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두앵 3세 (예루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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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두앵 3세는 1130년 예루살렘 왕국에서 태어났으며, 1143년부터 1163년까지 예루살렘을 통치한 세 번째 군주이다. 그는 외조부 보두앵 2세의 재위 기간에 태어났고, 아버지 풀크 5세가 사망한 후 어머니 멜리장드와 함께 공동 통치자로 즉위했다. 제2차 십자군 시기에 다마스쿠스 공격에 실패하고 내전을 겪었으나, 영토를 확장하고 비잔티움 제국과의 동맹을 강화했다. 1162년 베이루트에서 3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왕위는 동생 아모리 1세에게 넘어갔다. 그는 교양 있고, 말솜씨가 뛰어나며, 탁월한 지성을 지닌 국왕으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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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앵 3세 (예루살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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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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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예루살렘 왕 |
재위 기간 | 1143년 12월 25일 – 1163년 2월 10일 |
대관식 | 1143년 12월 25일 |
이전 통치자 | 풀크, 멜리장드 |
다음 통치자 | 아모리 1세 |
섭정 | 멜리장드 (1153년까지) |
섭정 유형 | 공동 통치 |
배우자 | 테오도라 콤네나, 1158년 결혼 |
가문 | 앙주 가문 |
아버지 | 풀크 |
어머니 | 멜리장드 |
출생일 | 1130년 |
사망일 | 1163년 2월 10일 (33세) |
사망 장소 | 베이루트, 예루살렘 왕국 |
매장 장소 | 성묘 교회 |
2. 왕위 계승
보두앵 3세는 1130년, 그의 외조부인 보두앵 2세가 예루살렘 왕국을 통치하던 시기에 태어났다. 이로써 그는 예루살렘 왕국 건국 이후 3대째 통치자가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보두앵 2세의 딸이자 상속녀인 멜리장드였고, 아버지는 앙주 백작이었던 풀크였다. 보두앵 3세가 한 살 때 외조부 보두앵 2세가 사망하자, 어머니 멜리장드와 아버지 풀크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멜리장드는 자신이 보두앵 2세의 정당한 계승자임을 내세웠다. 결국 두 사람은 화해했고, 보두앵 3세의 동생인 아모리가 태어났다.
1144년 장기가 에데사 백국을 점령하자 서방 세계는 충격을 받았고, 이는 제2차 십자군 발흥의 계기가 되었다.[2] 1147년 장기가 암살되고 그의 아들 누르 앗 딘이 뒤를 이었으며, 누르 앗 딘 역시 다마스쿠스를 장악하고자 했다.[2] 이에 맞서 예루살렘과 다마스쿠스는 한때 상호 보호 동맹을 맺기도 했으나, 1147년 누르 앗 딘과 다마스쿠스 총독 무인 아드-딘 우누르는 예루살렘 왕국이 조약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반-예루살렘 동맹을 체결했다. 같은 해 보두앵 3세는 이슬람 요새 보스라를 점령하려 시도했으나, 누르 앗 딘의 군대가 도착하자 철수해야 했다. 철수 과정에서 누르 앗 딘 군대의 공격을 받았지만, 보두앵 3세의 지휘 아래 이를 격퇴하고 예루살렘과 다마스쿠스 간의 휴전이 회복되었다.[3]
1152년, 보두앵 3세는 스스로 통치할 나이가 되었다고 판단하여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했으나, 어머니 멜리장드와 그녀를 지지하는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다.[3] 이전까지 국정 운영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보두앵은 이제 왕으로서 더 많은 권한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특히 1150년 이후 어머니와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며, 궁내대신 마나세가 자신의 정당한 권력 계승을 방해한다고 비난했다.[3] 1152년 초, 보두앵은 어머니와 별도로 풀크 총대주교에게 두 번째 대관식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보두앵은 독자적으로 월계관을 쓰고 예루살렘 시가지를 행진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권위를 드러냈다.[3]
예루살렘 왕국이 내전을 겪는 동안, 누르 앗 딘은 다마스쿠스를 복속시켜 시리아를 단일 이슬람 군주의 지배 아래 통일했다. 이로 인해 북쪽으로의 확장이 어려워진 예루살렘 왕국은 남쪽의 이집트로 눈을 돌렸다. 당시 이집트는 어린 파티마 칼리프들이 연이어 즉위하며 내전으로 약화된 상태였다.[10]
어머니 멜리장드 여왕은 1161년에 사망했다. 이후 보두앵 3세는 안티오키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에 병을 얻었다. 시리아 정교회 의사가 준 약을 먹고 난 후 고열과 이질에 걸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 때문에 독살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3] 역사가 티레의 기욤은 이 병이 결핵으로 발전했다고 기록했다.[3] 보두앵 3세는 귀환 도중 트리폴리에 몇 달간 머물렀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베이루트로 옮겨졌고, 결국 1163년 2월 10일 그곳에서 향년 32세로 사망했다.[3]
기욤 드 티르와 같은 당대의 기록가들은 보두앵 3세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교양 있고 말솜씨가 뛰어나며, 뛰어난 지성과 기억력을 갖춘 군주로 묘사된다.[1] 여가 시간에는 역사서를 읽고 예루살렘 왕국의 관습법을 익히는 데 시간을 보냈으며, 이는 그가 왕국의 법과 제도에 정통했음을 보여준다.[1]
1143년, 아버지 풀크가 사냥 중 사고로 사망하자 13세였던 보두앵 3세는 어머니 멜리장드와 함께 공동 통치자로 즉위했다. 이는 어머니 멜리장드가 아버지 보두앵 2세의 상속자로서 즉위했던 방식을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어린 보두앵 3세는 초기에는 복잡한 통치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2] 공동 통치 초기에는 어머니 멜리장드가 귀족 중에서 조언자를 구해 실권을 행사하며 어린 아들을 권력에서 배제하려 했다.
여성과 어린 소년이 왕국을 통치하게 되면서 예루살렘 왕국의 정치적 상황은 불안정해졌다. 북쪽에 위치한 십자군 국가들, 즉 트리폴리, 안티오크, 에데사 등은 점차 독립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전의 보두앵 2세나 풀크처럼 강력한 군주가 있어 이들 국가에 예루살렘 왕국의 종주권을 강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편, 이슬람 세계에서는 장기가 모술과 알레포를 중심으로 시리아 북부를 장악하고 남쪽의 다마스쿠스까지 세력을 확장하려 하고 있었다. 1144년, 장기는 에데사를 점령하여 에데사 백국을 멸망시켰다. 이 사건은 서유럽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제2차 십자군이 조직되는 계기가 되었다.[2]
제2차 십자군은 1148년에야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그 사이 1146년에 장기가 암살되었고, 그의 아들 누르 앗 딘이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받아 다마스쿠스를 정복하려 했다. 이러한 위협에 맞서 예루살렘 왕국과 다마스쿠스의 이슬람 정권은 상호 방위를 위한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1147년, 다마스쿠스의 통치자 무인 아드딘 우누르는 예루살렘 왕국이 자신에게 반기를 든 봉신과 동맹을 맺었다는 이유로 예루살렘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누르 앗 딘과 손을 잡았다. 이에 보두앵 3세는 군대를 이끌고 이슬람 요새인 보스라를 공격했지만, 누르 앗 딘의 군대가 나타나자 후퇴해야 했다. 십자군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누르 앗 딘의 기병대가 공격해왔으나, 보두앵 3세는 뛰어난 지휘 능력을 발휘하여 기사들과 함께 이슬람 군대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이후 예루살렘 왕국과 다마스쿠스 사이에는 다시 휴전 협정이 맺어졌다.[3]
3. 제2차 십자군
1148년,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그의 아내 엘레오노르, 그리고 독일 왕 콘라트 3세가 이끄는 제2차 십자군이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보두앵 3세는 아크레에서 공의회를 열어 십자군의 공격 목표를 결정했다. 북쪽의 알레포를 공격하면 에데사를 되찾을 가능성이 있었고, 남쪽의 다마스쿠스를 점령하면 누르 앗 딘의 세력을 제한하고 예루살렘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또한 다마스쿠스는 기독교 역사에서 더 중요한 도시로 여겨졌다. 보두앵 3세는 다마스쿠스 공격에 동의했으나, 다마스쿠스 공성전은 단 4일 만에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이 실패는 외교적 재앙으로 이어져, 결국 다마스쿠스는 1154년 누르 앗 딘의 수중에 떨어졌다.[4]
1149년까지 십자군은 유럽으로 돌아갔고, 예루살렘 왕국은 약화된 상태로 남겨졌다. 누르 앗 딘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안티오크를 침공했고, 이나브 전투에서 안티오크 공작 레몽이 전사했다. 보두앵 3세는 급히 북쪽으로 가서 안티오키아 공국의 섭정을 맡았다. 레몽의 미망인이자 보두앵 3세의 사촌인 콩스탕스는 안티오크의 정통 계승자였으나, 보두앵이 그녀를 동맹 세력과 결혼시키려던 계획은 실패했다.[4] 또한 보두앵은 에데사 백국의 마지막 남은 영토인 투르베셀을 지켜내지 못하고, 1150년 8월 비잔티움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누스에게 할양해야 했다. 그는 아인타브 전투에서 누르 앗 딘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투르베셀의 라틴 기독교인들을 성공적으로 피신시켰다.[4]
1152년, 보두앵 3세와 그의 어머니 멜리장드는 보두앵의 이모인 오디에르나와 그녀의 남편 트리폴리 백작 레몽 2세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트리폴리로 갔다. 분쟁이 해결되고 오디에르나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레몽 2세가 하샤신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보두앵은 트리폴리에 남아 사태를 수습했고, 오디에르나는 어린 아들 레몽 3세의 섭정으로서 트리폴리를 다스리게 되었다.[4]
4. 내전
모자 간의 갈등은 결국 왕국의 최고 자문 기구인 고등법원에 회부되었다. 고등법원은 왕국을 두 개의 행정 구역으로 나누기로 결정했다. 보두앵 3세는 상대적으로 덜 부유한 북부의 갈릴레아 지역과 아크레, 티레를 할당받았고, 멜리장드는 더 부유한 남부의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 그리고 나블루스와 예루살렘을 차지하게 되었다.[2] 멜리장드의 관할 구역 내 야파 백작령을 소유하고 있던 보두앵의 동생 아말리크와 궁내대신 마나세는 멜리장드를 지지했다.[2] 보두앵과 멜리장드 모두 이 분할 결정에 만족하지 못했다. 보두앵은 왕국 전체를 통치하기를 원했고 분할이 국력 약화를 초래할 것을 우려했지만, 내전을 피하고자 했던 멜리장드는 이 타협안을 수용했다.[2]
그러나 분할 결정 후 불과 몇 주 만에 보두앵 3세는 남부 침공을 감행하며 내전을 시작했다. 그는 멜리장드를 지지했던 마나세를 미라벨 성에서 격파하고 추방했으며, 나블루스도 신속하게 점령했다.[2] 더 이상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예루살렘 시민들은 보두앵에게 성문을 열어주었다. 멜리장드와 아말리크는 다윗의 탑으로 피신하여 저항했으나, 교회의 중재로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다.[2] 협상 결과, 멜리장드는 나블루스를 여생 동안 소유하는 것을 허락받았고, 보두앵은 그녀의 평화를 방해하지 않겠다고 엄숙히 맹세했다. 이로써 보두앵 3세는 왕국의 실질적인 전권을 장악했으며, 자신의 지지자인 험프리 2세를 새로운 궁내대신으로 임명했다.[2]
1154년, 보두앵 3세와 어머니 멜리장드는 화해했다. 보두앵은 어머니의 풍부한 국정 운영 경험과 정치적 수완을 인정했으며, 그녀를 다시 국정에 참여시켰다.[5][9] 멜리장드는 공식적으로는 은퇴했지만, 여전히 궁정과 정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보두앵이 원정 등으로 자리를 비울 때는 섭정으로서 왕국을 다스렸다.[5]
5. 영토 확장과 외교
1150년경 보두앵 3세는 이집트의 전초기지인 아스칼론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기 위해 인근 가자를 재건하고 요새화했다. 1152년에는 북부 시리아에서 침입해 온 오르토키드 왕조의 군대를 격퇴했다.[2] 1153년에는 아스칼론을 포위하여 함락시켰다.[6][10] 이로써 이집트와의 남쪽 국경이 안정되었으나, 이는 향후 이집트의 예루살렘 왕국에 대한 공격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아스칼론은 아말릭(훗날의 아말릭 1세)이 소유한 야파 백국에 편입되어 야파와 아스칼론의 이중 백작령을 형성했다.
1156년 보두앵 3세는 누르 앗 딘과 평화 조약을 체결해야만 했다. 그러나 1157년 겨울, 보두앵은 시리아로 원정을 이끌고 샤이자르를 포위했다. 하지만 샤이자르의 소유권을 두고 플랑드르 백작 티에리와 안티오키아의 공작 부군 레날드 드 샤티용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면서 원정은 철수해야 했다. 그럼에도 보두앵은 이 원정에서 과거 안티오키아 공국의 영토였던 하림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며, 1158년에는 누르 앗 딘의 군대를 직접 격파하기도 했다.[7]
왕국의 위상을 어느 정도 회복한 보두앵 3세는 비잔티움 제국과의 동맹을 모색했다. 1157년 그는 움프리 드 토론을 비잔티움 수도로 보내 마누엘 1세 콤네노스 황제와 협상하게 했고, 그 결과 황제의 조카인 테오도라 콤네나와의 결혼이 결정되었다. 이 동맹은 예루살렘 왕국보다는 비잔티움 제국에 더 유리한 측면이 있었다. 보두앵은 안티오키아에 대한 비잔티움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해야 했으며, 만약 자신이 먼저 사망하여 테오도라가 과부가 될 경우 아크레를 그녀에게 양도한다는 조건에 동의해야 했다. 테오도라는 양국 동맹의 상징이었지만, 아크레 외의 지역에서는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지 못했다. 결혼식은 1158년 9월에 거행되었으며, 당시 보두앵은 28세, 테오도라는 13세였다.[2]
예루살렘 왕국과 비잔티움 제국 간의 관계는 개선되어, 1159년 보두앵 3세는 안티오키아에서 마누엘 1세 황제와 만났다. 두 군주는 좋은 친구가 되었으며, 마누엘 1세는 서유럽식 의복과 관습을 받아들이고 보두앵과 함께 마상창시합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때 보두앵이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자 마누엘 1세가 직접 그를 돌보기도 했다. 같은 해 말, 안티오키아의 공작 레날드 드 샤티용이 전투 중 이슬람 군대에 포로로 잡히자 보두앵은 다시 한번 안티오키아 공국의 섭정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안티오키아를 제국의 영향권 아래 있다고 여긴 마누엘 1세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황제는 1160년 보두앵의 사촌인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와 결혼함으로써 안티오키아 공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며 보두앵을 견제했다. 보두앵은 비잔티움 제국과 안티오키아 공국이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마누엘 1세에게 자신의 또 다른 사촌인 트리폴리의 멜리센드와의 결혼을 제안하기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
6. 죽음
보두앵 3세의 장례 행렬은 베이루트에서 예루살렘까지 8일간 이어졌으며, 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전해진다.[3] 당시 왕비 테오도라는 18세였고,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3] 이에 따라 왕위는 동생인 아모리 1세에게 계승되었다. 테오도라 왕비는 이후 아크레로 은퇴했다.[3]
예루살렘의 성지 박물관Terra Sancta Museumeng에 있는 대리석 스크린 패널은 본래 성묘 교회에 있던 보두앵 3세 또는 그의 아버지 풀크의 묘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8][11]
7. 평가
보두앵 3세는 교회 재산을 존중하고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으며,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과 열린 마음으로 소통하여 신하들과 백성들로부터 폭넓은 존경과 인기를 얻었다.[1] 젊은 시절에는 오락을 즐기고 사생활에 문제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테오도라 콤네나와 결혼한 후에는 충실한 남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1]
그의 명망은 적에게까지 알려져, 오랜 숙적이었던 누르 앗 딘조차 보두앵 3세의 죽음을 듣고 "프랑크는 훌륭한 왕을 잃었다. 지금 프랑크에는 그와 같은 왕은 더 이상 없다."라고 말하며 그의 능력을 인정했다고 한다.[1]
7. 1. 개인적 성격
기욤 드 티르는 보두앵 3세의 외모와 인품에 대해 상세히 기록했다. 그는 평균보다 키가 컸지만 신체 비율이 잘 맞아 전체적으로 조화로운 모습이었다고 한다. 얼굴은 잘생기고 혈색이 좋아 건강해 보였으며, 눈은 중간 크기에 약간 돌출되어 반짝였다. 머리카락은 곧고 노란색이었으며, 뺨과 턱에는 수염을 풍성하게 길렀다. 체형은 다소 통통했지만, 그의 형제처럼 살이 찐 체형도 아니고 어머니처럼 마른 체형도 아닌 중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보두앵 3세는 교양 있고 말솜씨가 뛰어나며 지성이 뛰어난 왕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아버지 풀크와 달리 기억력이 매우 좋았다고 한다. 그는 여가 시간에 역사책 읽기를 즐겼으며, 예루살렘 왕국의 관습법에도 해박했다. 교회 재산을 존중하여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고,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과 스스럼없이 대화했으며, 알현을 청하는 이들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는 도박과 같은 오락을 즐기고 다른 사람의 아내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기도 했지만, 테오도라 콤네나와 결혼한 후에는 이러한 행동을 그만두고 왕비에게 충실했다고 한다.
보두앵 3세는 신하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고 많은 존경을 받았다. 심지어 그의 숙적이었던 누르 앗 딘조차 그를 높이 평가하여, 보두앵 3세의 사망 소식을 듣고 "프랑크족은 훌륭한 왕을 잃었다. 지금 그들 중에는 그와 같은 인물이 없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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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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