 1세 드 베리 공작의 딸이자 본 드 부르봉의 조카인 본 드 베리와 혼인했다.
  • 루이지(Luigi) : 1364년 말에 태어나 그 해가 지나기 전에 사망했다.[6]

7. 문학계

아메데오는 발레리오 에반젤리스티의 뉴 위어드 장르 소설 《La luce di Orione》의 주인공 중 한 명이다. 그는 또한 크리스찬 캐머런의 『기사도』 시리즈의 조연으로, 그의 별칭은 세 번째 소설인 『녹색 백작』(2017)의 제목이 되었다.

참조

[1] 서적 Sabaudian Studies: Political Culture, Dynasty, and Territory (1400–1700) https://books.google[...] Penn State Press 2013-03-25
[2] 서적 Encyclopaedia Britannica: A Dictionary of Arts, Sciences, and General Literature https://books.google[...] R.S. Peale 1891
[3] 서적 The Hospitaller Knights of Saint John at Rhodes 1306-1522 https://books.google[...] Pen and Sword Military 2024-05-16
[4] 서적 Penny Cyclopaedia of the Society for the Diffusion of Useful Knowledge https://books.google[...] C. Knight 1833
[5] 서적 The Green Count of Savoy: Amedeus VI and Transalpine Savoy in the Fourteenth-Century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5-12-08
[6] 서적 Avignon and Its Papacy, 1309–1417: Popes, Institutions, and Society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2015-08-20
[7] 서적 Europe: A History https://books.google[...] Random House 2010-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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