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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리 1세 (예루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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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모리 1세는 1163년부터 1174년까지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이었다. 그는 보두앵 2세의 손자이자 풀크 왕의 아들로, 야파 백작과 아스칼론 백작을 역임했다. 아모리 1세는 이집트 정복을 목표로 여러 차례 원정을 시도했으나, 살라딘의 등장으로 실패했다. 그는 비잔틴 제국과의 동맹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려 했으며, 두 번 결혼하여 시빌라, 보두앵 4세, 이사벨 1세를 자녀로 두었다. 아모리 1세는 이질로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보두앵 4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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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리 1세 (예루살렘)
기본 정보
이름아모리
원어 이름 (라틴어)Amalricus
원어 이름 (프랑스어)Amaury
왕위
작위예루살렘 왕
재위 기간1163년 - 1174년
대관식1163년
이전보두앵 3세
이후보두앵 4세
가족
배우자아녜스 드 쿠르트네
마리아 콤네나
자녀보두앵 4세
시빌라
이사벨 1세
가문앙주 가문
아버지풀크 5세
어머니멜리상드
출생과 사망
출생일1136년
사망일1174년 7월 11일
사망 장소예루살렘, 예루살렘 왕국

2. 생애

보두앵 2세는 임종을 앞두고 예루살렘 왕국을 그의 맏딸 멜리센드, 그녀의 남편 앙주의 풀크, 그리고 그들의 어린 아들 보두앵 3세에게 넘겼다. 예루살렘 왕국은 레반트를 침략하여 무슬림 통치자들을 격파한 라틴 기독교도들이 세운 십자군 국가 중 하나였다. 풀크는 멜리센드를 권력에서 배제했지만, 1135년 멜리센드와 예루살렘의 남작들은 그에게 압력을 가해 그녀를 공동 통치자로 인정하게 했다. 말콤 바버는 풀크가 화해를 원했고, 멜리센드는 아들 하나에게 가족의 계승이 달려 있었기 때문에 동의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부부는 1135년 말이나 1136년 초에 아모리를 잉태했다.[1]

1143년 아모리의 아버지 풀크 왕은 아크레 근처에서 가족 나들이 중 낙마 사고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11월 10일에 사망했다. 멜리센드 여왕은 권력을 장악했고, 13세의 보두앵 3세와 함께 12월 25일에 다시 즉위했다. 1144년, 터키계 무슬림 모술의 아타베크인 젠기가 에데사를 점령했다. 이는 제2차 십자군을 촉발시켰지만, 가장 큰 무슬림 도시 중 하나인 다마스쿠스 정복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멜리센드는 보두앵이 성년이 된 후에도 권력을 넘겨주지 않았고, 1151년까지 그들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아모리는 어머니의 측근이 되었으며, 1151년 멜리센드는 보두앵에 맞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그에게 야파 백국을 하사했다. 아모리는 교회를 제외하고는 어머니의 가장 중요한 지지자였다.[1]

1152년, 보두앵은 고등 법원을 소집하여 왕국을 자신과 멜리센데 사이에 분할할 것을 요구했다. 멜리센데 여왕은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을 다스리고, 아크레와 티레는 어린 국왕의 통치 아래 남았다. 보두앵은 곧 어머니의 영토를 침략하여 마나세스 드 이르게를 격파하고 추방한 후 예루살렘으로 진군했다. 멜리센데의 영주들은 보두앵이 진격하자 그녀를 버렸고, 멜리센데는 다윗 탑에 가장 충성스러운 사람들인 아모리와 로하르 1세 자작, 밀리의 필립과 함께 피난했다. 보두앵은 그들을 포위했지만, 멜리센데가 폐위되고 나블루스 시를 통치하는 것으로 제한하는 협상이 이루어질 때까지 방어전을 펼쳤다. 1152년 4월 말, 보두앵은 왕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1] 헌장 증거에 따르면, 보두앵이 1152년에 아모리에게 야파 백작령을 박탈함으로써 어머니를 편든 것에 대한 처벌을 내렸다고 한다.[2]

1153년, 국왕은 파티마 왕조의 아스칼론을 정복하고 이집트인들에게 공물을 지불하도록 강요했다.[3] 그는 아모리에게 아스칼론과 야파를 모두 양도했다. 역사가 한스 E. 마이어는 아모리가 이중 백작령을 얻은 시기를 1154년 7월 직후로 추정한다.[4]

1162년 형 보두앵 3세가 죽자 예루살렘 왕위는 아모리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귀족들은 아녜스의 행실이 나쁘다는 이유로 결혼 무효화를 요구했고, 결국 아모리는 아녜스와 이혼하고 왕위에 올랐다. 아녜스는 이벨린의 위그와 결혼했고, 시빌라와 보두앵의 왕위 계승자로서의 법적 지위는 보장받았다.[1]

아모리의 어머니 멜리장드 여왕은 1161년 9월 11일에 사망했고, 그의 형제인 발두인 3세는 1163년 2월 10일 베이루트에서 이질로 사망했다. 발두인 3세와 테오도라는 자녀가 없었으므로 아모리가 상속자가 되었다.[2] 연대기 작가 에르눌은 발두인이 아모리를 자신의 상속자로 지명했다고 전한다.[2]

왕위 계승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고등 법원은 아모리가 아그네스를 버리지 않는 한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의 대변인은 네슬의 아모리 대주교였다. 티레의 윌리엄에 따르면, 대주교는 부부의 혈연 관계를 문제 삼았다.[3] 아모리는 고등 법원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그의 아그네스와의 결혼은 근친혼의 사유로 무효가 되었다.[3] 교황 알렉산데르 3세의 교황 사절인 산티 조반니 에 파올로 알 첼리오의 요한 추기경이 참석했다. 아모리는 그의 자녀인 시빌라와 발두인의 적법성과 아그네스의 도덕적 비난 면제를 교황으로부터 확인받았다.[3] 2월 18일, 발두인 3세의 장례일, 대주교는 성묘 교회에서 아모리에게 왕관을 씌웠다.[3]

아모리는 통치 초기에 가장 강력한 봉신(주요 봉신)에 대항하여 《리게스 조례》를 통과시켜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다. 이 법률은 강력한 봉신의 봉신들이 그들의 영주가 그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할 경우 직접 왕에게 상소할 수 있도록 했다.[4]

2. 1. 유년 시절

보두앵 2세는 임종을 앞두고 예루살렘 왕국을 그의 맏딸 멜리센드, 그녀의 남편 앙주의 풀크, 그리고 그들의 어린 아들 보두앵 3세에게 넘겼다. 예루살렘 왕국은 레반트를 침략하여 무슬림 통치자들을 격파한 라틴 기독교도들이 세운 십자군 국가 중 하나였다. 풀크는 멜리센드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고,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와 딸 플랑드르 백작부인 시빌라가 유럽에 있었다. 풀크는 멜리센드를 권력에서 배제했지만, 1135년 멜리센드와 예루살렘의 남작들은 그에게 압력을 가해 그녀를 공동 통치자로 인정하게 했다. 말콤 바버는 풀크가 화해를 원했고, 멜리센드는 아들 하나에게 가족의 계승이 달려 있었기 때문에 동의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부부는 1135년 말이나 1136년 초에 아모리를 잉태했다. 왕국의 북쪽에는 트리폴리 백국, 안티오크 공국, 에데사 백국의 세 십자군 국가가 더 있었다. 안티오크와 트리폴리는 멜리센드의 여동생들인 안티오크의 앨리스와 트리폴리의 호디에르나 가문이 통치했다.[1]

1143년 아모리의 아버지 풀크 왕은 아크레 근처에서 가족 나들이 중 낙마 사고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11월 10일에 사망했다. 멜리센드 여왕은 권력을 장악했고, 13세의 보두앵 3세와 함께 12월 25일에 다시 즉위했다. 1144년, 터키계 무슬림 모술의 아타베크인 젠기가 에데사를 점령했다. 이는 제2차 십자군을 촉발시켰지만, 가장 큰 무슬림 도시 중 하나인 다마스쿠스 정복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멜리센드는 보두앵이 성년이 된 후에도 권력을 넘겨주지 않았고, 1151년까지 그들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아모리는 어머니의 측근이 되었으며, 1151년 멜리센드는 보두앵에 맞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그에게 야파 백국을 하사했다. 아모리는 교회를 제외하고는 어머니의 가장 중요한 지지자였다.[1]

2. 2. 야파와 아스칼론의 백작

1152년, 보두앵은 고등 법원을 소집하여 왕국을 자신과 멜리센데 사이에 분할할 것을 요구했다. 멜리센데 여왕은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을 다스리고, 아크레와 티레는 어린 국왕의 통치 아래 남았다. 보두앵은 곧 어머니의 영토를 침략하여 마나세스 드 이르게를 격파하고 추방한 후 예루살렘으로 진군했다. 멜리센데의 영주들은 보두앵이 진격하자 그녀를 버렸고, 멜리센데는 다윗 탑에 가장 충성스러운 사람들인 아모리와 로하르 1세 자작, 밀리의 필립과 함께 피난했다. 보두앵은 그들을 포위했지만, 멜리센데가 폐위되고 나블루스 시를 통치하는 것으로 제한하는 협상이 이루어질 때까지 방어전을 펼쳤다. 1152년 4월 말, 보두앵은 왕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1] 헌장 증거에 따르면, 보두앵이 1152년에 아모리에게 야파 백작령을 박탈함으로써 어머니를 편든 것에 대한 처벌을 내렸다고 한다.[2]

1153년, 국왕은 파티마 왕조의 아스칼론을 정복하고 이집트인들에게 공물을 지불하도록 강요했다.[3] 그는 아모리에게 아스칼론과 야파를 모두 양도했다. 역사가 한스 E. 마이어는 아모리가 이중 백작령을 얻은 시기를 1154년 7월 직후로 추정한다.[4]

2. 3. 예루살렘 왕위 계승

1162년 형 보두앵 3세가 죽자 예루살렘 왕위는 아모리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귀족들은 아녜스의 행실이 나쁘다는 이유로 결혼 무효화를 요구했고, 결국 아모리는 아녜스와 이혼하고 왕위에 올랐다. 아녜스는 이벨린의 위그와 결혼했고, 시빌라와 보두앵의 왕위 계승자로서의 법적 지위는 보장받았다.[1]

아모리의 어머니 멜리장드 여왕은 1161년 9월 11일에 사망했고, 그의 형제인 발두인 3세는 1163년 2월 10일 베이루트에서 이질로 사망했다. 발두인 3세와 테오도라는 자녀가 없었으므로 아모리가 상속자가 되었다.[2] 연대기 작가 에르눌은 발두인이 아모리를 자신의 상속자로 지명했다고 전한다.[2]

왕위 계승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고등 법원은 아모리가 아그네스를 버리지 않는 한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의 대변인은 네슬의 아모리 대주교였다. 티레의 윌리엄에 따르면, 대주교는 부부의 혈연 관계를 문제 삼았다.[3] 아모리는 고등 법원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그의 아그네스와의 결혼은 근친혼의 사유로 무효가 되었다.[3] 교황 알렉산데르 3세의 교황 사절인 산티 조반니 에 파올로 알 첼리오의 요한 추기경이 참석했다. 아모리는 그의 자녀인 시빌라와 발두인의 적법성과 아그네스의 도덕적 비난 면제를 교황으로부터 확인받았다.[3] 2월 18일, 발두인 3세의 장례일, 대주교는 성묘 교회에서 아모리에게 왕관을 씌웠다.[3]

아모리는 통치 초기에 가장 강력한 봉신(주요 봉신)에 대항하여 《리게스 조례》를 통과시켜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다. 이 법률은 강력한 봉신의 봉신들이 그들의 영주가 그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할 경우 직접 왕에게 상소할 수 있도록 했다.[4]

3. 이집트 원정과 십자군 국가 간의 갈등

1153년 아모리는 아스칼론을 점령하여 야파와 아스칼론의 백작이 되었다. 1162년 형 보두앵 3세가 죽자 아모리는 예루살렘 왕위를 계승했으나, 귀족들은 아내 아녜스의 행실을 문제 삼아 결혼 무효화를 요구했다. 결국 아모리는 아녜스와 이혼하고 왕위에 올랐다.

당시 십자군 국가는 이슬람 세력과 전쟁 중이었다. 제2차 십자군다마스쿠스 공략에 실패했고, 누르 앗 딘은 모술알레포를 장악하고 이슬람의 유력자로 떠올라 다마스쿠스마저 점령했다. 십자군은 약화된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를 노렸고, 보두앵 3세의 아스칼론 점령으로 이집트 원정은 더욱 구체화되었다.[2]

아모리는 이집트에 여러 차례 원정을 시도했다. 1163년 제1차 원정은 파티마 왕조가 나일강의 둑을 터뜨려 수공으로 막아 실패했다. 1164년 제2차 원정에서는 샤와르와 시르쿠 간의 권력 다툼에 개입했으나, 하림 전투에서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3세가 누르 앗 딘에게 포로로 잡히면서 시리아로 급히 돌아가야 했다.[3] 1167년 제3차 원정에서는 시르쿠와 알렉산드리아를 두고 공방전을 벌였으나 결국 협상을 통해 도시를 얻는 데 그쳤다.[4]

1167년 아모리는 비잔티움 제국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누스의 조카 손녀 마리아 콤네나와 결혼했고, 1168년 마누엘 1세와 동맹을 맺었다.[3] 같은 해 제4차 원정에서는 구호 기사단의 지지를 받아 빌바이스를 점령하고 학살했으나, 카이로 공격 중 누르 앗 딘이 보낸 시르쿠가 도착하자 퇴각했다.[3]

1169년 시르쿠는 샤와르를 암살하고 재상이 되었으나 곧 사망했고, 살라딘이 그 자리를 이었다. 아모리는 1169년 비잔티움 함대와 함께 제5차 원정을 감행하여 다미에타를 포위했으나, 십자군과 비잔티움 제국 간의 불화와 살라딘과의 휴전으로 성과 없이 귀환했다.[5]

1174년 누르 앗 딘이 사망하자 아모리는 바니아스를 공격했으나, 원정 중 이질에 걸려 1174년 7월 11일 사망했다.[1]

3. 1. 제1차 이집트 원정 (1163년)

1163년 아모리는 파티마 왕조가 연공을 바치지 않았다는 구실로 이집트를 기습공격했고, 이집트는 나일강의 둑을 허물어 수공 작전으로 아모리군을 막고 협상을 시작했다. 형 보두앵 3세가 사망하면서 2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아모리는 이집트 정복을 계획했다. 당시 이집트를 지배하던 파티마 왕조는 재상들의 권력 다툼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이 때문에 재상들은 1160년부터 예루살렘 왕에게 공납금을 지불하고 있었다. 재상 샤와르가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여 시리아로 도망친 것을 계기로, 아모리는 이집트 내의 혼란을 예상하고 6만 디나르의 공납금이 기한 내에 지불되지 않았다는 것을 구실로 삼아 1163년에 이집트를 침공했다. 시나이 반도를 횡단한 예루살렘 군은 당시 나일 강변에 있던 도시 빌바이스를 포위했다. 수비 측은 포위가 진행된 9월이 나일강의 범람기임을 이용하여 둑을 여러 곳에서 터뜨려 예루살렘 군을 수공으로 공격했다. 이로 인해 아모리는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첫 번째 이집트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3. 2. 제2차 이집트 원정 (1164년)

아모리 1세는 1163년에 파티마 왕조가 연례 조공을 지불하지 않았다는 구실로 이집트를 공격했다. 디르함은 샤와르에게 쫓겨난 뒤 펠루시움에서 아모리를 만나 싸웠으나 패배하고 빌베이스로 물러났다. 이집트인들은 나일 강의 댐을 열어 강물을 범람시켜 아모리의 추가 침략을 막았다. 아모리는 본국으로 돌아갔고, 샤와르는 누르 앗딘에게 도망쳤다. 누르 앗딘은 자신의 장군 쉬르쿠흐를 보내 1164년에 이 분쟁을 해결하도록 했다. 디르함은 아모리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아모리가 개입하기 전에 쉬르쿠흐와 샤와르가 도착하여 디르함은 살해되었다. 그러나 샤와르는 쉬르쿠흐가 권력을 잡을 것을 두려워하여 아모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모리는 1164년에 다시 이집트로 돌아와 쉬르쿠흐가 다마스쿠스로 후퇴할 때까지 빌베이스에서 그를 포위했다.[3]

이집트에서 아모리가 성공을 거두는 동안, 시리아에서는 누르 앗딘이 활동하여 하림 전투에서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3세와 트리폴리의 레이몽 3세를 포로로 잡았다. 아모리는 급히 안티오키아와 트리폴리의 섭정을 맡아 1165년에 보에몽의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시켰다 (레이몽은 1173년까지 포로로 잡혀 있었다). 1166년은 비교적 평온했지만, 아모리는 비잔티움 제국에 사절을 보내 동맹과 비잔틴 신부를 구했으며, 바니아스를 점령한 누르 앗딘의 습격을 처리해야 했다.[3]

1164년 4월, 시르쿠는 샤와르와 함께 2,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집트에 진입했다. 4월 24일에는 빌바이스를 점령하고, 5월 1일에는 카이로 성벽 아래에 진을 쳤다. 샤와르를 몰아낸 재상 디르함은 혼란 속에 살해되었고, 샤와르가 재상으로 복귀했다.

샤와르는 복귀 후 누르 앗딘과의 약속을 어기고 시르쿠에게 즉각 퇴거를 요구했다. 그리고 시르쿠를 공격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특사를 보내 아모리 1세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아모리 1세는 그해 7월 다시 이집트로 원정하여 시르쿠가 농성하는 빌바이스를 포위했다. 누르 앗딘은 아모리 1세를 이집트에서 철수시키기 위해 안티오키아 공국 영토 할림의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보에몽 3세 (안티오키아 공)와 레몽 3세 (트리폴리 백)를 포로로 잡았다. 이 소식을 접한 아모리 1세는 철수했고, 아모리 1세와 시르쿠는 동시에 이집트를 떠나는 것으로 타협했다. 아모리 1세는 10월 말 이집트를 떠났다. 이 원정에서 아모리 1세는 이집트가 누르 앗딘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는 데 성공했다.

3. 3. 제3차 이집트 원정 (1167년)

1167년, 누르 앗 딘은 시르쿠를 다시 이집트로 보냈고, 아모리는 알 아디드 칼리프와 조약을 맺고 나일 강에서 시리아군과 맞서 싸웠다. 아모리는 카이로로 퇴각했고, 시르쿠는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다. 아모리는 알렉산드리아로 진격하여 공성전을 폈고, 시르쿠는 협상을 통해 그 도시를 아모리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아모리는 알렉산드리아에 오래 머물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퇴각했다.[4]

샤와르는 시르쿠흐의 재침공을 두려워하여 아모리 1세와 상호 원조 조약을 맺었다. 1167년 초, 아모리 1세는 샤와르의 군대와 함께 카이로 앞에서 시르쿠흐를 기다렸다. 그러나 시르쿠흐는 카이로 남쪽으로 향해 나일강을 건너 북상했고, 기자의 피라미드 근처에 포진했다. 이때 시르쿠흐는 샤와르에게 힘을 합쳐 아모리 1세를 쓰러뜨리자고 제안했지만, 샤와르는 거절하고 예루살렘 왕국에 조공을 포함하는 정식 동맹을 맺었다.[3]

예루살렘-이집트 연합군은 시르쿠흐를 추격하여 3월 18일 알 바바인 근교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여 카이로로 돌아갔다. 아모리 1세는 적이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알렉산드리아로 향하여 도시를 포위했다. 도시에서는 식량이 부족했고, 시르쿠흐는 살라딘에게 알렉산드리아를 맡기고 상 이집트로 향했다. 시르쿠흐는 아모리 1세에게 강화 협상을 제안했고, 아모리 1세도 이에 응하여 화의가 성립되었다. 알렉산드리아 포위는 풀렸고, 1167년 8월, 양군은 귀국했다. 이 원정으로 예루살렘 왕국은 이집트와의 정식 동맹, 이집트의 10만 디나르 조공, 프랑크 군의 카이로 상주라는 성과를 얻었다.[3]

3. 4. 비잔티움 제국과의 동맹

1165년 아모리는 비잔티움 제국에 사절을 보내어 자신의 신부감을 구하고 누르 앗 딘에 맞서 동맹을 맺으려고 하였다. 1167년 아모리는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누스의 조카 손녀인 마리아 콤네나와 결혼했다.[3] 이듬해 아모리와 마누엘 황제는 동맹을 맺고 누르 앗 딘에 공동으로 맞서기로 했다.

아모리와 마리아의 결혼

3. 5. 제4차 이집트 원정 (1168년)

1168년 아모리와 비잔틴 제국의 마누엘 1세 콤네노스는 이집트에 대항하는 동맹을 협상했고, 티레의 윌리엄은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된 대사들 중 한 명이었다.[3] 아모리는 샤와르와 평화 조약을 맺고 있었지만, 샤와르가 누르 앗 딘과 동맹을 맺으려 했다는 혐의를 받자 침략을 감행했다. 구호 기사단은 이 침략을 열렬히 지지했지만, 템플 기사단은 이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9]

10월에 아모리는 비잔틴의 지원을 기다리지 않고 빌베이스를 침략하여 점령했다. 주민들은 학살당하거나 노예가 되었다.[3] 이 학살은 아모리에게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이 사건은 카이로의 친 프랑크 이집트인들마저 아모리에 대한 철저한 항전을 결의하게 했고, 샤와르는 도시를 내주느니 차라리 파괴하겠다는 듯이 카이로의 구 시가지에 불을 질렀다. 아모리는 이후 카이로로 진격했고, 샤와르는 아모리에게 2백만 개의 금화를 제시했다. 한편, 누르 앗 딘은 시르쿠를 다시 이집트로 보냈고, 그가 도착하자 아모리는 물러났다.[3]

샤와르는 누르 앗 딘의 개입 없이 아모리를 철수시키려고 했지만, 칼리프 알 아디드 자신이 누르 앗 딘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누르 앗 딘은 시르쿠흐를 파견했고, 1169년 1월 2일 아모리는 철수했다. 시르쿠흐가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6일 후였다.[9]

이 일로 영향력을 잃은 샤와르는 살해당하고, 그 대신 살라딘이 이집트의 재상에 취임했다. 이 원정의 실패로 아모리는 누르 앗 딘의 개입과 시르쿠흐, 살라딘의 영향력 증대를 허용했으며, 이집트와 시리아에 포위되는 형국이 되었다. 게다가, 아모리는 이집트와의 동맹과 조공이라는 지난번의 성과를 모두 잃었다.[9]

3. 6. 살라딘의 등장과 제5차 이집트 원정 (1169년)

1169년 1월, 시르쿠는 샤와르를 암살하고 재상이 되었지만, 3월에 사망하여 그의 조카 살라딘이 그 뒤를 이었다. 아모리는 불안감을 느껴 티레의 대주교 프레데릭 드 라 로슈를 유럽의 왕과 귀족들에게 보내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다.[5] 그해 말 비잔틴 함대가 도착했고, 10월에 아모리는 또 다른 침공을 시작하여 바다와 육지에서 다미에타를 포위했다. 포위는 길어졌고 기독교 진영에서는 기근이 발생했다. 비잔틴인과 십자군은 실패의 책임을 서로에게 돌렸고, 결국 살라딘과 휴전이 맺어졌다. 아모리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5]

3. 7. 누르 앗 딘 사후

1174년 누르 앗 딘이 죽자 아모리는 즉각 바니아스를 공략했다. 그러나 그 원정길에서 아모리는 이질에 걸렸고 고열로 시달려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1] 의사들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결국 1174년 7월 11일 죽었다.[1] 아모리의 두 번째 부인인 마리아 콤네네는 이사벨을 낳았는데 나블루스를 유산으로 받았고, 어린 아들 보두앵 4세가 아모리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의 왕위에 올랐다.[1]

4. 아모리 1세의 유산과 평가

1174년 누르 앗 딘이 사망하자 아모리는 즉각 바니아스를 공략했으나, 원정길에서 이질에 걸려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의사들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1174년 7월 11일 사망했다.[10] 아모리의 두 번째 부인인 마리아 콤네나는 이사벨을 낳았는데 나블루스를 유산으로 받았다. 어린 아들 보두앵 4세가 아모리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4. 1. 아모리 1세에 대한 다양한 평가

티레의 윌리엄은 아모리 1세의 좋은 친구였으며 그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했다. 그는 아모리 1세에 대해 "말에 약간의 장애가 있었지만, 결함으로 여겨질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유창한 웅변을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는 유창하거나 화려한 연설보다는 조언에 훨씬 뛰어났다."라고 평가했다.[10] 그의 형제인 보두앵 3세처럼 그는 전사라기보다는 학구적인 인물이었으며, 여가 시간에 법과 언어를 공부했다. "그는 왕국을 통치하는 관습법에 능숙했다. 사실, 이 점에서 그를 따를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모든 후방 봉신들이 왕에게 직접 종속되고 고등 법원에 출두할 수 있도록 하는 아시즈를 만든 데 책임이 있었을 것이다. 아모리는 엄청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고, 윌리엄은 아모리가 병을 앓는 동안 부활에 대해 질문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는 특히 독서와 남이 읽어주는 것을 즐겼으며, 윌리엄이 그의 역사의 초고를 읽어주는 것을 들으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사냥은 좋아했지만, 게임이나 구경거리는 즐기지 않았다. 그는 그의 관리들을 신뢰했는데, 아마도 너무 신뢰했고, 대중들 중 그를 경멸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는 공개적으로 그를 모욕하는 사람들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10]

윌리엄은 아모리 1세의 외모에 대해서는 "그는 키가 크고 꽤 잘생겼다. 그는 중간 크기의 반짝이는 눈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코는 그의 형제처럼 매부리코였으며, 그의 머리카락은 금발이었고 이마에서 약간 뒤로 물러나 있었다. 아름답고 매우 꽉 찬 수염이 그의 뺨과 턱을 덮었다. 그는 몸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과도하게 웃는 버릇이 있었다."라고 묘사했다. 그는 과식하거나 과음하지 않았지만, 말년에 비만이 심해지면서 군사 작전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다. 윌리엄에 따르면, 그는 "여성의 가슴처럼 허리까지 내려오는 가슴을 가진 과도하게 뚱뚱한 사람이었다."[10]

아모리는 독실하여 매일 미사에 참석했지만, "육신의 죄에 거리낌 없이 탐닉하고 기혼 여성을 유혹했다고 한다." 그의 독실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했고, 그들은 당연히 반대했다.[10]

윌리엄은 "그는 지혜와 분별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왕국에서 통치의 고삐를 잡기에 충분한 능력을 갖추었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초기 예루살렘 왕의 마지막 인물로 여겨진다. 몇 년 안에 황제 마누엘도 죽었고, 살라딘만이 동방의 유일한 강한 지도자로 남았다.[10]

아모리 1세는 아랍인들에게 몰리라고 불렸으며, "다루기 힘든 야심가"였다. 이 "프랑크 왕은 지혜보다는 혈기에 넘쳤으며, 키가 크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가졌지만, 중요한 위엄이 부족했다. 어깨가 유난히 좁았고, 길고 시끄러운 웃음 발작을 자주 일으켜 측근들을 괴롭혔으며, 특히 말더듬이 심하여 타인과의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다만, 이집트 정복이라는, 그를 끊임없이 몰아붙이는 집념과 멈추지 않는 그의 추구가 몰리를 훌륭한 인물로 만들었다."[10]

또한, 누르 앗딘(누레딘)의 경건한 군주라는 선전에 영향을 받아, 스스로도 "종교적 학문에 힘쓰고, 정의에 마음을 쓰는, 성실하고 경건한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퍼뜨리려고 했다."[10]고 한다.

5. 가계

아모리 1세는 1157년 에데사 백작 조슬랭 2세의 딸 아녜스 드 쿠르트네와 결혼했지만, 1162년 혼인이 무효 처리되었다. 아녜스는 그 후 위그 디블랭과 시돈 영주 르노와 결혼했다.



1167년, 동로마 제국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노스의 조카 John Doukas Komnenos|요아네스 두카스 콤네노스영어의 딸 Maria Komnene, Queen of Jerusalem|마리아 콤네나 (예루살렘 왕비)|마리아 콤네나영어와 결혼했다. 마리아는 아모리 1세 사후 바리앙 디블랭(위그의 동생)과 결혼했다.

  • 이사벨 1세 (1172년 - 1205년) 예루살렘 여왕 (1192년 - 1205년)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Cypru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2] 간행물 Amalric s.v. Amalric I. EB1911
[3] 논문 The Latin States under Baldwin III and Amalric I, 1143–1174 http://images.librar[...] Th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69
[4] 서적 Documenti sulle Relazioni delle Citta Toscane coll'Oriente Cristiano e coi Turchi https://books.google[...] M. Cellini
[5] 논문 The Rise of Saladin, 1169-1189 http://images.librar[...] Th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69
[6] 문서
[7] 문서
[8] 문서
[9] 문서
[10]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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