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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안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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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변안렬은 1334년에 태어나 고려 말의 무신으로, 홍건적 격퇴와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워 1등 공신에 올랐다. 우왕 때 추충양절선위익찬공신으로 왜구를 물리치고 문하찬성사로 승진했으며, 황산대첩에서 이성계와 함께 왜적을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 위화도 회군 이후 전제개혁에 반대하며 이성계와 대립했고, 우왕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순절했다. 변안렬은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며, 정도전의 《고려사》 기록과 관련된 논란을 겪었다. 그의 시 '불굴가'는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을 보여주며, 드라마 《정도전》과 《태종 이방원》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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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안렬 - [인물]에 관한 문서
변안렬
한글변안렬
한자邉安烈 (변안렬)
문화관광부 2000년식 표기Byeon Annyeol
매큔-라이샤워 표기Pyŏn Annyŏl
기본 정보
원어 이름邉安烈
별칭자(字) 충가(忠可), 호(號) 대은(大隱)
출생일1334년 4월 16일
경력판삼사사(判三司事), 영삼사사(領三司事)
작위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
출생지원나라 심양(瀋陽)
사망일1390년 2월 1일
사망지고려 개경에서 사형
배우자원주 원씨
본관원주(原州)
부모변량(邉諒)
형제변안백(형), 변안서(제)
친척변상복(손자), 변상회(손자)
자녀장남 변현(邉顯), 차남 변이(邊頤)
국가고려
직책영삼사사

2. 생애

1334년 4월에 태어났다. 공민왕 10년(1361년) 안우를 따라 홍건적을 패주시키는 데 공을 세워 2등 공신 판소부감사에 올랐으며, 이듬해에는 개성을 수복하고 1등공신이 되었다. 예의판서가 되어 추성보조일등공신(推誠輔祚一等功臣)의 호를 받고 판밀직사사가 되었다. 1374년 최영과 더불어 제주를 정벌한 뒤 지문하부사·문하평리를 역임하였다.

우왕 때 추충양절선위익찬공신(推忠亮節宣威翊贊功臣)의 호를 받은 뒤 양광전라도도지휘사 겸 조전원수로서 나세·조사민 등과 함께 왜구를 크게 물리치고 돌아와 문하찬성사로 승진하였다.(우왕 2년, 1376년)

단양안동의 왜구를 몰아낸 뒤 원천부원군에 봉해지고 판삼사사, 뒤에 영삼사사가 되었다. 1380년(우왕 6년) 황산대첩에서 큰 공을 세웠다.[5][6][7]

2. 1. 초기 생애 및 군사적 활약

1334년 4월에 태어났다. 공민왕 10년(1361년) 안우를 따라 홍건적을 패주시키는 데 공을 세워 2등 공신 판소부감사(判小府監事)에 올랐으며, 이듬해에는 개성을 수복하고 1등공신이 되었다. 예의판서(禮儀判書)가 되어 추성보조일등공신(推誠輔祚一等功臣)의 호를 받고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었다. 1374년 최영과 더불어 제주를 정벌한 뒤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문하평리(門下評理)를 역임하였다.

우왕 때 추충양절선위익찬공신(推忠亮節宣威翊贊功臣)의 호를 받은 뒤 양광전라도도지휘사 겸 조전원수(楊廣全羅道都指揮使兼助戰元帥)로서 나세·조사민 등과 함께 왜구를 크게 물리치고 돌아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승진하였다. (1376년)

단양안동의 왜구를 몰아낸 뒤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에 봉해지고 판삼사사(判三司事), 뒤에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다.

2. 2. 황산대첩 (1380년)

1380년 (우왕 6년), 추충양절선위익찬보조공신(推忠亮節宣威翊贊輔祚功臣)으로서 도순찰사(都巡察使) 이성계, 류실 등과 함께 운봉(雲峰), 황산(荒山), 부령(扶寧) 등지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르고 개선하였다. 이후 정방제조(政房提調)가 되어 그 세력이 임견미, 이인임 등과 겨룰 만큼 커졌다.[5][6][7] 우왕은 황산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변안렬과 이성계에게 금 50냥씩, 왕복명 이하 여러 장수들에게는 은 50냥씩을 주었으나, 모두 사퇴하면서 "장수가 적을 격멸하는 것은 그 직책인데 우리가 어찌 그것을 받겠는가?"라고 하였다.[5][6][7]

이 대승리로 냇물이 붉게 변하여 6, 7일이나 그 색이 변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마시지 못하고 그릇에 담아 맑아지기를 오랫동안 기다려서야 마실 수 있었다. 노획한 말이 1,600여 필이고, 기타 무기는 헤아릴 수 없었다. 지인 김국을 파견하여 승전 보고를 했더니, 신우는 기뻐서 밀직사 인원보를 보내 궁중에서 술을 주어 위로하고, 김국에게 낭장 벼슬과 말 1필을 주었다. 처음에 적의 병력이 아군의 10배나 많았지만 70여 명만이 겨우 살아 지리산으로 도망쳤다.[5][6][7]

2. 3. 전제개혁 반대

조준이 파격적인 전제개혁안을 제시하고 이 개혁안을 둘러싸고 논란이 가중되자, 도당에서 투표한 결과 참석자 53명 가운데 조준, 정도전 등 18명이 찬성하고, 이색, 조민수, 변안렬, 이임, 우현보, 권근, 유백유 등이 반대하였다.[8]

도당에서 그 가부를 토의할 때 시중 이색은 오랜 법제를 경솔하게 고칠 것이 아니라는 의견으로 자기주장을 고집하면서 듣지 않았으며, 이림, 우현보, 변안렬, 권근, 유백유 등은 이색의 주장을 추종하였다. 정도전, 윤소종은 조준의 주장에 가담했고, 정몽주는 이 중간에서 일정한 입장을 가지지 않았다. 또 여러 관료에게 의논하게 하니, 논의에 참가한 자가 53명이었는데 개혁을 요구한 자가 십중팔구였으며, 요구하지 않는 자는 모두 다 명문거족의 자제들이었다.[9]

위화도 회군 이후 사전개혁은 중요한 정치 현안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변안렬이 이색의 의견을 좇아 사전개혁에 반대한 것은 이성계와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드러낸 것이었다. 변안렬은 이성계 일파의 정치적 구상에는 뜻을 함께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이색과 정치적 입장을 함께 하면서 창왕을 옹립하고 사전개혁에 반대하였다. 그 결과 변안렬은 이성계와 갈등을 빚으면서 다시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10]

2. 4. 우왕 복위 사건과 죽음

위화도 회군 직후 조준은 급진적인 전제개혁안을 제시했고, 이를 둘러싸고 논란이 커졌다. 도당에서 투표한 결과, 참석자 53명 가운데 조준, 정도전 등 18명이 찬성하고, 이색, 조민수, 변안렬, 이임, 우현보, 권근, 유백유 등이 반대하였다.[8]

도당에서의 전제개혁안 논의
시중 이색은 오랜 법제를 경솔하게 고칠 것이 아니라는 의견으로 자기주장을 고집하면서 듣지 않았으며, 이림·우현보·변안렬·권근·유백유 등은 이색의 주장을 추종하였다. 정도전·윤소종은 조준의 주장에 가담했고, 정몽주는 이 중간에서 일정한 입장을 가지지 않았다. 또 여러 관료에게 의논하게 하니, 논의에 참가한 자가 53명이었는데 개혁을 요구한 자가 십중팔구였으며, 요구하지 않는 자는 모두 다 명문거족의 자제들이었다.[9]



위화도 회군 이후 사전개혁은 중요한 정치 현안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변안렬이 이색의 의견을 좇아 사전개혁에 반대한 것은 이성계와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드러낸 것이었다. 변안렬은 위화도 회군 이후 다시 도당에 참여하면서 권력자로 부상하였으나, 이성계 일파의 정치적 구상에는 뜻을 함께 하지 않았다. 대신 이색과 정치적 입장을 함께 하면서 창왕을 옹립하고 사전개혁에 반대하였다. 그 결과 변안렬은 이성계와 갈등을 빚으면서 다시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10]

1389년(창왕 1) 대호군 김저(金佇) 등이 이성계의 세력을 저지하고 우왕의 복위를 모의했던 일이 발각되었다. 김저는 이림, 우현보, 이색 등과 함께 연루되었다고 거짓 자백하여 한양(漢陽)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순절하였다.[11]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변량(邉諒)판삼사사(判三司事) 추증
변안백고려 호부전서
동생변안서(邉安緖)
부인원주 원씨
아들변현(邉顯)
손자변극충(邉克忠)별좌공파(別坐公派) 파조(祖), 원종 삼등공신
손자변극민(邉克愍)참의공파(參議公派) 파조(祖)
아들변이(邊頤)원종공신, 호용사 동첨절제사, 판남원부사, 전라도 병마도절제사 겸 수군도절제사, 충청도 수군도안무처치사, 중군 총제
손자변차희(邉次熹)첨추공파(僉樞公派) 파조(祖), 아들 회문, 장흥고직장, 부안진병마절제사, 세종 때 첨지중추원사
손자변상조(邉尙朝)남부령공파(南部令公派) 파조(祖), 원종 삼등공신, 세조 때 남부령, 처(妻) 순천 김씨
손자변상근(邉尙覲)호군공파(護軍公派) 파조(祖), 세종 때 선절장군 군기시판관
손자변상회(邉尙會)참판공파(參判公派) 파조(祖), 호 무송당, 원종 삼등공신, 호조․예조참판, 증 예조판서 겸 예문관제학 지 경연춘추관사, 원평군
손자변상동(邉尙同)감찰공파(監察公派) 파조(祖), 조선 사헌부감찰
손자변상빙(邉尙聘)군수공파(郡守公派) 파조(祖), 원종 삼등공신, 세종조 행대감찰, 홍원숙과 함께 옳고 그름을 살피는 일로 경기 좌우도보사직, 원종공신 삼등 녹훈, 통정대부 간성군수 역임
손자변상복(邉尙服)부마공파(駙馬公派) 파조(祖), 호 송헌(松軒), 조선 통정대부 강릉대도호부사, 정종의 딸 덕천옹주와 혼인
손녀 사위정유길(鄭由吉), 이점(李漸), 이승손(李承孫)
아들변예(邉預)
손자변영청(邉永淸)사용공파(司勇公派) 파조(祖)
손자변세청(邉世淸)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 파조(祖)


4.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변안렬

위화도 회군 이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우왕이 밤에 환관 80여 명과 함께 갑옷을 입고 태조 및 조민수, 변안렬의 집으로 달려왔으나, 이들이 모두 전문(殿門) 밖에 군사를 두고 집에 있지 않아 살해하지 못하고 돌아갔다.[12]

정종 1년(1399년) 3월 9일에는 태상왕(태조)이 새벽에 먼저 유후사에 들어가서 변안렬의 옛집에 갔다.[13]

태조 2년(1393년) 7월 22일, 태조는 개국 공신 책록 교지를 내리면서, 죽은 검교 시중 변안렬은 이등 공신 경보의 예가 될 만하며, 포상하는 은전을 유사는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5. 《고려사》 기록과 관련된 논란

정도전이 편찬한 《고려사》에는 태조가 신우, 신창 및 변안렬을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 개국 후 갈등을 야기했다. 이는 정도전이 이방원의 심복에게 죽임을 당하는 원인 중 하나였다.[1] 세종 6년(1424년) 12월 1일, 태조 때 정도전이 《고려사》 편찬 시 태조가 신우·신창 및 변안렬을 죽였다고 기록한 고려 시대의 사초(史草)를 제출하여 귀양을 보냈다.[1]

6. 이색과의 관계

이색은 변안렬과 관련된 시 몇 편을 남겼다. 이색은 왜구가 극성을 부려 이성계와 변안렬 등 여러 장수가 출정한다는 소식을 듣고, 시를 지어 격려하였다. 이색은 당시 이성계와 변안렬을 직접 배웅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승리 결단한 조정의 계책이 훌륭한지라 교외의 전송에 군율 또한 정강해졌으니

서로 의지함은 흡사 수레와 덧방나무요 문란치 않음은 진정 그물과 별릿줄 같네

여러 장수의 용맹은 다 기가 넘치거니와 두 원수의 지휘권은 유별히 광채가 나네

알건대 남은 종자 없이 다 섬멸할 테니 망할까 하여 다시 뽕나무에 매주었으면 하네중국어[14]

아래는 이성계와 변안렬의 용맹, 지혜, 의리를 칭송한 시이다.

천지가 폐장하면 의당 봄이 돌아오고 용사의 칩복은 제 몸 보존키 위함인데

힘을 기르되 때로 숨겨서 겁내지 않고 널리 밝아서 갑옷 쓴 이는 성인이었네

혈기의 용맹은 고작 일당백에 그치지만 의리가 지극하면 천하의 신하가 된다오

양 몰아 범을 침은 상대가 안 되고말고 군사 착함은 율로 내는 데 있을 뿐이네중국어[14]

아래 시에서 이공과 변군은 이성계와 변안렬을 가리킨다. 1380년 이성계가 도순찰사, 변안렬이 도체찰사가 되어 왜구와 치열한 전투를 벌일 때였다. 이성계와 변안렬은 운봉 전투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큰 공을 세웠다.

이공과 변군은 용맹 지혜 다 갖춘 데다 의리는 하늘 닿아라 어이 그리 우뚝한고

일 당해 두려워하고 계책 내서 성공하니 유독 군법에만 모두 정명한 게 아니로다

상산은 지대가 낮고 큰 고개는 험준한데 고기들이 솥 안에서 살려고 버둥대거니

붕궤되는 형세가 반드시 급격할 테지만 함정만 있고 견고한 성 없음이 한스럽네

가을바람 썰렁해지면 몸은 움츠러들지만 가을밤 점차 길어지면 꿈은 말아지리니

원컨대 우리 주장이 높은 공렬을 세워서 일거에 요기의 뿌리를 모두 절멸시키고

백만의 창생이 다 안정을 되찾게 하여 다시 여생에 풍월을 즐기게 해주었으면 하네중국어[14]

7. 정몽주와의 관계

정몽주이색, 길재, 이숭인, 이방번 등과 함께 변안렬의 제사에 참석하여 그를 애도하는 제문을 지었다.[1]

다음은 정몽주의 제문이다.[1]

"임신년 정월 기망일은 고인 대은공이 순절하신 두번째 해입니다. 진실한 벗이며 시중의 직책을 맡고 있는 영일인 정몽주는 술잔을 부어 공의 묘에서 아륍니다. 늠름하기가 추상같음은 공의 충열이요, 열렬하기가 백일(白日) 같음은 공의 의절 이었습니다. 이 밤을 소리 내어 크게 울건대 어느 날이든 감히 잊겠습니까? 받드리는 제수는 비록 박하오나, 마음으로 통하는 우정은 두터우니 혼령께서는 바라건대 오셔서 드시옵소서. 아! 원통하도다."[1]

정몽주는 변안렬을 진실하고 잊을 수 없는 벗이라 칭하며, 마음으로 통하는 두터운 우정을 표현하였다. 그는 짧은 제문을 통해 변안렬의 충직하고 열렬한 절의를 기리고, 그의 죽음을 원통해하였다. 정몽주는 변안렬이 지조가 맑고 높았으며 기국과 도량이 넓고 컸으며, 문장에 능통하였고 무예에 뛰어났다고 평가했다.[1]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 회군에 참여하였으나, 우왕의 강화 추방에 상심하여 문을 닫아걸고 호를 대은이라 하였다고 전한다.[1]

8. 불굴가(不屈歌)

1389년 (공양왕 1년) 10월 11일은 이성계의 생일이었다. 당시 무장들은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역성혁명을 꾀하고 있던 이성계는 변안렬이 마음에 걸렸다. 변안렬은 언제나 정예병 200명을 거느리고 공병(公兵)을 장악해 전공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성계는 자기 생일을 핑계로 정몽주와 변안렬을 초대했다.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을 시켜 <하여가>를 부르게 하자, 변안렬은 <불굴가>로, 정몽주는 <단심가>로 화답했다.[15]

하여가(何如歌)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성황당 후원이 무너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죽지 않으면 어떠하리"



불굴가(不屈歌)
"내 가슴 말(斗)처럼 구멍 뚫어 새끼줄로 길게 길게 꿰어 앞에서 끌고 뒤어서 당겨 갈리고 찢길망정 너희들 하는 대로 내 사양치 않으리라. 내 임금 빼앗는 일 나는 굽힐 수 없도다."



김천택의 『청구영언』에 전해오는 「불굴가」가 그의 시가로 밝혀졌다. 따라서 그의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엿볼 수 있다. 불굴가는 일명 ‘충의가’라고도 한다. 원가(原歌)는 전하지 않고, 한역가(漢譯歌)와 창작경위가 『원주변씨세보』 경신보(庚申譜) 권1 잡록부(雜錄附)에 수록되어 있다.[15]

변안렬은 1351년공민왕을 따라 고려에 와서 귀화한 장수로 무공을 많이 세웠다. 그러나 정몽주보다 2년 먼저 이성계의 혁명세력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는데, 그 이유는 「충의가」의 창작동기에 잘 나타나 있다.[15]

이방원은 잔치를 베풀고 고려 왕실 추종자들의 마음을 떠보려 「하여가」를 지어 그의 심중을 드러내었다. 그러자 정몽주는 「단심가」로, 변안렬은 이 작품으로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굽힐 수 없다는 뜻을 드러냈다고 한다.[15]

전하는 한역가는 “穴吾之胸洞如斗 貫以藁索長又長 前牽後引磨且戛 任汝之爲吾不辭 有慾奪吾主此事吾不從”(혈오지흉동여두 관이삭장우장 전견후인마차알 임여지위오불사 유욕탈오주차사오부종)이다.[15]

9. 평가

김저와 정득후(鄭得厚)를 체포하려 하니, 정득후가 김저와 같이 모의하고 밤에 태조의 집에 잠입하다가 문객(門客)에게 잡히게 되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김저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니 공초(供招)가 변안렬 등에게 관련되었다. 대간(臺諫)이 청하므로, 태조가 극력 구원하였으나 창왕은 듣지 아니하였다.[11]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에 있는 대은변안렬묘역은 2002년 9월 16일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116호로 지정되었다.

고려우왕은 왕씨가 아니라고 몰렸으며, 권력의 탐학과 전횡을 일삼던 이인임은 왕권과 신하들을 위협하다가 이성계에게 처형당하고, 급진개혁가 정도전은 이성계의 힘을 빌어 역성혁명을 꿈꾸었다.

만약 변안렬이 억울하게 순절하지 않았어도 고려 왕조는 계속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고려사》에는 변안렬을 이성계가 처형했다고 기록했다.[16]

대은 변안렬은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 회군을 하였다. 이는 이성계와 고려를 바로 세우려는 충신으로서 같은 뜻을 가졌지만 이성계와 추구하는 목표는 달랐다. 그러나 변안렬은 우왕 복위 사건에 휘말려 억울하게 순절했다.

조선 개국 후 태조는 변안렬을 개국 이등공신에 책록하였으며, 변안렬의 가택을 방문하고 그를 그리워했다. 태조는 변안렬의 후손에게 벼슬을 여러 차례 내리려 노력하였으나, 변안렬의 후손은 극구 사양하였다. 태종 11년에 이르러서야 변안렬의 아들 변이를 상호군(上護軍)에 임명하고 원종공신(元從功臣) 1등으로 책록하였다. 변안렬은 고려의 충신이었다. 이성계에게 변안렬은 조선을 개국하기 위해서 넘어야 하는 가장 큰 산이었을 수도 있다. 대은 변안렬은 고려의 마지막 무신으로 남음과 동시에 조선을 개국하는 명분으로 남았다.[17]

10. 등장 작품

참조

[1] 뉴스 변씨(邊氏) 본관(本貫) 원주(原州)입니다. http://www.findroot.[...] 한국족보출판사 2022-09-17
[2] 뉴스 大隱 邉安烈の墓域 http://www.nyj.go.kr[...] 南楊州市
[3] 기타 『고려사』 권126, 열전39 https://terms.naver.[...]
[4] 서적 《태조실록》 권4, 태조 2년(1393년) 7월 22일(을축) 3번째 기사
[5] 문서 변안렬전에 수록된 황산대첩에는 변안렬의 전공보다는 이성계의 전공이 확대돼 있다. 전공의 평가는 동일하게 받았고 황산대첩에서 변안렬은 도체찰사(정1품)이고, 이성계는 도순찰사(정2품)인데 지휘체계가 모호하다. 이는 도체찰사와 도순찰사의 품계는 고려 시대에는 없었고, 조선 성종 대에 품계가 정해졌기 때문에 생긴 오해이다. 또한 이성계는 3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이다. 변안렬전에 묘사된 이성계의 전공은 독자적인 전공위주로 나오는데, 지휘관이 결심하는 합동작전의 내용이 없지만 황산대첩은 왜구의 말 1,600여 필을 노획할 수 있을 정도의 전면전적인 대규모 전투였음을 알 수 있다. 황산대첩후 변안렬은 이성계와 최고의 포상을 받았다. 변안열은 이성계를 견제하기 위한 우왕 측의 안전판으로도 볼 수 있다.
[6] 서적 고려사, 변안렬전
[7] 서적 저서 '대은 변안렬의 생애와 업적' 한국역사문화원
[8] 서적 고려사 권118, 열전31,조준
[9] 서적 고려서 권118, 열전31, 조준
[10] 서적 '대은 변안렬의 생애와 업적' 한국역사문화연구원 2013
[11] 문서 실록에 "창왕은 듣지 아니하였다." 라고 기록 되었으나 실제 변안렬의 순절 시기는 공양왕의 재임 기간중 이었다.
[12] 문서 이를 볼 때 우왕이 이성계, 조민수, 변안렬을 살해하려고 한 공통적인 이유를 알 수도 있다.
[13] 문서 태상왕(이성계)이 변안렬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정종실록에 기록되었다.
[14] 서적 이색의 작품집, 《목은시고》 참조
[15] 논문 「장시조(長時調)의 장르형성 과정 및 그 성격(Ⅰ)-‘불굴가(不屈歌)’의 내용(內容)을 중심으로-」(조규익, 『민족문화연구』 제24호, 1991), 「사설시조의 장르형성 재론」(김학성, 『대동문화연구』 20집, 성균관대학교대동문화연구원, 1986),「대은(大隱)의 불굴가보고(不屈歌補攷)」(황패강, 『국어국문학』 49·50, 1970), 「대은(大隱) 변안렬(邊安烈)의 불굴가(不屈歌)」(황패강, 『단국대학교논문집』 2, 1968)]
[16] 문서 " 이는 태조(이성계)로 하여금 정도전을 내치는 요인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이후 정도전이 펼치는 정책은 태조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결국 정도전은 태조가 16세의 어린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17] 서적 저서 '대은 변안렬의 생애와 업적' 한국역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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